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몬테 코르비노의 Johannes de Monte Corvino(1247~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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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최초로 복음을 전한 몬테 코르비노의 요한(왼쪽)과 교황을 알현하는 몽골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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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최초로 복음을 전한 몬테 코르비노의 요한(왼쪽)과 교황을 알현하는 몽골 대사.


초대 북경대교구장이자 몽골 통치하의 극동 전 지역 관할 총대주교. 작은 형제회 회원. 한자 이름은 맹고미락 (孟高味諾) 중국 원(元)나라 때 북경으로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한 선교사로서, 북경에 최초의 가톨릭 성당을 건축하였다. [생애 및 선교 활동] 요한은 이탈리아 나폴리 왕국의 몬테 코르비노라는 마을에서 1247년에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에 대해 전해 주는 자료는 거의 없 다. 단지 작은 형제회의 신부인 마리놀리의 요한(Johannes de Marignolli)에 의해 알려진 것이 있을 뿐이다. 그에 따르면, 요한이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기 전에는 군인, 법 률가, 의사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부유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가 수도원에 입회한 연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요한은 수도원에 입회하여 엄격한 수도 생활을 하였 고, 철학과 신학을 배운 후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신학 강의와 설교에 충실하였다. 그는 대단히 박학다식한 사람이었으며, 프란치스코(Fanciscus Assisii, 1181~1226)의 덕과 영성을 본받으려는 열성이 남달랐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철저하고 엄격한 사람이었다. 점차 그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으로 가서 선교를 하려는 소망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 내 그는 장상으로부터 허락을 받고 선교사의 길을 나서게 되었다. 요한은 생애의 거의 전부를 선교 활동에 바쳤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선교 활동에 관한 세 편의 서한을 남겼다. 그의 50여 년(1279~1328)에 걸친 선교 활동은 대략 세 시기로 나누어진다. 제1 시기는 아르메니아와 페르시아 에 교황 사절로 파견되어 선교 활동을 체험한 시기이다. 그리고 북경을 향한 여정 중에 13개월 간 인도에 체류한 시기이다(1279~1289, 1290~1291, 1292~1293). 제2 시기는 원나라의 수도인 북경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다가 마침내 북경대교구장이자 극동 지역의 총대주교로 임명되기까 지의 시기이다(1294~1307). 제3 시기는 총대주교로 서임 된 후, 북경 관구(北京管區)의 관할 교구들을 설립하고 정비하다가 사망할 때까지의 선교 활동 시기이다(1308~ 1328). 제1 시기 : 요한은 중동 지역 선교지에서 약 10년 동 안 열정을 다해 선교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에 요한은 아르메니아어와 페르시아어를 배우고, 또 네스토리우스 주의 전례에 사용되는 문어체 시리아어도 습득하였다. 그는 아르메니아와 페르시아와 그루지아의 동방 교회와 접촉하여 그들의 관습과 심성, 그리고 정치적 · 사회적 권력을 다루는 그들의 방식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그는 네스토리우스파가 수 세기에 걸친 여러 정치 체제 속에 서 어떻게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알려고 하였다. 