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Joannes
글자 크기
9권

1 / 5
교황 요한 1세.
① 요한 1세(?~526) : 성인. 교황(523~526) . 순교자. 축일은 5월 18일. [생 애] 교황 요한 1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그는 대립 교황이었던 라우 렌시오(498~506)를 지지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506년 9월 16일부터 교황 심마코(498~514)를 지지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친구 보에시우스 (A.M.T.S. Boetius, 470/475?~524)의 저술 작업에 조언을 해 주었으며, 보에시우스는 그에게 3편의 논문을 헌정하였 다고 한다. 523년 8월 13일 교황 호르미스다(514~523) 의 후계자로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는 부제 중 가장 연장자였다고 한다. 동로마 제국 황제였던 유스티누스 1세(518~527)가 아 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하여 이단 척결을 앞세워 박해하자, 우스주의자이면서 동고트족과 이탈리아의 왕인 테오도리쿠스(Theodoricus, 493~526)가 교황 요한 1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즉, 그에게 콘스탄티노플로 유스티누스 1세를 직접 찾아가 아리우스주의자들의 건물 압수와 강제 개종을 통한 박해를 중단해 줄 것을 부탁하라는 것이었다. 525년에 교황으로는 최초로 동로마 제국에 도착 한 교황 요한 1세는 융승한 대접을 받았다. 이 당시는 서로마 제국이 이미 멸망한 상태였다. 476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475~476)가 사망한 이후 서로마 제국의 권력은 게르만 용병 출신인 오도아케르(0doacer, 433?~493) 의 손으로 넘어갔고, 교황 요한 1세 시대에 서로마 제국은 동고트족과 서고트족 그리고 프랑크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교황이 있던 로마는 동고트 왕국에 속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로마의 교황은 비록 상징적이었지만 서로마 제국의 대표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교황 요한 1세와 유스티누스 1세의 만남은 서 로마 제국의 교회와 동로마 제국의 교회 간의 유대감뿐 아니라, 로마 제국의 재통일을 꿈꾸는 황제와의 관계가 한층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협상 결과가 만족스러웠지만, 강제로 개종한 사람들이 다시 아리우스주의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교황 요한 1세가 강력히 반대하였다. 유스티누스 1세 황제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교 황 요한 1세는 이 동로마 황제의 대관식도 집전한 것으 로 전해진다. 또한 동로마 제국에 있던 거의 모든 주교들은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였다. 다만 그리스도 단성설 (monophysitismus)을 따르던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티모테우스 3세(Thimotheus Ⅲ ,519~535)만은 칼체돈 공의회 (451)의 정신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었기에, 수위권 인정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교황 요한 1세는 526년 4월 19 일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전에서 부활 대축 일 미사를 통해 로마 교회의 전례를 거행함으로써 콘스 탄티노플 교구와 에피파니우스 교구에 대한 수위권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이것은 교황의 수위권과 관련하여 가톨릭 교회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일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에서의 독립 운동에 경계심을 가지고 있던 테오도리쿠스는 이미 보에시우스를 처 형시켰으며, 귀향하는 교황 요한 1세를 체포하여 자신의 왕국 수도인 라벤나(Ravenna)의 감옥에 가두었다. 