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난 벤 자카이 Johanan ben Zakk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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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70년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된 때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을 거느리고 야브네(Jabneh, Jamnia)에서 유대교를 재건한 율법 학자. [시대 상황] 엄밀한 의미에서 그에 관한 전기 자료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탈무드와 미드라쉬 등 남아 있는 자료들은 주로 율법 학자들의 가르침과 견해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하난의 생애는 제1차 유대 독립 전쟁(66~70)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기원전 167년에 일어난 마카베오가 독립 전쟁, 서기 132년에 일어난 제2차 유대 독립 전쟁은 그 발발 이유가 뚜렷하다. 성전에서 야훼께 드리던 제사를 없애고 제우스 신에게 제사를 드리도록 하고 제우스 신상을 세운 독성 사건(기원전 167), 예루살렘 성전 터에 제우스 신전을 건립하려는 독성 사건(서기 132) 때문에 유대인들이 항거하며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데 서기 66년 제1 차 독립 전쟁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복합적이고 모호하다. 펠릭스(A. Felix, 52~60) 총독과 사마리아의 로마 행정 관인 플로루스(J.Plous, 64~66)의 폭정, 로마인들을 비롯 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알력, 기근이 계속되고 세금이 늘어나서 민생고가 심화된 것, 여러 독립 운동 단 체의 등장 등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66년 여름 아나니아스의 아들 엘리아잘 사제의 집단이, 성전에서 로마 황제를 위해 매일 바치던 제사를 정지 시키고 성전 구역과 그 아래 있는 구시가지를 점령했다. 또한, 서기 6년에 젤롯당을 조직한 가믈라 출신으로 유다의 후손인 므나헴의 자객 집단은 마사다 주둔 로마군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한 다음 예루살렘 신시가지를 점령했다. 두 집단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 므나헴은 살 해되고, 자객들 중 일부는 마사다로 피신하여 74년 과월 절까지 로마군에게 항거하다가 모두 자결했다. 66년 8~9월 예루살렘과 지중해변 가이사리아를 비롯해서 전 국에서 로마인 ·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서로 살육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의 박해 가 무서워 요르단 강을 건너 펠라로 피신했다(에우세비오, <교회사> 3, 5, 2~3). 66년 10월 시리아의 총독인 체스티우스 갈루스(Cestius Gallus)는 예루살렘을 평정하고자 했으나 예루살렘 서북방 벳-호론에서 대패하였다. 이에 네로 황제(54~68)는 후에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 (Vespasianus, 69~79) 장군을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68년 로마군이 갈릴래아 지방, 지중해변 평야, 요르단 강 계곡을 평정하던 가운데 6월 9일 네로 황제가 자살했다. 로마군이 유대 지방을 평정하던 중인 69년 7 월 1일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였고, 12월 로마에서 황제로 등극했다. 이 무렵 예루살렘과 헤 로디온 요새 · 마사다 요새 · 마캐루스 등 세 요세만은 반 라군의 수중에 있었으나, 그 외의 유대 지역은 평정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로 후에 황제가 된 티투스(TituS, 79~81)는 토벌군 사령관이 되어 70년 과월절 직전에 로마군 4개 여단 24,000명을 이끌고 예루살렘 북쪽 스 코푸스 산에 진을 쳤다. 로마군은 예루살렘 북쪽의 제3 성벽을 뚫고 들어가서 성전 서북쪽 안토니아 요새를 공 략했다. 마침내 로마군은 성전 건물을 불태워 버렸는데, 요세푸스는 그날이 8월 30일이었다고 하고(《유대 전쟁사》 6, 248~250), 랍비 전승에선 8월 29일이었다고 한다. 로마군은 9월에 예루살렘 서북부 고지대에 자리 잡은 헤 로데 궁전까지 점령함으로써 시내를 완전히 장악했다.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초토화하고 헤로데 궁전의 탑 세 개(파사엘 · 힙피쿠스 · 마리암네))만 남겨 두었다. 이 가운 데서 파사엘 탑 아래 부분이 오늘날에까지 보존되어 있는데 현재는 다윗의 탑이라 한다. 갈릴래아 기샬라 출신인 요한과 지오라스의 아들 시몬이라는 두 독립군 지휘자는 로마로 압송되어, 티투스의 개선 행진 때 수모를 겪은 다음 요한은 종신형을, 시몬은 사형을 받았다.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도 독립군 일부는 헤로디온 · 마 캐루스 · 마사다 요새 등지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72년 로마군 제10 여단장 바수스 장군은 베들레헴 남방 헤로 디온을 점령하고 연이어 사해 동쪽에 자리잡은 마캐루스 를 점령했다. 