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의 지배권은 신으로부터 받는 것이므로 신성 불가 침이며 백성들은 국왕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 다는 정치 사상. 17세기에 등장한 절대주의를 반대하는 주장에 대항하여 영국 · 프랑스 등 유럽 대륙에서 광범위 하게 전개된 절대주의 군주를 옹호하기 위한 정치 이론 이다. 이 주장은 절대주의 국가에서 백성들의 저항이 높 아진 상황에서 절대주의를 보강하는 이념적 무기로 사용 되었다. '신수권설' . '제왕(帝王) 신권설' 이라고도 하 며, 이것이 역사상 특별히 중요성을 지니고 등장한 것은 15~18세기에 서유럽에서 절대주의 국가들이 출현했을 때부터이다.
이 이론은 다음과 같은 네 개의 원칙을 갖고 있다. 첫 째, 군주제는 신의(神意)에 의해 제정되었다는 것, 둘째 왕위 계승권은 철폐되지 않는다는 것, 셋째 왕은 신에 대 해서만 책임을 지며 백성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 다는 것, 넷째 신의 뜻에 따라 백성의 왕에 대한 저항은 금지되어 있으며, 왕이 비록 폭군이라 해도 수동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신수설을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군주가 자신의 권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신의 권위를 빌리는 모든 사상을 의 미한다. 따라서 왕을 신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신의 대리 자로 하든지, 또는 신으로부터 지배권을 수여받았다는 사상이 신수설이며, 왕권 신수설은 그중 마지막의 것이 다. 이러한 사상은 선사 시대부터 시작된 신정설(神政 說, Sacred Kingship)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통치자를 초 자연계의 신성하고 거룩한 존재의 화신 또는 대리인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의 《신국론》(De ciavitate Dei, 413~426) 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천황(天皇)을 신격 화하는 전제정치적 이념 등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
[형성 과정] 여기에서의 왕권 신수설은 유럽 근대 초 기에 나타난 정치 이론으로써 군주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서 그리스도교적 개념으로 형성된 것이다.
유럽의 중세 시기에 군주권은 어떠한 군주권이라 해도 신의 뜻에 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중세의 군주는 왕으 로서의 성격과 봉건 귀족의 토지 소유자적(土地所有者 的) 성격을 같이 지니고 있었다. 절대 군주제는 프랑스
의 군주처럼 중세의 군주가 점차 그의 동료인 봉건 귀족 을 지배하게 되거나 또는 프로이센의 경우처럼 한 명의 중세 귀족이 다른 봉건 귀족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민족 을 지역적으로 통일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위를 무력하게 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의 모든 성직자와 귀족과 같은 봉건적 세력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절대 군주제적 군주의 절대적인 권력은 힘을 기 초로 하는 데 지나지 않았고, 정당성을 근거로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민족 개념도 형성 과 정에 있어서 고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또한 민족 의식이 강렬하기는 했지만, 확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근대 민족 국가의 성립기에 절대 군주는 가톨릭적 또는 프로테스탄 트적인 종교의 기초 위에서 권위를 수립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따라서 군주권의 황제권과의 연결도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다. 절대 군주제의 사상적 지향은 불완전했지만, 일 반적으로 강력한 물리적 힘을 배경으로 하는 정치 체제 에서 그 권력을 옹호하는 정치 이론이 요청되지 않았다. 그것은 힘을 토대로 하는 국가에서는 정치 사상적 기초 없이도 그 권력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절대 군주제의 옹호론으로써 왕권 신수설이 절대주의적 정치하에서 전개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정 치적 조건이 마련되어야 했다.
일반적으로 신수설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마태 22, 21)라는 것을 근거로 정신적 영역에서는 교황이 최고권 을 가지며, 세속적 사항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최 고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양검론(兩劍論), 전투 시기의 황제권론 그리고 왕권 신수설을 통칭하는 제권 (帝權) 신수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실제에 있어서는 정신적 사항은 물론 세속적인 사항에 있어서도 교황이 거의 최고권을 가지고 있었다. 즉 왕권 신수설과 그 밖의 신권론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왕권 신수설 이 외의 신권론은 정치적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 지배자인 교황과 세속적인 정치적 지배자와의 상호 권한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왕권 신수설은 군주권과 백성의 권리와의 대결을 내용으 로 하는 군주권 옹호 이론이었다. 하지만 이 주장은 근대 적 민족 국가 시대에 백성 또는 기타의 세력으로부터 비 난받았다. 즉, 프랑스에서는 군주의 절대적인 권력이 확 립되었으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종교적 분쟁 이 내란화하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차이는 있 었지만 반군주론이 유혈(流血)을 동반하여 사태가 심각 하였다. 반면, 영국에서 왕권 신수설이 제기됨에 있어서 는 정치적 상황이 프랑스와 차이가 있었다.
