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세르바토레 로마노>

[이l]L'Oservatore Rom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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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에서 발행되는 신문. '로마의 관찰자' 라는 의미 의 이름을 지닌 이 신문은 1861년 7월 1일에 창간되었 다. 1870년 이탈리아 군대가 로마를 점령한 뒤 며칠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계속 발행되고 있다.
[창 간] 이 신문의 전신인 <일 코스티투치오날레 로마 노>(II Costituzionale Romano)지(誌)는 교황령(敎皇領) 안 에 사는 가톨릭 신자들의 소망에 따라 1848년에 3주마 다 발행되는 가톨릭 출판물로 창간되어 교회의 공식 승 인을 받았지만, 사적으로 간행되었다. 이 간행물은 1849년에 폐간되었다가 몇 달 후에 <옷세르바토레 로마 노〉라는 이름으로 다시 발행되었으나, 1852년에 정간 (停刊)되었다.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그 후 10년 동안 정치와 종교에 관한 일간지 발행 계획을 추진하여, 1861년에 <옷세르바토레 로마노>지를 재창간하였다. 교 황은 이 계획을 내무 차관인 파첼리(M. Pacell)에게 맡겼 었다.
당시는 이른바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여파로 교황의 세속 권력은 영토 문제 등에서 급격히 위축되었고, 유럽 의 제국들은 교황령을 지켜 줄 힘이 없는 것 같았다. 하 지만 많은 가톨릭 지성인들이 로마로 찾아와 교황 비오 9세에게 봉사하며 교황령을 회복하고 또 수호하고자 하 였다. 이러한 움직임의 하나가 적극적으로 호교론을 펴 는 신문의 발행이었다. 당시 저명한 논객이었던 찬키니 (Nicola Zanchini)와 망명 중이던 언론인 바스티아(Giuse- ppe Bastia)가 파첼리의 신문 발행 계획을 진척시켰으며, 교황 비오 9세는 <옷세르바토레 로마노〉지의 규정을 승 인하였다.
[목 적] 교황이 승인한 규정에 따르면, 처음의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로마와 교황에 대한 온갖 중상을 밝히고 공박한다. 둘째, 로마와 여타 지역에서 일어나는 매일의 주요 사건들을 보도한다. 셋째, 가톨릭 신앙의 확 고한 원칙, 정의와 법의 원칙을 모든 사회 생활의 건실한 토대로 제시한다. 넷째, 국가에 대한 의무를 교육한다. 다섯째, 교황에 대한 존경을 고취하고 증진한다. 여섯째, 대중이 관심을 갖는 예술 · 문학 · 학문의 발전을 도모하 고, 특히 교황령에서 이루어지는 과학 발명과 그 활용을 설명한다.
<옷세르바토레 로마노>지의 최종 목적은 교황과 교회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고 진리에 봉사하며 교황청의 여러 부서와 협력하여 공식 문서나 기록들을 펴내는 것이다. 일간지는 교황의 모든 담화를 교황이 말한 언어로 수록 하고, 주간판은 해당 언어로 번역하여 싣는다. 그러나
<옷세르바토레 로마노>지는 현재 교황청의 공식 기관지 가 아니다. 공식 기관지는 국무원에서 발행하는 《사도좌 관보》(AAS, Acta Apostolicae Sedis)이다.
[역사적 변천] 처음 10년 동안 <<옷세르바토레 로마노> 지는 이른바 '로마 문제' 를 비롯한 국제 정치에 많은 지 면을 할애하였으나, 정치적인 문제만을 다루기보다는 공 공 법령 등의 정의나 불의, 가톨릭 신앙과 사회 도덕에 미치는 영향 등에도 역점을 두었다. 또한 종교적인 주제 와 경제 · 사회 문제들이 일면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신문은 대다수 가톨릭 신자들은 물 론 바로 교황령의 견해와 소망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거 울로 자처하게 되었다.
교황령의 '반공식' (semi-official) 기관지였던 이 신문은 이탈리아 군대의 포르타 피아 점령(1870. 9. 20)과 더불어 신생 이탈리아 왕국 안에서 야당지가 되었다. 한 달 가까 이 휴간을 하다 그 해 10월 17일에 복간된 <옷세르바토 레 로마노>지는 1면에서 교황에 대한 순명을 선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가 가르치는 불변의 신앙과 도덕 원리에 대한 충성을 재천명하였다. 그 당시의 분위 기 속에서 이 신문은 여러 차례 압류를 당하였으나, 편집 자들의 끈질긴 신앙 투쟁을 막을 수 없었다. 뉴스 보도에 서 차츰 교황령의 기관지인 <조르날레 디 로마>(Giornale di Roma)를 대신하게 된 이 신문을 교황 레오 13세(1878~ 1903)는 1885년에 사도좌의 공식 기관지로 삼았었다.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전파 하여 왔던 이 신문은 또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움 없이 여러 나라와 민족들의 역사를 기록하여 왔다.
