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스콜라 철학자이자 신학자. 후기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us) 또는 오컴주의의 창시자.
[생 애] 오컴은 1285년 영국 서리(Sumey)에서 출생하 여 젊은 나이에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고, 옥스퍼드 대학 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318~1320년에 성서를 주석 한 《명제집》(Sententia)을 저술하였다. 오컴은 특히 논리 학 공부에 전념하였고, 신학을 포함해 하느님에 관한 논 술까지 모든 학문의 기초를 논리학으로 다졌다. 때로는 지나치게 논리학적인 그의 신학적 견해 때문에 신학부 교수들의 반대에 부딪혀 신학 박사(Magister)를 취득하지 못한 채, 옥스퍼드 대학의 학제상 학사 학위에 해당하는 초보자 자격(Inceptor)인 박사 후보 수험생으로 평생 남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논리학적 신학 논술이 옥스퍼 드 대학에 불안과 혼란을 일으켜 학생처장과 주교는 오 컴이 강단에 서는 것을 금지시켰다. 오컴은 이 문제를 해 결하기 위해서 1322년 당시 아비뇽에 있던 교황청으로 갔다. 하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그 후에도 오컴은 수 차례 그의 사상 때문에 교황청으로부터 단죄를 받고 결국 파문되었다. 이후 그는 자신을 파문한 교황을 대항 하여 자신의 학문적인 입장을 변호하는 논쟁서들을 저술 하며 생을 보내었다. 오컴은 1349년 뮌헨에서 사망하였 다.
[사상과 저서] 비록 오컴은 그의 새로운 사상 때문에 교회로부터 단죄받고 논쟁을 벌였지만, 새로운 가르침을 창시하였다는 역설적인 뜻에서 '존경할 만한 초보자' (Venerabilis inceptor), 또는 '창시자' 라고 불렸다. 오컴이 처음으로연 사고의 '새로운 길' (via moderna)이란 12세 기에 '유명론' 이라고 불린 것으로 논리학에 속한다. 그 러나 신학의 '하느님의 절대적 능력' 에 대한 주장을 더 욱 확고하게 강화한 사상으로써 옛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극단적으로 파괴하기까지 하는 새로운 요소를 지니고 있 는 것이다. 그러기에 혹자는 그의 '새로운 길' 은 토마스
주의와 스코투스주의의 형이상학이 파괴된 폐허 위에 창 조주의 조건부 능력에 의존하는 자연의 관성에 관하여 경험적 방법의 연구를 태동시켰다고 하였다. 오컴이 후 기에 쓴 정치적 논술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 다 더 중요한 것은 초기에 쓴 책의 내용으로 철학사에서 '유명론' 또는 '명목론' (terminism)이라고 부르는 그의 철학 이론이다.
유명론 : 오컴은 유명론 때문에 여러 차례 단죄를 받 고, 가르치는 것마저 금지당하였다. 하지만 14~16세기 동안 대학 안에서 토마스주의와 스코투스주의에 견줄 이 력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루터(M. Luther, 1483~1546)의 사상에 근본적인 영향을 주었다. 근대에 앞서 근대 사상 적인 영향을 오컴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토론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오컴 은 가톨릭 교회에 속하여 있었고, 사상은 중세의 테두리 를 벗어난 적이 없다.
오컴의 주저 《논리학 전집》에서 두 가지 원리를 찾을 수 있는데, 그중 하나는 스코투스(J.D. Scotus, 1265/1266~ 1308)로부터 영향을 받은 '절대 권능 의 원리이다. 이 원 리는 논리적 모순율의 힘에 의해서만 제한될 뿐이다. 다 른 하나는 스코투스를 비판하는 원리로 '조금이라도 너 무 한 것' 이라고 하여, 비판하는 '오컴의 면도날' (Oc- kham's razor)이라는 원리이다. 이는 경험이나 성서가 부 과하지도 않았는데, 이성이 산출해 낸 여러 실체를 철저 히 제거해 버리는 경제율이라고도 하여, 보편적 실체를 극소화하는 원리이다.
