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주교. 제2대 광주교구장. 제4대 요코하마(橫 濱) 교구장. 세례명은 토마스. 1881년 10월 26일 나가 사키(長崎) 현의 히사카 섬(久賀島)에서 태어났다. 1909년 7월 나가사키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오랫동안 나가사키 현과 구마모토(熊本) 현에서 사목 활동을 하던 중 1942년 11월에 한국의 광주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 다.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당시 한국 교회에서 사목 중이던 서양 성직자들을 국외로 추 방하거나 감금하였다. 즉 미국인 · 영국인 등 교전 국가 의 성직자들은 적성국인(敵性國人)으로 몰아 추방하였 고, 독일의 점령하에 있던 프랑스 성직자들과 중립 국가 인 아일랜드의 골롬반회 성직자들은 준(準)적국인으로 단정하고 일정한 지역에 . 연금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초대 광주 지목구장이던 골롬반회의 맥폴린(O. McPolin) 몬시놀은 전쟁의 발발과 함께 나주(羅州)에 연 금되었고, 이어 광주로 이송됨으로써 교구장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한국 교회를 일본인에게 맡 기려는 일제의 사임 압력이 계속되자, 맥폴린 몬시놀은 결국 1942년에 동경(東京) 주재 주일 교황 사절에게 교
구장직에 대한 사의를 표명하였다.
맥폴린에 이어 제2 대 광주교구장으로 임 명된 와키다 신부는 1942년 12월에 입국 하여 서울에서 노기남 (盧基南, 바오로) 주 교를 만났다. 그런 다 음 교구청이 있던 목 포로 내려가 활동을 시작하였고, 이듬해 2 월 7일 목포에서 지목 구장에 취임하였다.
이어 1943년 말경에는 교구청을 광주로 이전한 뒤 광주 를 중심으로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그는 일제 말 기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교회와 성직자, 그리고 신자들 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종전(終戰) 직후에는 일제의 잘못을 한국 국민에게 사과하는 편지를 노기남 주교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와키다 교구장은 1945년 8월 광복과 함께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10~11월경 노기남 주교의 도움으로 귀국 길 에 올랐다. 그 뒤 1947년 3월 요코하마 교구장으로 임 명되어 5월 27일에 주교로 착좌되었고, 교구장으로 재 임하는 동안 요코하마 교구의 부흥과 정비를 위해 노력 하였다. 1951년 7월 5일 교구장직을 사임한 그는 만년 에 나스(那須)에서 생활하다가 1965년 3월 16일 그곳 에서 선종하였다. 저서로는 《불교 개론》(佛教概論)과 《주일 · 축일 설교집》(主日 · 祝日說敎集) 등이 있다.
(→광주대교구 ; 맥폴린, 오언)
※ 참고문헌 유홍렬,《한국 천주교회사》, 가톨릭출판사, 1962/ 노 기남, <나의 回想錄>, 가톨릭출판사, 1969/ 천주교 광주대주교구 편, 《광주교구 50년사》, 1990/ 力 卜 リ ソ 7 中央協議會, 《ヵイぺデイ了'92》, 1992.
〔李元淳〕
와키다 아사고로 (1881~1965)
脇田淺五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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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