이 감 옥에서 교황 요한 1세는 526년 5월 18일 사망하였다. [평 가] 교황 요한 1세에 관해 남아 있는 자료가 적고, 또한 위서인 경우가 많아 이 당시의 일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교황 요한 1세는 동로마 제 국의 황제 유스티누스 1세가 아리우스주의에 호의적이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 와중에 귀향하던 교황 요한 1세는 열렬한 아리우스주의자였던 테오도리쿠스의 지시로 체포되고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현실적으로 교황은 이미 사라진 로마 제국의 부활을 강력히 바랐을 것이다. 그래서 그 로마 제국을 사실상 붕괴시킨 게르만족의 왕들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정치적 · 인종적 갈등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 특히 테오도리쿠스가 이단인 아리우스주의를 극단적으로 신봉하는 것을 교황 요한 1세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정치적 세력이 없는 교황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 역시 로마 제 국의 부활을 꿈꾸면서 게르만족을 다시 북쪽으로 몰아낼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서로마 제국의 교황과 동로마 제국 황제의 이해타산이 일치하여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게르만 세력을 몰아내는 데 실패했고 로마의 교회는 현실을 받아들여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 시대에 게르만족 왕국과의 관계 개선에 힘을 써 교회와 국가 권력 간의 화해를 모색하 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와 국가 간의 긴밀한 관계는 이미 콘스탄틴 대제(306~337) 시기부터 있어 온 것이기는 하지만, 교황 요한 1세는 분열된 로마 제국 내에서도 교회 가 정치 세력과 타협을 하여 교회의 안녕을 도모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로마 순교록》(Martyrologium Romanum)에는 교황 요한 1세를 순교자로 언급하고 있다. "라벤나 출신의 교황이 자 순교자인 성 요한 1세는 정통적인 신앙 때문에 아리 우스주의자인 이탈리아의 왕 테오도리쿠스에 의해 라벤 나로 호출되어 투옥되고 생을 마쳤다. 그의 시신은 로마 로 옮겨져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 참고문헌 H. Roessler, Deutsche Geschichte, Bertelsmann Gmbh, 1961/ S. Fleischmann, Daten der Weltgeschichte, Bassermann, 1992/ G. Wittich, Bibliographisch-Bibliographische Kirchenlexikon, Bd. Ⅲ, Verlag Traugott Bautz, 1992/ É. Amann, 《DTC》 8, pp. 593~595/ J. Chapin, 7, p. 1006/ J.N.D. Kelly, The Dictionary of Popes, Oxford Univ. Press, 1996, pp. 54~55. 〔李種凡〕 ② 요한 22세(1245~1334) : 성인. 교황(1316~1334) . 아비뇽의 교황 시기 중 두 번째 교황. [생 애] 초기 생애 : 프랑스 카오르(Cahors)의 부유한 부르주아 가문에서 1245년경에 출생한 그의 본명은 자크 뒤에스(Jacques Duèse)이다. 그는 몽펠리에(Montpellier)에서 법 공부를 하였으며, 나폴리의 귀족인 앙주 (Anjou) 가문과 가까워지면서 사회적인 출세를 하였다. 1300년 당시의 관행으로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55세에 프레유(Frejus)의 주교가 되었다. 주교가 된 후에도 앙주 가문과 계속 관계를 맺었으며, 1308~1310년에 나폴리 의 왕인 카를로 2세(1285~1309)와 로베르(1309~1343)의 대법관을 역임하였다. 1310년에는 로베르의 도움을 받 아 아비뇽의 주교가 되었다. 1312년에는 산 비탈레(San Vitale)의 사제 추기경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포르토 (Porto)의 주교 추기경이 되었다. 1314년 교황 글레멘스 5세(1305~1314)가 서거한 후 소집된 교황 선거는 약 2년 3개월 간 계속되었다. 이 당시 추기경단은 17명의 프랑스 출신과 7명의 이탈리아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글레멘스 5세 추종 자들로 인해 교황 선거가 무력으로 해산되었고, 그 이후 교황 선출이 계속 늦춰지자 추기경들은 리용에 다시 모였다. 1316년 8월 7일 포르토의 추기경인 자크가 교황 요한 22세로 선출되었다. 이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의 고령이었다. 교황 선출에 깊이 관여하던 프랑스의 왕 필리프 5세(Philipe V, 1316~1322)는 요한 22세의 선출을 바라지는 않았으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타협안으로 받아들였다. 