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전통을 되찾음으로써 영국 교회를 쇄신하려고 옥스퍼드 대학교를 중심으로 1833~1845년 사이에 일 어난 운동. 이 운동의 창시자들은 로드(W. Laud, 1573~ 1645)에서 비롯된 '찰스 시대의 성직자들' (Caroline Divines)과 로(W. Law, 1686~1761)를 중심으로 한 '비(非) 선서파' (Nonjurors)의 신학 전통을 허친슨(J. Hutchinson, 1674~1737)과 같은 18세기 신학자들을 통해서 이어받은 진보적 성향을 지닌 영국 성공회의 고교회인들(High Churcmen)이었다. 이들은 운동의 취지와 주장을 전파하 기 위해 《시대를 위한 소책자》(Tracts for the Times)라는 잡지를 발간하였다. 그로 인해 '소책자 운동' (Tractarian Movement)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옥스퍼드 운동의 지도 자들은 영국 종교 개혁 이전의 가톨릭 전통(Anglo-Catho- licism)으로 돌아가 영국 교회에서 사라진 가톨릭 이상과
함께 속권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쇄신된 교회상을 구현하 려고 노력하였다.
[역사적 배경] 19세기에 영국은 정치 · 사회 · 경제 면 에서 개혁의 시대를 맞고 있었다. 18세기 중엽부터 시작 된 산업 혁명은 영국에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로 산업 혁명은 자본주의와 함께 부유한 중산 계급을 탄생 시켰다. 이들은 재력과 정치적 자아 의식을 갖고 국가의 정책 결정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요구하였다. 둘째로 산 업 혁명은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룬 반면, 새 기계의 발명 으로 실직자를 양산하였다. 이 근로 계층은 실직의 원인 이 된 기계와 공장을 파괴함으로써 사회가 혼란 속에 휩 싸였고, 이는 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당황한 집 권당인 토리당(Tory Party)의 보수 강경파는 반(反)정부 집회 및 시위와 출판물을 금지하는 긴급 조치법을 통해 서 사회의 소요 사태를 진정시켰으나 일시적 처방에 지 나지 않았다. 1827년에 정권을 넘겨받은 토리 온건파는 야당인 휘그당(Whig Party)과 연립 내각을 구성하였으나 정치적 혼란만을 가져왔다. 1828년에 국왕 조지 4세 (1820~1830)는 웰링턴 공작(First Duke fWellington, Arthur Wesllesey, 1769~1852)에 조각을 위임하여 토리 정권이 다 시 들어섰으나, 심사령(Test Act)의 폐기(1828)와 '가톨릭 해방령' (Catholic Emancipation Act)의 선포(1829)로 집권당 은 당권파와 온건파와 강경파로 분열됨으로써 정치적 불 안정은 심화되었다.
영국의 정치적 불안정과 사회 소요 사태 뒤에는 사회 구성원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of Number)이라는 원칙을 세운 벤담(J. Ben- tham, 1748~1832)과 밀(J. Mill, 1773~1836)의 공리주의(功 利主義)가 있었다. 벤담은 사회 제도 개혁의 한 방법으 로 공리 원칙의 적용을 기대하였으나 집권 세력이 주저 하거나 반대함으로써 모든 개혁의 전제 조건으로 정치 개혁을 내세웠다. 그는 잘못된 현 질서를 파괴하고 민주 체제로 모든 사회 병폐를 치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그는 종교 문제에 있어서 합리적 증명이 없는 신 앙 교리를 거부하며 영국 국교 제도의 완전한 폐지를 주 장하였다. 공리주의자들은 반(反)교회주의를 내세우며 교회 재산은 공리 원칙에 의해 재조정 · 분배되고, 성직 자는 정부에 의해서 임명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러한 과격한 공리주의는 급진적 정치 지도자들을 탄생시 켰으며, 특히 휘그당을 정치 및 교회에 대한 개혁에 나서 게 하였다. 1830년 월리엄 4세(1830~1837)의 등극과 함 께 실시된 총선거에서 휘그당이 승리함으로써 웰링턴 내 각은 사임하였다. 아울러 같은 해에 프랑스에서 발생한 '7월 혁명' 은 중산 계층에게 정치 제도의 개혁을 위해 투쟁하도록 자극하여 의회 제도 개혁에 대한 국민적 관 심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정권을 잡은 휘그당은 1832 년 6월 4일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귀족 중심 의 사회 구조가 무너지고 중산 계층은 의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교회는 두 가지 위기에 놓여 있었다. 첫째는 교회 내부로부터 오는 위기였다. 교회는 개혁이
필요한 처지에 있었다. 일반적으로 성직자들은 박학하고 처세에 능하였지만, 영성은 결여되어 있었다. 성직자들 은 사목적 사명감을 망각하고 만찬과 오락을 즐기며 지 내는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하였고, 성직자의 임지 부재 는 보편적 현상으로 여겨졌다. 더욱이 정부가 십일조와 종교세로 거두어들인 교회 수입의 불공정한 분배로 일부 고위 성직자들은 부유하였지만, 많은 성직자들은 가난하 였다. 이러한 불공정한 분배와 함께 성직 겸임과 친족 등 용의 폐해는 국민의 비난과 적의를 심화하게 하였고 교 회 개혁에 대한 요구가 높았다.
