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에 순교한 조선 교회의 밀사. 세례명은 요한. 평안도 선천(宣川) 태생. 집이 가난하여 1794년부터 매 년 동지사(冬至使)의 마부로 북경을 왕래하며 장사를 하 였고, 1798년 사행(使行)시에 황심(黃沁, 토마스)을 알 게 되어 그와 교류하게 되었다. 그 후 옥천희는 의술이 조금 있어 평양에서 약방을 하며 생계를 꾸려 갔는데, 1799년 10월 황심의 권유로 다시 북경을 가게 되었다. 북경에 머무는 동안 그는 황심과 함께 3~4차 천주당으 로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를 방문하였고, 거기서 교리를 배운 다음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 다. 황심이 그를 구베아 주교에게 소개하고 세례를 받게 한 것은 앞으로 그를 조선 교회의 밀사로 보내기 위한 것 이었다. 과연 옥천희는 이듬해인 1800년에 서울로 올라 와 현계흠(玄啓欽)의 약국에서 황심과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을 만난 다음 강완숙(姜完淑, 골롬바)의 집에 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를 만나기도 하였다.
1800년 겨울 황심으로부터 주문모 신부의 편지를 전 해 받은 옥천희는 동지사 행차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 구 베아 주교에게 편지를 전하였다. 이때 그는 북경 성당에 서 있었던 미사를 보게 되는데, 미사의 장엄한 모습에 감 동하기도 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그에게 《교요서론》(敎 要序論)을 선물로 주었고, 또 은자 40냥과 주문모 신부 에게 보내는 답장도 주었다. 이듬해 은자와 답장을 가지 고 귀국한 옥천희는 곧바로 의주에서 천주교에 대한 박 해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겁이 난 옥천희는 가져온 편 지를 집에 숨겨 놓고 다시 사은사(謝恩使)를 따라 북경 에 들어가 구베아 주교에게 박해 소식을 전하였다. 그런 다음 1801년 6월 재차 귀국하다가 의주에서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옥천희는 포도청에서 형벌과 문초를 받았는데, 이때 황심과의 관계를 발설하고 말았다. 그 결과 황심이 체포 되고 황심의 실토로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이른바 1801 년의 겨울 박해인 동옥(冬獄)이 일어났다. 황사영은 <백 서〉(帛書)를 옥천희를 통해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려고 하였는데, 황사영의 체포로 그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갔 고, 옥천희는 형조를 거쳐 의금부에서 두 차례 심문을 받 은 뒤, 1801년 11월 5일(양 12월 10일) 황사영 · 현계흠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35세의 나이로 참수되었다. ※ 참고문헌 《邪學懲義》 〈邪學罪人嗣永等推案) 《闢衛編》 純祖
實錄》 <달레 교회사》. 〔河聲來〕
옥천희 (1767~1801)
玉千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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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