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
[히]יוֹסֵף · [그]Ἰωσήφ · [라]Ioseph · [영]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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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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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을 팔아 버린 형제들이 가져온 그의 옷을 보고 놀라는 야곱.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 번째이며, 라헬로부터 얻은 첫 아이(창세 30, 24). 요셉이 이스라엘의 3대 성조에 속하지는 않지만, 후일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부족장 계열에 든 에브라임과 므 나쎄의 아버지였기에 이 두 지파에게는 보다 가까운 성조로 간주된다. 따라서 그의 이름은 성서에서 개인으로도 쓰이지만 집단 고유 명사로도 사용되어 에브라임과 므나쎄 지파 모두를 지칭하기도 하고(신명 27, 12 ; 33, 13), 그중 한 지파(시편 78, 67) 혹은 북이스라엘 왕국 전 체를 지칭하며(에제 37, 16 ; 즈가 10, 6), 간혹 이스라엘 또는 야곱과 병행해서 사용된다(시편 77, 16 : 오바 1, 18). 요셉 지파가 정식으로 열두 지파에 속해 불리는 경우는 드물고(창세 49 ; 신명 27, 12 ; 33, 13-17), 레위 지파가 일반 지파로서의 기능에서 벗어났을 때 12라는 숫자를 유지하며 에브라임과 므나쎄로 분리되었으리라 추정된다(창세 48 ; 여호 14, 4 참조). 노트(M.Noth)는 요셉 가문이 에브라임과 므나쎄라는 중앙 지파들의 연방이었으리라 추측하며, 아마도 후대에 베냐민 지파가 거기 가입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학자들의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집단 고유 명사로서의 요셉 혹은 요셉 지파가 가리키는 범주나 그 역사적 형성에 관한 것은 불분명하게 남아 있다. [어 원] 창세기 30장 24절에 의하면, 라헬은 요셉을 낳으며 "주님께서 나에게 아들 하나를 더 보태 주셨으면 (יסֵף)!" 하고 말하였다. 여기서 '보태 주셨으면' 하는 단어의 히브리어 발음이 '요셉' 인데, 여기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몇몇 학자들은 요셉이란 이름이 본래 신의 이름과 합쳐진 긴 이름의 애칭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매우 빈약하다. [성서 안의 전승] 요셉은 주로 창세기 안에서 언급된다. 야곱이 나그네살이를 하던 때 바딴아람에서 태어났 으며, 어머니 라헬은 성조모(聖祖母) 사라나 리브가처럼 석녀였다는 점은 중요하다(창세 30, 22). 석녀의 잉태 주 제는 하느님이 구원사에 특별히 개입하실 때 나타나기 때문이다. 요셉의 생애는 창세기 37-50장 사이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며, 그 상세함이나 심리적 묘사의 심도가 다윗 궁정사와 쌍벽을 이룰 정도이다. 그러나 창세기를 제외하면, 요셉은 집회서 49장 15절과 신약성서 몇 곳에서 언급될 뿐이다(요한 4, 5 ; 사도 7, 9-18 ; 히브 11, 21-22). [요셉 전승에 관한 최근까지의 연구] 지금까지 학계의 주된 관심은 '현재의 창세기 37-50장이 형성되기 전에 어떤 형태의 요셉 이야기가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고, 다른 질문들은 이에 준해서 제기되었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가설을 따라 야훼계(J) · 엘로힘계(E) · 사제계(P) 전승이라는 여러 요셉 이야기가 있었다는 데에 동조한다. 그러나 보충 가설을 내세우고 성서 본문을 르르우벤 -야곱-미디안 상인들' 과 "유다-이스라엘-이스마 엘 상인들' 로 구성된 층으로 구분하여, 그 가운데 하나 를 독립적인 이야기로 다른 하나는 삽입된 것으로 간주하는 학자들도 있다. 