영국에서의 왕권 신수설 : 가장 강력한 절대 왕정인 튜 더(Tudor) 왕조 시대(1485~1603)에 유럽에서는 제일 먼 저 중앙 집권적 정치 체제가 수립되었다. 또한 16세기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종교 개혁도 가톨릭의 교의를 크 게 바꾸지 않으면서 영국 성공회가 확립되고 국왕이 교 회의 수장(首長)이 됨으로써 종교적 내란을 피할 수 있
었다. 당시에는 절대 왕정을 위한 정치 이론도 필요하지 않았으며, 또 실제로 어떤 이론도 구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튜더 왕조 말기에는 영국의 정치적 · 경제적 상황 이 현저하게 변하였다. 즉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절대주의적 군주에 대해서 정치 권력에 참여하려는 시민 세력이 등장하였다. 시민은 하원(下院, The House of Com- mons)을 근거로 군주와 의회의 형태로 정치 권력을 둘러 싼 투쟁을 전개했다. 이는 민족 국가적인 통일의 유지가 군주에 의해서만 가능했던 시대에 근대 시민이 민족 국 가를 대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스튜어트(Stuat) 왕조 (1603~1714)에 이르러서는 백성의 저항이 표면화하고, 왕과 의회와의 다툼이 심해졌다. 그리하여 왕권 신수설 이 제임스 1세(1603~1625)에 의해 제창되었다. 왕은 영 국 왕위에 오르기 전에 쓴 <군주국의 진정한 법>(True Law ofMonanchies, 1598)이라는 논문을 통해 왕은 지상에 서 신의 대리자이고 왕권에는 제한이 없으며, 의회의 역 할은 권고하는 데 그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1609년에 는 "왕이 신으로 불리는 것은 타당하다. 그 이유는 왕이 지상에 있어서 신의 권력과도 같은 권력을 행사하고 있 기 때문이다. 왕은 모든 신민(臣民)을 심판하며, 더욱이 신 이외의 아무것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라고 주장했 다. 청교도 혁명 때 왕당파로 활동했던 필머(Robert Fil- mer, 1588~1653)는 《가부장권론》(家父長權論, Patriacha, 1642)이라는 저서에서 "국가는 하나의 가정이며, 왕은 아버지"라고 주장했다. 또한 성서를 분석하면서 인류 최 초의 왕은 아담이고, 찰스 1세(1625~1649)는 아담의 상
속자로서 영국을 통치한다고 주장했다.
왕권 신수설의 최초 제창자인 제임스 1세는 자유 군주 국이란 군주가 원하는 바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국가라 고 주장했다. 그는 진정한 법은 군주와 백성의 정당한 관 계이므로, 자유 군주국은 외국의 군주나 국내의 어떠한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최고의 지위에 있다고 했 다. 그가 말하는 질서 유지는 지배자의 기능이며, 지배란 신의 천사에 대한 지배처럼 군주의 백성에 대한 지배가 자연의 원리라는 것이었다. 질서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무정부였고, 그 어느 하나만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었 다. 그러나 그의 신수설에는 신학적 색채가 짙었다. 군주 권은 신이 부여한 것일 뿐만 아니라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이었다. 군주에 대한 책임은 신에 대한 것이며 백성과의 관계에서는 초월적이었다. 따라서 군주 권에 대한 복종은 무조건적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무 조건적인 복종론은 군주가 어떠한 의미에서 자신의 행동 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왕권 신수설의 주장은 군주가 백성보다 높은 단계에 있다는 데서 그 책임도 일반적인 의미와는 같을 수 없다는 것이 다. 그러나 신법(神法)과 자연법의 준수와 국법(國法, CommonLaw)의 준수에 대한 의무를 무시해도 좋다는 것 은 아니다. 제임스 1세의 왕권 신수설이 의미하는 것은 성실법원(星室法院, Court of Star Chamber)에서의 그의 연 설에서 명백하게 표명되었다. 그는 군주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신하가 논의한다는 것은 방만이고, 군 주에 대한 모욕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신이 해야 하는 일 을 논의하는 것은 무신론자가 하는 일이며 신에 대한 모 독과 같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의 왕권 신수설 : 가장 전형적인 왕권 신수 설은 앙리 4세(1589~1610)의 법률가인 벨로(Pierre de Belloy)의 《가톨릭 옹호론》(Apologie Catholique, 1585)에서 전개되었다.