결국 이러한 언어 습득과 문화적인 경험들은 후 에 그가 황실의 막강한 힘과 보호 아래 경교(景敎)가 압도적으로 성행하고 있던 중국에서 효과적으로 선교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밑거름이 되었다. 한편, 아르메니아의 왕 헤툼 2세는 매우 경건하고 신심 깊은 사람으로서, 많은 왕족과 백성들과 함께 아르메 니아 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왕은 1289년 에 교황 니콜라오 4세(1288~1292)에게 평화의 사절로 요 한을 파견하였다. 교황 니콜라오 4세는 요한에게 아르메 니아의 헤툼 2세, 안티오키아와 그루지아의 총대주교, 페르시아의 칸 아르군과 에티오피아의 왕, 그루지아의 왕에게 보내는 서한들과 그 외에 여러 통의 서한들을 전 하도록 하는 동시에, 새로운 선교 사명을 부여하였다. 즉 교황은 그를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Kubilai, 世祖, 1260~ 1294)에게 교황 사절로 파견하였다. 요한은 1290~ 1291년 사이에 교황의 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먼 여행을 떠났다. 우선 몇 개월 간 타브리즈에 머물렀던 요한은, 원나라 의 수도인 북경에 도착할 때까지 길고 험난한 여행을 하였다. 그는 이전에 교황 사절로서 몽골에 파견되었던 작은 형제회의 선교사들(칼피니의 요한 신부, 루브뤼크의 굴리 엘모 신부)과는 다른 여행 방법을 택하였는데, 육로가 아 닌 해로로 여행을 하였다. 요한은 1291년에 도미니코회 의 니콜라오(Nicolaus de Pistoia)와 마침 타브리즈에 온 이 탈리아의 상인 베드로(Petus de Lucalongo)와 함께 먼저 인도로 향하였다. 일행은 1292년 혹은 1293년경에 인 도에 도착하여 약 13개월 간 그곳의 성 토마스 성당에 머물렀다. 요한은 인도에 도착한 후, 인도의 문화와 기후, 그리고 인도에서의 어려운 생활 등을 보고하는 첫 번 째 편지를 이탈리아어로 썼다. 요한의 첫 번째 편지뿐 아 니라 두 번째 편지 앞 부분에도 인도에서 13개월 동안 머물면서 이룬 선교 성과 즉, 약 100여 명에게 세례를 준 사실, 그리고 동료 니콜라오가 사망하여 성 토마스 성 당에 안치한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제2 시기 : 요한은 1294년경에 상인 베드로와 함께 배를 타고 해로로 북중국(Cathay)의 칸발리크(Khanbaliq, 지금의 북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요한이 북경에 도착했을 무렵은 황제 쿠빌라이가 사망하고 난 직후였던 것으 로 추정된다. 다행히 그는 쿠빌라이의 후계자 티무르(Timur, 成宗, 1294~1307)에게서 환대를 받았다. 그는 쿠빌라 이에게 보낸 교황의 1289년 7월 13일자 칙서를 티무르 에게 전하였다. 요한은, 로마 교회와 라틴 세계를 관대하 게 보아 줄 것과 황제에게 파견한 수도자들도 너그러이 받아 줄 것을 청하는 교황의 서한을 전하면서, 가톨릭 신 앙을 받아들이도록 권하였다. 하지만 요한의 말에 의하면, 황제는 너무 오랫동안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으므로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많은 특혜를 베풀고 있었다. 요한 역시 황제 의 측근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이로써 요한은 본격적인 중국 선교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요한은 특히 중국 선교 활동을 전개할 당시의 여러 가 지 상황들을, 페르시아에 체류하고 있는 작은 형제회와 도미니코회의 장상들과 작은 형제회 총장에게 보낸 라틴어로 된 두 번째(1305. 1.8)와 세 번째(1306.2 편지에서 자세히 전해 주고 있다. ① 경교인들의 중상 모략과 극복 : 당시 경교는 중국 북부와 동부의 10개 성과 20여 개 도시에 진출해 있었 다. 또한, 경교 신자들은 중국 황실에서 많은 고위직을 맡고 있었다. 요한은 편지에서 밝히고 있듯이, 중국 선교 활동 초기부터 경교 성직자들의 집요한 방해로 많은 어 려움을 겪었다. 경교 신자들은 직접적으로나 혹은 뇌물 로 사람들을 매수하여, 요한을 교황으로부터 파견된 자 가 아니라 정탐꾼이요 마술사이며 사람들을 기만에 빠뜨리기 위해 온 자라고 주장하였다. 그뿐 아니라, 교황의 특명을 받고 황제에게 바칠 엄청난 보물을 가지고 오던 다른 한 명의 사절을 인도에서 죽이고, 그 보물들을 모두 갈취하였다고 모략하였다. 