한편 요셉 이야기는, 야훼계 저자이건 누구건 간에, 한 저자에 의한 단일 작품이라는 주장도 만만찮게 이어져 왔다. 그 이유는 첫째, 비교적 독립적인 민담들로 구성된 원역사(창세 1-11장)나 아브라함 전승과 는 달리 그 줄거리가 연속적이면서도 조직적으로 짜여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특별히 그것이 지닌 아름다움 은 문학적으로 낮은 둘 이상의 작품의 병합(竝合)에서 나온 것일 수 없다는 점이다. 셋째, 본문의 분할에 좋은 터전을 마련해 주던 르우벤과 유다의 이중 역할이나 다 른 종류의 이중(二重)법이 작품에 깊이를 더하고 긴장을 고조시키며 심미적 효과를 자아내는 높은 수준의 문학 기법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러한 주장은 날로 강해지고 있다. 학자들이 요셉 전승에 관해 어떤 입장을 취하든지 현 재 창세기에 실린 요셉 이야기가 지닌 예술성을,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늘 감지해 왔다. 하지만 37장에 나오는 이스마엘 상인과 미디안 상인의 문제는 둘 이상의 요셉 이야기가 있다는 주장에 큰 뒷받침이 되어 주었다. 두 그룹의 상인이 다 요셉을 보디발에게 팔 수는 없기 때문이다(37, 36 : 39, 1). 보충 가설과 비슷하게 자료 가설도 '르우벤-구덩이 -미디안 상인' 과 '유다-이스마엘 상인' 에 관한 구절 들로 본문을 나누어 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분리한 야훼계 혹은 엘로힘계 요셉 이야기를 각각 전체로 읽어 보면 결국 다른 모순들이 생기고 때로는 히 브리어 본문을 고쳐 읽어야 하는 작위성도 불가피하게 된다. 오히려 설득력 있는 설명은 후대 편집자가 유다에 관한 전승(38장)을 기존의 요셉 이야기에 삽입할 때 유다와 그 형제들의 중죄(근친을 유괴하여 파는 것은 이스라엘 법에 따르면 사형이다. 출애 21, 16 ; 신명 24, 7)에 대한 직 접적 책임을 덜려고 미디안 상인에 관한 구절(28ㄱ, 36 절)을 삽입시켰다는 것이다. 비슷한 종류의 삽입이 유다 지지 본문인 49장의 시작과 끝, 또 다른 데서도 발견된 다. 모두 같은 편집자의 솜씨로 알려져 있는데, 그 삽입 기법은 좁은 범주에서는 모순을 느끼지 못하고 독자의 시선이 비켜가게 되지만, 넓은 범주에서는 모순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 특징이다. 요셉 전승에 관해 학계에서 일치하는 점이 있다면 창세기 37-50장 사이에는 요셉과 관계없는 고유 전승(38장)과 그 외 사제계 전승을 비롯 한 후대 삽입 전승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들이 요셉 이야기를 감싸고 37-50장을 '확장된 야곱 이야기' 혹은 '족장사' 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로써 가장 합리적이며 바람직한 해결은 37-50장에서 이렇게 확장 된 부분(비록 본문의 한계를 정하는 데 완전한 일치는 이루지 못했지만 대충 37, 1-2ㄱ. 28ㄱ. 36 ; 38장 ; 46, 1-5ㄱ. 8-27 ; 48-49장 ; 50, 12-13. 24-25으로 본다)을 뺀 나머지를 '하나의 요셉 이야기' 로 보는 것이겠고, 그 타당성은 아래에서 어느 정도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요셉 이야기] 요셉 이야기는 내용과 구성의 특징에 따라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제1부(37장) : 서막에 해당되며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 를 위해 씨를 뿌리는 역할을 한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편애하여 특별한 옷(2사무 13, 18-19에 의하면 이스라엘에 서 귀족들이 입던 옷)을 지어 준다. 그리고 요셉은 형제와 가족 전체에게 절을 받는 이상한 꿈을 거듭 꾸어 형들의 질시를 받는다. 어느 날 야곱은 양치는 형들에게 갔다 오라고 요셉을 파견하는데 형들은 요셉을 죽일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르우벤과 유다의 개입으로 요셉은 이집 트로 가는 이스라엘 상인들에게 팔려 간다. 제2부(39-41장) : 세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다. 