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단

[영]Jord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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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죽었다는 요르단의 느보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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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죽었다는 요르단의 느보 산.

중동에 있는 입헌 군주국. 양원제 국회가 있으나 최고 행정권은 왕에게 있다. 공식 국가명은 요르단 하심 왕국 (Hashemite Kingdom of Jordan)이다. 요르단 강 동쪽에 있 으며, 수도는 암만(Amman)이다. 북쪽은 시리아, 북동쪽 은 이라크, 남쪽은 사우디 아라비아, 서쪽은 이스라엘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쪽의 아카바 만(G. Aqabah)에 약 19km의 해안선을 갖고 있다. 웨스트뱅크로 알려진 요르 단 강 서쪽 지역도 1967년까지는 요르단의 영토였다. 국민의 대부분은 아랍인으로 북아라비아의 카이스 족 또 는 남아라비아 예멘 족의 후손이며, 공용어는 아랍어이 다. 최고 사법 기관은 대법원이며, 개인의 신분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사법권을 행사하는 이슬람 종교 재판소가 있다. 인구는 6,300,000명(2000)이며, 국교는 이슬람이 고, 국가 총면적은 89,326km²이다.
[역 사] 요르단은 팔레스티나 지역에 위치해 있기에 대부분의 역사가 이스라엘과 뒤섞여 있다. 이 지역에 사 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전기 구석기 시대로 여겨지며, 가 장 오래된 국가는 기원전 13세기 이후 존재했던 기드
온 · 암몬 · 모압 · 에돔 등이다. 기원전 13세기 초 이스 라엘 부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홍해를 건넌 다음 시 나이 반도를 전전하다가 요르단 지역(지금의 요르단 왕국) 으로 들어왔다. 이스라엘 부족은 에돔과 모압과 암몬 지 역을 거쳐(신명 2장) 느보 산에 이르렀는데, 부족의 영도 자 모세는 그곳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본 후 죽었다(신명 3, 23-29 ; 34장).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부 족을 이끌고 요르단 강을 건너 오아시스 도시 예리고를 점령했다(여호 6장). 다윗(기원전 1010~970)과 솔로몬(기 원전 972~933) 시대에는 지금의 요르단 동부 지역 대부분 이 이스라엘 왕국에 속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9세기경 모압의 임금 메샤는 이스라엘 임금 오므리(기원전 886~875)와 아합(기원전 875~853)의 간섭과 무거운 세금 에 시달리다가 아합이 죽자 반기를 들어 성공했다(2열왕 3, 4-27). 메샤는 850년경 모압 왕국의 수도인 디본(지금 의 디반)에 모압어로 승전비(1m×70m)를 세웠다(현재 루 브르 박물관 소장). 하지만 그 후 다른 지역들과 함께 아시 리아 · 바빌론 ·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330년 무렵부터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서로 다투 는 사이에 기원전 4세기부터 페트라(Peta)를 중심으로 유목 생활을 하던 나바테아인들이 기원전 170년에 나바 테아 왕국을 세웠다. 시조인 아레타스 1세(기원전 170~ 160)는 유다와 요나단이 펼친 마카베오가 독립 전쟁을 도왔다(1마카 5, 24-28 ; 9, 35 ; 2마카 12, 10-12). 아레타 스 3세(기원전 85~62)는 왕국을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근 처까지 확장했다. 그는 기원전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 스가 이스라엘을 점령한 다음부터는 로마에 예속되어 선 린 관계를 유지했다. 아레타스 4세 때(기원전 9~서기 40) 나바테아 왕국은 전성기를 맞았다. 갈릴래아와 베레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기원전 4~서기 39)는 아레타스 4 세의 딸과 결혼했다가 서기 27년경 이혼하고 조카딸이 면서 제수인 헤로디아와 재혼했다. 이에 화가 난 아레타 스 4세는 안티파스와 대적하여 이겼다(요세푸스, 《유대 고 대사》 18권 109~ 125). 그러나 서기 106년에 왕국은 로마 제국에 합병되었다.