둘째는 외부로부터 오는 위기였다. 휘그당의 집권은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휘 그 정부는 과격한 공리주의와 프랑스 혁명의 영향과 비 국교도의 지지를 받아 교회에 대한 급진적 개혁을 주장 하였다. 휘그 정치인들은 교회가 개혁의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면 의회가 교회 문제, 특히 교회 재산의 남용에 대 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뜻있는 교 회인들은 교회가 개혁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국가의 교회 지배와 내정 간섭과 함께 국교회 제 도가 폐지될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이처럼 국교회는 밖 으로부터의 개혁이나 안으로부터의 쇄신이 필요한 위치 에 놓여 있었다.
[기 원] 교회 개혁은 밖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국민 대 부분이 국교회 신자들인 영국에서 교회 유지를 위한 '십 일조세' 와 '종교세' 를 징수하는 데에 문제가 없었지만,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들인 아일랜드에서는 달랐다. 아일 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은 이단적 종교라고 믿고 있는 영 국 국교회의 유지를 위한 세금 징수에 불만을 품고 세금 납부를 거부하거나 세금 징수관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1833년 2월에 휘그 정부는 아일랜드인들의 납 세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서 '아일랜드 교회 재산법' (Iri- sh Clurch Temporalities Bill)을 의회에 제출하였다. 이 법안 은 아일랜드 국교회의 운영비를 60,000파운드 절약하기 위해서 아일랜드 국교회의 22개 교구를 12개의 교구로 줄이는 내용이었다. 이 법안은 아일랜드 국교회의 교구
를 축소함으로써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교회의 원칙 문제에 도전한 셈이었다.
이때 지식인들은 교회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영국 교회인들은 국교회 체제 안에서 교회는 국 가 행정부의 한 부서이며 국민 생활의 일부로 이해하였 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러한 이해로 충분하지 않고 교회 는 그리스도가 직접 설립한 하느님의 기구이며 사도 계 승(Apostolic Succession)을 통해서 전수되었고, 교회는 고 유한 생활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고유한 임무를 수 행하기 위해서는 외적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깨닫기 시작하였다.
교 회 밖으로부터의 개혁에 대응하여 교회 안에서 쇄신 의 움직임이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진보 성향이 강한 오 리얼 대학(Oriel College)에서 시작되었다. '순수 지성파' (Noetics)라고 불리던 오리얼 대학의 젊은 교수들은 교회 외부로부터 오는 위협을 이겨내고 내부로부터는 쇄신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휘그 정부와 의회의 교 회 내정 간섭을 교회의 신권(神權)과 자율권 침해라고 비판하면서, 교회의 자유와 교회의 개혁을 위해 투쟁해 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33년 7월 14일에 시학(詩學) 교수인 키블(J. Keble, 1792~1866)은 '국가의 배교 라는 설 교를 하였다. 그는 설교에서 그리스도인 정치인들이 여 론을 교회에 불충한 행동으로 이끌고 있고, 교회는 국가 기관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의해 설립된 기구이며 평 신도들이 사도들의 계승자인 주교들의 사목적 권위에 간 섭하는 행위는 중대한 죄악이라고 역설하였다. 이 설교 를 계기로 키블의 제자이며 진보적 성향을 지닌 고교회 파 프루드(R.H. Froude, 1803~1836)와 뉴먼(J.H. Newman, 1801~1890)과 같은 젊은 교수들이 교회 자율권을 찾기 위한 교회 쇄신 운동을 시작하였다. 1년 후에는 히브리 어 교수인 퓨지 (E.B. Pusey, 1800~1882)가 이 운동의 지도 자로 참여하였다. 옥스퍼드 운동의 이 세 명의 공동 창시 자들은 개인적으로 고유한 방법을 통해 교회 개혁 운동 에 공헌하였다.