그는 군주의 직무는 신으로부터 받았으며, 백성이나 교황이 군주의 직무를 박탈하는 것은 합법적이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권위는 인간이 타락하기 전까지는 필요 없 지만, 타락 후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군 주의 권위는 제한될 수 없지만, 신이 군주에게 권력을 부 여했다면 군주의 권력은 제한적으로 부여되지 않았다는 이유가 명백히 논증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합리적인 답변은 없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 주권은 제 한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벨로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 은 군주에 대한 수동적인 복종을 백성에게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군주는 신의 부관(副官)이고 영상(映像) 이었다. 군주는 지상에서 신을 위해서 행동하는 신앙의 수호자였다. 군주에 대한 반항은 신에 대한 반항과 같으 며, 파멸로써 벌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왕권 신 수설은 백성의 주권론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이다. 벨 로에게 백성의 주권론은 극히 위험한 것이며, 그 결과는 질서 파괴와 무정부 상태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평화에 대한 유일한 효과적인 보장은 세속적인 정부에 대한 복 종을 종교적 의무로 부과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것은 신
을 대표하는 것이 군주임을 인정받도록 보장하려는 것이 었다. 즉 군주는 백성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스코틀 랜드에서 프랑스로 이주한 버클리(W. Barclay)의 《왕권 론》(De Regno, 1600)도 똑같은 논리를 전개시켰었다. 그 후 프랑스의 절대주의는 루이 13세(1610~1643)와 루이 14세(1643~1715)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 루이 14세 는 스스로 "신은 사람들이 왕을 신의 대리로서 존경할 것을 희망했다. 신민으로 태어난 자는 누구이건 무조건 복종하는 것만이 신의 희망하는 바이다" 라고 말했다. 또 한 보쉬에(J.B. Boussuet, 1627~1704)는 《성서의 신성한 말 씀으로부터 이끌어 낸 정치학》(La Politique Tirée Paroles de I'Ecriture Sainte, 1679)에서 "신이 참된 군주이며 지상에 그 대리로서 군주를 두었다" 라고 썼다.
[교황과 왕권 신수설] 근대의 왕권 신수설은 교황의 종교적 권위나 중세의 도덕 · 정신적인 영역의 제약에서 벗어나 군주권이 스스로의 존립 근거를 찾으려고 한 데 서 성립한 사상이다. 그것은 절대주의의 세속적 권력을 신격화함으로써 대외적으로는 교황과 대립하고, 대내적 으로는 다원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권력을 일원화하기 위한 정치 이론으로 전개되었다.
1300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1294~1303)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세계 지배의 권리를 주장하고, 교황은 황 제인 동시에 교황임을 신수설을 토대로 천명했다. 즉 머 리는 둘이지만 몸은 하나라는 것이었다. 그보다 약 1세 기 앞서 영국의 존(1199~1216) 왕은 교황 인노첸시오 3 세(1198~1216)에게 신종(臣從)할 것을 서약하고, 그리스 도교 세계에서 교황의 최고 권위를 인정했었다. 그러나 교황들이 호전적이며 세속적인 경향이 드러나면서 교황 의 세속적 사항에 관한 최고권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결국 16세기에 교황은 마키아벨리(N. di Ber- nardo dei Machiavelli, 1469~1527)나 프로테스탄트에 의해서 비판을 받게 되어 지상에서의 최고권 주장은 사라졌다. 따라서 왕권 신수설은 왕의 절대주의를 입증하는 이론으 로 전화(轉化)되었다.
[왕권 신수설에 대한 반발] 왕권 신수설은 유럽 각국 의 질서가 안정되고 절대 군주제가 전제화(專制(化)함으 로써 근대 시민의 도전을 받으면서 사회적인 타당성의 근거를 잃어버렸다. 자연법적이고 사회 계약적 합리주의 에 의하여 왕권 신수설의 비합리성이 공격을 받았다. 영 국에서는 왕권 신수설이 시민 혁명 이후 자취를 감추었 다. 그러나 유럽 대륙에서는 영국과는 반대로 합리주의 에 대한 반발의 거점으로써 반동 세력의 몰락이 확고해 지는 19세기 초엽까지 생명력을 유지했다. 보날드(L.G.A. Bonald, 1754~1840), 메스트르(J.M.C. de Maistre, 1753~ 1821) 등이 대표적인 이론가들이다. 왕권 신수설을 반박 하기 위해 백성의 주권설, 백성의 반항권이 반군주적으 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로크(J. Locke, 1632~1704)의 《시민 정부론》(First Treatise of Civil Goverment, 1689)이 왕권 신 수설 쇠퇴에 크게 공헌했다.
※ 참고문헌 T.W. Allen, A History ofPolitical Thought in the 16th Century, 1956/ S. Desmond, The First Bourbon : Henri IV, King ofFrance and Constable, London, 1971/ G.M. Trevelyan, England under the
Stuarts, 1933/ K. Worzendorff, Die Polizeigedanke des Modern Staats, 1918/ D.P. Adama, Tudors and Stuarts, 1962/ W.A. Dunming, A History of Political Theories, 4 vols, 1920~1923/ K. Sternberg, Die Politischen Theorie in ihren geschichichenen Entwicklung vom dem Altertum bis zun Gegemwart, 1922. 〔洪淳鎬〕
왕권 신수설
王權神授說
[영]Divine Right of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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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왕권 신수설을 처음으로 제창한 영국 왕 제임스 1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