요한 22세의 나이가 고령이었기 때문에 교황 직을 오랫동안 수행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교황직 수행 : 교황 요한 22세의 착좌식은 1316년 9 월 3일 리용에서 개최되었다. 그는 리용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다시 아비뇽(Avignon)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리하여 교황으로 선출되면 거처를 로마로 옮길 것이라던 당초의 약속을 저버렸다. 이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소요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추기경들은 교황 이 아비뇽에 머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교황은 아비뇽의 교황 궁을 확장하여 자신의 정착지로 삼았다. 당초 그는 개인적 야망이 없고 별 무리가 없는 인물로 여겨졌으나 교황이 된 이후에는 매우 강력한 교 황권의 확장과 수호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다른 한편 요 한 22세는 교황이 된 이후에도 앙주 가문과 프랑스의 이 익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것이 독일 왕과의 정치적 대립 을 낳는 원인이 되었다. 교황은 유럽의 정치적 변화에 매우 민감한 편이었다, 그리고 그 변화를 교회의 이익이 되도록 이끌 줄 알았다. 그러기 위해서 정치에 교황의 권한을 행사하는 일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래서 교황의 직위에 머무는 동안 늘 정치적 문제와 씨름을 하게 되었다. 당시 교황이 처리해야 할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가 작 은 형제회의 내분이었다. 영성파(Spintuals, 혹은 Fraticelli) 는 청빈 규정을 엄격하게 고집하였다. 이와는 달리 이 규 율을 폭넓게 해석하자고 주장한 꼰벤뚜알회(Conventuals) 를 몰아내고 재산을 몰수함으로써 커다란 혼란이 야기되 었다. 교황은 이 혼란에 대한 조사를 한 후 1318년 영성 파의 주장에 오류가 있다는 판결을 내리고 교황의 명령 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그 러나 이 문제는 간단히 끝나지 않았고, 그 뒤에도 커다란 논쟁을 야기시켰다. 사실 작은 형제회의 가난을 중시하 는 사상과 당시 커다란 인기를 얻었던 독일 도미니코회 수사인 에크하르트(Meister Joannes Eckhart, 1260?~1327/ 1328)의 신비주의는 교황권에 대한 커다란 도전이었다. 특히 오컴(William of Ockham, 1285~1349)은 교황이 세속적 일에 관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였고, 이는 교황권에 대한 직접적 위협이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무소유의 삶이었으므로 성직자도 그에 따라야 한다는 사상을 매우 엄격히 따르는 작은 형 제회의 영성파에게는 세속적인 권력과 재정의 확충을 통 해 교회의 힘을 강화시키려고 노력하던 교황이 그리스도 교의 정신에 충실하지 않은 것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을 교황 요한 22세는 잘 이겨내었다. 정치적으로 교황 요한 22세는 특히 독일의 왕권 다툼 과 연관하여 커다란 분쟁에 관여하였다. 독일에서는 1273년부터 1347년까지 왕이 한 가문이 아니라 여러 가문에서 번갈아 가며 선출되었다. 이를 위해 3명의 성 직자와 4명의 세속 영주들이 모여 왕을 선출하였다. 그런데 당시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4세(1314~1347)와 오스 트리아의 백작 프리드리히(Friedrich der Schöne)는 서로 왕 이 되려고 대립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교황이 주재하는 즉위식을 통해 자신의 왕권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하 였다. 초기에 교황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였으나, 자신 이 분쟁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황제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는 금지령을 내렸다. 이에 루트비히 4세는 1324년 5월 22일 "작센하우젠의 공소" (Sachsenhausen Appellation)를 발표하여 교황의 황제 선출권을 부인하였다. 결국 교황은 루트비히 4세를 파문하였고, 그는 교황이 제국의 적이라며 그를 공의회에 항소하였다. 