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 줄리아 Ota Ju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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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의해 거두어져 일본 땅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기리시탄(切 支丹, 당시 일본에서는 가톨릭 신앙인을 포르투갈어의 발음대 로 기리시탄으로 부르고 있었다)이 되었으며, 장성한 후 굳 건하게 천주 신앙을 지키다가 생을 마친 조선인 여성 기 리시탄.
줄리아의 출생지와 성명 · 생년(生年)은 알 수 없다. 일본 땅에서 줄리아와 관계를 가졌던 서양 신부들의 서 간(書簡)이나 그 밖의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1592년 말 경 어린 몸으로 부모를 잃고 전선을 방황하다가 기리시 탄 장군이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 의해 대마도 (對馬島)로 보내졌다. 그 후 다시 고니시의 근거지인 규 슈(九州) 우토성(宇土城)으로 이송되어, 고니시 부인의
보호를 받으며 장성했고, 그곳에 살 때 "오타" (大田)라 는 이름으로 불렸다(서양 선교사들의 기록에는 Ota 또는 Vota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오타" 또는 "오타아"로 표기되기도 한 다). 그녀는 1596년 5월 고니시 부인의 인도로 예수회의 모레혼(Pedro Morejon) 신부에게 "줄리아" 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고, 영세 후에는 고니시 부인을 시종하며 신 앙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600년 도요토미(豊臣) 군과 도쿠가와(德川) 군 사이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쟁' (關原之役)에서 고 니시가 이끌던 도요토미 군이 패하자 일본의 통치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로 넘어갔다. 이에 고 니시는 반역자로 몰려 참사되었고, 그의 가산이 몰수될 때 줄리아도 도쿠가와 가문에 예속되는 조치가 취해졌 다. 줄리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시종하며, 한때 에도 (江戶, 현재의 東京)에 거주했으나, 그 후 정계를 은퇴한 이에야스의 '슨푸성' (駿府城, 현재의 靜岡에 있던 城)에서 오쿠가다 죠추우(奧方女中, 즉 侍從女官)로 근무하며 살 게 되었다. 장성한 줄리아는 기품이 있고 예의가 바르며, 맡은 바 임무에 충실했고 상당한 교양도 갖춘 여인으로 모든 이들의 추앙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이교인 (異敎人) 장군을 섬기면서도 자기 거실에 기도실을 마련 하는 등 신앙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나아가 궁내 여인들을 상대로 신앙의 전도에 힘을 쓰는 한편, 성밖의 성직자와도 연락을 취해 가며 교회 활동을 도왔다. 그녀 는 교회의 일꾼이 부족하다는 성직자의 고충을 알고, 자 신의 열두 살 난 양자를 교회의 일꾼으로 봉헌하기도 하 였다.
그런 가운데 1612년 4월, '기리시탄 금령' (切支丹 禁 令)이 선포되면서 줄리아는 원도(遠島)로 추방되는 형벌 을 받았다. 추앙받던 여시종 줄리아가 이에야스의 특명 에 의해 섬으로 유배(流配)된 것은 그녀가 '기리시탄 금 령' 에 위배되는 기리시탄 신자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주변의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주군(主君)이던 이에 야스의 개인적인 욕정을 끝내 거부하였기에 당한 재앙이 기도 했다.
줄리아가 추방령에 의해 섬으로 떠난 것은 1612년 4 월 20일이었다. 줄리아의 첫 유배지는 오시마(大島)였 으나, 1개월 후 더 멀고 외로운 니지마(新島)로 이송되 었다. 그래도 줄리아가 신앙을 포기하지 않자, 그 해 6월 중순경에는 다시 태평양의 고도(孤島)인 고즈시마(神津 島)로 추방하였다. 인적이 드물고 자연이 황량한 고도에 서의 유배 생활은 외롭고 고난에 찬 것이었다. 그러나 줄 리아는 유배 생활을 자신에게 주어진 크나큰 은혜로 확 신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님과의 일치를 다지는 기도와 명상의 생활로 신앙을 지켜 갔다. 줄리아의 청순하고 확 고한 천주 신앙은 그녀가 유배지로 떠나기 직전에 아지 로(網代) 항에서 쓴 서한이나, 유배지 고즈시마에서 본 토에 사는 성직자나 친지 교인들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잘 전해진다.
