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 본당

往十里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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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의 성당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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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의 성당 모습

서울대교구 소속 본당. 서울시 성동구 홍익동 236 소 재. 1959년 11월 신당동(新堂洞) 본당에서 분리 · 설정 되었으며, 주보는 예수 성심. 관할 구역은 상 · 하왕십리 동, 도선동, 마장동, 신당동, 행당동, 홍익동 일부 지역. [교 세] 1960년 1,650명, 1965년 5,079명, 1970년 3,105명, 1975년 6,386명, 1980년 4,852명, 1985년 6,312명, 1990년 6,393명, 1995년 4,667명, 2000년 3,684명. [역대 신부] 초대 게러티(B. Geraghty, 지) 베르 나르도(1959. 11~1965. 7), 2대 오코너(M. 0 Conor, 高) 마 우리시오(1965. 7~1966. 9), 3대 게러티(1966. 9~1968. 12) , 4대 매니언(F. Mannion, 明) 프란치스코(1968. 12~1970. 7), 5대 플래너건(J. Flanagan, 구) 요셉(1970. 7~1973. 5), , 6대 김수창(金壽昌) 야고보(1973. 5~1976. 5), 7대 김철규 (金哲珪) 바르나바(1976. 5~1982. 5), 8대 이원규(李源圭) 마태오(1982. 5~1986. 8), 9대 오창선(吳昌善) 시몬(1986. 8~1988. 2), 10대 김승훈(金勝勳) 마티아(1988. 2~1993. 10), 11대 박고빈(朴槁斌) 시메온(1993. 10~1998. 9) 12 대 이봉우(李奉雨) 토마스 데 아퀴노(1998. 9~2001. 10) , 13대 김승현(金勝賢) 그레고리오(2001. 10~현재) .
1959년 당시 신당동 본당은 서울의 동남부 전 지역을
포함하는 방대한 지역을 관할하였으므로, 왕십리 동쪽에 거주하는 신자들이 미사를 봉헌하기가 어렵고 본당의 사 목 활동이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에 그 해 4월 13일 성 골롬바노회의 지원으로 게러티 신부가 한국 전력 공사 소유의 사택 1동을 사들여 신당동 본당 소속의 왕십리 공소를 세우게 되었다. 공소를 세울 당시의 신자수는 29 세대에 100명 정도로 첫 미사는 신당동 본당 주임 김창 문(金昌文, 요셉) 신부가 집전하였고, 주일 미사 때에 게 러티 신부도 같이 집전하며 공소를 운영하였다. 이후 신 자들은 게러티 신부를 통해 서울교구청을 방문하여 본당 승격 교섭을 수 차례 벌였다. 이러한 열성으로 마침내 1959년 11월 16일 신당동 본당으로부터 왕십리 일대를 분리하여 새 본당을 신설하였고, 게러티 신부가 초대 주 임으로 부임하였다. 본당은 공소 강당을 그대로 사용했 으며 사제관은 길 건너에 있는 사옥을 개수하여 사용하 였다. 당시 관할 구역은 신당동 네거리에서부터 청계천 남쪽과 중곡동 동쪽은 물론 행당동 동쪽까지 실로 방대 한 지역이었다. 이와 같이 왕십리 본당 관할 구역이 너무 나 방대한 관계로 1960년 뚝섬 공소를 마련하여 어느 정도의 어려움을 해소하였으나 이후 교세가 점점 증가함 에 따라 더 넓고 큰 성당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 에 1961년 현 본당 자리에 신축 성당을 준공하였고, 같 은 해 4월에 본당 주보를 '예수 성심' 으로 명명하였으 며, 10월 24일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의 집전으로 첫 견진성사가 거행되었다. 1962년 7월 30일 본당 자매 교우 70여 명의 기금으로 대종을 구입하여 '성 알풍소' 라 명명한 뒤 축성하였다. 본당은 죄인의 의탁 소년 쁘레 시디움(1959. 8),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1962. 1), 성모 회(1962. 10) , 연령회(1964. 7) 등 여러 신심 단체들을 창 립함으로써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1965년 6월 10일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본당 내에 분원을 마련함으 로써 전교 활동에 한층 힘을 더했다. 