유럽 중남부에 위치한 공화국. 정식 명칭은 오스트리 아 공화국(Republik Österreich). 서쪽으로는 스위스와 리 히텐슈타인, 북서쪽으로 독일, 북쪽으로 체크, 동쪽으로 헝가리, 남동쪽으로 슬로베니아, 남서쪽으로 이탈리아와 국경을 이룬다. 면적 83,857k㎡, 인구 8,180,000명
(2001). 수도는 빈(Wien). 공용어는 독일어이고, 국교는 없으나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이다.
[그리스도교의 전래와 정착] 현 오스트리아 지역에는 초기 구석기 시대부터 정착이 이루어져 왔던 것으로 보 이며, 이 지역의 주요 거주자는 일리리아인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15년경 로마인들은 지금의 오스트리아 지 역 전역을 차지했으며 라우리아쿰(Lauriacum) · 노리쿰 (Noricum) · 판노니아(Pannonia) 등 세 주를 만들어 번영 을 누렸다. 로마의 영향과 함께 3세기 말부터 복음이 전 래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304년 성 플로리아노(St. Floria- nus), 482년 노리쿰의 사도 성 세베린(St. Severin)이 순교 하는 등 많은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교계 제도 또한 초기 부터 형성되어, 라우리아룸 · 비루눔(Viuum) · 듀니아 (Teurnia) · 아큐툼(Aguntum) 지역에 교구좌가 설립되었 으며, 발굴을 통해 이 지역에 20여 개의 교회가 설립되 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600년경 바바리안인의 개종을 통해 더욱 강력하게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같은 시기 성 골롬바노(St. Columbanus)는 알마니안인 사이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700년경 성 루페르트(St. Rupert)가 설립 한 잘츠부르크(Salzburg) 교구는, 798년 대교구로 승격 되어 바이에른과 마르크 지역의 교구를 관할하였고, 803년 카알 대제(768~814)가 다뉴브 계곡에 오스마르크 (Ostmark)라는 영지를 세운 후에는 강력한 게르만계 중 심의 그리스도교국이 되었다. 896년 마자르족은 헝가리 저지대와 마르크 지역을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는데, 955년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1세(Otto I , 936~973)는 마자르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다뉴브 강을 따라 경 계를 설정하였고 그리스도교를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하 였다. 976년 오스트리아 지역은 오토 2세에 의해 바이 에른 후작의 변경령으로 정해졌고, 1156년부터 바벤베 르크(Babenberg) 변경백(邊境伯)의 통치를 받았으며, 1278년 합스부르크가의 초대 황제 루돌프 1세(Rudolf I , 1273~1291)의 영유지가 되었다. 합스부르크가는 이후 오스트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갔는데, 막시밀리안 1세(Maximiliian I , 1493~1519)는 혼인 정책을 통해 네덜란드를 획득하였고 스페인 왕국과도 결합하였 다.
교회의 발전 : 오스트리아의 수호 성인인 성 레오폴드 (St. Leopold, 1075~1136)는 1108년 클로스터노이부르크(Klos- terneuburg)에 수도원을 세웠으며, 1133년에는 하일리겐 크로이츠(Heiligenkreuz)에 시토 수도원을 세웠고, 클라인 마리아셀(Kleinmariazell)에도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설립 하였다. 이와 함께 13세기부터 클뤼니 개혁을 비롯한 교 회 내의 많은 개혁 운동을 통하여 수도원들이 설립되었 다.
서구 대이교(Western Schism, 1378~1417)의 시기 동안, 빈 대학의 교수들은 혼란한 교회의 중재자로서 교회를 변 호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5세기에 두드러진 활동을 펼친 성직자로는 티롤의 백작들과 강하게 충돌했던 브릭 센(Brixen) 주교인 니콜라오(Nicolaus Cusanus) 추기경과 1451년 후스파에 대항하기 위해 파견되어 프란치스코회
의 엄격한 규칙을 오스트리아에 소개한 카피스트라노의 요한(St. Joannes de Capistrano, 1386~1456)이 있다.
[1500~1848년]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던 합스 부르크가 제국에는 많은 이민족과 상이한 언어들이 공존 했으며, 지역마다 자주적인 정치 체제와 경제 구조가 지 배했는데 1556년 합스부르크가는 나폴리 · 시칠리아 · 밀라노 · 부르군트 등을 중심으로 한 스페인 합스부르크 세력과, 신성 로마 제국 · 오스트리아 · 헝가리 일부 지역 과 보헤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오스트리아 세력으로 분리되었다.