1833년 7월 25일 서퍽(Suffolk) 주(州) 해들리(Hadle- igh) 성당의 주임 신부 로즈(H.J. Rose, 1795~1838)는 교회 위기의 상황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고교회인들을 초대하 였다. 모임의 참석자는 옥스퍼드에서 온 프루드와 팔머 (W. Palmer, 1811~1885) 그리고 궁정 담당 신부인 퍼시벌 (A.P. Perceval, 1799~ 1853)과 로즈였다. 4일 동안의 회합 에서 '사도적 계승을 지닌 교회를 위해서 투쟁하자' 는 원칙에 합의하였으나, 프루드가 영국 국교회 제도의 폐 지를 내세우자는 데에 대해 다른 참석자들이 반대하면서 의견의 일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8월 중순에 뉴먼은 행동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 오리얼 대학 내에 있 는 자신의 방으로 키블, 프루드, 팔머를 초대하였다. 이 회합에서 사도적 계승 교리의 전파, 비(非)교회인의 교 회 내정 간섭 배격, 국교회 폐지 가능성 고찰, 교회 민주 화의 필요성과 같은 주제들이 논의되었다. 두 회합에서 운동의 취지 전파를 위해 협회의 결성, 교리서의 간행,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보내는 청원서, 잡지의 간행과 같
은 네 가지 방법이 제 시되었다. 상류층과 고위 성직자들로 구성 되는 협회의 결성은 팔머의 제안이었으나 키블과 프루드, 뉴먼 이 반대하여 이루어지 지 않았다. 그러나 1834년 2월 성직자 6,530명의 청원서와 평신도 230,000명의 성명서가 캔터베리 대 주교에게 체출되었다. 아울러 퍼시벌은 문답 식의 《교회인의 교리
서》(The Churchman's Manual)라는 제목의 작은 교리서를 출판하였다. 1833년 9월 중순에 키블, 뉴먼, 프루드는 자신들의 견해를 알리기 위하여 《시대를 위한 소책자》를 창간하여 성직자들에게 배부하였다.
[주요 주장] 옥스퍼드 운동의 지도자들은 설교와 저 술, 특히 《시대를 위한 소책자》를 통해서 교리, 전례, 신 심에 대한 견해를 펼쳤다. 그들은 교회의 교리와 규율에 있어서 사도 계승의 교회와 성사적 교회를 주장하면서 교의 신학과 사목 신학을 제시하였다.
첫째, 뉴먼은 교회의 참된 권위는 사도로부터 전해진 것이며 교회의 통치권은 국가가 부여한 것이 아니라 하 느님이 사도들에게 부여하였고 사도들은 주교들에게 전 승하였고 주교들은 사제들과 함께 공유하고 있다고 강조 하였다(소책자 1호). 사도 계승은 옥스퍼드 운동의 기본 사상이었다. 뉴먼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 이기 때 문에 국가 조직의 일부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소책자 2 호). 이러한 그리스도의 신비체 교회론과 사도 계승의 교 회관은 옥스퍼드 운동이 교회 자유를 위한 투쟁을 주요 목표로 삼고 시작하게 했다. 소책자의 기고가들은(Tac- tarians) 영국 국교가 교회다운 모습을 완전하게 갖추고 고유한 영적 사명을 구현하기 위해서 국교 제도는 폐지 되고 비(非)국교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둘째, 키블은 교회를 하느님의 은총이 사람에게 전해 지는 경로라고 믿었다. 성사는 사람을 그리스도 신비체 의 구성원으로 만들고, 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현존한다고 보았다. 키블에게 있어서 성사의 유효 성은 교회의 그리스도의 신비체론과 사도 계승의 교회론 에 바탕을 둔 것이다. 키블은 성찬례를 매우 중요한 성사 로 확신하였고, 십자가 위의 제사처럼 성찬례가 제사임 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성체 현존을 믿었다. 그는 성 찬례를 그리스도인이 영성 생활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 느님이 부여한 특별한 도구로 여겨, 잦은 영성체를 권장 하였다. 또한 그는 츠빙글리(U. Zwingli, 1484~1531)나 칼 뱅(J. Calvin, 1509~1564)의 성찬 제정문에 대한 상징적 해 석을 반대하여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고, 성변화를 거부 함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성체성사 교리도 반대하였다.
