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레스, 요한 요셉(1776~1848)
Görres, Johann Joseph(v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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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괴레스, 요한 요셉.
평신도 신학자. 정치 평론가. 정치 철학자. 저술가. 19 세기 독일 가톨릭 부흥 운동의 정신적 지도자. 그의 파 란만장한 생애와 사상의 변모는 보통 3단계로 구분된다. 제1기(1776~1800) : 독일의 코블렌츠(Koblenz)에서 출 생한 괴레스는 그곳의 구 예수회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1786~1793) 계몽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어 그는 자 연 과학과 의학을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며 1792년부터는 프랑스 혁명 사상을 열광적으로 지지하면서 그의 초기 저술과 잡지 등을 통하여 가톨릭의 교회 제도를 맹렬히 공격하였다(Das Rothe Blatt ; Rübezahl ; Der allgemeine Friede, 1796~1798). 그러는 동안 그는 고향 도시로부터 파리로 파견되어 약 1년 반 동안 체류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혁명 사상에 완전히 실망하고 돌아와 그 결과를 책으로 펴냈다(Resultate meiner Sendung nach Paris, 1800). 그러나 혁명 사조에 대한 그의 실망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멸시 하는 그의 자유 사상은 지속되었다. 제2기(1880~1819) : 1801년 결혼한 괴레스는 라인 지 방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1814년까지 코블렌츠 의 중학교에서 자연 과학을 가르쳤다. 이 무렵 그의 세 계관이 서서히, 그러나 근본적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는 신앙과 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관하여 저 술하였다(Glauben und Wissen, 1805) . 이 책은 범신론의 입 장에서 저술되었으나 이미 종교 현상에 대한 호기심을 나타내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대학 강사로서 보낸 2년 간의 체류(1806~1808)는 그를 독일 민속 연구에 열중하 게 하였다(Teutsche Volksbücher, 1807). 또한 독일 역사에 관한 연구는 그를 서서히 그리스도교 전통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이 무렵 그의 세 자녀의 세례를 허락하였다. 그 러나 그 자신의 개종은 독일 독립 전쟁(1813~1815)에 대 한 그의 기대가 어긋난 후에야 이루어졌다(1820년경). 이러한 여러 분야에 걸친 그의 다양한 연구에도 불구하 고 그의 중심 사상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정치 사상 과정 은 중단되지 않았고 오히려 독일 독립 전쟁과 빈 회의 (1815)를 계기로 더욱 촉진되었다. 그는 1814 년 《Rheinische-Merkur) 란 정치 잡지를 창간하 였는데 이 잡지는 곧 독 일에서 가장 유명하고 많이 읽히는 정치 잡지 가 되었지만 정부의 탄 압으로 2년 만에 정간 되었다. 1817년 괴레스 는 다시 한번 프로이센 왕에게 입헌 국가를 요 구하는 탄원서를 냈고 (Adresse der Stadt Koblenz vom 18. Oktober 1817), 1819년에는 그의 정치 사상을 체 계화한 《독일과 혁명》(Teuschland und die Revolution)을 간 행하지만 이로 인해 프로이센 정부로부터 검거될 것을 우려하여 프랑스 영토인 스트라스부르크로 망명하였다. 제3기(1819~1848) : 괴레스는 스트라스부르크에 1819년부터 1827년까지 머물렀다. 그는 여기서 교회를 쇄신하려는 새로운 사상가들과 접촉하면서 교회와 국가 간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교회가 국가 생활에 더 영 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 다. 한편 《Katholike》에도 열심히 협조하면서 교회의 신앙 만이 시대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 닫고 또 그렇게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1827년 자일러 (Sailer)의 조언으로 바이에른의 왕, 루드비히 1세로부터 뭔헨 대학의 역사학 강좌를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는 즉시 뮌헨으로 갔고 여기서 그의 능력은 죽을 때까 지 최대한으로 발휘되어 독일 가톨릭계를 지배하게 되었 다. 그의 집에서는 서클(table rond)이 형성되었고 여기에 당시 유명한 독일 지성인(Döllinger, Brentano, Sailer)들을 위 시해서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이들을 중심 으로 하여 2개 잡지 두 권을 발간하였는데 《에오스》(Eos) 가 정간당하자(1818~183), 1838년부터 또 새 잡지 《Historisch-politischen Blättter》를 발간하였다. 이 서클의 활 동은 전체 독일 가톨릭 생활에 활기를 북돋아 주었고, 나아가서는 그 후 가톨릭 신도 대회, 가톨릭 정당(중앙 당) 같은 가톨릭 단체가 탄생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괴 레스는 특히 라인 지방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마침 혼종 혼(混宗婚) 문제로 괄른 대주교가 투옥되는 이른바 '쾰 른 사건' 이 터지자 괴레스는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 1837)란 격렬한 팩플릿을 통해 프로이센 정부에 항의하 도록 가톨릭을 분발시켰다. 또한 1845년에는 트리어에 서의 성의(聖衣) 전시에 즈음한 대규모의 가톨릭 신도들 의 모임을 해설하는 책자 《Die Wallfahrt nach Trier》를 펴냈다. 만년에 그는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 관해 대작을 내놓 았다(Christliche Mystik, 4 Bde, 1836~1842). 그의 지식과 사 상의 대전(大全)이라 할 수 있는 이 저서에서 그는 신학 과 근대 자연 과학과의 충돌을 영육(靈肉)의 조화를 통 해 극복하려 하였다. 괴레스가 학자로서 연구가로서 과 학적인 학문 방법론을 정착시키는 데 기여하였다고 주장 하려 한다면 그것은 잘못일 것이다. 사실 그의 사상은 명확하지 않고 방법도 객관성이 부족하고 때로 감정에 치우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가톨릭 신자들이 19 세기의 독일 교회를 위한 강력한 대변자이며 옹호자로 받들고 찬양하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의 영 향력은 그의 사후에도 강하게 작용하였다. 1928년 그의 고향인 코블렌츠의 라인 강변에 그의 기념비가건립되었 고, 그의 탄생 100주년에는(1876. 1. 25) 독일 가톨릭 학자 들의 결합과 연구 보조를 목적으로 하는 괴레스 학회 (Görres-Gesellschaft)가 창립되었는데, 이 학회는 그간 많 은 학문적 업적(괴레스 전집, Staatslexikon, Concilium Tridentinum 등)을 이루었다. . ※ 참고문헌 Gesammelte Schriften, ed., von Marie Görres, 9 Bde, Miinchen, 1854-74/ J.Galland, Johann von Görres, Freiburg, 1876-2/ J.N. Sepp, Görres und eine Zeitgenossen, Nordlingen, 1877/ F.Schnabel, Deutsche Geschichte in 19. Jahrhundert, Freiburg/ Br. Herder, 1949-2, Bd. 1-2/ A. Dru, The Church in the 19th Century : Germany 1800-~1918, London, 1963/ L. Just, 《ThK》4. 〔崔奭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