636년 야르무크 계곡 전투에서 제2대 칼리프인 우마 르 1세(Umar I 634~644)가 이끄는 이슬람군이 동로마 제국 군대를 쳐부수고 요르단 · 팔레스티나 · 시리아 일 대를 점령했다. 이듬해 우마르 1세는 예루살렘까지 점령 했다. 다마스커스를 도읍으로 정한 우마이야 왕조(Uma- yyad dynasty, 661~750)는 암만 고지대에 엘 카스르 별궁, 요르단 사막에 여러 개의 성채, 예리고에 히샴 별궁을 지 었다. 우마이야 왕조를 이어 메소포타미아 바그다드에 도읍을 정한 아바스 왕조(Abbasid dynasty, 750~1258) 시기 에 요르단 지역은 권력의 중심지에서 멀어졌으며 주님들 은 유목 생활로 돌아갔다. 이 왕조는 몽골 제국이 침략한 1258년까지 지속되었다.
1097년에 제1차 십자군이 시리아를 점령하였고, 1099년에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왕국(1100~1118)을 세 웠다. 이에 아이유브 왕조(Ayyubid dynasty, 1169~1260)를 창시한 살라딘(1137/1138-1193)이 1187년 7월 4일 티베 리아와 나자렛 사이에 있는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섬 멸하고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 10월 2일 예루살렘을 점 령했다. 십자군은 트리폴리 공국과 안티오키아 공국만 유지할 정도로 위축되었다. 이집트의 마멜루크 왕조 (1250~1517)가 프랑크 족 십자군의 마지막 거점인 아코 와 티로와 시돈을 점령했다(1291~1292). 1517년 마멜루 크 왕조는 터키군에 의해 멸망했다. 16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요르단 지역은 다마스커스의 관 할 아래 있었다. 19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아라비아로 오 가는 길을 보호하기 위해 체르케스인과 카프카스인을 비 롯한 여러 지역의 난민들을 요르단에 정착토록 하는 조 치를 취하였다.
1917~1918년 알렌비 장군 휘하의 영국군이 팔레스 티나와 요르단과 시리아에서 터키군을 몰아낸 다음, 1920년 요르단은 팔레스티나와 함께 트란스 요르단이란 이름으로 영국의 위임 통치령이 되었다. 영국군은 요르 단 지역의 행정을 1921년 아브둘라 이븐 후세인(Abdul- lah ibn al-Husayn, 1882~1951)에게 맡겼다. 요르단 지역은 1946년 3월 22일 입헌 군주국으로 독립했다. 이스라엘 이 국가로 독립하던 1949년에 그리스도교 신자를 포함 한 500,000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요르단으로 이주 하였다. 1951년 7월 20일 아브둘라 왕이 예루살렘 성전 터에 있는 엘 아크샤 모스크에서 예배 중 암살되고, 1952년 8월 11일 아브둘라의 손자인 후세인(Hussein ibn Talal, 1935~1999)이 17세로 등극했다. 1967년 6일 전쟁 후 이스라엘에게 웨스트뱅크를 빼앗겼으며, 1970~ 1971년 정부군과 요르단에 주둔하는 팔레스타인 게릴라 사이의 전투로 국토가 많이 파괴되었다. 이 전투는 정부 군이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요르단에서 몰아냄으로써 끝이 났다. 1990년대에 30,000명의 칼데아 전례를 따 르는 신자들을 포함한 약 130,000명의 이라크 난민들이 요르단으로 이주하였다. 1999년 2월 7일 국왕인 후세인 이 임파선 암으로 사망하자 그의 큰아들인 아브둘라가 국왕으로 등극했다.
요르단의 국교는 이슬람이지만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
어 있다. 그래서 요르단의 페트라와 필라델피아(Filadel- fia)에 그리스 정교회의 멜키트 전례를 따르는 이들을 위 한 대교구좌가 있다. 라틴 전례를 따르는 이들은 예루살 렘에 있는 라틴 총대주교의 지도를 받는다. 요르단은 1994년에 교황청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2001년 현재 가톨릭 신자는 전체 인구의 1.1%인 71,000명이 있으 며, 대교구 1, 동방 대목구 1, 본당 64개에 대주교 1. 주교 1 · 신부 75(교구 소속 59, 수도회 소속 16) · 신학생 5 · 수사 9 · 수녀 251명이 있다.
