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다마스커스의 Joannes Damascenus(6507~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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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고를 쓰고 있는 다마스커스의 요한.

설교 원고를 쓰고 있는 다마스커스의 요한.


성인. 신부. 수도승. 교회 학자. 그리스 교부 중 마지막 인물. 축일은 12월 4일. [생 애] 요한은 650년경 아랍계 그리스도인 가문 출 신으로 다마스커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몇 세대 에 걸쳐 국가 재정을 담당한 고위 관리였으며, 칼리프 무 아위야(Muawija, 661~680) 당시 재무 장관이었던 그의 아 버지 사르군(Sargun)은 남부 이탈리아 출신의 전쟁 포로 에게 요한과 양자인 코스마스의 교육을 맡겼다. 요한은 훗날 칼리프가 된 야지드 1세(680~683)의 친구였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황실에서 중요한 관직을 맡았다. 아랍인들이 635년 다마스커스를 정복하였을 때, 마호 메트의 후계자인 칼리프들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 정 책을 폈었다. 그런데 이 정책은 칼리프 아브드 알 말리크 (Abdal-Malik, 685~705), 그리고 오마르 2세(Omar II,717~ 720) 때 완전히 바뀌었다. 그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국가의 고위 관직을 맡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요 한은 사직하고 코스마스와 함께 예루살렘 근처의 마르 사바(MarSaba) 수도원으로 가서, 금욕 생활을 하며 성서 와 교부 문헌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정통 신앙을 변론 하고 백성을 교화하기 위한 신학 작품을 저술하였으며, 근처 여러 주교의 조언자가 되었다. 그의 명성은 찬가 시인과 학자로 매우 드높았다. 그런데 반역 때문에 칼리프 의 명령으로 그의 손이 잘렸으나 하느님의 모친인 마리아가 이를 치유해 주었다는 일화는 꾸며 낸 이야기이다. 요한에게 신학을 가르쳐 준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요한 5세(707~735)는 그에게 사제품을 주었으며, 특히 성화상 논쟁에 관여하게 하였다. 성화상 논쟁에서 그는 성화 공경을 변론하는 데 전력하였다. 생애 말기에 그가 자신의 작품을 교정하였다는 보고는 수사본 전승에 근거한 것이 다. 그는 12월 4일 고령으로 죽었으며, 마르 사바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성화상에 적대적 입장을 취한 히에레 이아(Hiereia) 교회 회의(754)는 그를 단죄하였다(이 교회 회의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미 사망하였다). 그러나 제2차 니체아 공의회(787)는 그를 복권시켰으며, 그의 성화상 신학을 지지하였다. 동방 교회는 그를 늘 교부로 공경해 왔으며, 교황 레오 13세(1878~1903)는 1890년 8월 19 일 교령에서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작 품] 남아 있는 요한의 작품들은 당시의 신학 전반 을 다루고 있다. 요한은 자신의 형제이며 마유마의 주교인 코스마스에게 바치는 헌정 서간에서 《인식의 원천》이 《철학》(Capitula philosophica, Dialectica) · 《유설》(De haeresibus) · 《올바 른 신앙에 관한 해설》(Expositio fidei, De fide orthodoxa) 등 의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철학》에서 이교 철학의 장점을 설명한다. 《유설》에서는 당시까지의 100개의 이단을 다루었는데, 그중 80개의 이단은 에피 파니오(Epiphanius, 315?~403)의 작품에서 따온 것이며, 나 머지 20개의 이단은 독자적으로 쓴 것 같다. 《올바른 신 앙에 관한 해설》에서는 교회의 가르침, 곧 하느님과 창 조, 인간론, 그리스도론, 마리아론, 성인 공경과 성화 공 경, 구원론, 종말론을 100장에 걸쳐 다루었다. 그 밖에 도 《교의 기초 입문》 · 신앙 해석서인 《올바른 신념에 관 한 소책자》 · 《네스토리우스파 논박》 · 《야고보파 논 박》 · 《트리스하기온 찬가》 · 《거룩한 성화상들을 비방하 는 이들에게 보내는 연설들》이 있다. 이 중 마지막 작품 은 성화상의 목적, 원형(πρότυπος)과 모상(αντίτυπος) 의 관계, 성화상 공경(흠승과 공경의 구분)을 언급하였다. 도덕 · 금욕서로 《단식》, 도덕과 금욕을 다룬 본문을 모은 성서-교부 선집인 《거룩한 병행 구절》 등이 있다. 또한, 설교로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탄생> · <시든 무화 과 나무와 포도밭 비유> · <파스카 금요일 또는 주님의 매장> · <우리 주님이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변 용> · <거룩한 하느님의 모친, 마리아의 탄생일> 등이 있 다. 요한의 작품 중에서 성 바바라와 요한 그리소스토모 에 대한 찬가 이외에도 널리 보급된 《바르람과 요아삽에 관한 교화 소설》이 있다. 그런데 수도자 소설인 이 작품 의 친저성은 아직도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평 가] 요한은 이전 신학자들의 전통을 따르는 편집 자였다. 그는 《인식의 원천》의 서두에서 "자신의 것은 아 무것도" 첨가하지 않겠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그는 이전 에 쓰인 작품의 자료를 비판적 안목으로 선별하고 체계 적으로 구성하였다. 특히 성화상 연설과 신학에 관한 소 논문의 적지 않은 구절에서 그는 전통에 바탕을 둔 새롭고 독창적인 신학을 전개하였다. 그는 그리스 교회의 위 대한 교의학자 가운데 한 명일 뿐만 아니라 박식한 저술 가이며, 동방에서 매우 유명한 설교가이고 뛰어난 시인 이었다. 《인식의 원천》은 10~11세기에 게오르기아어 . 아르메니아어 · 고대 슬라브어 · 아랍어 등으로, 12세기 에는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이 저서는 동방 교회에서 신 학적 사고의 토대를 이루는 작품이 되었으며, 《올바른 신앙에 관한 해설》은 17세기까지 러시아 신학의 기초를 놓는 유일한 작품이었다. 서방에는 맨 먼저 강해들이 소 개되고, 1140년경 《올바른 신앙에 관한 해설》을 피사의 부르군디오가 번역하였다. 로베르트 그로세테스테는 《해 설》을 개작하고, 《인식의 원천》의 나머지 부분을 번역하 였다. 서방 교회는 그리스 용어를 신중히 도입하면서 요 한을 접하게 되나, 1215년에 열린 제4차 라테란 공의회 에서 베드로 롬바르두스(Petus Lombardus, 1095~1160)의 삼위 일체론을 인가함으로써 요한에 대한 불신은 사라졌다. 이후 요한의 《해설》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페라 라-플로렌스의 일치 협상에서 요한은 필리오퀘(Filioque) 와 성찬례 문제에서 여러 번 인용되었다. 1507년 이후 《해설》과 《인식의 원천》의 다른 부분은 계속 번역되고 출판되었다. (⇦ 요한 다마세노 ; → 성화상 논쟁) ※ 참고문헌  B. Kotter, 17, pp. 127~131/ Robert Volk, 《LThK》 5, pp. 895~899/ H.R. Drobner, Lebrbuch der Patrologie, Freiburg · Basel · Wein, 2000. [河聖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