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아킴, 플로라의 Joachim de Floris(1132~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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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요아킴의 저서 (요한의 묵시록 설명> 필사본.
시토회 수도원 원장. 신비주의자. 신학자. 역사 철학 자. 이탈리아어 이름은 조아키노 다 피오레(Gioacchinno da Fiore) . [생애 및 활동] 1132년경 나폴리 왕국 칼라브리아 (Calabria)의 헬리코(Celico)에서 출생하였다. 요아킴의 아버지는 노르만인들이 다스리던 시칠리아에서 고위직에 있었다. 아버지 덕분에 젊은 나이에 궁정에서 일을 하던 요아킴은 팔레스티나 성지로 순례를 떠났고, 순례 중 에 엄청난 재난을 목격하고는 세속을 떠나 수도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사순 시기를 타보르 산에서 묵상하면서 지냈는데, 그때 자신이 살아야 할 삶에 대해 계시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요아킴은 1159년경 삼부치나(Sambucina)의 시토회에 입회하였다. 그러나 한동안 수도복을 입지 않고 평신도로서 설교 활동에 전념하였다. 이런 그의 생활 방식은 주변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는 결국 코라초(Corazzo)에 있는 수도원에서 착복식을 하였고, 1168년에는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성서에 숨 겨진 의미를 해석하는 데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성서 연구에 몰두하였다. 1176년에 요아킴은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수도원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원장직이 자신의 수 도 생활에 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1182년 교황 루치오 3세(1181~1185)에게 청원하여, 원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요아킴은 카사마리(Casaman)에 있는 수도원에서 생활하면서 설교와 집필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 후 피에트랄라타(Pietralata)의 은둔소에서 생활하다가, 마침내 칼라브리아 산중의 플로라(Flora, Fiore)에 수도회 를 설립하였다. 1198년에 교황 철레스티노 3세(1191~ 1198)로부터 인준을 받은 이 수도회는 시토회 중에서 새 롭고 더욱 엄격한 분파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1202년 3월 30일 이 수도원에서 사망하였다. [저서 및 사상] 요아킴의 집필 작업은 1185년에 교황 우르바노 3세(1185~1187)에 의해, 그리고 또 1187년에 는 교황 글레멘스 3세(1187~1191)에 의해 지체하지 말고 집필을 마무리할 것이며, 완료 후에는 교황청에 제출하 여 심의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허가를 받아 진행되었다. 마침내 요아킴은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세 권의 저서를 완성하였다. 그 저서들로는 우선 성서 주석서로 자신의 역사 철학을 2개가 짝을 이루는 형태로, 즉 역사의 위대 한 2가지 섭리인 신약과 구약을 조화시키는 방식으로 제시한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의 조화에 관한 책》(Liber concordie Novi ac Veteris Testamenti)이 있다. 그리고 《요한 의 묵시록 설명》(Expositio in Apocalypsim)을 통해서는 묵 시록에 반그리스도라는 상징으로 묘사된 악의 위기가 곧 닥쳐오고 그 뒤를 이어 영혼의 삶이 나타난다는 것을 증 명하려고 하였다. 또한 《10개의 줄이 달린 현악기》(Psalterium decem chordarum)에서는 십현금(十絃琴)을 통해 삼 위 일체설을 설명하고 있다. 이 저서들은 심의를 받기 위 하여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에게 정식으로 제출되었다. 그러나 교황청의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그는 사망하였다. 세 권의 저서들 속에 담긴 핵심 주제는 성서의 예언을 교회의 과거 역사와 미래와 관련 지어 해석하는 것이었다. 또한 요한 묵시록을 작위적으로 해석한 내용에 근거 를 둔 '영원한 복음' 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 내었는데, 이 가르침은 다소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그는 세상이 삼위 일체의 세 위격에 상응하는 세 단계로 진행된다고 보았다. 곧, 첫 번째 단계에서는 성부가 구약 성서의 질서에 따라 권능과 위엄으로 다스렸고, 그 뒤를 이어 두 번째 단계에서는 세기에 걸쳐서 감추어져 있던 지혜가 성자를 통하여 계시되었으며, 이것이 신약성서의 가톨릭 교회이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시대 곧 성령의 나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능가하고 초월하는 보편적인 사랑의 새로운 질서가 올 것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이제 두 번째 시대가 끝나고 있으며, 세 번째 시대가 1260년 에 몇 가지 대변동이 일어난 뒤에 실제로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되면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는 문자의 족쇄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영적 왕국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이고, 유대인들이 회개할 것이며 '영원한 복음'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존재할 것이라고 보았다. [사상의 영향 및 비판] 요아킴의 주장들 가운데 일부 는 1215년에 열린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단죄를 받 았다. 그렇지만 그의 주요한 가르침들은 중세기까지 별 다른 문제 없이 받아들여진 듯하다. 그는 콘스탄틴 대제 이전의 원시 교회(ecclesia primitiva)만이 교회를 세속화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원형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당 시의 교회는 사도적 단순함, 청빈에 대한 이상, 세상으로 부터의 격리가 특징인 원시 교회로 돌아가는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요아킴이 주장한 영적 교 회, 즉 현존하는 교황의 교회와 교대하게 될 '성령의 교회' 라는 이론은 13~14세기에 프란치스코회의 엄격주 의자들에 의해 널리 전파되었다. 그 와중에 요아킴의 추 종자들도 생겨났고, 예레미야서와 이사야서에 관한 주석 서들을 비롯한 많은 이단적 저작물들이 요아킴의 이름으 로 쏟아져 나왔다. 요아킴의 추종자들은 요아킴의 가르침을 더 확대시켜서, 신구약 성서는 사라질 것이며 요아 킴의 세 권의 책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영원한 복음' 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대신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가톨릭 교회의 사제직과 신약 성서의 모든 가르침은 곧 쓸모 없게 될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의 주장들은 1256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4세(1254~ 1261)에 의해 단죄받았다. 그의 핵심적인 가르침들은 토 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의 《신학 대 전》( I~II, Q cvi, a. 4)에서 논박되었고, 보나벤투라(Bonaventura, 1217?~1274)에 의해 비판받았다. 더욱이 요아킴 이 예견한 일들이 1260년에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는 사실이 요아킴의 추종자들에게는 결정적인 타격이 되 었다. 요아킴의 추종자들은 이후에도 자기들 나름의 주장을 펼치곤 하였으나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평 가] 요아킴은 그의 가르침 때문에 교회로부터 단 죄받고 비판받았으나, 수도자로서 거룩한 삶을 살았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가 사망한 후에도 그의 무덤 가에는 공경과 기도를 바치는 신자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종종 기적이 발생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단테(A. Dante, 1265~1321)는 요아킴이 당대에 '예언 자의 정신을 타고난' 사람으로 널리 일컬어졌다고 전한다. 그러나 요아킴은 생전에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예언자라고 불려지는 것을 철저히 사양하였다. (⇦ 조아키노 다 피오레 ; → 역사 철학) ※ 참고문헌 Edmund G. Gardner,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8, trans. by Alison S. Britton, Robert Appleton co., 1910(Online Edition by Kevin Knight, 1999)/ A. Franzen, Kleine Kirchengeschichte, Herder, Freiburg, 2000(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개정 증보판, 분도출판사, 2001). 〔李錫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