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프, 피에르 마리 Osouf, ,Pierre-Marie(829~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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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프 대주교.

오주프 대주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대주 교. 일본 도쿄(東京) 의 초대 교구장.
[생애와 활동] 오 주프는 1829년 5월 26일 프랑스 노르망 디 지방의 쿠탕스 (Coutances) 교구에 속한 뮈자르디에르 (Musardière)라는 작 은 마을에서 12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1841년 생로(Saint- Lô) 중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고전과 철
학 과정을 마치고, 1848년 쿠탕스 대신학교에 입학하였 다. 그리고 1852년 7월 11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서품 후 그는 즉시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려 하였으나 건 강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교구 소속 신부로 남 았고, 교구장 비서실에서 3년 동안 근무하였다.
홍콩에서의 활동 : 3년 뒤 건강이 회복되자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였다. 이후 10개월 동안 외방전교회 신 학교에서 생활하였으며, 1856년 6월 싱가포르 대표부를 신설하라는 사명을 받고 파견되었다. 홍콩을 거쳐 1857 년 3월 싱가포르에 도착한 그는, 그 해에 성당을 갖춘 대 표부 건물을 매입한 이후 초대 대표로서 6년 동안 재임 하였다. 1862년에 그는 홍콩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극 동 대표부의 부대표로 전임되었고, 1866년에는 리부아 (N.F. Libois, 1805~1872) 신부의 뒤를 이어 극동 대표부의 대표가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부대표로, 이어 극동 대표 부의 대표로 총 13년 동안 중요하고도 어려운 이 직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당시 홍콩 대표부는 극동의 주요 세 선교지, 즉 조선과 중국, 일본을 관할하고 있었으므로 오주프는 조선의 선 교사들과도 자주 서신을 교환하였다. 그는 1862년 부대 표로 부임하자 베르뇌(S.F. Berneux, 張敬一, 1814~1866) 주 교에게 자신의 부임 사실을 알렸고, 이어 다블뤼(M.N.A. Daveluy, 安敦伊, 1818~1866) 부주교에게도 인사 편지를 보냈다. 이에 다블뤼 주교는 중요한 직책을 맡게된 것을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앞으로 조선의 일이 더욱 잘될 것 을 기대하며 미리 감사한다는 회신을 보냈다. 1866년과 1867년에는 조선에서 페롱(Féron)과 칼레(Calais) 그리 고 리델(F.C. Ridel, 李福明, 1830~1884) 신부가 중국으로 피신해 와 있었다. 그들은 당시의 궁핍한 상황에서 성석 (聖石)이나 수단(soutane) 등의 조그마한 주문부터 재입 국이라는 어려운 시도에 이르기까지 대표의 지원이 필요 하였기에 오주프에게 수시로 편지를 보내 지원을 간절히 호소하였다.
일본에서의 활동 : 오주프 신부는 1875년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 지도자로 선발되어 파리로 돌아갔다. 그 러나 2년 후인 1876년 말 신설된 북일본 대목구의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1846년에 일본 대목구라는 단일 대목구로 출발한 일본 선교지는 1876년에 남북으 로, 다시 말해 나가사키(長崎)를 주교좌로 하는 남일본 (南日本) 대목구와 도쿄(東京)를 주교좌로 하는 북일본 (北日本) 대목구로 양분되었다. 남일본의 대목구는 나가. 사키에서 일본 대목구 주교로 활동하던 프티장(Petitjean) 주교가 맡게 되었으나 북일본 대목구는 그곳의 선교사들 이 새로 선출하여야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오주프 신부 를 만장일치로 대목구장 후보 중 첫 번째로 선출하였고, 그 결과 북일본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오주프 신부는 1877년 2월 11일 파리 외방전교회 성당에서 주 교품을 받고, 이어 로마로 가서 교황을 알현하고는 같은 해 7월 도쿄에 부임하였다. 당시 도쿄를 중심으로 한 북 일본 대목구의 교세는 신자가 1,235명이었으며, 이들은 도쿄와 요코하마 등 네 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도쿄 에는 성당이 하나도 없었다.
이에 오주프 주교는 성당 건립부터 서둘렀다. 다행히 유럽의 한 은인 도움으로 1878년 도쿄의 외국인 거류지 인 츠기지(築地)에 작은 고딕식 성당을 건립할 수 있었 다. 그는 그곳을 주교좌 성당으로 정하였다. 그런데 당시 일본은 이른바 '명치 유신' 으로 근대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1879년과 1881년 두 차례에 걸쳐 경찰법이 완화되었고,그 결과 당시까지 개항지에서만 선 교가 가능하였던 것이 어디로나 여행하고 또 체류할 수 있게 되어 현지 주민들과 직접 접촉하며 선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선교와 신앙의 자유는 1889년의 헌법에 명시됨으로써 법적으로도 보장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종교에 대한 우호적인 조치들을 계기로 대규모의 선교 활동과 개종 운동이 시작되었고, 1895년경까지 약 15년 간 지속되면서 거의 모든 도시에 신자 모임이 형성되고 성당이 건립되었다. 본당의 증가는 대목구의 증설로 이 어졌고, 1888년에 남일본 대목구에서 오사카(大阪)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일본 중부 대목구가 신설되었고, 1891년에는 북일본 대목구가 도쿄 대목구와 하코다테 (函館) 대목구로 분리되었다.이로써 일본 교회는 4개의 대목구로 늘어났다. 이 시기에는 교육 사업도 번창하였 다. 왜냐하면 오주프 주교가 부임 초인 1877년에 마리 아회를 도쿄로 초청하였고, 1881년에는 샬트르 성 바오 로 수녀회를 초청하여 교육을 전담시켰기 때문이다. 오 주프 주교는 복지 사업과 출판 사업에도 큰 관심을 보였 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도 효과가 적지 않게 나타났다.