오타 줄리아에 대해서는 이미 일제 시대부터 서양인 선교사가(宣敎史家)들의 연구에 의해 알려져 있었다. 그
러나 그녀에 대한 사실이 명백하게 알려진 것은 광복 이 후의 일이다. 즉 기리시탄 연구의 근본 사료인 선교사들 의 서한이나 그 밖의 연구 자료가 발굴되고, 그러한 자료 를 활용한 연구 성과가 쌓임에 따라, 줄리아에 대해 종래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사실들이 많이 밝혀지게 되었다. 예 를 들어 줄리아가 임진왜란 때 혈족을 잃고 어린 몸으로 전선을 헤매다가 일본 땅으로 건너간 조선인임은 확실하 다. 그러나 종래 일부에서 주장되어 온 것같이, 그녀의 성이 이(李)씨라든가, 왕족 출신이며 3세에 일본으로 이 송되었다거나, 1652년에 60세로 고즈시마에서 일생을 마치고 그 섬에 묻혔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그녀의 묘지가 오늘날 고즈시마에 남아 있다는 등의 주장은 역 사적 사실과 거리가 먼 항설(巷說)임이 밝혀졌다.
줄리아가 일본으로 건너간 지 15년 후인 1607년 2월, 당시 12세이던 그녀의 양자를 교회에 봉헌받았다는 무 노즈(Munoz) 신부의 서한이 사실이라면, 이 일이 있은 그 해 줄리아의 나이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20세 이상이 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줄리아가 3세 때에 일본으로 건너갔다고는 볼 수 없다. 또 줄리아의 조선 성이 이씨 요, 왕족 출신이라는 기록은 1871년 중국에서 발간된 《관광 조선》 (觀光朝鮮)이나, 1900년에 발간된 《고려치 명사략》(高麗致命史略) 등 중국측 출판물에 나오는 것이 나, 우리 나라와 일본의 옛 기록에는 그녀의 성씨나 신분 이 전혀 언급되지 않아 믿을 수 없다. 이와 함께 줄리아 가 고즈시마으로 유배된 지 40년 후인 1652년에 고즈시 마에서 성(聖) 처녀와 같은 신앙 생활을 하다가 60세의 나이로 그 섬에서 일생을 마쳤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다. 즉 1620년 3월 25일자 도미니코회 소속의 살바네스 (Salvanez) 신부의 서한에 의하면, 그 당시 줄리아는 나가 사키 (長崎)에서 도미니코회가 창설한 신심 단체인 산타 콘프라디아(Santa Confradia)에 속해 있었는데, 그녀는 이 단체의 일원으로 소녀들에게 교리와 성가를 가르쳤고, 이 일로 거듭 나가사키 시 당국에 호출되어 조사를 받았 으며, 일정한 주거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교회 사 업에 헌신적으로 종사했다고 한다. 또 1622년 프란치스 코회 소속의 파체코(Pacheco) 신부의 서한에 의하면, 당 시 줄리아는 오사카(大阪)에 살고 있으며, 그 자신이 줄 리아의 생활과 활동을 도와 주고 있다고 했고, 줄리아와 면식이 있었던 아빌라 지론(Avila Giron)은 그녀가 1615 년 당시 고즈시마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밝히 고 있다. 따라서 이상의 서한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줄리 아는 1615년에서 1620년 사이에 고즈시마에서 풀려 나 나가사키와 오사카 등지에서 계속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줄리아가 어떠한 활동을 하다가 언제 어디에 서 선종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결국 이제까지 오타 줄리아에 대해서는 많은 내용이 잘못 알려져 왔다. 따라서 줄리아에 대한 잘못된 역사적 사실은 바로잡아져야 한다. 그러나 각종 사료가 증명하 듯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성에서 살 때 모든 사람으로 부터 추앙을 받던 그녀의 천주 신앙과 이에야스의 위압 적인 요구를 끝내 거부하고 정결을 지키다가 유배의 길
에 나선 그녀의 천주에 대한 충성, 그리고 고즈시마에서 의 고난에 찬 유배 생활을 자신에게 주어진 특별한 은총 으로 받아들이고 성스러운 신앙 생활을 영위했던 것과 해배(解配)되어 일본 본토로 귀환한 후에도 희생적으로 교회 사업에 헌신한 그녀의 천주 신앙은 현양되어야 마 땅하다고 할 것이다. 현재 매년 5월 끝 주말, 고즈시마에 서는 섬의 주민과 일본 각지에서 모여든 신자들이 줄리 아를 현양하는 '줄리아제' 를 거행하고 있다.
※ 참고문헌  이원순, <오타 줄리아 실기>, 《교회와 역사》 301호 (2000. 6), 한국교회사연구소/ -, '새로운 세기의 줄리아제' <가 톨릭신문> 2247호(2001. 4. 29) · 2249호(2001. 5. 13)/ Luiz de Medina, <일본에 살았던 일본인 - 일본의 한국인 천주교 신자를 중심으로>, 《釜山敎會史報》 12호(1996. 10), 부산교회사연구소 - 《遙力攻 る 高麗》, 近藤出版社, 1988/ 片岡彌吉, < 日 本 リ シ タ ソ 殉教史》, 時事 通信社, 1982/ 田村襄次, 《孤島 の華》, 中央出版社, 1965/ 田中英一, 《美しき孤島 の聖女》, 神津島おたあジ 그 リ 了表慶會, 1999.[李元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