파 라오의 신하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 간 요셉은 하느 님의 은총으로 신분이 상승되어 주인의 최고 대리자 역할까지 하게 되었으나 그를 유혹하다가 실패한 보디발 부인의 농간으로 감옥에 갇힌다(39, 1-20). 그러나 감옥 에서도 신분이 상승되고, 파라오의 두 시종장의 꿈을 해 몽해 주고 해방을 희망하지만 그의 청(請)이 망각되어 인간 세상에서 완전히 끊긴, 가장 비참한 처지에 머물게 된다(39, 21-40, 23). 그러나 어느 날 파라오의 꿈을 해 몽하게 됨으로써 파라오의 최고 대리자, 곧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어 전국의 곡식을 관리하게 된다(41, 1-36). 요 셉은 같은 구조로 이루어지는 두 번의 신분 상승과 하강 후에 눈부시게 상승되는데, 이 상승이 매번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그리고 요셉의 해몽처럼 7년 풍작 후에 엄청난 기근이 시작된다. 제3부(42-46장) : 여행이라는 틀 안에 세 개의 에피소드가 연결되어 있다. 가나안까지 기근이 들어 야곱은 베 냐민을 제외한 열 아들에게 곡식을 사오라고 이집트로 파견한다. 그리하여 형제들이 만나지만 요셉만이 형들을 알아본다. 요셉은 그들을 무고하게 책잡아 감옥에 넣고, 형들은 이를 계기로 자신들이 과거에 요셉에게 저지른 죄를 상기하고 통회하기 시작한다. 요셉은 베냐민을 데 리고 오는 조건으로 형들에게 곡식을 주어 돌려보낸다. 기근이 더욱 심해지자 야곱은 마지못해 베냐민까지 보내 어 곡식을 사오라고 하는데, 요셉은 은잔을 베냐민의 곡식 자루에 넣어 혐의를 씌워 사랑하는 동생을 체류시키려 한다. 그러나 유다의 절절한 상소를 받은 요셉은 마침내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형들의 두 번에 걸친 이집트로 의 여행(42, 1-38 ; 43, 1-44, 17)은 그들의 두 번에 걸 친 내적 하강이라 할 수 있는 어두운 빛깔을 띠고, '야곱 의 명령-요셉과 형제들의 2번 만남-형들의 통회와 요 셉의 울음-곡식과 함께 몰래 돈을 돌려줌-돌아온 돈 (그리고 은잔)에 대한 놀람과 과거 죄의 상기(하느님을 두려 워함)' 라는 거의 같은 구조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세 번째 여행(45, 8ㄴ-46, 30)은 온전히 밝은 것이 된 다. 이 여행은 요셉의 정체를 알고 난 후 마음놓고 하는 여행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온 가족이 기근을 영구히 면할 수 있고 또한 요셉과 영광을 같이 나누게 될 전폭적 이주 여행이기 때문이다. 제4부(47, 1-50, 14) : 역시 비슷한 구조를 지닌 세 개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요셉의 지혜가 어떻게 모든 일 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그로 인해 야곱 가문의 신분이 어 떻게 점차적으로 상승되어 최상의 영예를 얻게 되는지를 은유법이나 말 고리 등을 이용한 섬세한 문학 기법으로 보여 준다. 요셉은 애초 자신의 계획에 따라(45, 10), 그 러나 파라오의 자발적 협조를 유발시키며(47, 6), 가족을 고센 땅에 정착시키고 형들을 이집트의 목축장(牧畜長) 으로 만든다. 아울러 파라오의 이상적 수명인 110세를 훨씬 능가한 유목민 족장 야곱은 파라오를 축복함으로써 히브리 민족의 우월성을 은연중에 드러낸다(46, 31-47, 12). 한편 요셉은 이집트인들의 사유 재산을 극심한 가 뭄이라는 기회를 통해 없애고, 이집트 고유의 원칙대로 토지를 파라오의 것으로 만드는 동시에 파라오와 백성 모두의 욕심을 제한 시기는 오분의 일조 세제(稅制)를 만들어 어떠한 어려움에도 전 이집트가 살 수 있는 영원한 해결책을 마련해 준다(41, 34-36 참조). 가뭄 중 요셉 의 대민(對民) 활동을 요약한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은 47 장 17절의 동사로 '양식을 내주었다' 로 의역된 '나할' (נָהָל, 조심하여 인도하다)이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에 따르면, 현대 독자의 섣부른 판단으로는 잔인해 보이는 요셉의 정책이 실상 그 백성들에게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목자의 보살핌과도 같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집트인들은 자진하여 자신들의 자유와 땅을 파라오에게 팔았으 며, 7년 간의 가뭄 속에서도 기적적으로 종자를 보존해 준 요셉을 생명의 은인으로 고백한다. 