그러나 프루드는 프로테스탄트가 가톨릭 교회의 성변화 교리를 반대하면서 성서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성찬 례의 신비로운 기적을 과소평가하였다고 비판하면서 유 일하게 성변화를 주장하였다.
아울러 키블은 준성사적 죄 고백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는 속죄가 죄의 용서를 받는 길이라는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키블은 종교 개혁가들과 는 달리 죄는 상태(Sinfulness)가 아니라 자유 의사의 행 위이며, 죄인은 참회를 일으키는 양심을 지니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사제가 신자에게 죄 고백을 요구할 수 없지만 사제와 신자가 죄 고백이 필요한지를 결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키블은 신자가 마음(양심)의 평화를 위해 서 또는 영성체를 위해서 필요하다고 믿으면 죄 고백을 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셋째, 프루드는 키블처럼 신앙 교리의 원천은 성서와 성전(聖傳)이라고 강조하면서 영국 국교회의 광교회(廣 敎會)와 저교회(低敎會)의 성서관을 반박하였다. 그는 성서는 인간의 이성으로 해석되고 입증되어야 한다는 광 교회인들의 견해를 비신앙적이고 비합리적 경향이라고 여겼다. 성서가 담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신비로운 개념 들은 인간 이성을 뛰어넘는 것이며, 인간의 경험을 통해 서 증명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성서의 자구(字 句)가 애매하더라도 신앙을 갖고서 성서에 접근해야 된 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그는 성서의 자의적 해석을 강 조하면서 성서 전문가의 주해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따 라서 그는 성서의 해석을 개인의 자유 판단에 맡기는 저 교회인들의 견해를 배척하였다. 프루드는 성서에 의해서 확증될 수 없는 교리는 초대 교회의 가르침과 실천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성전이 '무오류의 길잡 이' 로써 성서에 나타난 교리를 보충하여 설명해 주고 성 서를 올바르게 해석해 주는 교회 가르침의 주요 도구라 고 주장하였다.
넷째, 키블은 사목 직무를 수행하기에 부족한 사람들 이 성직자로 많이 선택되었다고 느꼈다(소책자 4호). 그 에게 이러한 성직자들은 너무나 인간적이며 영성을 갖추 지 못하고 있는 모습으로 비취졌다. 그는 성직자들이 교 회 안에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그리스도가 약속한 구원의 은혜를 전수하는 중재자라는 중요한 위치를 깨닫 지 못하고 있다고 믿었다. 키블은 사제 수품 예식에 있는 안수는 성사적 행동으로 사제를 하느님의 신비 · 말씀 . 성사를 수행하는 사목자로 만든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죄 고백을 듣는 것은 사제가 사목 직무를 잘 수행하는 데 에 도움을 준다고 말하였고, 프루드는 성직자의 첫째 임 무는 성사 집전, 특히 성찬례의 집전이라고 믿었다. 그리 고 뉴먼은 성직자가 복음의 전달자 또는 성사 은총의 분 배자로 여겨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소책자 1호). 아울러 키블은 성직자들이 사목 직무를 수행할 때에는 그리스도 의 위치에 있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같아져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따라서 키블은 사제의 성덕(聖德)을 강조하 였다.
이러한 성덕을 향한 열망은 프루드에게서 잘 드러났
다. 프루드는 매일 세심한 양심 성찰, 엄격한 자기비판, 극기 실천과 같은 수도자적 생활을 통해서 내적 완성을 이루려고 노력하였다. 아울러 키블은 조심스럽게 성직자 의 독신 생활을 권장하였다. 그러나 프루드는 성직자 독 신제에 대한 열성적 주창자였다. 그는 교부들의 저서 연 구를 통해서 성직자의 독신 제도에 대한 소신을 갖게 되 었다. 프루드에게 있어서 독신 생활은 사제의 성소이며 의무였다. 스승인 키블이 결혼한 후에는 결혼이 사목 생 활에 알맞은 조건이라고 주장하였지만, 프루드는 받아들 이지 않았다.