하지만 중동 지역에서 다년간 쌓은 선교 경험으로 경교인들이 황실의 권력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입지를 마련하는 처세술을 간파하고 있었던 요한은, 경교의 술책에 크게 실망하지 않고 이를 지혜롭게 극복해 나갔다. 한편, 요한은 중국에 온 첫해에 산서(山西) 북부의 몽골 부족인 옹구트의 왕 제오르지오(Georgio, 忠獻王, +1298)를 만났다. 티무르 황제의 사위인 제오르지오는 경교 신자 였으나, 요한에 의해서 가 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이 때문에 경교 신자들은 더욱더 요한을 모략하였다. 원나라 자료에 의하면, 제 오르지오 왕은 1298년경 에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5년 동안이나 지속되던 경교인들의 박해 는 제오르지오 왕이 사망 한 후 더욱 극에 달하였다. 요한은 경교인들의 중상 모략으로 자주 기소되었으며, 사형수가 되어 감옥에 갇힌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경교 신자인 어느 대신의 자백으로 요한은 경교인들의 박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황제 역시 요한의 무고함을 인정하였으며, 그를 중상 모략한 경교인들을 가족들과 함께 모두 귀양보냈다. ② 옹구트인들의 복음화 및 전례 교육 : 요한은 편지 에서, 옹구트의 왕 제오르지오를 선왕(善王)이라 경칭하 였다. 그에 따르면, 옹구트의 왕은 요한의 설교를 듣고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하였을 뿐만 아니라, 작은 형제회에 호의를 보여 주었으며, 요한에게 제의를 입고 미사를 거행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래서 다른 경교 신자 들은 그를 배교자라고 고발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비난에도 아랑곳없이 옹구트의 왕은 경교를 신봉하던 자신 의 부족 대다수를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시켰다. 뿐만 아니라 거액을 들여서 황제가 거주하는 북경 북부 산서 방 향으로 20여 일 정도 가는 지점에, 삼위 일체 하느님과 교황을 위해 봉헌한 아름다운 성당을 지어 주었다. 요한이 둘째 편지에서 성당이 이미 6년 전에 완공되었 음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성당은 1299년경에 완 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요한은 이 성당에 세 개의 종이 달린 종각을 두어 시간마다 종이 울리도록 하였다. 요한 이 이 당시 세례를 준 사람들의 숫자는 대략 6천 명 정도 였다. 그런데 왕이 사망하자, 왕의 형제들은 경교인들의 사주를 받아 왕의 인도로 개종한 옹구트 사람들을 다시 경교로 돌아오도록 강요하였다. 요한은 편지에서, 만약 에 경교 신자들의 방해만 없었더라면, 3만 명은 족히 개종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하였다. 그리고 제오 르지오 왕은 9세의 어린 아들을 두었는데, 요한은 그 어 린 왕자에게도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 요한은 개방된 마음으로 자신이 만난 사람들의 문화에 동화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주로 이 시기에 제오르지 오 왕의 백성인 옹구트인들에게 봉사하는 데 혼신을 다 하였으며, 그들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펼쳐 나갔다. 요 한은 그들을 복음화시키기 위해서 중국 도착 첫해부터 미사 경본을 옹구트족이 사용하는 위구르말로 번역하였 다. 뿐만 아니라 약 10년에 걸쳐 신약성서와 시편을 위 구르말로 번역하였다. 그는 중동 지역에서 배운 문어체 시리아어 덕분에 몽골 제국에서 두루 사용되던 위구르어를 쉽게 배울 수 있었다. 또한 라틴어로 전례를 거행함으로써 서방 전례를 활성 화시키고자 한 것도 요한의 사도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는 선교 활동 시작 후 7~11년 사이에 노예 시장에서 산 40명 가량 되는 소년들에게 세례를 주고, 라틴어와 가톨릭 전례를 가르쳤다. 그는 그들에게 30여 편의 찬가가 수록된 라틴어 시편집과 두 권의 시간 전례 서를 필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들 중 11명의 소년들은 가톨릭 전례를 거행하는 데 직접 참여할 수 있게 하였 다. 