논리와 지식론에 있어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 teles, 기원전 384/383~322/321)를 따르다가, 플라톤(Pla- ton, 기원전 428/427~348/347)의 실재론을 극단적으로 반 대하여 비판하는 방향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서 반 플라톤적인 새로운 입장에 이른다. 그리하여 비아리스토 텔레스적 새로운 논리와 지식론을 발전시켰다. 오컴의 사유 안에서 세계는 개별적이고 개연적으로 병렬된 사물 이며, 이와 같은 사물은 직관으로만 인식된다. 그럼에도 오컴은 중립적인 제1차 직관적 파악과 그 뒤를 이어, 정 확한 분별을 가져다주는 승인을 구별 지었다. 구체적 실 존을 개시(開示)하는 감각적 직관과 그 실존하는 사물이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지성을 구별 지은 것이다. 따라서 오컴은 회의주의자도 아니요, 주체주의자도 아니며, 근 대의 지식론자라고도 할 수 없다.
오컴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론으로부터 해석의 역 할에 대하여 언급하면서도 상징 기호학적 요소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의 이론은 개념이 의도나 목적 을 갖는 것만으로도 말 또는 명사(tem)라는 상징을 매개 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하였기에, '명사론' 또는 '명목 론 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징조를 표현하는 계약적인 상징 기호는 장소와 시간에 따라 다를 수도 있으며, 사물 에 대신하여(supponere prore) 언어학적인 상징 기호 체계 를 이루어, '징후학' 또는 '기호학' (semiology)이라고 불 리는 이론을 형성시켰다. 오컴의 '명사론' 이 지닌 독창 적인 특징으로 다른 보편 명사론과 명확하게 다른 것은,
보편이 한 개별자에게 술어로 귀속될 때 이 개별자에 부 속된 속성의 한 요소가 아니라, 아무런 구별 없이 개별자 와 동일한 것으로 귀속된다는 것이다. 명사가 한 주어의 술어로 쓰일 때라도, 그 주어와 아무런 구별 없이 주어가 의미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명사가 주어 의 한 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결국 보편 명사나 개별 명사가 의미하는 지시체는 아무런 구별이 없는 동일체라는 것이다. 문장 안에서 주어 명사는 개체 이고, 술어 명사는 보편을 의미한다는 구별도 없이, 주어 명사나 술어 명사는 동일한 사물을 지시하는 의미를 가 지고 있다는 것을 밝히려 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플 라톤과는 다르게 보편을 올바르게 정의하려고 했던 의도 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개별성을 우선으로 보편성을 설 명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유명론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 조하였다.
윤리와 정치론 : 오컴은 심리학을 토대로 윤리학적 차 원에서 신(神)의 결정과 관련된 자유에 관하여 논술하였 다. "신은 '절대적 권능' 으로서 아무런 모순 없이 도둑과 간통과 같은 행위를 명령하는 것과 창조주에 대한 미움 과 당나귀를 찬양하는 것조차 합의할 수 있도록 허용한 다"고 주장하였다. 오컴에 의하면, 성서는 어떤 확정된 명령을 개인에게 하지 않았다. 다만 '연합' (association)이 라고 말할 수 있는 계약이므로, 지상 주권은 양도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계약론은 스코 투스로부터 온 것이며, 루소(J.J. Rousseau, 1712~1778)의 사회 계약론과도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루소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말한 점은 오컴의 계약론과 본질 적으로 차이가 있다. 오컴은 정치에 관한 저서인 《서문》 (Breviloquium)에서 명시적으로 '자연스러운 자유' 는 어 떤 사람의 의지에 의해서도 보류되지 않는다는 미묘한 주장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단호하게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개인의 기본권을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관례를 옹호하였다.
오컴은 여기서도 유명론적인 관점으로, 지성은 감각적 직관이 파악하는 대상과 동일한 대상에 관계하기 때문에 개념이나 이론과도 상관없고, 어느 그룹과 학파의 사상 운동과도 상관없으며, 더구나 형이상학에서 다룰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음을 강조하며 형이상학과의 연관성을 축소하였다. 형이상학적 개념이 직관에 의해서 파악되는 감각적 구조와 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남 아 있는가라고 자문하면서, 있다고 착각하거나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하는 오류를 감각적 직관이 시정하도 록 비판과 파괴를 수행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본질이나 실존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용어의 구별도 단순히 비상식 이라고 말하였다(Quodlibet II , Ⅶ). 현실과 잠재라는 서 로 다른 용어도, 결국 현실적인 하나의 사물이나 행동과 관련 지어 분석하면, 잠재적 존재의 잠재력이라고 하는 것은 한갓 환상적인 공상물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다 (Sententia Ⅱ, Ⅲ). 이와 같은 환상적인 것을 파괴하는 비 판과 분석 끝에, 현실적인 모든 실재가 직관으로 파악된 다고 오컴의 '유명론' 은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그
의 가르침은 결과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온건 실재론 의 재건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은 셈이다. 그래서 인간 과 신의 관계로부터 신의 존재와 같은 진리까지 이성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고 하는 사유의 출발점을 불확실한 것으로 일격에 차단하고 있다.