[결 과] 소책자 운동의 가르침은 교회 안팎으로부터 개혁을 이루었다. 교회 밖으로부터의 개혁은 정부와 의 회를 통해서 실현되었다. 첫째, 정부는 1835년에 두 명 의 대주교, 3명의 주교와 4명의 평신도로 구성된 '교회 위원회' (Ecclesiastical Commission)를 설립하였다. 이 위원 회는 교구들의 재정을 조정하여 교구를 평준화함으로써 주교들이 다른 교구로 옮기려는 유혹을 없앨 수 있었다. 1836년에 '교회 위원회' 는 주교좌 참사회를 해체하고 주교좌 성당에 머무르지 않는 겸직 성직자의 교회록은 주교좌 성당의 수석 사제와 4명의 성직자들의 생활 유지 비로 전용함으로써 성직자의 임지 부재의 폐해가 사라질 수 있었다.
둘째, 의회는 국교회 성직자의 생계를 위한 '십일조' (Ti- the)와 교회 건물의 유지를 위한 '교회세' (Church Rate)에 대한 개혁에 나섰다. 십일조는 국교회의 많은 성직자들 에게 수입의 주요 원천이었다. 그러나 이는 비국교인들 에게 불만의 대상이었고, 신자들과 직접 액수를 협정해 야 하는 성직자들에게도 부담이 되었다. 따라서 1836년 에 의회는 '십일조법' (Tithe Act)을 통과시켜 세금 책정표 를 작성하여 십일조를 납세의 의무로 정하였다. 아울러 국교회 건물을 위한 세금도 국교회 건물을 사용하지 않 는 비국교도들에게 불만의 대상이었다. 이 문제는 1868 년에 '글래드스턴의 법령' (Gladstone's Bill)을 통해 납세 의 의무를 폐지함으로써 해결되었다.
교회 안에서의 개혁은 교구와 본당의 교회 생활에서 나타났다. 런던의 주교 블룸필드(C.J. Bloomfield, 1786~ 1857), 노리치(Norwich)의 주교 스탠리(E. Stanley, 1779~ 1849), 옥스퍼드의 주교 윌버포스(S. Wilberforce, 1805~ 1873)와 같이 옥스퍼드 운동에 관심을 두었던 주교들은 교회 개혁이 필요함을 통감하였다. 그들의 교구에서 적 지 않은 신부들이 사목적 사명감을 깨닫지 못하고, 교회 쇄신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많은 시간을 음주와 사냥으로 보내고 인구 증가에 비해 교회가 모자랐다. 이렇게 어려 운 환경 속에서 주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교회 생활을 활성화하였고, 교구의 수석 사제들을 교육하여 성직자들 의 생활 쇄신에 나섰다. 그들은 교구에 신학교를 설립하 고 사제 수품 예정자에 대한 심사를 강화하였다. 주교들 은 많은 교회를 세우고, 주민의 도덕심 향상을 위한 교회 단체를 조직하였다. 아울러 리즈(Leeds)의 주임 신부 후 크(W.F. Hook, 1789~1875)와 같이 옥스퍼드 운동에 동조 한 일부 주임 신부들도 교회 쇄신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전례의 정신에 맞게 예배 의식을 거행하였고, 고유한 복 장을 입은 성가대를 도입하여 전례 생활을 새롭게 하였 으며, 잘 준비된 설교를 통해서 본당 신자들의 신앙 부흥 에 헌신하였다. 성직자들은 본당 사목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근로 청소년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면서 사회 복지에 노력하는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 주었 다.
프 루드는 교회 내부가 좀더 가톨릭적인 모습으로 꾸며 지기를 원하였고 퓨지는 신심의 시각적 영역에 관한 글 을 써서 교회 장식에 대한 열망을 보였다. 이러한 열망은 뉴먼이 리틀모어(Littlemore)에서, 그리고 퓨지가 리즈에 서 나무 제대를 돌 제대로 교체함으로써 구현되었다. 점 차 다른 성당에서도 신부들이 제대에 십자가와 촛대를 올려놓고 검은 가운 대신 중백의와 같은 전례복을 입고 설교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그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었 지만 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옥스퍼드 운동 의 지도자들이 제사적 성찬례와 그리스도의 성체 현존을 강조한 데에서 비롯하였다. 이제 교회의 건축과 장식에 관한 외형과 전례를 연구하는 단체들이 옥스퍼드(1828) 와 케임브리지(1839)에 설립되었다. 아울러 프루드는 영 국의 상황이 16세기 종교 개혁으로 영국에서 사라진 수 도원이 부활할 여건을 만들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결 혼하지 않은 사제들이 수도 공동체를 이루어 기도와 고 행 그리고 규칙을 통한 생활을 통해 개인 성화에 힘쓰고 비신앙화되어 가는 도시 속에서 대중에게 신앙 부흥 운 동을 일으킬 때가 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수도원 부활 계획은 옥스퍼드 운동의 성덕에 대한 강한 열망에서 비롯하였다. 1839년에 퓨지는 가난 한 사람들을 돌보는 수녀회를 세울 것을 다짐하였다. 1841년 삼위 일체 대축일에 24세의 휴즈(M. Hughes)가 옥스퍼드에서 봉헌된 삶에 대한 설교를 듣고 개인적으로 퓨지 앞에서 세 가지 수도 서약을 함으로써 수도원 설립 계획이 세워졌다. 1845년 부활 대축일에 4명의 회원으 로 구성된 파크 빌리지 공동체(Pank Village Community)가 런던에서 설립되었고 성탄 대축일에는 회원이 8명으로 증가하였다.