요한은 그들에게 성가를 가르쳐 전례 중에 부르도록 하였으며, 시간마다 종이 울릴 때 시간 전례를 합창하도록 하였다. 그들이 부르는 노랫소리는 황제가 거처하는 방까지 들렸는데, 이는 황제를 매우 기쁘게 하였다고 한 다. 일반적으로 요한이 행한 소년들의 교육은, 중세기 서 방에서 성직자로 양성하려고 선별된 소년들에게 행한 교육 방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여겨진다. 요한은 그들 을 중국의 현지인 사제들로 서품시키려고 한 것이 분명 하나, 그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또한 요한은 편지에서, 만약 제오르지오 왕이 더 살아 있었다면, 왕의 통 치령 전역에 라틴 성가가 울려 퍼지도록 할 생각이었다고 이야기하였다. ③ 선교사의 요청과 두 번째 성당의 설립 : 요한은 북경에 온 이후 혼자서 사목을 하느라 온갖 역경과 노고를 겪었다. 북경에서 사목 활동을 한 지 11년 만인 1303년 에 쾰른의 작은 형제회 회원 아르놀도(Arnoldus Alamanus) 신부가 찾아왔다. 그러나 아르놀도는 온 지 얼마 안 되어 사망하였다. 요한은 두 번째 편지에서, 그 동안 자 신이 겪은 고초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말해 주기라도 하 듯이, 자신이 58세라는 나이에 맞지 않게 백발이 성성한 노인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 은 황실에서 거주하고 있는데, 성당은 20여 일 정도 걸 리는 거리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혼자서 성당을 왕래하 며 사목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설명하였다. 이러한 이야기와 더불어 요한은 작은 형제회 총장에게 정식으로 의 지가 굳건하고 복음 정신이 투철한 선교사들을 북경으로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요한은 세 번째 편지에서 1305년에 황실 옆에 또 하나의 성당과 수도원 숙소를 설립하기 시작하였다고 알려 주었다. 이 건물들은 "황실 문 앞에서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거리"에 있다고 하였다. 타브리즈에서 함께 온 상인 베드로가 1305년 8월 초에 부지를 사서 기증한 땅에, 후원금으로 주변 담장과 수도원 숙소와 제의실과 200명은 족히 수용할 수 있을 본당을 성 프란치스코 축 일(10월 4일)까지 완공하였다. 편지에서 요한은, 이듬해 여름에는 성당 전체를 완공할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하였다. 요한은 자신이 가르친 소년들을 양 건물에 나누어 배치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시간 전례를 바치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양쪽을 왕래하며 주일 미사를 봉헌하였다. 제3 시기 : ① 교황청의 대응과 북경 관구의 설정 : 요한의 편지들은 중동 지역에 있는 작은 형제회와 도미니 코회의 장상들에게 먼저 전해졌으며, 타브리즈에서 많은 네스토리우스주의 신자들을 개종시킨 바 있는 토마스 (Thomas deTolentino) 주교가 이탈리아로 가는 길에 그 서한을 로마에 전하였다. 먼저 작은 형제회의 전(前) 총장 요한(Johannes de Muro, 1296~1304) 추기경이 그 서한을 읽고 북경의 선교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 사실을 추 기경단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추기경단에서는 토마스 주 교로부터 직접 듣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토마스 주교는 추기원(Consistorium) 회의에 참석하여 추기경들 앞에서 몬테 코르비노의 요한이 간절히 청하고 있는 바와 중국 의 선교 활동은 계속 진전시킬 가치가 충분히 있음을 피력하였다. 당시의 교황 글레멘스 5세(1305~1314)는 작은 형제회 의 총장 곤잘로(Gonzalo de Balboa, 1304~1313)에게 작은 형제회 회원 중에서 덕이 출중하고 복음 정신이 투철하 며,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회원들을 선정하 여 주교로 서임하고, 그들에게 합당한 특권을 부여하여 북경으로 파견하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교황은 1307년 7월 23일 북경을 극동 지역의 총대주교좌로 설정하고, 총대주교로 몬테 코르비노의 요한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주교로 임명한 7명의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1308년경에 북경으로 파견하여, 요한을 총대주교로 서임시키고 그를 보좌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들은 요한이 택하였던 방식으로 인도를 거쳐 해로를 이용해 북경으로 떠났다. 