이 분쟁은 복잡한 정치적 관계와 작은 형제회의 파벌 간의 대립, 그리고 신학자들의 논쟁과 연관되면서 국가 와 교회의 관계 정립 문제로 비화되었다. 사실상 더 근본적으로는 아비뇽에 있었던 교황 요한 22세와 바이에른 에 있었던 루트비히 4세가 형식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하는 이탈리아 지역의 관할권을 놓고 영토 다툼을 벌인 것이다. 독일 지역에서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루트비 히 4세는 로마에서 작은 형제회의 영성파에 속하는 라이 날두치(Pieto Rainalducci de Corbario)를 교황 니콜라오 5 세(1328~1330)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지역에 팽배한 루트비히 4세를 배척하는 정서와 그의 권력이 약 화되면서 대립 교황인 니콜라오 5세는 교황에게 화해를 청했고 교황은 이를 받아들었다. 적어도 이탈리아 지역 에서는 교황에 대한 강력한 지지 세력이 있었고, 이를 바 탕으로 그는 권력을 강화할 수가 있었다. 이에 힘입어 교 황은 1328년 루트비히 4세에 대항한 십자군을 선언하였 다. 그러나 분쟁을 원하지 않는 여론에 밀려 루트비히 4 세와 교황은 피상적으로 타협을 하였다. 이것으로 교회 와 국가의 대립은 역사적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교회와 국가는 원만한 관계를 지속하였다. 교황 요한 22세는 사후의 지복직관(beatific vision)과 연 관된 신학 논쟁에 말려들어 곤경에 처하였었다. 교황은 인간이 죽은 후에 곧바로 하느님을 빌 수 있는 것이 아니 라 '최후의 심판' 날에야 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은 특히 작은 형제회의 영성파들에 의해 이단 적 요소가 있는 것으로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이 논쟁은 교황이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와 같은 많은 갈등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교회를 위 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교세가 확장되었고 많은 정치적 갈등을 중재하였으며 학문 장려에도 크게 힘을 썼다. 1323년에 있었던 토마스 아퀴나 스(1225~1274)의 시성이 교황의 주요 업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1329년 에크하르트가 주장한 31개의 명제에 대한 단죄 역시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교황은 교황관(tiara)에 띠를 둘러 장식하였다. 그 밖에도 예술의 진흥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었고, 아시아 지역에 선교사 를 파견하는 일에도 큰 힘을 기울였다. 교황 요한 22세 는 1334년 12월 4일 아비농에서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평가 및 의의] 교황 요한 22세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재정을 확충하는 데 커다란 수완을 보였다. 당시 교황청 의 재정은 여러 가지 이유로, 특히 전쟁 수행 비용 때문에 거의 고갈된 상태였다. 그러나 교황은 교회 조직을 중 앙 집권화하고 교회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한 십일조 제 도를 정비하여 교회 재정의 확충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왕권과의 지속적이고 강력한 대립 속에서 교회의 복잡한 세속 문제 관여의 선례를 남겼다. 또한 그 영향이 후에도 지속되어 특히 계몽기 이후에 교 회가 종교 자유 문제와 연관하여 어려운 입장에 빠지는 데 근본적 원인을 제공한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교황 요한 22세의 재임 기간은 친인척 중용의 관행으로 점철되 었고, 성직의 매매 현상도 격심하였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즉위에 관한 문제 개입은 후에 공의회 우위설 (Conciliarismus)로 인한 논쟁으로 발전되었다. (→ 공의회 우위설 ; 아비뇽 교황들 ; 에크하르트 ; 작은 형제회) ※ 참고문헌 Brennpunkte der Kirchengeschichte, Fredinand Schöningh, 1976/ H. Roessler, Deutsche Geschichte, Bertelsmann Gmbh, 1961/ S. Fleischmann, Daten der Weltgeschichte, Bassermann, 1992/ R. Kottje, Öekumenische Kirchengeschichte Bd. 2, Matthias-GrünewaldVerlag, 1993/ J.P. Kirsch, 《CE》 8, pp. 431~434/ D.L. Douie, 《NCE》 7, p. 1014/ 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niv. Press, 1996, pp. 214~216/ M. Hanst, Biographich-Bibliographische Kirchenlexikon, Bd. Ⅲ , Verlag Traugott Bautz, 1992/ L. von Ranke, Die Päpste, Biichergilde Gunterberg, 1962. 