[위 기] 1838년에 키블과 뉴먼은 프루드를 추모하고 옥스퍼드 운동의 정신을 전파하는 의도에서 네 권으로 된 《프루드 신부의 유고집》(Remains ofthe Late ReverendRicha- rd Hurrell Froude, M.A.)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프로테스 탄트 교회에 대한 폭언과 가톨릭 교회에 대한 찬탄으로 가득 찼다. 그는 중세기에 국왕 헨리 2세(1133~1189)가 교회의 권리를 제한하려는 '클래랜던 헌법' (Constitutions ofClarendon, 1164)을 반대하여 왕권에 대해 교회의 독립 을 주장한 베켓(Thomas Becket, 1118~1170), 영국 종교 개 혁의 기원을 이룬 헨리 8세(1491~1547)의 요구를 단호하 게 거절한 폴(Reginald Pole, 1500~1558), 가톨릭 전통을 옹 호하다가 처형된 로드와 같은 캔터베리 대주교들을 가톨 릭 이념의 구현자로 숭배하고 그들의 교권의 독립을 위 한 투쟁을 높이 평가하였다. 프루드는 《시대를 위한 소 책자》를 반(反)프로테스탄트 정신과 친(親)가톨릭 경향
으로 돌리는 데에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는 신앙의 원 천으로 성서와 성전을 내세우고 그리스도의 성체 현존뿐 아니라 실체 변화를 주장하였다. 프루드는 성모 신심을 지니고 《공도서》(Book of Common Prayer)보다 가톨릭 교 회의 《시간 전례서》가 우수하다고 평가하면서(소책자 75 호) 기도서로 사용하며 매일 양심 성찰과 함께 맨 마룻바 닥에서 자고 단식하는 고행과 같은 가톨릭적 신심을 실 천하였다. 그는 성직자의 독신 제도를 존중 · 장려하고 수도원 부활과 같은 가톨릭적 이상이 실현되기를 염원하 였다.
프루드의 유고집은 영국 사회와 종교계에 충격을 주었 다. 옥스퍼드 운동을 비난하는 책자들과 설교들을 통해 프루드는 가톨릭 교회의 어리석고 위험한 교리를 주장하 고 있다고 비난받았으며, 그의 친구들은 옥스퍼드 대학 교를 가톨릭화하는 집단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보수적 고교회인들은 유고집의 반프로테스탄트적이며 친가톨릭 적인 성향의 신학적 견해와 수도자적 극기 생활에 대해 유감과 분노의 뜻을 표명하였다. 고위 성직자들에게 유 고집은 옥스퍼드 운동의 회원들이 가톨릭 사상으로 기울 어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동기가 되었다. 캔터베리 대주 교 하울리(Wiliam Howley, 1766~1848)는 프루드의 프로테 스탄트 비난과 금욕 생활의 실천에 대해 유감의 뜻을 나 타내면서, 금욕 생활은 교육을 받지 못한 대중을 가톨릭 사상으로 기울어지게 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였다. 광교회파와 저교회파의 국교도들도 프루드의 종교 개혁 가들에 대한 공격에 격노하였다. 저교회의 온건파 신문 <크리스천 옵저버>(Christian Observer)는 처음에 옥스퍼드 운동에 동조하였으나, 프루드의 저서로 옥스퍼드 운동에 대한 적의가 담긴 논평을 실었다. 옥스퍼드 대학교 안에 서도 프루드를 '교황 신봉자' 라고 비난하였고, 의회는 프루드의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혹평을 비난하였다. 또한 유고집을 간행한 옥스퍼드 운동의 지도부를 '가증스러운 옥스퍼드 무리' 라고 공격하였으며, 일반 사회의 신문과 잡지도 프루드를 '교황 추종자' 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옥스퍼드 운동의 급진적 소장파 회원들은 《프 루드 신부의 유고집》을 진지하고 열렬하게 받아들였다. 