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 쉴피스회(Congregatio Sulpitiensis)의 설립자.
[생애와 활동] 1608년 9월 20일 파리에서 태어난 그 는 부친이 지방 총감으로 재직하고 있던 리용에서 성장 하였다. 그는 이곳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그리스어와 고전 라틴어를 배웠다. 그리고 하쿠르(Harcout) 대학에 서 철학을, 소르본 대학에서 스콜라 신학과 교부학을 공 부하였다. 이후 로마로 가서 히브리어를 배웠다. 그러던 중 실명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로레토(Loreto)로 성지 순례를 갔는데, 그곳에서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하느님 체험을 하였다. 그 후 공부와 명상을 지속했다. 정부 관 리인 아버지가 1631년에 사망하자 다시 파리로 돌아온 그는, 공직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한 채 유산으로 물려받 은 집에 빈민과 부랑자들을 모아 교리 교육을 시켰다. 그
리고 빈천시오 아 바오로(Vincentius a Paulo, 1581~1660) 의 지도를 받고 1633년 5월 21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그는 농촌 지역에서 사목하였는데, 신경성 불안 증 세, 즉 "정신의 모호함" , "영혼의 혼란스러움" 및 "악마 에 둘러싸인 듯한 느낌"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심리 적 · 정신적인 불안정 증세가 나타나 상당히 힘든 시련을 겪었다. 이 시련은 1641년 초 샤르트르의 노트르담 주 교좌 성당에서 기적적으로 치유되어 정상적인 심리적 · 정신적 상태를 회복하였다.
그는 빈천시오 아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 외에도 콩드 렝(Charles de Condren, 1588~1641)과도 교분을 맺었다. 당 시 콩드렝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정신에 충실한 신학교를 세우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의 반대에 부딪 혀 어려움을 겪었으며, 1641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결 실을 맺지 못하였다. 뒤를 이어 올리에는 신학교를 세우 려 했으나 실패하고, 1641년에 드 푸아(De Foix)와 뒤 페리에(DuFerier) 등과 함께 파리 근교의 보지라르(Vau- girard)에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당시 보지라르의 본당 신 부는 올리에와 그 동료들의 개혁 운동에 감동을 받아 올 리에에게 거의 헐값으로 이곳을 넘겨주었다. 목적은 단 순히 성직 지망자들을 교육하는 작은 공동체를 설립하는 것이었는데, 좋은 반응을 얻어 이듬해 4월부터 정식으로 신학생들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함께 기도하고 노 동하고 연구하며 생활하였다.
올리에는 그 해 여름 파리의 포부르 생 제르맹(Faubou- rg St. Germain)에 있는 생 쉴피스 성당의 주임 신부로 임 명되었다. 이 지역은 당시 대도시에 버금가는 커다란 지 역이었다. 이 지역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크고 가장 타락 한 곳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래서 개혁의 여지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던 곳이었다. 생 쉴피스 성당의 주임 신부가 된 올리에를 따라서 12명의 신학생들과 4명의 신부들이 함께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생 쉴피스의 사제회' 라 칭하였다. 1642년 올리에는 성 당 내에 신학교를 설립하여 성직자 양성을 시작하였다. 이 신학교는 소르본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은 신학 강좌는 물론 전례에 관한 강의조차도 개설되지 않았다. 대신 신학생들로 하여금 수시로 영성 모임을 개최하면서 사제 서품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이는 성직자가 신학적 지식을 갖추는 것보다 성직자의 기능에 대한 종교적 중 요성을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그를 통해 성직자의 개혁이 가능할 것이라는 올리에의 믿음에 기초한 것이었 다. 또한 올리에는 지칠 줄 모르는 풍부한 창의력을 갖고 본당 사목 활동에 전념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1627년 에 설립된 "성체회"를 더욱 근본적으로 또한 더 강하게 개혁하려고 평신도들을 독려하였다.
올리에가 설립한 공동체는 점차 확대되어 신학교로 사 용할 두 개의 건물을 더 매입할 정도로 회원수가 늘어났 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다른 지역에도 신학교를 설립 하기 시작하였다. 그 첫 번째가 1648년 낭트에 세워졌 다. 당초에는 신학교 설립에 자문 역할을 하는 것이었으 나, 교구의 요청에 따라 신학교를 직접 운영하게 되었다.
또한 올리에는 13개의 교리 교육 기관을 설치하여 청 소년뿐 아니라 성인들도 교육하였다. 특히 거지, 빈민, 시종, 산파, 노동자, 노인 등을 위한 별도의 교리반을 편 성하여 운영하였다. 또한 칼뱅주의자였다가 개종한 이들 을 위한 특별반도 운영하였다. 그는 부도덕하고 이단적 인 서적과 그림에 대한 강력한 비판 운동과 더불어 성화 와 기도서 보급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성당에 책방을 설 치하여 양서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빈천시오 아 바오로 의 정신에 입각하여 빈민 구호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당 시 파리를 거의 초토화시킨 전쟁 이후에 발생한 난민 구 호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올리에의 이런 난민 구호는 다 른 지역에서도 본받기 시작하였다.
