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아
[히]יֹאשִׁיָּהוּ · [라]Iosias · [영]Josi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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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남부 유다의 왕(기원전 640~609). 고대 근동의 격변기 에 외세로부터의 정치적 독립 운동과 신명기 정신에 입각한 종교 개혁을 주도한 인물. [개혁의 배경]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기원전 722) 직후 남부 유다로 유입된 원(原) 신명기의 가르침을 중 심으로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개혁을 시도한 바 있던 히 즈키야(기원전716-687, 2열왕 18-20장)를 계승한 므나쎄의 통치 시기(기원전 687~642)는 주변 열강의 세력이 절정에 다다랐던 시기였다. 북왕국을 멸망시킨 아시리아는 아슈르바니팔 시대(기원전 669~630)에 최강국으로서의 위용을 자랑했고, 이집트의 부흥을 부르짖고 일어선 제 25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타르하카(기원전 685~664) 또 한 팔레스티나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으려 노심초사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때 므나쎄는 친(親)아시리아 정책을 취하는데, 이는 결국 히즈키야의 개혁 기반을 무너뜨 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로 인해 종교 개혁의 신학적 근거가 되었던 문서들은 종교적 가치를 상실하였으며, 예루살렘 성전의 한 구석에 방치된 채 요시아 시대까지 이르게 된다. 므나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몬 시대(기 원전 642~640) 역시 종교적 혼란만을 거듭했던 시대였다 (스바 1, 8-11). 이 무능한 아몬 왕은 지배 계급 사이의 권력 투쟁에서 희생양이 되고 마나(2역대 33, 24), 이때 부터 위기 극복의 새로운 기운이 움트기 시작한다. 민중 세력의 꾸준한 성장은 므나세와 아몬 시대 지배자들의 시대착오적 민중 착취를 언제까지나 허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라 백성이 아몬 임금을 거슬러 모반한 자들을 모두 쳐죽이고,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요시아 를 임금으로 세웠기"(2열왕 21, 23-24) 때문이다. 즉 요시아는 지배 계급의 착취 대상이었던 일반 백성이 봉기 하여 왕위에 오르게 된 예외적 인물로 소개되고 있으며, 이때 어느 정도 개혁 세력이 함께했으리라 추정한다. 아무튼 요시아의 등극과 함께 정치적 · 종교적인 개혁의 필요성은 다시 한번 입증된 셈이다. [정치적 개혁] 요시아의 업적에 관한 열왕기의 보도(2 열왕 22-23장)와 역대기의 보도(2역대 34-35장) 사이에는 다소 차이점이 발견되나 개혁의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일치하고 있다. 요시아는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2열왕 22, 1 ; 2역대 34, 1) 왕직 수행에 어려 움이 많았으리라 추측된다. 그러나 요시아의 등극이 민중 세력의 지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어린 왕을 보필 했던 세력이 배후에 있었을 것으로 본다. 아울러 이 시기 아시리아는 국내 문제로 말미암아 팔레스티나에 관심을 쏟을 여력이 없었던 시기였으므로, 요시아는 성년이 되 기까지 왕직을 유지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결국 재위 12년 그의 나이 20세가 되었을 때 요시아는 전면적인 개혁에 착수하였고, 나아가 아시리아 제국에 병합된 북이스라엘 영토의 상당 부분을 탈환하기에 이른다. 물론 요시아는 여전히 아시리아의 봉신(封臣)으로 머물면서 이와 같은 북진 정책을 단행하여 남북 이스라 엘의 통일과 독립을 시도해 나갔다. 하지만 아시리아는 이를 응징할 힘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요시 아가 아시리아의 최대 적대국이었던 이집트와 결탁하는 것을 막는 일이 급선무였으므로 아시리아로서 이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북이스라엘의 주민들 역시 이 러한 정치적 변화를 환영했을 것이기에 요시아는 아무런 저항 없이 자신의 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여하간 요시아 의 정치적 개혁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 아시리아는 멸망 직전에 있었고, 유다는 명실상부한 자유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었다. [종교적 개혁] 요시아의 이와 같은 정치적 개혁의 바 탕에는 그의 철저한 야훼 신앙이 자리하고 있었다. 요시 아는 예루살렘 성전 보수 공사를 명하며, 공사 도중 율법서' (2열왕 22, 11 ; 2역대 34, 14) 또는 '계약서' (2열왕 23, 2) 한 권이 발견됨으로써 본격적인 종교 개혁에 착수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익명의 책이 발견되기 전 요시아는 이미 성전 보수를 명했다는 사실 자체가 요시 아의 개혁이 단계적으로 진행되어 왔음을 말해 준다. 이 공사는 단순한 보수 공사가 아니라 이방 잡신의 우상을 제거하기 위한 공사였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 서 요시아의 야훼 신앙이 정치적 개혁과 종교적 개혁의 바탕을 이루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전에 서 발견된 이 '율법서' 또는 '계약서' 는 도대체 어떤 책 을 가리키는가? 이 책은 분명 지금의 신명기의 근간을 이루는 작품일 것이다.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직전 편 집되어 그 완성을 보지 못한 채 남부 유다로 유입된 작품이다. 