〔李種凡〕 ③ 요한 23세(1881~1963) : 복자. 교황(1958~1963) 본명은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현대의 변화에 교회가 적응하기 위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소집한 인물. [생 애] 1881년 11월 25일 이탈리아 베르가모(Bergamo)에 서 12km 떨어진 소토 일몬테(Sotto il Monte) 에서 가난한 농부인 조반니(Giovani Roncalli)의 13명의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요한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제상을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그는 베르가모 신학교에서 2년 간 교육을 받고, 로마의 성 아폴리나레 대학(S. Apollinare Institute)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곳에서 신학 공부를 하던 중, 1902년 10월 영성 지도자인 구속주회의 피토키(Francesco Pitocchi) 신부를 만나면서 "하느님은 모든 것이며,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Dio tutto, io sono nulla)라는 기본적이면서도 근본적인 명제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시기에 《영혼의 일기》(Giornale dell'anima)를 시작하였다. 1904년 신학 박사 학위 취득과 함께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05년 베르가모의 테데 스키(G.R. Tedeschi) 주교의 비서로 임명되어, 1914년 주 교가 사망할 때까지 그의 곁에 머물렀다. 교구장 비서로 일하면서 교구사와 보로메오(Carolus Borromaeus, 1538~ 1584)에 대한 연구에도 몰두하였다. 또한 암브로시오 도서관에서의 연구 작업은 후에 비오 11세 교황(1922~1939)이 된 라티(A.D.A.Ratti) 추기경과의 만남을 갖게 하였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5월부터 1918년 9월까지 군 복무를 하였다. 처음에는 의무대에서, 후에 는 군종 신부로 근무하였다. 1921년 베네딕도 15세 교 황(1914~192)은 론칼리 신부를 포교성성(Sacrae 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 현 인류 복음화성)의 이탈리아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교황청 외교관으로서의 활동 : 1925년에는 아레오폴리스(Areopolis) 명의 주교로 서품을 받고, 불가리아 감목 대리(Vicarius Apostolicus)로 파견되었다. 1935년 대주교가 된 론칼리는 1944년까지 그리스와 터키 주재 교황 사절(Delegatus)로 이스탄불로 파견되어 근무하였다. 이 기간 동안 론칼리 대주교는 다른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 에 대한 적대적 태도와 교황청과의 긴장감 때문에 가톨릭 고위 성직자를 환대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도 터키 정부의 각료들과 우정 관계를 맺었다. 또한 콘스탄티노 플 총대주교를 방문(1939)하는 등 동방 교회 신자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교회 일치의 필요성을 절감하였 고, 당시의 성직자들 사이에서 지배적이던 유럽 중심주의(Eurocentros,is)의 한계를 깨달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론칼리 대주교는 독일군에 점령당한 그리스에 대한 도움을 주고 유대인들이 나치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저 지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독일군이 프랑스에서 철수한 뒤인 1944년 12월 22 일, 그는 교황 비오 12세(1939~1958)에 의해 프랑스 주 재 교황 대사(Nuntius)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무엇보다 도 비시 정권(Vichy regime)에 협력적이었다고 고발당한 여러 명의 주교들에 관한 문제를 잘 처리하였고, 오랜 그리스도교 전통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가 비그리스도교화 (scistianizzazione)되고 있던 상황에서 주교들이 근본적인 사목적 쇄신을 취하도록 하였다. 