이 신문은 1890년까지 개인 소유였으나, 그 뒤 교황 청의 소유가 되었다. 그리고 로마 시내에서 인쇄되던 이 신문은 1929년 2월 11일 라테란 조약 체결 이후 교황청 에 세워진 인쇄소에서 발행하게 되었으며, 교황 비오 11 세(1922~1939)는 관리 책임을 살레시오회 신부들에게 맡 겼다. 1990년 11월부터는 주간판의 사진 편집 등을 전 산화하였고, 1995년에는 자료실을 전산화하였다.
[성격과 의의] 140년의 역사를 지닌 이 신문은, 현재 이탈리아어로 발행되는 일간지 외에도 일곱 개 언어의
주간판이 있다. 곧 프랑스어(1949, 주간) · 이탈리아어 (1950, 주간) · 영어(1968, 주간) · 에스파냐어(1969, 주 간) · 포르투갈어(1970, 주간) · 독일어(1971, 주간) · 폴란 드어(1980, 월간)로 발행되고 있다. 언어별로 발행되는 주간판은 각기 편집인이 있고, 일간지를 비롯한 전체 편 집인 겸 발행인이 별도로 있다. 이 전체를 주관하는 편집 인은 창간 이후 줄곧 평신도가 맡아 왔다. 현재 제9대 편 집인은 마리오 아네스(Mario Agnes) 교수이다. 특히 이탈 리아어 일간지는 종교 · 정치 · 사회 · 문화의 핵심 주제 에 관한 주일 부록을 펴내며, 그 해의 교회 생활과 이탈 리아 안팍의 주요 사건들에 관한 연말 부록을 천연색으 로 펴내고, 필요할 때에는 여러 가지 잡지도 발행하고 있 다.
신문의 표제 밑에는 교황기가 그려져 있다. 교황기의 교황관은 가르치고, 다스리고, 거룩하게 하는 교황의 삼 중 직무를 상징하며, 금은 두 열쇠는 주님께서 베드로 사 도에게 주신 하늘 나라의 열쇠를 나타낸다. 교황기 왼쪽 에는 '우니퀴궤 수움' (Unicuique suum)이라는 말이 쓰여 있는데, "누구에게나 각기 그 몫을" 주라는 뜻의 이 말은 정의(正義)에 대한 로마인들의 고전적인 표현이다. 또 오른쪽에는 논 프래발레분트' (Non praevalebunt)라고 쓰 여 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반석(베드로) 위에 당 신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면서 죽음의 힘도 교회를 "이기 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신 약속이다. 이 라틴어 글귀들 은 모든 언어판에 그대로 쓰여 있다.
<옷세르바토레 로마노>지 창간 100주년을 맞아 교황 요한 23세(1958~1963)는 이렇게 말하였다. "지난 100년 동안 이 신문은 역사의 증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창조자였다. 이 신문은 진리를 천명하고 정의를 수호하 며 진정한 자유를 증진하고 인간 존엄을 옹호하여 왔다. 평화로운 시대나 폭풍의 계절이나 언제나 똑같이 일관성 을 갖고 공명정대하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류를 존중 하여 왔다." 또한 창간 140주년을 맞아 교황 요한 바오 로 2세는 다음과 같이 축하하였다. "날마다 진리에 봉사 하며 베드로 후계자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편집자들 에게 감사한다. 모든 시민 생활의 토대가 되는 인간의 근 본 가치와 그리스도교 가치들을 용기 있게 수호하며, 세 상의 열망에 한층 더 부응하는 교회의 모습을 모든 사람 에게 보여 주기 바란다" (2001년 7월 1일, 삼종 기도 연설). (⇦<로쎄르바토레 로마노> ; → 바티칸 시국)
※ 참고문헌  Vatican Information Service(V Jul. 26, 1996, Curia Profile/ L'Osservatore Romano, Jul. 2, 2001, Angelus/ 2001 Annuario Pontificio, Città del Vaticano, 2001. [姜大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