한편 온갖 가축을 다 파라오의 몫으로 받은 요셉의 정책은 국가 목축장(國 家牧畜長)인 형들을 더욱 부강하게 했음은 물론이고, 그 의 가족은 이집트의 최고 계열에 속했던 사제와 같이 땅 의 주인이 되어 그들의 자유롭고도 영예로운 신분을 드 러내었다(47, 13-26). 마지막 에피소드(47, 27-31 ; 50, 1-11. 14)는 이스라엘의 죽음을 다룬다. 시체를 방부 처 리하는 것, 그리고 온 이집트인들이 놀랄 만큼 오래 애도 하는 것은 그의 죽음이 한 가장(家長)의 죽음을 훨씬 넘 어서는 것임을 보여 준다. 장례 행렬 또한 국제적이 되어 파라오의 장례를 능가할 만큼 호화로운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2부에서 히브리인 요셉의 신분이 세 번 영예로이 상승하였다면, 4부에서는 야곱의 가족 전체가 세 번 영 예로이 놀라운 상승을 했다고 보겠다. 제5부(50, 15-26) :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부분이다. 야곱의 죽음 후, 형제들의 두려움은 되살아나 자신들이 가장 겁내고 증오하던 종의 신분을(37, 8 ; 43, 18) 자청하며 요셉에게 죄의 용서를 청한다. 그러나 요셉은 울면 서 용서는 하느님의 것임을 확언하고 다시금 하느님 섭 리의 빛 안에서 역사를 해석한다. 이제 남은 일이 있다면 형제들이 이미 들었던 요셉의 용서(45, 5-8)와 지금 그들 을 향한 위로와 희망에로의 초대(50, 21)를 마음으로 신뢰하며 받아들이는 것뿐인데, 작가는 그 대답을 각 이스 라엘 독자에게 열어 놓고 있는 듯하다. 맺음말(50, 2223. 26)로 요셉의 복된 죽음을 기술하고 있다. [신학적 성찰] 요셉의 꿈 : 요셉의 꿈(37, 5-11)은 매 우 중요하다. 그 꿈이 형들이 행한 살인 음모의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천부적 꿈풀이꾼인 요셉에 의하면 꿈의 원천은 하느님이다. 꿈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리며, 꿈 의 해석은 각각의 상징이 제시하는 '의미를 따라서' 해 야 할 뿐만 아니라(40, 5 ; 41, 11. 12) 하느님 혹은 하느 님께서 알려 준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이는 2부에서 그대 로 증명되었다. 그런데 처음에 요셉의 꿈을 해몽한 사람 은 누구였던가? 그의 가족들은 꿈을 의미에 따라 해석하 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직 자신들이 엎드려 절하는 장면에만 마음을 빼앗겨 절을 하는 이유를 알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 해몽의 진가는 의심스럽다고밖에 볼 수 없다. ① 첫 번째 꿈 : 기근이 시작되어 요셉의 형들이 요셉 에게 절했을 때(42, 6), 독자는 쉽게 이 장면을 요셉의 꿈과 연결 짓게 된다. 무엇보다도 요셉 자신이 그 순간에 옛 꿈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42, 9) 그들이 만난 장소, 곡식을 사고 파는 마당은 '곡식단이 쌓였던 밭' 을 연상 시킨다. 다른 꿈의 상징들(빵과 새의 먹이=빵을 굽는 시종 장의 운명, 포도와 잔을 바침=술잔을 드리는 시종장의 운명, 소 [씨 뿌림, 밭 일굼과 경작]와 이삭[추수]=농경 문제)을 참고할 때 '곡식단' 은 가뭄 중에 요셉이 공급할 양식을 의미한 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강렬한 접합점은 형제 들의 '절' 이다. 그들은 요셉의 곡창에서 곡식을 공급받 고자 절한 것이다. 사실 형제들의 2차 여행에서는 베냐 민까지 합쳐 온 형제가 그에게 절했다. 그렇다면 요셉의 첫째 꿈은 그 의미에 따라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 다. 