신학 : 오컴은 신학을 형성시켜 주는 것은 계시와 신 의 자유로운 몇 가지 결정밖에 없기 때문에, 진정한 과학 이 될 수 없고 특이한 명제들의 집성이라고 생각하였다. 신학은 '실천 학문' (scientia pratica)이라는 스코투스의 정 의를 받아들이면서, "어떤 경우에도 삼단 논법적 논술에 의해서 명백해질 수 있는 필연 명제의 총체를 구성할 수 는 없다" 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교황청에서 수 용하지 않았다. 신앙의 문제에서도 신의 '절대 권능 으 로부터 받은 인간의 직관적 지식을 한계 지으며, 섭리 · 육화 또는 부활과 같은 창조주의 개연적 행위에 관한 모 든 지식을 배제하였다. "개념들은 언제나 여러 실질적인 경험을 요구한다"라고 하며, 단순히 신성이 무엇이라고 하는 데서부터 창조주의 능력을 연역적으로 끌어내어 명 증성을 가지고 알아낼 수는 없다고 하였다. 무로부터 창 조되어 나오는 것에 관해서는 직접 직관하여야 한다 (Sententia pro 1.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사도 신경 첫 구절의 의미를 알아듣는 것만으로 피조물 모두의 의 미를 찾아낼 수 있는 신학적 주제이다. 오컴의 주장과 이 론에서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은 신을 무엇보다 우선으로 사랑하는 것인데, 이 사랑도 신의 명령을 어겨서는 칭찬 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조건부 능력' 이라는 차 원에서 창조주는 애덕이라고 부르는 '창조된 관성' 에 의 해서만 사람들로 하여금 천상 지복을 누리게 한다고 한 다.
[오컴주의 및 영향과 의의] 두 세기가 지난 뒤 등장한 루터가 올바른 이성를 가진 사람의 자유로운 행위의 공 로로 구원받는다는 주장에 반대한 것은 오컴주의적인 교 육의 배경 때문이며, 오컴의 신학 이론에 영향을 받은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컴은 섭리와 선견지명을 혼 동하지 않고, 죄가 견책에 선행하고 덕행이 은총의 선물 을 준비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는 중세 전통 안에서 하등 의 특별한 이론이 아니었다. 더욱이 혁명적인 것은 결코 아니어서, 엄밀하게 보아서 루터의 의화론을 미리 준비 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정치적 오컴주의의 이론적 특징은 교황 요한 22세 (1316~1334) · 베네딕도 12세(1334~1342) · 글레멘스 6세 (1342~1352)의 정치적인 입장에 반대하기 위한 오컴의 논쟁서 《90일》(Opus nonaginta dierum, 1333) 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신의 '절대 권능 이라는 관점 으로 보아, 세계 질서는 극단적인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신의 자유에 달려 있어서, 일차적으로는 신에 의해서 만 들어지고 그에 의해서 제정된 법에 따라 유지된다. 이 질 서 안에서, 자연법과 인간이 제정한 법은 사실적 가치를 지니지만 법적 권리의 가치는 지니지 않는다. 개연적 정 치 권력의 합법성은 가정상, 정의로운 '정치적 지배자' 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나, 모든 선과
도덕성은 결국 신의 뜻에 근거한다. 법적 권리가 신의 결 정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에서 개별 외에는 존재 하지 않는 것처럼, 정치에 있어서도 역시 개인만이 존재 하며, '사회라는 일체' 는 존재하지 않고, 다만 서로 다른 단위의 회 또는 협회 단체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전망 안 에서, 정치적 권위는 개인들간의 합의와 연관된다. 이와 같은 정치적 개인주의에 더하여 종교적 개인주의도 주장 될 수 있다. 유명론자들은 정치 질서의 존재론적 근거를 강조하지 않는다.
오컴이 실재론을 비판한 것은, 종교인과 시민의 정치 력 경쟁에 있어서 시민 연합의 진보와 일맥상통한다. 이 로써 그는 14세기 파리 대학에서 유명론의 발전을 가지 고 오는 길을 열어 놓았다. 프랑스의 유명론자들은 오컴 의 주장을 프랑스의 상황에 맞도록 변형하여 왕권의 자 율을 강화하는 이념론자들이었다. 그러나 오컴이 당시 교회 제도의 남용, 특히 교황 제도의 남용을 비난한 것은 근대화의 의지라기보다는 순수한 복음 정신의 원천으로 돌아가려는 관심이라고 해석되며, 이와 같은 해석이 빌 (G. Biel, +1495)을 거쳐 루터에게 전수되었고, 뒷날 오컴 의 그리스도교 정신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에게도 동정 적으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졌다.
