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교에서 인간의 수명 장수와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최 고의 신을 지칭. 옥황상제(이하 '옥황' )의 옥(玉)은 영원 히 불변하듯 장수와 순결 · 청정을 나타내며 동양에서는 신선(神仙)과 밀접한 관련을 가져, 옥황은 인간 세계를 지배하는 신선의 황제라는 의미를 지닌다. 다양한 신격 이 현세 관료 조직처럼 위계를 이루고 있는 도교에서 최 고의 신격은 시대에 따라, 교단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겪 어 왔다. 처음부터 옥황이 도교의 최고신은 아니었다. 고 구려에 처음 들어온 오두미교(五斗米敎)에서는 태상노 군(太上老君 老子)이 최고신이었고, 불교의 영향으로 도교가 체계화됨에 따라 원시천존(元始天尊)이 최고신 이 되었다. 태상노군은 그의 한 응현신(應現神) 정도로 격하되었다. 당(唐) 황실이 태상노군과의 관계를 부각시 키면서 도교가 국교가 되고 옥황의 관념도 구체화되어
갔으나 양(梁)의 도사 도흥경(陶弘景, 456~536)이 신의 계보를 정리한 《진령위업도》(真靈位業圖)에는 옥황의 서열이 고작 10위였다. 후에 도교를 숭상한 송(宋)의 진 종(眞宗, 998~1022)이 옥황을 호천상제(昊天上帝)로 지 칭한 이래 여러 신격 가운데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옥황이 최고신인 삼청존(三淸尊)를 제치고 최고신으 로 부상하였지만, 이는 민간 도교에서의 흐름일 뿐, 교단 도교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여전히 당 · 송의 교단 도교에서는 옥황을 삼청존의 신하로 설명 하였으나, 옥황이 민중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그의 활 동과 관계된 속성 때문이다. 옥황은 일 년 동안 인간 행 위의 선악을 살펴보고 연말에 총결산하여 그 다음해의 길흉화복을 결정하며, 인간계를 감찰하고 있는 조신(竈 神)을 비롯한 수많은 신들의 보고서가 모두 옥황에게 보 내지게 된다. 즉 옥황은 바로 인간계의 공과격(功過格) 을 판결하는 최고의 존재로서 인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신이다.
한편, 옥황상제는 중국의 전통적인 상제 관념을 민중 차원에서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래 은허 (殷墟)의 복사( 卜辭)에 나타난 상제는 자연 현상의 지배 와 함께 인간의 길흉화복, 생사, 전쟁의 성패를 지배하는 주재자였다. 이러한 상제가 주(周)에서는 군권신수 사상 (君權神授思想)을 바탕으로 황천상제, 호천상제, 상천상 제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또한 서주(西周) 이후 상제 관념은 점차 합리화되고 내재화되었으며, 종법(宗法) 제 도의 확립으로 말미암아 천자(天子)만이 천제(天祭)를 통해 상제와 교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도교에서는 민중의 요구에 따라 천과의 새로운 교감 통로를 제공하 려 하였고, 이러한 계기로 옥황상제의 신격이 부상하였 다.
옥황은 선계의 최상층에 속하는 백옥경(白玉境)과 광 한전(廣寒殿) 등 천상선계에 거주한다. 그곳은 천상 은 하수 저편, 운하(雲霞) 자옥한 한가운데, 붉은 구름이 활 짝 열린 곳, 대라천(大羅天)에 위치하고 있다. 거주하는 도시는 금궐옥루이며, 진주와 산호로 장식되어 있고 칠 보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옥황의 상(像)을 보면, 대개 가 구장법복을 입고 머리에는 12줄의 면류관을 쓰고 손 에는 옥홀(玉笏) 든 진 · 한 시대의 황제 모습으로 그려 져 있다. 그는 옥청단(天壇) 옥좌에 앉아 군선(群仙)의 조회를 받고, 밤새 제천(諸天)에서 올라온 직무를 수행 한다. 또한 광한전도 화려하다. 그곳은 옥으로 대들보를 만들었고 은촉과 금병으로 둘러쌓여 있다. 이처럼 옥황 이 거주하는 하늘은 인간의 상상력이 동원할 수 있는 가 장 아름다운 곳으로 묘사되고 있다.
한국에 옥황의 수용 과정을 보면, 《삼국사기》 고구려 영류왕 7년 당고조(唐高祖)가 고구려에 도사와 함께 천 존상을 보내 주었다고 하나 이때 천존상이 옥황상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 길은 없다. 다만 《해동이적》(海東 異蹟)에 도당 유학생인 김가기(金可紀)의 유사(遺事)에 의하면 "그가 등선(登仙)에 관한 옥황상제의 칙서를 받 았다" 라는 기록이 보인다. 그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민중들에게는 최고의 인기 있는 신으로 수용되었 다. 특히 조선 시대에는 옥황의 힘을 내세워 선행을 권장 하는 선서(善書)가 널리 유포되어 민중 도덕 내지 민중 윤리의 실천을 고취하였다. 최근 옥황상제는 민간 신앙 과 신종교에서 천계 또는 신선계의 황제로서 신앙 대상 으로 자주 등장한다. 이는 도교 신앙이 한국의 민간 신앙 과 습합된 결과로써 민중 신앙과 민중 종교에 뿌리를 내 린 결과라고 평가된다.
