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안나, 아르크의 Joanna Ancensis(1412~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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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크의 요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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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크의 요안나.


성녀. 동정 순교자. 프랑스의 두 번째 수호 성인. 축일은 5월 30일. 성녀의 이름은 프랑스어로 잔 다르크(Jeanne d'Arc)이며, 당시 사람들은 '오를레앙의 성처녀(聖處女)', (La Pucelle d'Orléans)라고 불렀다. [생애와 활동] 요안나는 1412년 1월 6일 프랑스 동북 부의 상파뉴(Champagne) 근처에 있는 동레미(Domrémy) 에서 열심한 가톨릭 신자인 농부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요안나가 출생하던 시기는 백년 전쟁(1339~1453)이 한창 진행 중이던 때였다. 당시 동레미는 영국군의 침략으로 많은 피해를 받았다. 이 시기의 경험은 요안나가 조국애와 국왕에 대한 충성심을 신앙에 접목시킨 시기로 알려 져 있다. 후에 요안나가 한 증언에 따르면, 1425년 13세가 되던 무렵 대천사 미카엘이 성녀 가타리나와 마르가리타와 함께 나타나 부친의 집을 떠나 프랑스 군대의 사령관을 찾아가고 나아가 오를레앙을 점령하고 있던 영국 군대를 몰아내라는 '음성' 을 들었다. 그녀는 이 목소리를 하느 님이 보내신 것이라 생각하였으며, 그 '음성' 의 지시에 따라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다는 표시로 순결 서약을 하였다고 한다.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음성' 의 사실 여부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요안나가 화형을 당한 주요 이유인 이 '음성' 에 대해 심리학이나 정신 병리학에 서는 일종의 환각 증상으로 설명하나, 가톨릭 학자들은 하느님의 직접 계시로 이해하고 있다. 아무튼 이 신비 체험은 요안나의 삶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당시 부르고뉴 공작(1419~1467)인 필리프 3세(Philipe Ⅲ le Bon, 1396~1467)는 프랑스의 왕세자로 후에 프랑스 왕이 된 샤를 7세(Charles Ⅶ, 1422~1461)가 아버지의 암살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1420년 잉글랜드 왕 헨리 5세(1413~1422)와 트루아 조약을 맺었다. 이후 잉 글랜드와 부르고뉴 연합군은 프랑스 북부 전역을 거의 점령하였다. 한편, 전통적으로 왕위 즉위식을 거행하던 랭스가 적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왕세자인 샤를 7세는 정식으로 왕관을 쓰지 못하고 있었고, 이는 프랑스 왕위 주장의 정당성을 도전받게 만들었다. 1428년 5월에 그녀는 샤를 7세를 도와 부르고뉴가 영국과 동맹을 맺음으로 인해 영국의 영향하에 놓이게 된 오를레앙 지역을 탈환하고, 내전으로 분열된 프랑스를 국왕의 통치 아래에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이 하느님이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샤를 7세가 보쿨뢰르(Vaucouleurs)에 파견한 장군을 찾아가 프랑스를 위해 싸울 수 있는 허락을 요청하였으 나, 그는 요안나의 이야기를 무시하였다. 그 후 샤를 7세의 상황은 더욱 불리해져 갔다. 1428 년 10월 12일 그의 거점 지역인 오를레앙이 포위되었 다. 요안나는 다시 계시를 체험한 후 남장을 하고 로렌 공작 샤를 2세의 도움으로 무장한 여섯 명의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1429년 3월 시농(Chinon)에 피신해 있던 샤를 7세를 찾아갔다. 그녀는 샤를 7세의 최측근이었던 라 트레모유(la Trémoile)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샤를 7세 의 신임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군사 작전에 나서 기 전 푸아티에(Poitiers)로 가서 주교와 학자들 앞에서 최종적인 심문을 받게 되었다. 이때 요안나는 '음성' 의 진실성 여부에 대한 조사와 처녀성 여부에 관한 검사까 지 받아야 했다. 그 결과, 그 '음성' 은 사실로 인정되었고, 요안나의 주장에서 이단이나 미신적인 요소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받았다. 이후 요안나는 하느님이 파견한 예언자이자 투사로 알려졌고, 그녀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시농으로 돌아온 요안나는 전투에 나섰다. 전설에 따르면, 이때 요안나가 사용한 칼은 샤를 7세가 하사한 것이 아니라 계시에 의해 성녀 가타리나(Sainte Catherine de Pierrevoy) 성당의 제단에서 발견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칼에는 '예수 마리아' 라는 글자와 더불어 성부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부의 형상 앞에는 프랑스 왕가의 문장인 붓꽃(fleur de lis)을 바치는 천사의 모습 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전투에 참가한 요안나는 1429년 5월 7일 오를레앙에 입성하고 5월 8일에 영국 군을 퇴각시켰다. 