그런데 요셉이 형들에게 자기 정체를 밝힌 후 하는 짧은 이야기(45, 5-8)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이야기 는 이제껏 무슨 일이 일어났고 또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 한 요셉의 첫 언급인데, 요셉이 파라오의 꿈을 해설할 때와 비슷한 형식을 따르고 있다. 하느님께서 가뭄을 미리 내다보시고 형제들의 종족을 살리기로 계획하셨으며, 그 계획의 실현 방법으로 요셉을 이집트 통치자로 만드시어 양곡을 공급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셉의 이 말은, 천부적 꿈풀이꾼인 요셉이 자신의 첫 번째 꿈을 풀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꿈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일찍이 요셉의 꿈을 통해 알려 주신 것이 다. 섬세한 감성을 지닌 요셉은 형들에게 고통스러운 과 거를 떠올리게 해주고 싶지 않아 꿈에 대한 명확한 언급 을 피하고 이를 설명한다고 보겠다. 그러면 첫째 꿈은 언 제부터 실현되기 시작하였는가? 이집트에서 열두 형제 들의 만남은 그 전의 사건 없이는 불가능하고, 그 전 사 건은 그 이전의 사건 없이는 불가능하다. 사건들의 이러한 연속적인 고리는 야곱이 요셉을 형들에게 파견할 때 까지 이어지며 그 직전의 사건이 바로 요셉의 이중 꿈인 것이다. 그러므로 2부의 다른 꿈들처럼 요셉의 첫 번째 꿈도 꿈꾼 후 즉시 실현을 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1, 32 참조) . ② 두 번째 꿈 : 학자들은 흔히 해와 달과 별의 상징을 황도 십이궁(黃道十二宮)이나 월신(月神) 마르두크(Marduk, 목성)에 연결시켜 해석함으로써 요셉을 신화적 인물 에 비교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하는 근동의 신화들을 요셉의 꿈과 자세히 비교해 보면 전혀 다르다는 것이 드러난다. 해와 달과 별들이 별 하나에게 절하는 경우란 찾아볼 수도 없고, 정황들도 너무나 다르다. 또한 요셉 이야기에는 신화적 요소가 전혀 나타나지도 않는다. 오히려 성서 밖 자료보다는 해, 달, 별에 대한 구약 성서적 안목이 참조가 될 것이다. 구약성서에 해와 달과 별이 같이 나타나는 곳은 13군데로써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지만, 공통점이라면 이 천체들은 하느님의 창조물 중 더 뛰어나고 하느님 가까이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탁월한 사람들을 이에 비유하기도 한다(다니 12, 3). 사실 이스라엘 종족의 탁월함은 이야기의 4부에서 충분히 드러났으며, 야곱은 자기 가족을 '하느님의 종(신 하)들' 로 표현한다(50, 17). 이는 어느 민족보다도 하느님 가까이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인간으로서는 가장 영 예로운 신분이라 하겠다. 또한 성서 본문은 형들은 물론 (50, 18) 야곱도 요셉에게 절을 했다고 알려 주기에(47, 31 : 우리말 공동 번역은 의역을 하였음) 요셉의 두 번째 꿈 도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야곱이 요셉의 꿈을 해석할 때 천체를 자신의 가족에 비겼는데, 비록 요셉을 꾸짖기는 하였지만 그의 해몽은 옳았던 것이다. 야곱이 임종 직전 침대에서 절하는 장면의 유일한 병행문(1열왕 1, 47)을 보면 다윗은 임종 직전 하느님께서 자신의 일생 동안 베 푸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절한다. 성서 본문은 '역할 중 첩' 이라는 문학 형식을 통해 여러 모양으로 야곱이 요셉 을 하느님의 대리자(使節)로 알아들은 것을 암시해 준다. 야곱은 요셉의 꿈 이야기를 마음에 품어 간직했었기 에(37, 11) 자신이 보고 들은 모든 사건을 그 꿈에 연결 시킬 수 있었고, 마침내 지상에서 온갖 소원을 다 채운 후 일생 동안 입은 은혜에 감사하며 자기 곁에 있는 대리 자를 통해 하느님께 절한 것이다. 더불어 "내가 하느님 의 자리에 있기라도 하단 말입니까?"(50, 19)라는 말로 미루어 볼 때, 형들의 마지막 절의 의미도 같은 맥락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야기의 끝에 요셉이 형들에게 하 는 두 번째 신학적 대담이 나온다(50, 19-20). 