그리고 히즈키야의 종교 개혁의 기초가 되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므나쎄 시대 이후 성전 한구 석에 방치된 율법서의 일종으로 본다. 원(原) 신명기라 일컫는 이 작품은 특히 신명기의 핵심인 신명기 12-26 장의 골격을 이루는 것으로 보며, 이는 요시아의 종교적 개혁이 이 본문의 내용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종교적 개혁의 대표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요시아는 예루살렘 성전과 인근의 성소(聖所)를 정화하는 작업으로 개혁에 착수한다. 이 가운데 민족주의자들 눈에 가장 저주스러운 존재였던 아시리아의 우상들이 제일 먼저 처리되었을 것이다. 이 우상들과 함께 유다의 왕들이 우상 숭배를 위하여 임명하였던 사제들과 기물들, 여인 네들이 우상 숭배에 쓰이는 천을 짜기도 했던 신전 남창 들의 거처 등이 철저하게 제거된다(2열왕 23, 4-7). 또한 몰록의 제물로 어린아이들을 제물로 바치거나 봉헌하기 위하여 힌놈의 골짜기에 설치해 놓았던 도벳, 태양신을 숭배하기 위해 마련해 놓았던 기마와 수레 형상들, 이방 잡신들인 아세라 · 바알 · 아스다롯 · 그모스 · 밀곰 등의 신상들을 예외 없이 파괴시켜 나갔다(2열왕 23, 10-14) 그러나 이와 같은 예루살렘과 인근 성소의 정화 작업 외 에도 이 작업은 유다 전역으로 확대되어 나갔다(2열왕 23, 8-9). 게바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유다 전역으 로 확대된 정화 작업의 구체적 내용은 분명하지 않으나, 요시아는 유다 성읍 전역에서 우상을 받들던 사제들을 내쫓았으며(2열왕 23, 5), 나아가 야훼를 섬기던 성소들 에 대해서도 동일한 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야 훼 신앙을 위한 장소라 할지라도 예루살렘 성전을 제외 하고는 지방의 모든 성소를 폐쇄하는 결단을 내린 것으로 추정된다. 제의의 중앙 집중화라 일컬을 수 있는 이와 같은 조치는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감독과 제재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는 이들 지방 성소에서 종종 우상 숭배 또는 야훼 신앙의 우상화와 같은 혼합주의가 빈번했기에 야훼 신앙의 순수성을 보전하기 위해 내려진 결단으로 보인다. 요시아의 개혁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력 을 앗아 간 종교적 혼합주의를 방치한 상태에서는 출애 급과 시나이 계약을 잊고 살다가 멸망한 북왕국의 전철 을 밟을 수밖에 없다는 절박감에서 단행된 조치였다. 이 점에서 계약의 역사를 되새기기 위해 오랫동안 경시되어 왔던 과월절 축제가 다시 그 중요성을 되찾게 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2열왕 23, 22-23). [개혁의 결과] 요시아의 개혁은 남부 유다의 종교적 삶과 의식에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을 것이다. 특히 예언 자들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따르고 모세의 계약 신앙을 부흥시키려 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었을 것이다. 요시 아 시대에 활발한 예언 활동을 펼쳤던 예레미야도 요시아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예레 22, 15-16). 그러나 이 개혁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불가분 의 관계에서 펼쳐진 운동이었기에 문제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이 개혁 운동은 우선 외국의 지배에 저항하던 민 족주의 정신에 입각한 것으로써 외국의 지배가 계속되던 동안에만 그 활기를 찾을 수 있었다. 또한 정치적 수도로 서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통일 왕국을 재건하려는 원대 한 꿈을 바탕으로 이 개혁이 단행되었다는 점도 종교적 가치를 실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기원전 640년 서진 정책을 추진 중인 바빌로니아를 견제할 목적으로 쓰러져 가던 아시리아를 지원하고자 출정 길에 오른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와의 전투에서 요시아가 갑작 스럽게 사망하자, 통일 왕국 건설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사라졌고 이 개혁은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단지 요시아에 대해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마음 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께 돌아온 임 금은 그 앞에도 없었고 그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았다" (2 열왕 23, 25)는 평을 내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 신명기 ; 열왕기 ; 이스라엘) ※ 참고문헌 J.R. Lundbom, The Law Book of the Josian Reform, 《CBQ》 38, 1976, pp. 351~371/E. Würthwein, Die josianische Reform und das Deuteronomium, (ZTK) 73, 1976, pp. 395~4231 W. Dietrich, Josia und das Gesetzbuch(2 Reg. XXII ), 《VT》 27, 1977, pp. 13~35/ H. Cazelles, Histoire politique d'Israel, Ancien Testament-1, Paris, Desclée, 1982/ J. Bright, A History of Israel,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3rd ed., 1981(박문재 역,《이스라엘 역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9). 〔金建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