종교 개혁과 반종교 개혁 : 이 시기에 이르러 점차 세 력을 획득하게 된 귀족과 합스부르크가와의 권력분쟁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오스트리아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대부분은 엔스(Enns) 강을 따라 집중되어 있었는데, 영 주이기도 했던 귀족들은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신부가 아닌 목사를 통해 교회를 관할하였다. 황제는 오스만 투 르크의 침략에 방어하기 위한 막대한 비용을 귀족들의 세금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종교적 특권 을 종종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신앙에 대한 무관심 과 도덕의 붕괴가 지속되었으나 가톨릭은 잘츠부르크의 주교였던 랭(M. Lang, 1519~1540) 추기경이 그의 영지 내 에서 농민들의 봉기와 루터주의의 전파를 막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빈에서 추진하던 개혁이 실패하는 등 효과 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오스트리아가 루터파의 영향으 로부터 가톨릭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신성 로마 제 국의 페르디난드 1세(Ferdinand I , 1556~1564)에 의해 초 빙된 예수회의 활동 때문이었다. 예수회 회원들은 대학 을 설립하고 그곳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합스부르크 왕 가의 고백 사제와 조언자로서 활동하였다. 1552년 빈에 도착한 가니시오(P. Canisius, 1521~1597)는, 대학에서 신
학을 가르쳤으며 저지대 오스트리아 지역의 많은 본당을 관할하였다. 이와 함께 1600년 이후에는 카푸친회가 활 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 중 성 라우렌시오(St. Lau- rentius)는 헝가리 황제 부대의 종군 사제로서 활동했고, 빈과 그라츠(Graz)에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1580년 저 지대와 고지대 오스트리아를 다스리고 있던 어네스트(A. Emest)는, 클레슬(M. Klesl) 추기경의 협조를 받으며 가톨 릭 개혁을 시작하였다. 오스트리아 반종교 개혁을 이끌 어 나갔던 클레슬 추기경은 뛰어난 신앙심과 외교술로 다양한 정치적, 종교적 문제들에 대응하였고, 바덴 (Baden) · 크렘스(Krems) · 슈타인(Stein) 등의 지역을 수 복하여 그의 관할하에 교구를 설립하였다. 이와 함께 1619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페르디난드 2세(Ferdi- nand II ,1619~1637)는 분명한 반종교 개혁적인 입장에서 가톨릭 신앙을 엄격하게 수호하여, 프로테스탄트 세력인 국가들과 30년 전쟁(1618~ 1648)을 일으켰다. 1648년 30년 전쟁의 종결을 위한 베스트팔렌 조약의 체결로 반 목 상태에 있던 각 종파들은 종교간의 동등권을 인정받 게 되었다. 이후에도 가톨릭 내의 고위 성직자들은 지속 적으로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 가톨릭을 수호하 기 위해 가톨릭 개혁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중 피르미안 (L.A. Firmian) 대주교는 자신의 관할하에서 잘츠부르크 를 중심으로 강한 연대를 형성하고 있던 루터파 신자들 을 대상으로 1731년 믿음을 철회하거나 이주할 것을 요 구하는 칙령을 반포하였는데, 이로 인해 10년 동안 3만 명 이상의 루터파 신자들이 동프러시아, 하노버 등으로 이주하였다.