이 말은 요셉의 두 번째 꿈에 대한 풀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야기 전체, 특별히 요셉의 두 꿈과 함께 볼 때에 의미가 더욱 잘 드러난다. 요셉은 자신의 첫 번째 꿈을 해설할 때 가 뭄과 (죄지은) 형제들의 종족과 관련시켜 생명 보존의 문제를 다루었다(45, 7-8). 이번에도 그는 '생존' 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특별히 '큰 백성' 이라며 자기 종족 전체 의 특수 신분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큰' 이 란 양적 · 질적 차원을 다 포용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니, 번성하는 위대한 한 민족을 만들기 위해서 하느님은 두 단계의 작업을 거치셔야 했던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가뭄은 죄지은 당신 백성을 벌하고 정화 시키는 하느님의 도구로 자주 사용되었다. 사실 그 가뭄 이 형제들을 필연적으로 만나게 하였다. 그 과정에서 온 가족 성원은 각각 '구덩이/ 감옥/ 세올로의 하강' , '옷을 찢음' , 그리고 '울음/ 부르짖음' 이라는 같은 종류의 고 통을 체험하면서 정화되어 갔고, 동시에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맡기는 것을 배우며 성숙하여 마침내 영 광스러운 '하느님의 종들' 이 되기에 합당하게 된 것이 다. 그러므로 첫째 꿈의 실현은 둘째 꿈의 실현을 위한 준비, 곧 전제 조건이었고, 요셉의 꿈은 둘이지만 하나로 이어지는 것이다. 둘째 꿈은 첫째 꿈의 실현 후 즉시 실 현되기 시작했다. "하느님께서 나를 파라오의 아버지로, 그 온 집안의 주인으로, 그리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셨습니다" (45, 8)를 고리로 두 꿈이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야곱 가족의 이집트 이주는 곧 그들 신분의 상승 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야곱이 죽을 무렵 절정에 달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면, 이교 세상 을 대표하는 파라오의 꿈과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요셉의 꿈이 모두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셉 의 것에 파라오의 것이 포함된다. 기근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은 파라오의 꿈 안에 구체적으로 제시되었지만, 사 실 이는 요셉의 첫째 꿈 안에 이미 배아로 존재하였다. 하느님은 '이집트인들' 과 '이스라엘' 두 무리 모두에게 생명을 주려 하셨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서 이집트인들과 그들의 땅을 이용하셨으며, 이집트는 물론 온 세계가(41, 57 참조) 이스라엘인이 지닌 신적 지 혜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하셨다. 작가는 이집트인이 극 심한 고통을 겪은 햇수가 요셉과 그 가족의 것과 똑같은 2년(41, 1 ; 45, 6)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이 상징적 숫 자는 그들이 느낀 고통의 심도가 같았다는 점 외에도 이 집트인들이 자생을 넘어 공존 공생으로 나아가는 정화의 시기를 겪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요셉 이야기 전체는 '구원사' 라는 신적 지혜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느님이야말로 진짜 계획하시는 분이요 숨은 주인공이다. 요셉의 이중 꿈은 바로 이 구조의 선포였다. 이야기의 처음(37, 5-7. 9)부터 끝(50, 19-21) 까지 뻗어 있으면서, 이것은 부수적 구조들인 2, 3, 4부 를 결합시킨다. 이 세 부가 각각 거의 같은 구조와 같은 길이[量]를 가진 것은, 그 모두가 하느님께 똑같이 중요했고, 하느님 고유의 계획을 따라 하나씩 이루어져야 했던 것을 의미한다고 보겠다.