올리에는 1652년 2월 뇌졸증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곧 건강을 회복하고 얀센주의자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 다. 이후 그는 주임 신부을 사임하고 저술 활동에 전념하 였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그리스도인의 일상》(1655) 《내적 삶을 위한 그리스도교 종교 교육》(1656), 《장엄 미 사 전례 해설》(1656) , 《그리스도인의 삶과 덕성 입문》(16 57) 등이 있다. 이러한 저서들은 그가 사망한 이후에도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특히 그의 놀라울 정 도로 뛰어난 문체와 풍부한 영성 체험으로 유명하였다.
이러한 저서들을 살펴보면, 올리에는 그리스도 육화의 신비와 관련된 베륄(Pierre de Bérulle)의 견해들을 수용하 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올리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하여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찬양을 드릴 수 있다고 생각 하였다. 또한 그는 예수가 육화, 즉 인성을 통하여 하느 님의 완벽한 흠숭자 및 "하느님의 수도자"가 될 수 있었
다고 파악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성체성사의 중요 성을 강조하였다. 즉 교회 내에서 행해지는 성체성사는 그리스도 육화의 신비를 체험하는 것으로 그 성사를 통 해 그리스도에 대한 찬미가 증폭될 수 있으며, 나아가 성 체성사는 구세주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 성체성사를 토대로 한편으로는 기도와 성령 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하느님 안에서 살게 되며" ,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세속적인 이해와 집착으로부터 멀어짐 으로써 자신은 물론 세속적인 유혹을 극복할 수 있게 된 다는 것이다. 그의 여러 저서들에서 나타나는 정신은 거 의 수도자에 가까운 엄격함을 보여 주고 있을 뿐만 아니 라 그 엄격함을 기초로 사도로서의 사명에 전념하였음을 알게 한다. 그의 이러한 태도들은 지난 몇 세기 동안 프 랑스 신학교들에서 성직자를 양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력 을 발휘하였다.
그는 1653년 9월에 다시 발병하여 거동이 어렵게 되 었다. 이후 심신의 고통으로 매우 고생스러운 시간을 보 낸 그는, 1657년 4월 2일 파리 근교의 이시(Issy)에서 사망하였다. 뒷날 이곳으로 파리의 쉴피스회 신학교가 이전하였고, 청원자들의 수련소도 이곳에 마련되었다.
[업적과 의의] 1618년 뵈멘(Boehmen) 전쟁으로 시작 되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마감된 가톨릭과 프 로테스탄트 간의 '30년 전쟁' 은 유럽 전역을 폐허로 만 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톨릭을 중심으로 한 올리에 의 그리스도교 정신에 입각한 빈민 구호 활동은 평민들 의 커다란 반향을 얻었다.
올리에의 활동과 명성은 오스트리아에까지 알려졌다. 전성기에는 80여 명의 신부들이 이 공동체에서 활동하 였다. 그중에 유명한 인물로는 후에 캄브라이(Cambrai) 의 대주교가 된 페넬롱(F. de S. de la Mothe Fénelon, 1651~ 1715)이 있다. 올리에는 철저히 교육받고 계몽적이며 의 지에 넘치는 사제의 양성과 파견에 전력을 기울였기 때 문에, 그가 관할한 지역이 처음에는 프랑스에서 가장 타 락한 지역이었으나 가장 신앙심이 깊은 곳으로 변모되었 다. 올리에는 늘 선교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선교 지역을 유럽만이 아닌 전세계로 넓혀 나갔다.
올리에가 쉴피스회의 신학교를 설립한 것은 그의 커다 란 업적 중 하나이다. 올리에는 세속과 함께하는 사제상 을 구현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왜냐하면 올리에 는 이를 통해서만 평민들에게 실망을 안겨 준 그리스도 교가 다시 부흥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초기에 는 교구의 보조를 철저히 거부하는 올리에의 정책 때문 에 신학교는 재정적 어려움이 컸다.
말년에 그의 신비주의적 영성 사상은 얀센주의자들과 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얀센주의자들조차도 올 리에의 경건주의에는 경의를 표하였다. 그리고 그의 구 호 활동은 종파를 초월하여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쉴피스회)
※ 참고문헌 C.J. Noonan, 《NCE》 10, p. 680/ E. Levesque, 《DTC》 11- 1, pp. 963~982/ L.J. Rogier . R. Aubert . M.D. Knowles dir., Nowelle Histoire de L'Église. vol. 3, Réforme et Contre-Refome, Seuil, 1968/ I. Noye, 《Cath》 10, pp. 60~62/ I. Noye · M. Dupuy, 《DSp》 11,pp. 737~751/
L. Bertrand, Bibliothéque sulpicieme, vol. 1, 1990, pp. 1~40 ; vol. 3, pp. 419~507/ T.K. Johnson, J.J. Olier spiritual Director, Bulletin de Saint- Sulpice, n. 6, 1980, pp. 287~310. [邊琪燦]
올리에, 장 자크 Olier, Jean Jaoques(1608~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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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올리에와 그의 생애에서 주요 사건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