그런데 이들 주교들은 북경까 지 가는 여행 중 목숨을 잃거나 병에 걸렸다. 인도에서 세 명의 주교(Nicolaus de Banzia, Ulricus de Seyfridsdorf, Andreucci de Assisio)가 사망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따라갔던 여러 명 의 선교사들 가운데 다수도 그곳에 머물고 말았다. 나머 지 주교들과 여러 명의 선교사들이 북경을 향해 다시 길 을 떠났으나, 굴리엘모(Guillelmus deVillanova) 주교는 도 중에 사망하였다. 결국 세 명의 주교들(Gerardus Albuini, Andreas de Perusia, Peregrinus de Castello)이 여러 명의 선교사들 과 함께 당나라 때부터 개항된 국제 상업 항구인 천주 (泉州)에 도착하였다. 제라르도는 천주에 남아 있고, 안드레아와 페레그리노 만이 1313년경에 북경에 도착하여 요한의 총대주교 착 좌식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북경에 온 이 들은 약 5년 간 황실에 거주하면서, 황제로부터 하사된 은봉(恩俸)으로 생활하였다. 한편, 1311년에 교황청에서는 인도에서 사망한 세 명의 주교들을 대신하여 새로 세 명의 주교들을 중국으로 파견하였다. 그들은 베드로 (Petrus de , 국적 불명의 토마스(Thomas) 카파의 주교로 임명된 예로니모(Hieronymus de Catalaunia)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 베드로만이 무사히 북경에 도착하였다. ② 북경 관구 및 중국의 교세 확장 : 북경 관구 설정은 1318년까지 지속되었다. 그 후 교황 요한 22 (1316~1334)가 술탄 지역에 새 관구를 설정하고 극동 지역의 일부를 도미니코회에 위임하였다. 그래서 중국과, 킵차크와 소아시아의 일부 지역이 북경 관구에 속하게 되었고, 이를 작은 형제회가 위임받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북경 관구에는 북경대교구를 비롯하여 천주 즉 자이 툰(Zaitun) · 알말리흐(Almaligh) · 카파(Kaffa) · 사라이 (Sarai) · 타나(Tana) · 쿠무크(Kumuk) 교구들이 설정되어 소속되었다. 북경 관구의 총대주교이자 북경대교구장이 된 요한은, 그때까지 여러 가지 이유로 제한을 받아 왔던 선교지에 선교사들을 나누어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페레그리노 주 교는 1318년에 장상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 북경에는 세 개의 성당이 설립되어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이 해에 요한은 천주교구를 설정하고 초대 교구장으로 제라 르도를 임명하였다. 이곳에는 제라르도 주교 외에도 세 명의 신부들이 더 있었다. 그리고 이 도시에 사는 부유한 아르메니아 부인이 내놓은 기부금으로 성당과 작은 형제 회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1326년에 장상에게 보낸 안드 레아 주교의 편지에 따르면, 이 성당에는 작은 형제회 수 도자들이 기거할 수 있는 20개의 작은 방과 고위 성직자 들을 위한 4개의 방이 있었다. 이 성당은 후에 요한 총대 주교에 의해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요한은 북경대교구와 천주교구를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활발하게 펼쳐 나갔으며, 또한 북경에 도착한 안드레아와 페레그리노 주교를 여러 선교사들과 함께 항주(杭州)와 양주(揚州)로 파견하였다. 항주에는 작은 형제회 수도원이 하나 설립 되었다. 한편, 요한은 북경에서 옹구트인들뿐 아니라 몽골에서 추방되었거나 경교인들이었던 알란인들, 케라이트인들, 아르메니아인들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 함에 따라, 날로 신자수가 증가되었다. 또한 다른 선교사 들은 천주, 양주나 항주의 지방민들, 소위 '우상 숭배자' 라고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하여, 개 종자수를 날로 증가시켰다. 