무신도(巫神圖)에 나타난 옥황은 하늘나라에서 용상 에 앉아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는 모습이다. 그는 하늘나 라를 다스리며 인간의 수명 장수, 길흉화복, 그리고 기우 를 담당한다. 그럼에도 한국의 마을 제당에는 거의 등장 하지 않으나, 각종 무굿의 축원경이나 축사경에 다른 천 존 대상과 더불어 등장한다. 그리고 안택굿의 천존위목 (天尊位目)이나 천존기에 옥황이 포함되고 있다. 특히 농촌에서는 대동굿과 만구대댁굿을 행할 때 이 옥황을 각별히 모신다.
민속에서도 옥황과 관련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수경 신(守庚申)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체내에 형체 없 는 삼시충(三尸蟲)이 있어 체내에서 그 삶의 행위를 보 고 있다가 경신일 밤에 그 사람이 잠이 들면 빠져나가 천 계에 올라가서 그 사람이 저지른 악행을 옥황에게 남김 없이 고해 바치고, 그 악행의 정도에 따라 옥황은 그 사 람의 수명을 120세에서 단축시킨다. 이를 방해하기 위 해 경신일에 잠을 자지 않는 습속이 생겼다. 이러한 수경 신은 고려 초부터 이미 국속(國俗)이라고 불릴 정도로 크게 보급되었다. 조선 시대에도 궁중에서 수경신의 행 사가 지켜져 내려오다가 영조 대에 와서 비로소 폐지되 었다.
신종교에서는 증산교(甑山敎)의 강일순(姜一淳, 甑山, 1871~1909)이 옥황으로서 구천에 있다가 하강하였다 한 다. 태극교(太極道)나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는 강일 순을 구천상제, 조철제(趙哲濟, 鼎山, 1895~1958)를 옥황 상제로 받들고 있다. 특히, 구천상제에게 법배(法拜)를 올린 다음 옥황상제에게도 법배를 올린다. 갱정유교(更 定儒道)의 입문 의례 때 옥황상제께 일심 불변하겠다는 서약한다. 그 외에 천도교(天道敎)와 일관도(一貫道)에 서도 명칭은 약간 차이가 있지만 유사한 상제 신앙이 보 인다.
이같이 옥상상제의 관념이 한국인에게 확산된 데에는 몇 가지 문화적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한국 인의 고유한 하늘 신앙과의 유사성이 있다는 점이다. 단 군 신화에 의하면 환인(桓因)은 그의 서자 환웅(桓雄)을 시켜 태백산 신단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건설하였다 고 한다. 이른바 천왕으로 강림한 것이다. 이러한 단군 신화 이외에 우리 고대 여러 건국 설화에 시조가 천제 (天帝)와 혈연을 가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사례 들은 하늘나라 황제인 옥황상제의 존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이 되었다. 둘째, 한국인의 종교 생 활은 현실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신 선 세계를 다스리는 신이 옥황상제이고, 그는 인간에 가
장 필수적인 현세의 수명 장수와 길흉화복을 점지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 도관인 복원궁(福源宮)이나 조선의 소격서(昭格署)의 초제(醮祭)에서도 도교 36천 (天)에 거주하는 원시천존을 비롯한 모든 신들을 차례로 청하여 모시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소재기복(消災祈福) 의 주 신앙 대상이 옥황상제였다는 점이다. 셋째, 옥황상 제는 민중 도덕을 지켜 주는 감시자의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조선 태종 17년(1471)에 유 · 불 · 도 삼교 사상 을 융합한 선행을 권장하는 선서들이 중국으로부터 많이 유입되었는데, 이러한 선서가 선초부터 한말까지 널리 읽혀졌다. 《옥황보훈》(玉皇寶訓) · 《주생연사응진경》(注 生延嗣應眞經) · 《경신록》(敬信錄) 등의 선서에는 옥황 상제를 정상에 둔 사과신(司過神)적 응보설로 꾸며져 민 중 도덕을 유지시키는 증인이 되었다. 넷째, 왕이나 왕조 가 천과 직접 교통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조선 초 신진사림(新進士林)의 소격서 혁파 주장에 대해 왕들은 과거 선례를 들어 거부하였다. 명종대 특진관(特 進官) 최연(崔演)이 아뢰기를 "소격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명분으로 설치되었습니다. 위의 단(壇)은 옥황 상제, 가운데 단은 노자, 아래 단은 염라왕입니다. 이는 당연히 제사지낼 신들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그 논리 는 도교가 노자를 승봉하는 이상 좌도(左道)이므로 소격 서를 없애야 하고 또 천제는 천자만이 제사할 수 있으므 로 일개 제후인 조선의 왕에게는 예에 어긋나는 일이라 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소격서의 완전 폐지는 임진왜란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고려 시대 이후로 옥황 상제를 중심으로 한 제초(齊醮)가 왕조의 정통성과 자주 성을 확보하는 데 일정한 기능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참고문헌 陳起煥, 《중국의 토속신과 그 신화》, 지영사, 1996/ 酒井忠夫 外, 최준식 역, 《도교란 무엇인가》, 민족사, 1991/ 葛兆光, 沈揆昊 역, 《도교와 중국 문화》, 동문선, 1993/ 李康五, <한국 신종교 에서 보이는 도교와 불로장생>, 《도교와 한국 사상》, 범 양사, 1987/ 金泰坤, <민간 신앙의 도교적 경향>, 《한국 사상사 대계》, 정신문화 연구원, 1991/ 車柱環, 《한국 도교 사상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3. [尹承容]
옥황상제
玉皇上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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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