교회 학교의 재정 확충 을 위해 프랑스 정부와 협상을 벌이기도 하였다. 또한 샤 르트르(Chatres)에서 신학 수업을 받으면서 사제 수품을 준비하고 있던 독일군 전쟁 포로를 신속히 귀환시키도록 압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특별히 론칼리 대주교는 노동 사제의 이상에 대한 호의를 보였고, 1952년부터는 교황 청의 유네스코(UNESCO) 파견 상임 참관인(pemanet observer)으로도 활동하였다. 추기경 서임 : 1953년 1월 12일 추기경으로 서임된 론칼리는 1월 15일 베네치아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강한 사목적 열의를 보였고, 공산주의 노 동자들에 대해 강하게 저항하였다. 1958년 론칼리 추기 경은 《성 가롤로 보로메오의 베르가모 사도적 순시 행 전》(Gli atti dellla visita apostolica di S. Carlo Boromeo a Bergamo)이라는 저서의 마지막 권을 발표함으로써 오랜 기간 동안 이루어진 가롤로 보로메오에 대한 연구 작업을 종 결하였다. 교황으로서의 활동 : 교황 비오 12세의 사망으로 1958년 10월 25~28일에 개최된 교황 선거에서 77세 의 론칼리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급박하 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짧은 기간 동안 재위할 수 있는 교 황을 선출해야 한다는 것과 교황 비오 12세의 연장선에 놓이는 인물보다는 새로운 인물을 뽑아야 한다는 추기경 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교황은 결코 과도기적인 성격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대로 교황으로서의 권한을 수행할 것임을 보여 주었다. 이 점은 무엇 보다도 '요한 23세' 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사실 요한 23세는 1415년 파면된 대립 교황이었다. 역사가였던 론칼리는 요한 23세라는 이름을 선택함으로써 과거 사건과의 단절과 다시 한 번 대립 교황이었 던 요한 23세의 파면을 정당화하였다. 교황은 11월 4일 즉위식을 거행하면서 좋은 목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자신의 희망을 피력하였다. 우선 교황이 된 후 처음으로 개최한 추기경 회의에 서 추기경 숫자를 70명으로 제한하는, 식스토 5세(1585~ 1590)부터 내려오던 규정을 폐지하였다. 1958년 12월 15일에 교황은 23명의 추기경을 새로 임명하였는데, 그 중에는 밀라노 교구장으로 후에 교황 바오로 6세(1963~ 1978)가 되는 몬티니(Giovanni Battista Montini)도 포함되 어 있었다. 1959년 1월 25일 교황은 추기경들에게 로마 교구 시노드 개최, 공의회 개최, 교회법전 개정 등 세 가 지 계획을 선언하였다. 로마 교구 시노드는 1960년 1월 24~31일까지 라테란 대성전에서 개최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최는 교황의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황은 이 소집이 성령의 영감에 의한 것임을 밝히면서, 공의회의 임무는 현시대에 맞게 쇄신 하는 것, 즉 '교회 현대화 운동' (aggiornamento)임을 강조 하였다. 이는 신앙의 본질을 새로운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고, 교회 규율과 조직을 현 시대에 맞게 하는 것이었 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교회 일치를 지향하는 것이었 다. 이 목적을 현실화하기 위해 교황은 1960년 봄 베아 (AgostinoBea) 추기경을 책임자로 하는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Segretariato per I'unit dei cristian)를 신설하여, 다른 교회 성원들을 공의회 참관인(obsevers)으로 초대하였 다. 교황은 1962년 12월 8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첫 회기를 마칠 때까지 두 번 공의회 교부들의 작업에 개입 했을 뿐, 공의회 교부들의 자유와 대다수의 의사를 존중 하면서 공의회를 진행시켰다. 교회 법전 개정을 위해서 교황은 교황청 위원회를 설 립하였다(1963. 3. 28). 이미 교황은 영화, 라디오, 텔레비 전에 관한 교황청 위원회를 신설하였었다(1959. 2. 22) . 전례에 대한 관심에서 교황은 멜키트파(Melchites)의 비 잔틴 전례에서 모국어 사용(1960.4.5), , 미사 경본과 시간 전례서에 새로운 예식 규정을 승인하였고(1960. 