이때부터 영국군의 공식 문서에는 요 안나가 들은 '음성' 은 하느님이 아닌 악마가 보낸 것으 로 규정하는 내용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전투에서 요안나는 가슴에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참전을 계 속하였다. 그녀는 루아르(Loine)와 파테에(Patay), , 트루아 (Troyes)에서 승전하였다. 마침내 1429년 7월 17일 샤 를 7세는 랭스에서 대관식을 올리게 되었다. 이후 1461 년까지 32년 간 샤를 7세는 비록 루아르 이남 지역에 한 정되기는 했지만 프랑스를 통치하게 되었다. 샤를 7세는 영국과의 형화 협상을 펼치는 한편, 요안나의 조언을 받아들여 당시 영국군이 주둔하고 있던 파 리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공격 개시일이 성 모 마리아의 성탄 축일(1월 1일)로 휴일이었다. 당시에는 휴일에 전투를 하는 것을 죄악시하였기 때문에, 뒷날 재 판을 받을 때 이 점 역시 죄목으로 포함되었다. 이 전투 에서 그녀는 파리 공략에 실패하였지만 생 드니(St. Denis)를 정복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그리고 다리에 부상을 입었으며, 프랑스 군대는 퇴각하였다. 1430년 4월에 요안나는 위험에 빠진 콩피에뉴(Compiègne)를 구하기 위해 출정하였다. 이때 영국군의 포로가 될 것이지만, 하느님이 도와 주실 것이니 걱정하지 말 라는 성녀 가타리나와 성녀 마르가리타의 '음성' 을 듣게 된다. 후일 요안나는 재판정에서 이 상황을 설명하면서, 자신은 포로가 되기보다 죽음을 원한다는 간청은 물론 포로가 되는 시점을 알려 달라고 하였지만, 모두 거절당 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그 해 5월, 처음에는 우세한 전투 를 펼치던 요안나의 군대는 결국 엄청난 피해를 입고 퇴 각하던 중 포위되었으며, 그녀는 '음성' 이 알려 준 것처럼 포로가 되었다. 그녀가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영국에 동조하는 파리 대학교의 학자들과 성직자들은 요안나는 마녀이며 이단의 혐의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단 심문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프랑스인들은 당시 프랑스 의 포로였던 영국군 사령관과 요안나를 교환할 것을 샤를 7세에게 청하였으나, 왕은 거절하였다. 콩피에뉴가 속한 교구는 보베(Beauvais)였는데, 교구장은 코숑(Pierre Cauchon, 1371~1442) 주교였다. 그는 엄청난 액수의 몸값을 받고 요안나를 1431년1월 영국군에게 넘겼다. 영국 왕은 "미신과 혹세무민, 위대한 하느님을 여러 가지로 거스른 죄"를 묻기 위한 재판을 열도록 하였다. 결국 요 안나에 대한 이단 심문은 루앙(Rouen)에서 열리게 되었 으며, 코송과 르메트르(J. Lemaitre)가 재판관으로 임명되 었다. 1431년 1월부터 루앙에서 진행된 재판에는 60여 명에 이르는 파리 대학교 교수들, 고위 성직자 및 수도자 들이 배석 판사로 참석하였다. 당시 심문 기록은 라틴어로 보존되어 있는데, 이 자료에 의하면 요안나는 매우 당 당하고 솔직 담백하게 심문에 임했다고 한다. 그 해 5월 까지 진행된 심문을 통해 '음성' 과 관련된 내용은 물론 남장을 하여 하느님을 모독하였으며, 군대를 선동하는 잔인함 등의 12가지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는 동시에 전향을 종용받았다. 계속되는 심문에 많이 지친 요안나를 파리 대학교의 신학자들은 세속 법정에 넘기기로 하였고, 5월 24일 이 판결을 들은 요안나는 교회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우리 주님이 원하는 것이라면"이 라는 말을 하며 전향 문서에 서명을 하였다. 그러나 며칠 후 다시 '음성' 을 듣고 서약을 취소하였다. 결국 5월 29 일 세속 법정으로 넘긴다는 재판관들의 만장일치가 이루 어졌다. 다음날인 5월 30일 신앙 고백을 하고 성사를 받 을 수 있는 허락이 내려졌으며, 이날 화형에 처해졌다. 〔복권과 시성] 요안나에게 내려진 사형 판결의 본질 은, 당시의 많은 프랑스인들과 영국인들이 그녀를 거룩 한 '음성' 의 안내를 받아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인물로 보았다는 데에 있다. 즉, 당시 프랑스의 학자들과 성직자 들을 비롯한 요안나의 적대자들은 그녀가 주장하였던 '음성' 을 부정하였으며, 이를 위해 성직자들로 하여금 그녀가 마녀라고 증명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이 재판은 법이 정의를 눌러 이기는 것으로 보였으나, 그 승리는 불과 한 세기도 지속하지 못했다. 요안나가 샤를 7 세에게 전달한 '음성' 의 계시 내용이 사실로 드러나자, 그녀에 대한 명예 회복 역시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요안나의 화형 이후 파리와 루앙을 탈환한 샤를 7세는 그녀에 대한 재판을 새롭게 검토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그 결과 1455년 11월 파리의 노트르담 주교좌 성당에서 복권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때 출석한 증인들은 모두 요 안나의 덕성과 특별한 은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증언하였 다. 그리고 요안나의 가족들의 탄원으로 교황 갈리스도 3세(1455~1458)는 조사 위원회의 설치를 지시했다. 조사 결과 1456년 7월 요안나에게 화형 판결을 내린 재판을 폐기하고 무효화하는 선언이 발표되었으며, 그녀의 명예 역시 복권되었다. 