소장파의 지도자인 워드(W.G. Ward, 1812~1882)는 프루 드와 개인적 접촉이 없었고 옥스퍼드 운동을 비판하였지 만, 유고집을 읽고서 옥스퍼드 운동에 가담하였다. 워드 는 유고집을 신심서와 신학서로 받아들여 가톨릭 교회를 찬양하고 프로테스탄트를 비판하였다. 오클리(F. Oakeley, 1802~1880)는 프루드의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가들에 대한 비난을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프루드의 유고 집은 옥스퍼드 운동의 젊은 세대를 가톨릭 사상으로 기 울게 하였다. 더 나아가 워드와 친가톨릭적 젊은 세대는 영국 교회는 가톨릭 교회와 공동 신앙을 지니고 있다는 뉴먼의 주장에 대해, 영국 교회에서 가톨릭 교리를 배제 하기 위하여 작성된 <39개 항 신조>를 내세우며 답변을 요구하였다. 이제 "<39개 항 신조>가 프로테스탄트 교리 인가 아니면 가톨릭 교리인가?"라는 문제는 옥스퍼드 운 동 안에서 긴급한 문제가 되었다. 뉴먼은 <39개 항 신
조>를 연구하여 1841년 2월에 <39개 항 신조 안의 일부 조항에 대한 소견>(Remarks on Certain Passages ofthe Thirty- Nine Articles)이라는 제목을 붙인 《시대를 위한 소책자》 90호를 발간하였다. 그는 <39개 항 신조> 가운데 14개 조항은 가톨릭 교회 안에서 심해져 가는 남용을 반박하 였지만, 가톨릭 교리 자체를 비난한 내용은 아니며 가톨 릭 교리와 가깝다고 주장하였다.
뉴먼의 《시대를 위한 소책자》 90호는 프루드의 유고 집만큼 영국 교회와 옥스퍼드 대학교 안에서 항의를 피 할 수 없었다. 그것은 한 그리스도인이 가톨릭 교회인이 면서 영국 교회 안에 머물 수 있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 이다. 오리얼 대학 교수로서 뉴먼과 가깝게 지내던 처치 (W.R. Church, 1815~1890)는 뉴먼의 《시대를 위한 소책자》 90호는 논증보다 고통과 분노를 일으켰다고 걱정하였 다. 주교들은 뉴먼을 신뢰할 수 없다고 공언하였다. 교 황 추종자' (Popery), '반그리스도' (Anti-Christ)가 문 앞에 다가온다는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테이트(A. Tait, 1811~1882)를 포함한 4명의 교수들은 런 던에서 발간되는 신문 <타임>(The Times)에 《시대를 위한 소책자》 90호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비난하는 편지를 보 냈고, 옥스퍼드 대학교 당국은 《시대를 위한 소책자》 90 호를 단죄하였다. 옥스퍼드 주교인 배것(R. Bagot, 1782~1854)은 뉴먼에게 더 이상 《시대를 위한 소책자》를 출판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이후 옥스퍼드 운동 회원 들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국가와 교회의 배신자로 여겨졌 고, 불이익을 당하였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월리엄즈 (I. Williams)는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위한 소책자》에 기고했다는 이유로 시학 교수 선임에서 탈락하였고, 퓨지는 옥스퍼드에서 설교하는 자 격을 정지당하였다.