7. 25) , 미사 통상문의 성찬 기도에 성 요셉의 이름을 삽입하였 다(1962. 11. 13) . 교황이 발표한 회칙은 교의적 측면보다 는 사목적 측면을 보다 더 드러내고 있다. <베드로좌에 서>(Ad cathedram Petri, 1959. 6. 29)라는 회칙에서 교황은 진리 · 일치 · 평화는 사랑의 정신에서 증진되어야 한다 고 강조하면서 비가톨릭 신자들을 '갈라진 형제요 아들 들' 이라고 표현하였다. 또한, 회칙 <어머니와 교사> (Mater et Magistra, 1961. 5. 15)를 통해서는 가톨릭 교회의 사회 가르침을 쇄신하였다. 교황은 1962년 10월 중순 쿠바 사태로 생긴 미국과 소련의 위기 상황에서, 교황은 10월 25일에 발표한 담화를 통해 세계 각국의 정상들에 게 전쟁의 위험을 피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후 발표 된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1963. 4. 11)에서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 온 인류가 힘써야 한다는 전제하에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 체제의 열망을 구분하면서, 서 방 세계와 공산주의와의 평화적 공존을 역설하였다. 이 회칙은 전세계에 강한 인상을 주었고, 러시아 공산당 의 장인 흐루시초프(Khrushchov, 1894~1971)의 사위와 딸의 알현으로 이어졌다. 교회 일치 운동 측면에서, 교황은 1960년 12월 20일 캔터베리의 대주교인 피셔(J. Fisher)를 교황청에서 만났 다. 이로써 그는 성공회 주교로서는 처음으로 교황청을 방문한 인물이 되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 총대교인 아 테나고라스 1세에게 사절을 보내 인사를 전하게 하였고 (1961. 6. 27), 모스코바의 총대주교인 알렉시우스와도 인 사를 교환하였다. 이외에도 세계 교회 협의회(W.C.C)에 처음으로 가톨릭 교회의 참관인이 참여토록 하였다 (1961. 11).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우선 성 금요일 전례에 서 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단어들을 삭제하였고, 유 대인 방문객들에게 "나는 여러분의 형제인 요셉입니다" 라는 말로 자신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또한 교황은 로마 주교로서의 모습도 강화하였다. 일반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길 원한 교황은 로마의 본당을 방문하는 것뿐 아니라 '레지나 첼리' (Regina Coeli)와 같은 감옥과 병원을 방문하였다. 1963년 5월 22일 베드로 광장에 모인 신자들에게 마지막 인사와 함께 강복을 준 교황은 성령 강림 대축일이 었던 6월 3일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평가와 의의] 5년도 채 안된 재임 기간 동안 교황은 새 천년기의 전야에 인류를 향해 열려 있는 교회가 되도록 가톨릭 교회에 큰 각인을 새겼다. '좋으신 교황' (papa buono)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교황 요한 23세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 소송이 시작되어, 2000년 9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베드로 광장에서 시복되었다. (→ 바티칸 공의회, 제2차 ; <어머니와 교사> ; <지상의 평화>) ※ 참고문헌 Giacomo Maria Radini Tedeschi, Vescovo di Bergamo, Roma, 1963/ Giovanni XXIII , Il giornale dell'anima, a cura di L. Capovilla, Cinisello Balsamo, 1990/ G. Alberigo, Dizionario Storico del Papato I, diretto da P. Levillain, Traduzione di Francesco Saba Sardi, Milano, 1996, pp. 657~661/ F.L. Cross · E.A. Livingstone edited,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 1997, pp. 886~8871 J.N.D. Kelly, The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New York, 1986, pp. 320~3221 A. Lopes, I Papi, La vita dei pontefici attraverso 2000 anni di storia, Roma, 1997, p. 101. [邊宗燦]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