바수스의 후계자인 플라비우스 실바 장군 이 74년 과월절 사해 서쪽에 있는 험준한 천연 요새 마 사다를 함락시킴으로써 제1차 유대 독립 전쟁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예루살렘 함락과 더불어 유대교 5대 당파 중에서 고위 급 사제들과 유지들로 구성된 사두가이파, 쿰란에서 수 도 생활을 하던 에세네파, 헤로데 가문에 빌붙어 살던 헤로데파, 제1차 유대 독립 운동을 주도한 젤롯당이 모두 망하고, 오로지 바리사이파만이 재기할 수 있는 여력을 갖게 되었다. [요하난 벤 자카이의 활동]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 하고 있을 때 요하난 벤 자카이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관 에 넣어 로마군 진지로 운반하라고 하였다. 그는 베스파 시아누스 장군에게, 장차 황제가 될 것이라 예언하고, 장 군으로부터 야브네에 율법 학당을 차려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바빌론 탈무드》 깃틴 56a). 이는 사실 여부 가 확인되지 않는 전설이지만, 요하난이 예루살렘 포위 중에 야브네로 빠져나간 것, 로마군의 허락을 받아 야브네에 율법 학당(Bet Midrash)을 개설한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이 율법 학당은 제1차 독립 전쟁 전에 유대교 최고 의회가 하던 역할을 일부 수행했다. 요하난은 바리사이계 율법 학자들을 여기에 모아 성전이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율법만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 를 재건했다. 80년대 초반에 그는 힐렐(Hilel)의 고손자인 가믈리엘 2세(Rabban Gamliel Jabneh, 1세기 후반~2세기 초)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아스클론 남동쪽으로 14km 지 점에 있는 브로르 하일(Beror Hayil)에서 살다가 곧 사망하였다. 현재 그의 묘소는 티베리아스(Tiberias) 시내에 있다. 후대인들은 그를 높이 평하여 "요하난 벤 자카이 가 죽음으로써 지혜의 광채가 사라졌다"(《미쉬나) 소타 9, 15)라고 하였다. 그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제자들이 문 병을 갔더니, 그는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께 심판받을 것 이 두렵다면서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는 초상 방에 있는 그릇들은 부정을 타기에 방 밖으로 내어 가라는 임종게를 남겼다. "부정 타지 않도록 그릇들을 밖으로 치워라. 유다 임금 히즈키야가 저승으로 나를 데려가려 오고 있으니 옥좌를 마련하라"(《바빌론 탈무드》 브라코트 28b) 〔야브네 시대(70~135) 율법 학자들의 업적] 힐렐 학파 의 득세 : 요하난 벤 자카이가 70년대에 야브네에 율법 학당을 세운데 이어, 그의 후계자 가믈리엘 2세는 80년 대에 최고 의회(Bet Din)를 조직하고 율법 학당과 최고 의회 모두를 통괄하는 수장(Nasi)으로 취임했다. 이때부 터 426년에 가믈리엘 6세가 사망할 때까지 오직 힐렐의 혈손들이 유대교 수장을 맡았다. 힐렐 학파가 다른 학파들을 누르고 득세했다. 구약성서 경전의 확정 : 제1차 유대 독립 전쟁 때까지도 유대교의 경전 범위가 확정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수 많은 묵시 문학 작품을 비롯하여 이단서들이 성행하여 경전을 확정할 필요가 있었다. 100년경 야브네의 율법 학자들은 오늘날의 것과 거의 같은 형태로 히브리어 경전을 확정했다. 다만 아가서 · 전도서 · 에즈라서의 경우에는 경전인지, 아니면 위경인지에 대한 논란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18조 기도문 개작 : 85년경 가믈리엘 2세가 유대교 수장으로 활약할 무렵 작은 사무엘 율사가 회당 예배 때 마다 바치는 18조 기도문(Shemoneh Esreh)의 제12조 (Birkat ha Minim)를 개작하여 이단자들 앞에다 그리스도 인들(Noserim=나자렛 도당들)을 명기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 회당 예배에 더는 참석할 수 없었다. 그 기도문을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나자렛 도당들과 이단자들은 곧장 사라지게 하소서. 살아 있는 이들의 책에서 그들을 지워 버리시어 의인들과 함께 적혀 있지 않게 하소서. 무엄한 자들을 굴복시키시는 하느님, 찬양받으소서"(《바빌론 탈무드》 브라코트 28b) . 율법 분류 작업 : 기원전 50년부터 서기 200년 사이에 활약한 150여 명의 율법 학자들이 구전으로 전해준 율법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서 기억력이 뛰어나지 않고선 도저히 다 기억할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분류 체계가 정해지지 않아 난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키바(Akiba ben Joseph, 40~135)에 이르러 비로소 잡다한 구전 율법들을 주제별로 분류하는 원칙이 세워졌다. 그의 분류 방 법이 메이르(A. ben Meir, 2세기경) 율법 학자에게 전수되었고, 또 유다 하 나시(Judah ha-Nasi, 135~220)에게 전수 되어 200년경 갈릴래아 지방 우사(Usha)에서 처음으로 6부 63편 520장으로 짜여진 법전이 편찬되었다. 이것이 곧 미쉬나(מִשְׁנָה)이다. 이 분류 방식은 미쉬나 보충본이라 할 수 있는 토세프타 법전, 팔레스티나 탈무드 법전, 바빌론 탈무드 법전에도 그대로 승계되었다. (→ 가믈리 엘 ; 미쉬나 ; 아키바 벤 요셉 ; 유다 하 나시 ; 유대교 ; 이스라엘 ; 힐렐 학파) ※ 참고문헌  Lewis M. Barth, 《TRE》 17, pp. 89~91/ Jacob Neusner,A life ofYohaman ben Zakkai, Leiden, Brill, 1962, 2nd ed., 1970/ 《EI》 10, pp. 148~154/ 이영헌 · 정양모, 《이스라엘 성지 어제와 오늘》, 생활성서사, 1988, pp. 83~85. 〔鄭良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