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 시는 하느님께서는 무턱대고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단계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구원사를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다스리는 이 · 섬기는 이 : "네가 우리의 임금이라도 될 셈이냐? 네가 우리를 다스리기라도 하겠다는 말이 나?" (37, 8) 살인을 계획할 정도로 요셉의 형들이 가장 혐오하고 두려워한 것은 종노릇하며 섬기는 것이었다. 그에 못지않게 철없는 어린 요셉은 자신이 별 중의 하나 인지 아닌지 말하지 않은 채 마치 하느님인 양 다스림의 기쁨을 은근히 표현했었다. 높낮이를 다투는 것, 이것이 야곱 집안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 결과 종살이의 고생을 톡톡히 한 요셉은 응어리져 복수에 찬 마음으로 다시 만난 형들을 괴롭힌다. 하지만 마침내 형들을 용서하고 아버지의 죽음 후에는 오히려 위로하며 새로이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변화시켰을까? 요셉 에게 형들과 다른 면이 있다면, 그는 특별히 하느님의 시각으로 과거를 반추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41, 51-52 : 45, 5-8 : 50, 19-21). 요셉은 자신이 겪은 온갖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뿐 아니라 자기 민족이 살아남아서 입은 모든 영예가 다 선 하신 하느님의 섭리였음을 깨닫고 마침내는 역사 안에서 '큰 백성' 이라는 미래를 발견한다. 그들 민족은 모두가 한 조상의 후예로서 '하느님의 종들' 이란 귀한 신분을 지녔으며, 자신은 형들보다 높은 신분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사를 위해, 또 자신의 가족을 위해 특수 역할을 부여받았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처음엔 가족 모두가 신분과 역할을 위치의 높낮이와 혼 동했었고, 요셉이 자신의 역할을 처음 발견했던 때는 역할 수행을 위해서 주어진 권력 때문에 혼동이 있었다. 마치 어린 시절에 꿈 이야기를 할 때처럼 그의 어조는 영화 를 입고 있는 자로서의 자의식이 가득했던 것이다(45, 12-13). 그러나 이집트에서 가족과 함께 살며 그들이 받 는 모든 영광을 보고 요셉은 마침내 신분과 위치의 구분 을 선명하게 할 수 있었다. 높으신 분은 역사의 주재자이신 하느님 한 분이시라는 것, 그리고 지도자란 하느님 백 성을 돌보기 위한(50, 21 참조) 그분의 도구라는 것! 그 리하여 요셉은 인생 행로의 의미를 잘 알아들은 만큼 죄 의 사슬과 복수로부터 탈피하였고, 마침내 자신을 한껏 낮추어 형제들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사실 이 겸허야 말로 용서의 깊은 차원으로써 자신이 부정을 하든 안 하든 하느님의 대리자로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50, 19). 하느님의 구세사와 자기 민족의 특수 신분, 그 리고 하느님께 선택되고 파견된 지도자의 역할에 대한 이러한 요셉의 이해는 사실 구약의 백성 이스라엘인들의 정신 안에 면면히 흘러내려 왔고 마침내 신약 시대의 예수에게까지 이어진다. 예수는 '하느님께 파견받은 자' 로 서 섬김과 돌봄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확연히 드 러냈다. 그리고 '하느님의 새로운 종들' 인 당신 제자들에게 세상의 왕이나 주인이 다스리는 것과 달리 섬김으 로써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증거하도록 가르쳤다(마르 10, 42-45). 따라서 하느님 백성의 지도자에게 섬김이란 인간의 종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동기(同 氣)요 착한 목자로서 하느님의 백성을 이끌어 가는 하느 님의 종으로서의 귀한 신분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요셉 전승에 대한 재고] 몇몇 학자들은 요셉 이야기가 유혹을 물리치고 무고히 죄를 뒤집어쓰는 주제를 다 룬 '두 형제 이야기' 나 다른 종류의 이집트 민담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화적(偶話的) 요소가 전혀 없이 현실감을 불러일으키는 생동감은 정묘한 예술성과 더불어 이 작품이 천재적 창의성에서 나온 열매임을 드러낸다. 