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촌 본당

堯村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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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소속 본당. 전북 김제군 요촌동 172 소재. 1935년 6월 16일 수류 본당에서 분리 ·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관할 구역은 김제시 요촌동 · 갈공동 · 옥산동 · 서암동 · 월봉동 · 복죽동 · 신곡 동 · 교동 · 연정동 · 입석동 · 장화동 · 제월동 · 명덕동 · 하동 · 홍사동 · 백산면 · 부량면 · 죽산면 전 지역과 검산 동 · 신풍동 일부 지역이며, 관할 공소는 봉월 1개소. [교 세] 1965년 2,014명, 1971년 2,161명, 1976년 2,875명, 1980년 2,490명, 1985년 2,094명, 1990년 2,231명, 1995년 2,405명, 2000년 2,114명. [역대 신 부] 초대 이상화(李尙華) 바르톨로메오(1935. 6~1938. 6), 2대 석종관(石鍾寬) 바오로(1938. 6~1943. 3), 3대 오기순 (吳基順) 알베르토(1943. 3~1947.4), 4대 이철연(李喆淵) 프란치스코(1947. 4~1948. 8), 5대 조상익(趙相益) 베드로 (1948. 12~1950. 5), 6대 강윤식(姜允植) 베네딕도(1950. 5~1951. 5), , 7대 허일록(許日錄) 타데오(1951. 5~1955. 7) 8대 김종택(金鍾澤) 요셉(1955. 7~1958. 1), 9대 김재덕 (金在德) 아우구스티노(1958. 1~1960. 3), 10대 범석규(范 錫圭) 마티아(1960. 3~1963. 6), 11대 안복진(安福鎮) 요 셉(1963. 6~1966. 12), 12대 서석기(徐錫基) 베드로(1966. 12~1969. 12), 13대 이대권(李大權) 바오로(1969. 12~1971. 4), 14대 김영신(金英信) 바오로(1971. 4~1974. 6), 15대 김봉희(金鳳熙) 요한(1974. 6~1976. 8), 16대 박 창신(朴昌信) 베드로(1976. 8~1979. 1), 17대 김반석(金盤 石) 베네딕도(1979. 1~1980. 5), 18대 김환철(金丸喆) 스 테파노(1980. 5~8), 19대 오현택(吳賢澤) 가시미로(1980. 8~1985. 1) , 20대 황인규(黃寅奎) 마태오(1985. 1~1989. 1), 21대 안용기(安龍起) 가브리엘(1989. 1~1991. 7), 22 대 김태윤(金泰潤) 안드레아(1991. 7~1993. 2) 23대 문규 현(文奎鉉) 바오로(1993. 2~1997. 8), 24대 김환철(金丸 喆) 스테파노(1997. 8~2000. 1), 25대 이태주(李泰柱) 알 로이시오(2000. 1~2002. 1), 26대 김진룡(金鎭龍) 안토니오(2002. 1~현재). 요촌 본당 관할 지역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1902년에 건동리 공소가 설립된 것으 로 보아, 이 시기쯤에는 이 지역에도 신자들이 모여 신앙 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가운데 1920년 정읍 군 산외면 구장리 공소의 김정엽(베드로) 회장이 김제읍 소금산 일대에 3,000평의 땅을 매입하여 검산리 공소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신앙 공동체가 시작되었다. 당시 김제 지역에는 수류 본당으로 판공을 보러 다니는 2명의 여교우만이 있었는데, 이후 여러 사람이 노력한 결과 10 년 후에는 200여 명의 영세자를 배출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처럼 이 지역의 신자수가 증가하자, 수류 본당의 뤼카(L. Lucas, 柳嘉鴻) 신부는 1930년에 검산리 (김제역 근처)에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본당 설립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 결과 이듬해인 1931년에 성당 건물이 세워졌고, 4년 뒤인 1935년 6월 16일에는 김제 본당(요촌 본당의 전신)이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제하에서의 본당 운영은 어려움이 많았는데, 특히 1941년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2대 주임 석종관 신부가 몇 달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본당의 운영은 일시 정지되었다. 