14세기에 대학 내에서 이른바 '길 싸움' 이 있은 후, 오컴의 '새로운 길 로 들어서서 성공적인 이력을 쌓은 사람들이 등장하였다. 프랑스에서는 뷔리당(J. Buridan, 1300?~1358)과 리미니(G. Rimini, +1358) , 영국에서는 우 담(A. Woodham, +1358)과 로버트 홀코(+1349) , 독일에서 는 폰 작센(A. von Sachsen, +1390)과 인겐(M. Inghen, +1396)이 유명하다. 특히 뷔리당은 실험을 기초로 한 귀 납법을 새로운 인식 방법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아이(P. D'Ailly, 1350~1420)와 함께 유명론 의 정치 철학적 이론을 빌려 새로운 정치론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정치적 오컴주의가 프랑스의 왕 샤를 5 세(1364~1380) 치하에서 행운을 맞는 것을 《벨지에의 꿈》(Le Songe du Vergier, 1378)에서 증언하고 있다. 교회론 에서는 오컴이 신앙에 관하여 인간의 무류성을 부정한 것이 후스파와 위클리프주의자들에게 반향을 불러일으 켰다. 서구 대이교 시기에는 자바렐라(F. Zabarella, 1360~1417)와 같은 교회법 학자들과 갈리아주의 신학자 들, 특히 제르송(J. Gerson, 1363~1429)과 아이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이들의 영향력은 컸다.
청빈에 관한 논쟁에서 취한 오컴의 입장은 또한 오컴 주의 정치론의 일부였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작은 형제 회의 복음적 가난을 거부하기 위하여 논한 것이라는 《벨 지에의 꿈》 저자의 해석이 오히려 더 널리 받아들여졌다. 갈리아주의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구걸하는 것 보다는 일하시기를 더 좋아하셨다"라고 주장하면서, 자 발적인 청빈의 공로를 인정하는 한편 사유 재산권을 옹 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오컴의 청빈론을 기치로 내세우기 도 했다.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와 라이프니츠 (G.W. von Leibniz, 1646~1716)를 거쳐, 현대에 러셀(B.A.W. Russell, 1872~1970), 스트로슨(P.F. Strawson, 1919~ ) , 굿맨
(N. Goodman, 1906~ ) 등이 오컴의 유명론에 관심을 기울 여 재해석을 시도하였으며, 이에 대한 토론은 지금도 지 속되고 있다. (→ 유명론 ; → 스콜라 철학)
※ 참고문헌 Guillelmi de Ockham Opera philosophica et theologica, Franciscan Institute, St. Bonaventure N.Y./ Guillelmi de Ockham Opera politica,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74/ Breviloquium de potestate papae, Leipzig, 1944/ Dialogus, Lyon, 1496, London, Gregg, 1962/ De imperatorum et pontificum potestate, Oxford, Clarendon Press, 1927 L. Baury, Lexique philosophique d'Ockham. Etudes et notions fondamenentales, Paris, Vrin, 1950/ Ph. Boehner, Collected Articles in Ockham, St. Bonaventure N. Y. Franciscan Institute, 1958/ A. Ghisalberti, Guglielmo di Ockham, Mailand, Vita e pensiero, 19721 R. Guelluy, Philosophie et théologie chez Guillaume d'Ockham, Löwen-Paris, Nauwelaerts-Vrin, 1947/ R. Imbach, Wilhelm Ockham, Klassiker der Philosophie, C.H. Beck, 1980/ 一, Condition de I'intelletuel au XIIe et Xive siécles, Paris, UGE, 1985/ J. Jolivet, Histoire de la Philosophie, Paris, NRF, Pieiade, 1969/ -, Arts du langage et théologie chez Abelard, Paris, Vrin, 1969/ G. De Lagarde, La naissance de I'esprit laique, IV : Guillaume d'Ockham, Löwen-Paris, E. Nauwelarts, 1963/ A.S. McGrade, The Political Thought of William Ockham,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4/ P. Vignaux, Art. Nominalisme, 《DTC》 11. [朴全圭]
오컴, 월리엄의 Ockham, Wiliam of(1285~1349)
글자 크기
9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