요셉주의 : 프로테스탄트와 오스만 투르크의 위험으로 부터 가톨릭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합스부르크가 는 그들의 역할을 교회 제도에 대한 통제로까지 확대하 고자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M. Theresia, 1740~1780)는 40여 년의 통치 기간 동안 군대 개편, 경제 개혁 등을 실 시하고 공공 교육 제도를 도입하면서 권력을 중앙 집권 화했고 근대 국가로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이어 황제가 된 그의 아들 요제프 2세(Joseph II , 1780~1790)는, 이른 바 '요셉주의' 를 펼치며 연방 교회에 대한 독단적인 개 혁을 수행하였다. 황제는 계몽 절대주의 사상을 받아들 여 계몽주의의 영향하에서 학교 교육의 근대화와 국가 통제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재정 개혁적 견지에서 농민 해방, 귀족의 면책 특권 폐지 등 급격한 사회 정책을 취 했다. 또한 교회의 자치권을 자기의 권리로 요구하고, 예 수회 추방 · 수도원 해산 ·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박해 금 지 등의 정책을 실시해 교회를 국가 운영을 위한 하나의 기구로써 적용하며 국가에 복속시켰다. 이와 함께 교회 와 로마 간의 교류를 제한했으며, 국가의 승인 없이는 어 떠한 주교 교서도 출판될 수 없도록 규정하였고 교회에 서 운영하는 학교와 신학교를 국가가 운영하는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에 성직자들은 요제프 2세와 교황 비오 6 세(1775~1799) 사이의 불화가 증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1782년 봄 비오 6세는 화해를 위하여 빈 을 방문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프랑스 혁명이 발
발했을 때 그 파급을 두려워했던 오스트리아의 레오폴드 2세(Leopold II , 1790~1792)는 프로이센과 동맹 관계를 맺 고 프랑스를 견제하였으나, 1806년 나폴레옹이 라인 동 맹을 조직하여 스스로 그 보호자가 됨으로써 결국 프란 츠 2세(Franz Ⅱ, 1793~1806)는 황제의 지위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다. 오스트리아 외무 장관 메테르니히(K. Metternich)는 독일어 사용 국가들 사 이에서 오스트리아의 패권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옛 질서에 대한 그의 보수적인 지지, 전제 정치에 대한 믿음, 비민주적인 관행들과 프랑스 2월 혁명의 영향으로 1848년 3월 빈에서 혁명이 일어났으며 메테르니히는 영 국으로 망명하였다.
[1848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교회는 3 월 혁명으로 그 동안 국가 종교로서 차지했던 특권적 위 치를 포기해야 했으나 자유를 획득할 수 있었으며, 1855년에는 오랜 협상 끝에 정교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정교 조약은 새로운 형태의 국가 절대주의를 형성하 고 교회 발전을 도모하는 데 있어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정교 협약은 국가가 교회의 도 전에 직면하여 권력을 포기하는 것이며, 교회는 이를 통 해 국가와 교회 간의 문제를 다분히 교회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며 반대하였다. 1859년 이탈리아 통일 전쟁, 이어 1866년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위 기에 직면한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인의 저항 운동이 가열 될 것을 우려하여 대(對) 헝가리 유화 정책을 펼치기 시
작하였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간의 새로운 관계 정립 이 모색된 결과, 1867년 화해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오 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 이 성립되었다. 같은 해 오 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은 자유주의 사상을 반영한 기본법을 제정하였고, 이듬해에는 결혼과 교육 제도를 국가가 관할하도록 하는 오월법을 제정하였다. 1870년 정부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에서 교황의 수 위권과 무류성에 관한 교의가 결정됨으로써 교황의 본성 이 바뀌었다는 것을 구실로 정교 협약을 일방적으로 파 기했다. 이에 교회에서는 오월법에 반대하면서 사회 개 혁 운동을 시작하였는데 당시 교회는 급격한 산업화나 다양한 노동 문제들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으나, 다 양한 조직을 구성하여 사회 운동에 동참하였으며 다른 나라보다 앞서 사회법의 제정을 주창했다.