[가톨릭으로의 개종] 뉴먼은 쉬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 리틀모어에 교회를 세우고 사목에 종사하였다. 1843년 9월 25일에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 성 마리아 교회 주임 신부직을 사임하고, 다음날 리틀모어 교회 창설 기념일 에 퓨지가 집전하는 성찬례에서 '친구들을 떠나면서' (On the Parting of Friends)라는 제목의 고별 강론을 하였다. 그는 키블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자신이 가톨릭 교회를 참된 유일한 교회로 받아들이게 된 영적 여행을 밝혔다. 1844년 말에 뉴먼은 《그리스도교 교리의 발전에 관한 논고》(An Essay on Development of Christian Doctrine)를 쓰기 시작하여 1845년 10월 6일에 끝내고, 3일 후 예수 고난 회 수사 신부인 바르베리(D. Barberi, 1792~1849)로부터 세 례를 받았다. 뉴먼의 개종은 옥스퍼드 운동의 가톨릭 성 향 회원들의 개종으로 이어졌다. 워드는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교의 이상》(The Ideal ofthe Christian Church, 1844) 때문에 학위를 박탈당하고, 뉴먼보다 한 달 먼저인 9월 5일에 가톨릭 교회로 개종한 후 가톨릭 교회 안에서 평 신도로 철학과 신학 교수로서 활동하였다. 오클리는 뉴 먼의 개종 20일 후인 10월 9일에 가톨릭 교회로 입교하 여 1847년에 가톨릭 사제로 서품을 받고 본당 사목에 헌신하였다. 옥스퍼드 운동은 지도자들의 개종으로 끝맺
음하였다.
한편 옥스퍼드 운동 의 지도자 키블과 퓨 지와 같은 옥스퍼드 운동 회원들은 영국 교회, 동방 교회, (로 마) 가톨릭 교회는 하 나이고 거룩하고 사도 로부터 이어 오는 가톨 릭 교회라는 뿌리에서 자란 세 나뭇가지라는 '그리스도교의 분지 설 (Branches Theory)을 내세워 영국 교회 안의 가톨릭 교회인(Anglo-
Catholic)으로 남았다. 키블은 영국 교회는 보편적(Catho- lic) 교회라는 나무의 참된 가지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모 든 그리스도교들처럼 영국 교회 안에도 불완전과 폐단은 있으며, 하나이고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가톨릭 교회의 과오는 인간의 한계에서 오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과오라는 상처는 공의회를 통해서 치유될 수 있 지만, 공의회가 없는 한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교회로 옮 겨 가지 말고 몸담고 있는 교회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고 권고하였다. 키블은 영국 교회와 교회인들을 사랑하 여 자신이 영국 교회를 떠난다면 영국 교회인들에 대한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퓨지는 영국 교 회가 여러 면에서 잘못된 점들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고 해서 가톨릭 교회가 유일한 참된 가지라는 것 과 영국 교회를 떠나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앵글로-가톨릭 교회인' 으로서 교회 일치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1865년에 《교회 평화 제의》(Eireni- con)를 출간하여 교회 재일치의 장애는 사소한 교리 문 제 때문이며, 동방 교회의 포시우스 사건(858~867) 이전 의 일치적 상호 친교로 돌아가기를 희망하였다. 이후 옥 스퍼드 운동에서 탄생한 앵글로-가톨릭 교회인들은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 교회 일치를 위해 다른 프로테스탄트, 동방 교회, 가톨릭 교회와의 일치에 노력하고 있다. (- 뉴먼, 존 헨리 ; 만닝, 헨리 에드워드 ; 앵글로 가톨리시 즘 ; 영국 ; 영국 성공회)
※ 참고문헌 J.H. Newman, Apologia pro Vita Sua, 4th ed., London · Glasgow, Collis, Fontana Books, 1972/ J. Keble, National Apostasy Considered in a Sermon Preached in St. Mary' Oxford before His Majesty' Judges Assize on Sunday, July 14th, 1833, London · Oxford, Mowbray & Co., 1932/ R.H. Froude, Remains ofthe Late Reverend Richard Hurrell Froude, M.A. 4 volumes, London, J.G. & F. Rivington, 1838~1839/ J.H. Thom (ed.), Tractsfor the Times by Members ofthe University of Oxford, 6 vols., London, J.G. & F. Rivington, 1834~1941/ D.C. Dessain (ed.), The Letters of Diaries of John Henry Newman, 21 vols., London, Thomas Nelson and Sons, Ltd., 1961~1977/ R.W. Church, The Oxford Movement Twelve Years 1833~1845, 3rd ed., London, Macmillan and Co., Ltd., 1892/ L. Crumb, The Oxford Movement and its Leaders, Metuchen, NJ, The Scarecrow Press, Inc., 1993/ 0. Chadwick, The Spirit of the Oxford Movement. Tractarian Essays, Cambridge, Cambridge Univ. Press, 1992/P. Brendon, Hurrell Froude and the Oxford Movement, London, Paul Eleck, 1974/ M. Trevor, Newman' Journey, London, Harper Collins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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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운동
運動
[영]Oxford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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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운동이 시작된 오리얼 대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