따라서 얼마만큼의 역사성이나 전승을 깔 고 있던 간에 창세기에 나타나는 요셉 전승은, 많은 학자들이 정의하는 대로, '짧은 소설' (Novella)이라는 문학 형식에 속한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쓴 목적은 무엇일까?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연결하기 위한 다리' (Coats)라 하기에는 이야기 자체가 내뿜는 메시지가 너무 강하다. 뿐만 아니라 다른 성조사나 출애굽기에 나타나는 '성조에게 주신 약속과 축복' 및 '조상들의 하느님에 대한 언급' 이 여기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다수의 학자들이 이야기의 주제로부터 목적을 추적하여 '지 혜를 아는 이상적인 관리자의 상을 제시하기 위한 것' (von Rad), 혹은 '가족 분쟁과 화해 문제 및 가족 중심 사 회에서 왕정으로 옮겨가며 과연 형제를 지배할 수 있는 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기 위한 것' (Westermann) '신적 섭 리의 인도에 대한 신앙 고백' 등 여러 가지 주장을 한다. 하지만 다양한 주제가 나름대로의 비중을 가지고 서로 얽혀 있어 그 어느 것 하나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이야기가 저술되던 당시의 사회 · 정치적 배경이 이러한 다중적 메시지들을 선포할 필요성을 갖지 않았겠는가 추 측할 따름이다. 요셉 이야기가 언제 쓰여졌느냐에 대한 학계의 의견도 매우 다양하다. 가장 많이 대두되는 것은 다윗-솔로몬 시대인데, 이 이야기가 궁중 지혜 문학의 성격을 지녔다는 것과 당시 사회 · 정치상을 반영한다는 것이 주된 이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지혜 문학은 다윗-솔로몬 시대 이후에도 계속 활기를 띠며 발전해 왔고, 사회 · 정치상의 이유라는 것도 설득력이 약하다. 오히려 형제들 중 가장 부각되는 주인공 요셉이 북부인들 의 직접적 성조라는 점, 그리고 북부 쪽이 남부보다 이집 트 전승에 더 친숙했다는 점을 우선 생각해야 한다. 또 한, 유다를 의식하며 형제간의 화합을 중시하는 점, 나라 경제에 관심을 가지며 요셉의 국제 결혼을 떳떳이 이야 기하고 이교 사제들일지라도 높이 존중하는 점, 비록 이야기의 배경은 희소스 시대로 삼았을지라도 이야기 안에 기술된 이집트식 이름과 관습은 기원전 8~10세기의 것 들임을 참고할 때 기원전 9세기 북이스라엘 오므리 왕가의 통치 시대와 훨씬 잘 어울린다 할 수 있다. 사실 이 시대에 북이스라엘은 처음으로 왕권의 안정을 얻고 경제 적 번영을 누렸으며, 종교 관용주의를 채택하고 국제적으로는 화친 정책을 썼다. 특히 남부 유다 왕국과의 유대 수립에 적극적으로 노력했으며, 사마리아 궁을 건축하여 후일 사치와 예술로의 길을 열었다(아모 6, 4-5 참조). 그렇다면 이때는 왕실이 문학 창작을 지원해 줄 만한 능력을 가지기도 했을 것이다. 특히 그것이 나라의 정책을 옹호할 수 있었다면 더욱 권장할 만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셉 전승의 역사적 자리 매김은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본다. (→ 열두 지파 ; 창세기) ※ 참고문헌 E.J. Bae, A Multiple Approach to the Joseph Story, Dissertation, Rome, Pontifical Gregorian Univ., 1994/ E. Blum, Die Komposition der Vatergerobicha(WAMANT 57), Neukirchen-Vluyn, 1984/ G.W. Coats, From Canaan to Egypt. Structural and Theological Contexfor the Joseph StoryCBQMS 4), Washington, 1976/ G. von Rad, Genesis, 9 Aufl. Gättingen, 1972(박재순 외 역, 《창세기》, 한국신학연구소, 1981). 〔裵銀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