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소속 본당. 황해도 옹진군 옹진읍 온천리 (溫泉里)에 소재하고 있다. 1939년 5월 해주 본당에서 분리 · 설립되었다가 1950년 6월 폐쇄된 침묵의 본당. [역대 신부] 초대 김피득(金彼得) 베드로(1939. 5~1942. 5), 2대 방영석(方永錫) 요셉(1945~1947), 3대 부스(W. Booth, 夫) 굴리엘모 · 치섬(D. Chisholm) 도날도(1947. 5~1948. 9), 4대 유봉구(柳鳳九) 아우구스티노(1948.
9~1950.5), 5대 이계광(李啓光) 요한(1950. 5~6) .
[설립과 폐쇄] 1889년 10월 신천(信川)의 청계동(淸 溪洞) 본당의 빌렘(J. Wilhelm, 洪錫九, 요셉) 신부가 옹 진 본영(本營, 현재 북면 화산리)에 첫 공소를 열었으며, 청계동 본당, 장연(長淵) 본당의 관할로 있다가 해주(海 州) 본당 관할이 되었다. 1939년 5월 해주 본당으로부 터 분리되어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김피 득 신부가 부임하여 1941년 옹진읍의 중심지인 온천리 에 성당과 사제관을 짓고 본당을 이전하였다. 김 신부가 강원도 이천(伊川) 본당으로 전임된 후 옹진 본당은 신 부의 공석으로 다시 해주 본당 관할이 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고 남북이 분단된 직후 옹진 본당은 38선 이남에 속하게 되었다. 교구의 경리를 담당하던 방 영석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으나, 1947년 지병 인 폐결핵의 악화로 서울 성모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그 해 5월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부스 신부와 치섬 신부가 본당 신부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부스 신부가 경기도 평 택 본당으로, 치섬 신부가 서울 주교관으로 전임됨에 따 라 1948년 9월 4대 주임으로 유봉구 신부가 부임하였 다. 당시 옹진읍은 국민과 인민군의 충돌이 빈번하여 유 신부와 신자들은 50~60리 밖으로 소개되어야 했는데, 유 신부는 옹진 경찰서로 가서 월남하다 잡힌 천주교 신 자들에게 신원 보증을 해주어 석방시키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5대 주임 이계광 신부는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 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피난 길에 올라 40리 떨어진 사곶리(沙串里) 공소로 가서 그곳 도선장(渡船場)을 떠 나는 후퇴 경찰관들이 탄 목선에 몇몇 신자들과 함께 편 승하여 무사히 인천에 도착하였다. 그 후 이계광 신부는 UN군의 진격과 함께 옹진 본당에 복귀하기 위해 사리원 까지 와서 사태를 관망하던 중 1 · 4 후퇴 시기에 옹진에 는 가 보지도 못하고 남하하였다. 1953년 7월 한국 전 쟁이 휴전되고 옹진읍은 이북에 속하게 되었고, 옹진 본 당도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 참고문헌 黃海道天主教會史刊行事業會, 韓國敎會史研究所 編, 《黃海道天主教會史》, 1984. 〔金志煥〕
옹진 본당
甕津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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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