1318년 페레그리노 주교의 편지와 1326년 안드레아 주교의 편지에는 당시 천주교 구의 선교 현황을 보고한 내용이 있다. 안드레아는 편지 에서, "비록 천주에 있는 유대교인들과 사라센인들은 개 종시키지 못하였으나, 중국의 우상 숭배자들을 다수 개 종시켰습니다. 하지만 세례만 받았을 뿐 철저히 그리스 도교적인 생활을 하도록 이끌지는 못하였습니다"라고 하 였다. 1313년에 천주교구의 초대 주교였던 제라르도가 사망하여 그곳에 묻히자, 요한은 그 후임자로 안드레아 를 임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안드레아가 이를 수락하지 않자 페레그리노가 제2대 천주교구장이 되었다. 하지만 1322년에 페레그리노마저 사망하자, 안드레아 주교를 제3대 천주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 ③ 요한의 사망과 장례 : 요한은 1328년에 81세의 고 령으로, 중국의 사도로서 복음화에 헌신하였던 파란만장 한 삶을 마쳤다. 그를 추모하는 장례식은 장엄하게 거행 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북경에 설립된 작은 형제회 수도 원 내에 안치되었다. 그의 장례 미사를 주례하였던 술탄 의 총대주교인 코라의 요한(Johannes de Cora)은, 후에 요 한의 장례 미사 광경을 소개하는 글을 남겼다. 이에 따르 면, 요한의 장례식장은 그를 추모하기 위해 모여든 수많 은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이교도들로 가득하였다. 이교도 들도 그들의 관습에 따라서 가톨릭 성직자의 죽음을 애 도하였다. 장례에 참석한 무리들은 요한이 평소에 입었 던 의복들을 서로 가져다가 성물처럼 공경하였으며, 그 를 매장한 묘지에는 조문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들로 볼 때, 요한은 생전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들 뿐 아니라, 중국인에게서도 상당히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며, 그가 사망한 후에도 그를 기억하여 공경한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평가 및 의의] 요한이 사망한 후에, 교황청은 계속해 서 그의 후임자들을 임명하였다. 원나라가 패망하고 명 나라가 들어설 때까지 북경대교구는 약 40년 간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6세기 말, 17세기에 예수회에 의해 중국 땅에서 다시금 복음이 선포되기까지 중국에서는 선교 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따라서 원나라가 멸망하면서 북경대교구도 폐지되었다가 청나라 때인 1690년에야 교구로 설정되었고, 1696년 이래 여러 교구로 분리되었다. 요한은 최초로 중국에 교회를 설립한 자이며, 처음으 로 가톨릭 신앙과 복음이 중국 땅에 뿌리내리게 한 사람 이었다. 요한이 사망한 직후 14세기까지 중국에 파견되어 선교 활동을 펼친 선교사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요한 만큼 커다란 업적을 남기지는 못하였다. (⇨ 몬테 코르 비노 ; → 북경대교구 ; 중국) ※ 참고문헌  Anastasius van den Wyngaert O.F.M. ed., Fr. Iohnnes de Monte Corvino, Sinica Franciscana, vol. I , Apud Collegium S. Bonaventurae, 1929, pp. 335~355/ 一, Introductio, Sinica Franciscana, vol. I, XLIII ~CIX / Jean Charbonnier, Histoire des Chrétiens de Chine, Campin, Belgique, 1992, pp. 61~67/ A. Thomas ed., Histoire de la Mission de Pekin I, boulevard Saint-Germain, L'Aris, 1923, pp. 56~62/ J. Richard, Les Missions chez les Mongols aux 王文明 XII et 李文 XIV Siecles" , Histoire Universelle des Missions Catholiques, vol. 1, 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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