그러나 김제 본당은 종전 후 새로운 변화의 시대를 맞게 되는데, 1954년에 현재의 성당 대지를 매입하고 이듬해 3월 본당을 검산리에서 요촌리로 이전하 였다. 그런 다음 같은 해에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였고, 1956년 9월에 '오묘한 매괴' 쁘레시디움을 창단하여 레 지오 활동을 시작하였다. 또 1958년에는 청년회와 학생 회를, 1960년 8월에는 전주교구 최초로 가톨릭 노동 청 년회(J.O.C.)를 조직하는 등 점차 본당 운영의 기틀을 마련해 갔다. 아울러 되평 공소(1954) · 용지 공소(1955) · 백자동 공소(1955) · 황산 농원 공소(1958) · 만경 공소 (1960) 등이 차례로 설립되면서 본당의 교세는 날로 확장되었다. 본당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김제 본당에는 1961년 11월에 '평화의 모후' 꾸리아가 결성되었고, 1962년 3 월에는 나환우 정착촌인 신암 공소가 설립되었으며, 1964년 3월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분원을 마련하였다. 이어 1964년 5월에 지방 본당에서는 처음으로 성체 거동식을 거행하였고, 1965년 2월에는 애령회를, 1966년 12월에는 청년 성가대를 조직하여 본당의 활동 영역을 넓혀 갔다. 또 1971년 1월 '김제 신용 협동 조합' 을 창립하여 신자간의 상호 부조를 도모했으며, 1972년 8월에 학생들을 위한 돌담 도서관을 개관하였 고, 1975년 5월에는 그리스도 평화상과 성모 마리아상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1976년에 본당에 테니스장을 개장하여 신자들의 여가 활동을 도왔으며, 1979년 6월에 는 50평 규모의 유치원 신관을 완공하였다. |1980년대 들어 신자수가 점차 증가하자, 본당에서는 제2 성당의 신설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81년 김제 읍 신풍리 138번지에 성당 대지를 매입하였는데, 1983 년에 이것을 매각하고 신풍리 163-1번지의 땅을 새로 매입하였다. 그런 다음 1983년 5월에 '성전 건립 추진 위원회' 를 결성한 뒤, 1984년 12월에 새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였다. 1985년 1월 신풍 본당이 신설되면서, 김제 본당은 요촌 본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신암 · 백자동 · 요갓 · 용 지 · 와룡 공소를 신풍 본당으로 이관하였다. 이에 본당의 교세가 다소 위축되었지만, 곧 '신자 배가 운동' 을 전개하여 본래의 위상을 되찾았다. 아울러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열풍이 불 때에는,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시민 강좌' 를 개최하여 민주화 운동에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 이처럼 지역과 함께하던 요촌 본당은 1995년으로 본당 설립 60주년을 맞았다. 이를 계기로 본당에서는 세상과 함께하는 교회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특히 1996년 3월에 축성된 '60주년 기념 교육관' 은 지역 주민에게 전면 개방되어 주민들의 문화 공간으로 제공되었다. 뿐만 아니라 1996년 6월에 평화 동산 · 성모 동산 등을 조성하여 신자들만이 아니라 김제 시민도 함께 이 용하게 함으로써 열린 교회로서의 기초를 다져 갔다. 그 리고 그 해 11월에는 3월부터 시작된 성당 보수 작업을 완료하여 성전의 면모를 일신하였고, 1997년 2월에는 14처의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또 1998년 3월에 한재권 (요셉) ·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성인의 유해를 본당에 모셨으며, 1999년 4월에는 애령회를 조직하였다. 이어 2000년 1월에 만경 선교 본당을 분리하였고, 4월에 성 당 안에 성모상을 마련하였다. 2002년 현재 요촌 본당 은 '소공동체의 활성화' 라는 사목 지침 아래, 본당의 내 실화를 위해 전 신자가 노력하고 있다. ※ 참고문헌  천주교 전주교구,《천주교 전주교구사》 I , 1998. [方相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