20세기 초 발칸 지역에는 러시아의 슬라브주의와 독 일, 오스트리아의 게르만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 는데, 1908년 투르크에 혁명이 있어나자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강제로 병합함으로써 세르비 아와 러시아를 자극하였으며 발칸 전쟁 후의 영토 처분 때는 불가리아를 지원함에 따라 세르비아와의 대립이 심 화되었다. 이와 같은 대립으로 인해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인에게 암살되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오스트 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은 독일 편에 서서 싸웠으나 독일 이 전쟁에서 패하자 1918년 연합국과 휴전 조약을 체결 하였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혁명이 일어나자 합스부르 크가는 붕괴하고 공화제가 성립되었다. 이듬해 오스트리 아-헝가리 이중 제국은 해체되고 체코슬로바키아, 헝가 리가 독립하였으며 가리시아 지방은 폴란드에게, 트란실 바니아(Transylvania) 지역은 루마니아에게 돌아갔다. 오 스트리아 국토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4로 축소되었 고, 경제는 전쟁 배상 의무와 경제 대공황으로 위기에 빠 지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형성 :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에서는 보 수적인 그리스도교 사회당(Chrisian SocialParty)과 마르크 스 이론에 입각한 사회 민주당(Social Democrats)이 서로 대립하여 있었고, 나치스가 집권한 독일과의 통합을 주 장하는 세력도 활동하고 있었다. 1918년 이후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면서 사회 민주당은 세력을 확장하였는데, 이 정당의 목적은 국가와 교회를 완전히 분리하고 교회 의 법적 권한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종교가 자 본가 계급의 공범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며, 대중들이 현 실을 명확하게 보지 못하도록 환각제로써 작용한다고 공 격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교회는 몇몇 지도자들 을 중심으로 위치를 지켜 나갔고, 다양한 교회 신문과 간 행물을 발간하였다. 1932년 수상이 된 그리스도교 사회 당의 돌푸스(E. Dollfuss)는 1933년 의회 기능과 정당 활 동을 정지시키고 이듬해 권위주의 헌법을 채택, 폭력에 의한 국민 탄압 정책을 실시하였다. 돌푸스는 권위주의 적 방법으로 반대 세력을 억압하였으나, 교황청과 정교 협약을 체결하면서 교회와 국가 간의 일부 문제를 해결
하고자 노력하였다. 다음해 그가 나치 당원에게 암살된 후,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자이스 인크바르 트(A. Seyss-Inquart, 1892~1946)가 내각을 조직하게 되면서 오스트리아는 독일 제국에 합병되어 국가로서의 존재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 시기 동안 교회는 탄압을 받았는데, 정부는 성직자에 의해 운영되던 1,400여 개의 기관을 폐쇄하고, 다양한 자선 단체와 교회 기관들을 통제하였 다. 이와 함께 제도적으로 신부들의 사목 활동을 방해하 고 나아가 성직자 양성을 억제했다. 탄압은 계속되어 724명의 신부가 체포되고, 이 중 110명이 강제 수용소 로 보내졌다. 이와 같은 교회 탄압은 부정적으로 작용하 기도 했으나 신자들이 그들의 신앙으로 돌아오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 하여 교구를 중심으로 신부들과 함께 다양한 활동을 펼 쳤다.
오스트리아는 1939년 9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 으나 1945년 소련에게 빈을 점령당한 후 미국 · 영국· 소련 · 프랑스 4국 관리 이사회(管理理事會) 통제하에 새로운 정부가 재건되었다. 1945년 이후로 교회는 정부 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교구에 따라 가톨릭 운 동(Catholic Action)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당시 이루어진 가톨릭 운동의 활동은 이후 대중의 삶에 폭 넓은 영향을 미쳤다. 1955년 영세 중립을 전제 조건으로 '오스트리 아 국가 조약' 이 4국과의 사이에 체결되어 점령군의 철 수와 함께 독립 주권을 회복하였다. 오스트리아는 1955 년 국제 연합에 가입하였으며, 1979년 빈은 겐프(Genf) 와 뉴욕에 이어 세 번째 국제 연합 도시로 지정되었다. 바르샤바 조약 기구 붕괴가 확실시되자, 오스트리아 정 부는 유럽 공동체 가입 신청을 제출했고 1995년 가입에 성공했다. 최근 오스트리아 교회는 교회 운영에 있어 평 신도 참여 확대와 여성의 성직 임명, 성직자 독신 철폐 등 다양한 요구에 직면하여 많은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2001년 현재 6,163,000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있으 며, 대교구 2, 교구 7, 자치 수도원구 1, 군종교구 1, 본 당 3,058개에, 추기경 4, 대주교 2, 주교 14, 신부 4,569(교구 소속 2,752, 수도회 소속 1,817), 종신 부제 425, 수사 381, 수녀 6,285명이 있다. 한인 교포 신자 수는 140명이고, 1개의 본당에서 신부 1명이 사목 활동 을 펼치고 있다. (→ 레오폴드 ; 반종교 개혁 ; 에피스코 팔리즘)
※ 참고문헌 J. Wodka, 1, pp. 1095~1 105/ 2, pp. 812~825/ 2002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p. 305/ 《EU》 Les Chiffres du Monde, pp. 108~109/ 아우구스트 프란츤, 최석우 역, 《교회사》, 분도출판사, 1982/ 임영상· 황영삼 공편, 《소 련과 동유럽의 종교와 민족주의》,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1996. 〔金善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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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리겐크로이츠의 수도원 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