그 해 7월 게러티 신부가 휴가 차 본국으로 떠나 이임되고 오코너 신부가 부임하였으나 9개월 만인 1966년 9월 5일 다시 게러티 신부가 3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1966년 뚝섬 공소가 성수동(聖水洞)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68년 11월 신 자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성심 도서실을 개원하였으며, 11월 16일 성심회를 창립하였다. 4대 주임 매니언 신부 재임시에는 신자들의 영신 생활과 교회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1968년 12월 25일 본당 주보인 <예수 성심>을 창 간하였으며, 1969년 8월 행당동(杏堂洞) 본당을 분리 · 설립하였다. 한편 황학동 · 유락동 · 인창동 · 현인동 지 역의 신자들이 성당과의 거리 문제로 신앙 생활에 애로 가 있는 것을 감안하여 1969년 4월 20일 황학동 116번 지에 가톨릭 센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 해 9월 24일 선종한 신자들의 영혼을 편안히 모실 수 있는 묘지의 필 요성을 느끼고 경기도 파주군 조림면 뇌조리 소재 야산 에 묘지를 조성하였다. 6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수창 신 부는 본당의 디딤돌이 될 사목회 구성의 필요성을 절감 하여 1973년 8월 5일 사목 위원회를 발족하였으며, 마 이크, 앰프 시설, 전자 오르간을 구입하고, 다음해 6월
성당 지하실을 보수하여 성당 휴게실을 준공하였으며, 재래식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고치는 등 성당 시설의 개 선에도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신자들의 신심 도모 를 위해서 대건회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1975년 7월 5 일 성 안드레아 김대건 사제상을 성당 입구 우측 벽에 시 공하여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7대 주임 김철규 신부는 초창기에 세워진 성당의 부속 건물들이 너무 낡아 사제 관과 수녀원의 보수 공사를 하였으며, 1977년 어머니 성서 모임과 제대회 등 새 신심 단체들이 발족하는 등 본 당의 성장과 활성화를 위해 헌신하여 오던 중 과로로 쓰 러졌다. 그리고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다가 1982년 5월 휴양차 본당을 떠나게 되었고, 그 후임으로 이원규 신부가 8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선교하는 본당 공동체 · 배우는 본당 공동체 사랑과 친교의 본당 공동체 · 활성 화한 구역의 본당 공동체 등 네 가지의 사목 지침을 내세 웠다. 부임 직후 성당 마당이 너무 협소해 성당 부지 확 장 사업을 시작하여 1983년 6월 말에 공사를 끝내고 이 어서 정원 미화 작업에 착수하여 확장 공사를 마무리지 었다. 그리고 1985년 4월 7일 청년 연합회를 발족하였 으며, 바다의 별 쁘레시디움 · 인자하신 모후 쁘레시디 움 · 구세주의 모친 쁘레시디움 · 사랑하올 어머니 쁘레 시디움 · 샛별 쁘레시디움 · 성모들의 모후 쁘레시디움 등 여러 개의 쁘레시디움이 새로 설립되었다. 9대 주임 으로 부임한 오창선 신부는 혼인을 앞둔 사람들을 위한 혼인 강좌를 신설하였으며, 개별 면담 시간을 마련하여 상담을 하고 불우 이웃을 돕는 데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10대 주임 김승훈 신부는 부임 후 본당 사목회 활동의 활성화를 위해 유급 사무장 제도를 부활시켰고, 낙후된 사제관과 교육 시설의 미비함을 느껴 1988년 11월 25 일 교육관 유치원 · 사제관을 완공하여 축복식을 거행 하였다. 1989년 12월 본당 30년사 발간 작업을 시작하 여 다음해 5월 13일 발간하였다. 1992년 11월 15일 사 근동(沙斤洞) 공소 강당을 신축하여 축복식을 거행하였 는데 사근동 공소는 1996년 마장동(馬場洞)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2000년 3월부터 한 달 동안 본당 마당 석 조 및 정원 조경 공사를 하고 예수 성심상 좌대를 이전함 으로써 본당 주변 환경이 한층 새로워졌다. (→ 서울대
교구 ; 성수동 본당 ; 신당동 본당 ; 행당동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서울대교구 교구 총람》, 가톨릭출 판사, 1984/ 《왕십리 본당 삼십년》, 천주교 왕십리 교회, 1990/ 《신당 동 본당 사십년사》, 천주교 신당동 교회, 1988.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