교황청은 요안나의 명예 회복에 대해 수백 년 간 침묵을 지켰다. 교황청은 누구에게도 이때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부과하지 않았다. 특히 그녀가 들었다는 '음성' 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의 판단도 회피하였다. 하지만 1869 년부터 요안나의 신앙과 순결, 영혼의 깨끗함을 기리면서 시복 및 시성 움직임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사람들, 특히 오를레앙 사람들은 요안나의 동상을 푸른 색 가스등으로 장식하면서 이미 그녀를 성녀로 공경하였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요안나의 출생, 행적 및 화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각종 서적들이 출간되었다. 이는 그녀가 한층 더 신비로운 인물로 부상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나아가 그녀에 대한 또 다른 재판이 이루어진 것 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된 원인은 그녀에 대한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들은 그녀에 대한 재판 기록에 불과 하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그녀가 비록 재판 과정 에서 민중적인 언어와 표현을 사용하면서 증언하였다 하더라도 현재 남아 있는 재판 기록은 언어적으로 법률가 들과 신학자들에 의해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대부분의 동 시대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역 사가들조차 일정 부분 그녀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남아 있게 하는 작용을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 사고 및 신앙의 민중적 특성을 이해하였던 사람들은 민중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개념으로 인해 혹은 15세기 프랑스 의 민중 문화와 감성에 대한 무지로 인해 그녀의 역사적 이미지를 왜곡시켰다. 결국 영웅적 행동을 있게 하였던 그녀의 정치적 · 군사적 · 교회적인 배경으로부터 그녀 자체를 분리시키는 문화적 왜곡은 역사가들로 하여금 갖가지 해석을 낳게 하였던 것이다. 요안나에 대한 왜곡된 해석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녀 가 보유하고 있던 성덕(聖德)과 민족주의가 새롭게 강조 되고 있는 추세에 있으며, 그녀와 관련된 문학 작품 및 영화들이 풍부하게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오늘날의 사회적 상황과 연결된 것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조망의 모호함과 오류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15세기에는 어느 누구도 그녀를 성녀로 인식 하지 않았으며, 그녀의 사고는 그녀의 열렬한 추종자들 에게조차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녀의 행동에 우 호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던 당시의 사람들은 요안나를 "착하고 거룩한 인격자"(bona et sancta persona)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선량한 품성과 올바른 종교를 가진 사람" 이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그녀에 대한 새로운 추앙은 그녀의 '음성' 에 대 한 진실성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정치적으로 또한 신앙적으로 극도의 절망적 상황에 처해 있던 프랑스 에서 오직 그녀만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올바로 인식하였으며, 그 인식은 종교적 신념과 신앙과 확고하게 결부되어 있었다는 점에 기인한다. 또한 그러한 인식이 무식한 시골 처녀에게서 나타났다는 점은 확실히 기적이 기 때문이다. 요안나는 1909년 4월 18일 교황 비오 10세(1903~ 1914)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1920년 5월 16일 교황 베네딕도 15세(1914~192)에 의해 시성되었다. 같은 해 6월 24일 프랑스 의회는 요안나를 기리는 국가 축제를 매년 5월 두 번째 주 일요일에 거행하도록 하는 법령을 선포하였다. (⇦ 잔 다르크 ; → 프랑스) ※ 참고문헌  Régine Pernoud, J'ai nom Jeanns la Pucelle, Paris, Découvertes Gallimard/ -, La Spritualité de Jeanne d'Arc, Paris, Mame, 1992/ Jean Imbert, Le cas Jeanne d'Arc, L'Histoire, no 106(décembre, 1987)/ Jacques Le Goff, Jeanne d'Arc, 《EU》 12/ D. Farmer, Oxford Dictionary ofSaints, Oxford Univ. Press, 1996, pp. 254~255/ P. Tisset · Y. Lanhers, Procès de Jeamne d'Arc, Société de I'Histoire de France, 3 vols., 1960~1971/ Herbert Nette, 이은희 역, 《잔 다르크》, 한길사, 1998. [邊琪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