본당과 대목구의 증설은 결과적으로 선교사와 재원의 증가를 가져왔다. 특히 선교사들의 증가는 연례 피정을 통해 정기적으로 선교사 모임을 갖게 하였다. 이를 통해 그 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선교 방법을 모색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모아져 1883년에 새로운 선교 지침서 로 발행되었다. 이것을 전국적인 차원으로 확대시키고자 1890년에 제1차 시노드가 나가사키에서 개최되었다. 그 런데 제1차 시노드는 포교성성(현 인류 복음화성)의 지시
에 따라 일본만이 아니라 조선 지역까지 합쳐서 진행되 었다. 그래서 조선의 블랑(G-MM-J. Blanc, 白圭三, 1844~ 1890) 주교가 이 회의에 참석해야 했고, 실제로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개최 직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두 세(C.-E. Doucet, 丁加爾, 1853~1917) 신부가 대리로 참석하 였다. 이 시노드의 결의들은 포교성성의 인준을 거쳐 1893년에 포교성성 훈령으로 반포되었다.
블랑 주교의 후임으로 부임한 뮈텔(G.-C.-M. Mutel, 閔 德孝, 1854~1933) 주교는 1895년 도쿄에서 개최될 예정 인 제2차 시노드 참석을 1년 앞두고 포교성성 장관에게 조선 지역을 일본 시노드에서 제외시켜 줄 것을 건의하 였다. 뮈텔 주교는, 1890년의 시노드 법령들을 오주프 주교를 통해 받았는데, 그 가운데에는 조선에서 적용이 불가능한 것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또한, 조선은 일본 보다는 중국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하 며, 구체적으로 조선의 최초 선교사가 중국인이었고 또 조선 교회의 교리서나 기도서가 거의 한문본의 번역이라 는 등 몇 가지 사례를 지적하였다. 이 건의는 포교성성에 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1895년 예정대 로 도쿄에서 개최된 시노드는 일본 지역만의 시노드가 되었다.
외교가로 알려진 교황 레오 13세(1878~1903)는 근대 국가를 향하여 변해 가는 일본 정부에 대해서 외교적으 로 적극 대응할 줄 알았던 것 같다. 교황은 1885년 그 동안 가톨릭에 보여 준 호의에 공식으로 감사한다는 친 서를 일본 천황에게 전하도록 오주프 주교에게 위임하였 다. 1891년의 일본 교계 제도 설정에 즈음해서는 오주 프 대주교를 통해 일본 정부에 그 사실을 알리고, 그 의 의를 설명하도록 하였다. 일본 정부에 대한 이러한 교황 의 호의는 결과적으로 일본 교회를 높이 평가한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인근 국가보다 빠른 교계 제 도의 설정에서 드러난다. 사실 1946년의 중국 교회와 1962년의 한국 교회의 경우와 비교하면 너무나 이례적 으로 여겨진다. 아무튼 교계 제도의 설정으로 도쿄 대목 구는 대교구와 수도 관구(首都管區)로 승격되었고, 오주 프 주교는 초대 도쿄 대주교가 되었으며 나가사키 · 오사 카 · 하코다테 교구를 속교구로 갖게 되었다. 당시 도쿄 대교구의 교세는 인구 약 1,400만 명 중 신자 9,660, 선 교사 27, 수도자 59, 교리 교사 22, 신학교 1, 신학생 6, 학교 28, 성당 44개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의 물질적 인 발전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만큼 가톨릭 교회의 신속 한 발전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오주프 대주교는 노년에 이르면서 류머티즘으로 고생 하였고. 만년에는 다리의 통증으로 기동마저 점점 어려 워졌다. 그는 1902년에 부주교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1906년 6월 27일 선교사들이 임종 기도를 바치며 지켜 보는 가운데 77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평 가] 오주프 대주교는 수도자처럼 규칙적인 생활을 하였고 기도 생활에 많은 시간을 바쳤다. 그런데 불행하 게도 그는 일본어를 할 줄 몰랐다. 그러나 그는 애정과 친절함과 소박함과 신중함으로 뛰어났었고, 그로 인해
신자들의 깊은 존경을 받았다. → 리될, 프랑수아 알프 레드 데지레 ; 일본 천주교회사)
※ 참고문헌  Extraits des Procès-verbaux des réunions générales des missionnaires du Japon septentrional, Yokohama, 1883/ Acta et Decreta primae Synodi regionalis Japoniae et Coreae Nagasaki habitae. A.D. 1890. Cum mutationibus a S. Cong. de Propaganda Fide inductis, Hong-kong, 1893/ KActa sc) vol. 264(1894), f. 276~2791 Notice nécrologique-C.R., 1906. pp. 277~295/ Launay, Mémorial, vol. 2, pp. 479~480/ 上智 大學, 《 力 卜リシク 大辭典》 V 東京, 富 山房, 1960, pp. 617~619. [崔奭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