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안나, 발루아의 Joanna de Valois(146~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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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삼위 일체 신비를 체험한 요안나.
성녀. 프랑스의 왕비. 수도회 설립자. '프랑스의 요안 나' 라고도 불리는 이 성녀의 축일은 2월 4일이다. [생애 및 활동] 1464년 4월 23일 프랑스 파리에서 당 시의 왕인 루이 11세(Louis XI , 1461~1483)와 왕비 사보 이의 샤를로트(Charlotte de Savois, 1445~1483)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샤를 8세(Charles VIII, 1483~1498)의 누이이다. 기형으로 태어난 요안나는 아버지인 루이 11세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녀는 태어난 지 두 달이 되었을 때 오를레앙(Orléans) 공작과 결혼하기로 정해졌다. 그리 고 5세가 되었을 때 공작의 앙부아즈(Amboise) 성으로 보내져 궁중 예절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리니에르앙베 리(Lignière-en-Berry)의 영주인 프랑수아 드 보죄(Frangois de Beaujeu)와 안 드 퀼랑(Anne de Culan)에게 맡겨져 14 년 동안 양육되었다. 요안나는 어려서부터 죄짓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는 신심 깊은 아이였다. 고결한 심성을 지 닌 그녀는 홀로 지내는 것을 좋아하였고, 그런 까닭에 독 수 생활을 하는 수도원에 입회하길 원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소망은 주위의 조롱과 학대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요안나는 12세가 되던 해에 여러 가지 정치적인 정황 에 따라서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 후 오를레앙 공은 그녀를 무시하고 혐오했으나, 이러한 모진 대우들을 그녀는 고결한 성품으로 이겨내었다. 후에 오를레앙 공은 루이 12세(Louis XII 1498~1515)로 왕위에 오른 뒤, 자신 의 결혼은 루이 11세의 강제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무효 라고 선언하였다. 요안나는 그의 이런 주장이 타당하다고 인정해 주었다. 결국, 1498년 12월 7일 왕이 앙부아 즈의 생 드니(Saint Denis) 성당에서 결혼 무효를 선언함으로써 요안나는 왕비의 신분을 상실하였다.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 베리(Bery)의 공작으로 봉해 진 요안나는 자신의 영지를 왕국 안에서 가장 지혜롭게 운영하는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그녀는 가난한 병 자와 전염병 환자 구호, 주거 시설 복구, 가난한 일꾼들의 급여 인상, 여자 어린이들의 교육,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 기금 모금, 수도원 개혁 등을 계획에 따라 실천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업을 진행하던 가운데, 그 녀는 작은 형제회 회원이자 자신의 고해 사제였던 가브 리엘 마리아(Gabriel Maria) 신부의 도움으로 신심 깊은 10명의 여성들을 모아 관상 수도원인 '성모 영보 수녀 회' (Ordinis Sanctissimae Annuntiationis Beatae Mariae Virginis) 를 설립하였다. 요안나는 이 수도회를 운영하기 위해 자신의 성 가까 이에 수녀원과 경당을 지었다. 수녀회의 회칙은 1501년 2월 14일에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92~1503)의 승인을 받았으며, 1년 후 부르주(Bouges)에 두 번째 수녀원이 설립되었다. 이 수녀회는 엄격한 회칙에 따라 수도 생활을 하면서 병자를 돌보는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회칙은 회원들에게 복음서에 나오는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기사 에 담긴 열 가지의 덕을 닮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어 완덕으로 나아갈 것을 명하고 있다. 요안나는 자신이 세운 수녀원에서 1504년에 가브리 엘라 마리아(Gabriella Maria)라는 수도명으로 서원을 했 지만,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궁에서 살아야만 하였다. 남들이 모르게 많은 고행를 하면서 여러 번 신비로운 종교 체험을 하였던 그녀는 1505년 2월 4일에 부르주에서 사망하였다. 사망한 후에, 그녀는 수도복을 입고 머리에는 귀족의 관을 쓴 채로 부르주의 성모 영보 수녀원 경당 안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562년 5월 22일 프 로테스탄트 신자들이 그녀의 유해를 훼손시키고 불태워 버렸다. [공 경] 사후에 요안나에 대한 신자들의 공경 신심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1617년에 그녀를 시성시키려는 움 직임이 시작되었으나, 여러 가지 정치적인 사건으로 지연되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은 이러한 상황에 개의치 않고 그녀를 성녀로 공경했다. 또한 교황 인노첸시오 10 세(1644~1655) · 알렉산데르 7세(1655~1667) · 글레멘스 11세(1700~1721)도 여러 회칙에서 요안나를 성녀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요안나는 1742년 4월 21일 교황 베네 딕도 14세(1740~1758)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950년에 비오 12세(1939~1958)에 의해 시성되었다. ※ 참고문헌 M.J. Dorcy, 《NCE》 7, p. 993/ A. Girard, 《Cath》 6, pp. 670~671/ Mère Gabriel-Maria, 《DSp》 6, p. 18/ Les Bénédictins de Ramsgate réd., Dix Mille Saints Dictionnaire hagiographique, Brepols, Belgique, 1991, p. 285. 〔宋炯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