[유 적] 메드바 :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남서쪽으로 32km 떨어진 이 도시는 출애급한 이스라엘이 약속받은 땅으로 갈 때 점령했었다(민수 21, 30 ; 여호 13, 9. 16). 다윗이 다스리던 시기에 이스라엘 총사령관 요압은 메드 바 근처에서 암몬인과 아람인들의 연합군과 싸웠다(1역 대 19, 7). 기원전 2세기에 제관인 마따디아와 다섯 아들 들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압제에서 벗어나려고 독립 운동 을 할 때 메드바 지방의 얌브리 사람들이 요한을 죽였다. 이에 그의 동생들인 시몬과 요나단은 산속에 숨어 있다 가 습격해서 복수했다(1마카 9, 36-42). 요한 히르카누스 (기원전 134~104)가 메드바를 점령했고(요세푸스, 《유대 고 대사》 13, 9, 1), 알렉산데르 얀네우스(기원전 103~76)도 이곳을 지배했다(《유대 고대사》 13, 15, 4). 451년 칼체돈 에서 개최된 공의회에 메드바의 주교인 가이아노스 (Gaianos)가 참석했다고 하며, 635년 이슬람 군대에 의 해 함락되었다. 그 후 폐허가 되다시피 했는데, 1880년 멜키트 그리스도인들이 이주해 옴으로써 도시가 재건되 었다. 이 도시의 그리스 정교회 성 게오르기오스 성당 바 닥에, 6세기에 제작한 팔레스티나 모자이크 지도가 있 다. 이 지도에는 6세기의 예루살렘 시가지 모습이 뚜렷 하다.
암만 : 시내 한복판 고지대(Jebel el Qalaa)에는 마르쿠 스 아우렐리우스 치세 때(161~180) 세운 헤라클레스 신 전, 비잔틴 시대의 성당 유적, 우마이야 왕조의 별궁(El Qasr)이 있다. 고고학 박물관도 있는데, 메샤 승전비 모 형과 쿰란 출토품을 눈여겨볼 만하다. 고지대에서 내려 다보면 로마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세 때(138~161)
지은 관중석이 6천 석인 야외 극장이 잘 복원되어 있고, 그 앞에는 실내 극장(odeion) 유적도 있다.
페트라 :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 페트라는 붉은 사암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사막의 도읍이라 방어하기 매우 유리 한 지형이다. 입구에서 도심으로 들어가는 길(Siq)은 수 십 미터나 되는 절벽들 사이에 뚫린 좁은 골짜기라 그 모 습이 장관이다. 고인의 집안 사람들이 기일에 모여 제사 를 지내던 무덤 건물들이 볼 만하다(Ek Khazneh, Ed Deir) .
시야가 :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죽었다는 느보 산 비스가 봉우리(신명 34, 1)는 느보 산에서 세 번째로 높은 시야가 봉우리(Ras Siyga, 해발 710m)라는 것이 정설 이다. 이곳에 5세기 비잔틴 시대에 제의방과 세례당과 장례당을 모두 갖춘 큰 성당을 지었는데, 형형색색의 모 자이크 그림들이 일품이다.
마케루스 : 마다바에서 남서쪽으로 33km를 달리면 무 카베르(mukawer) 마을이 있고, 거기서 사해쪽을 바라보 면 해발 700m, 사해 수면보다 무려 1,100m나 높은 천 연 요새 마케루스(일명 마케론트)가 있다. 아랍인들은 이 요새를 미슈나카(Mishnaqa)라고 한다. 알렉산데르 얀네 우스 왕이 나바테아 왕국을 견제하고자 기원전 90년경 에 이 요새를 만들었다(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7권 171). 기원전 30년 헤로데 대왕(기원전37~4)이 요새를 재건했 고, 기원전 4년 그가 예리고에서 병사하자 갈릴래아와 베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가 물려받았다. 서기 27 년경 안티파스는 세례자 요한을 여기에 가두었다가 참수 했다(《유대 고대사》 18권 116~119). 70년 9월 예루살렘 이 로마군에게 함락되자 이스라엘 독립군 일부는 이 요 새로 피신했지만, 72년 이 요새마저 로마군에게 함락되 었다(《유대 전쟁사》 7권 163~177, 190~209).
게라사 :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요르단 강 양쪽에 그리스식 도시 열 개(데카폴리스)를 세웠다. 이 가운데서 요르단 왕국 북쪽에 자리잡은 게라사가 가장 크다. 서기 1세기에 도시 남쪽 입구에 타원형 광장을 만 들고 그곳부터 도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중앙통을 냈 다. 129년 하드리아누스 황제(117~138)의 순시를 기념 하여 게라사 남쪽에 하드리아누스 성문을 세웠다. 마르 코 복음 5장에 따르면 예수는 악령이 들어 미쳐 버린 이 방인을 여기서 고쳐 주셨다고 한다.
※ 참고문헌  정양모,《위대한 여행-사도 바울로의 발자취를 따 라》, 생활성서, 1997, pp. 16~24, 281~306. 〔鄭良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