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천주의 Joannes de Deo(1495~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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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의 요한.

천주의 요한.


성인. 수도회 설립자. 축일은 3월 8일. 본명은 후안 시 다데(JuanCidade) . [생애 및 활동] 천주의 성 요한(Juan de Dios)은 1495 년 3월 8일 포르투갈 몬테모르오노보(Monte-Mor O Novo)에서 태어났다. 부유하지 않은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8세 때에 한 순례자를 따라 가출하였다. 순례자를 따라 스페인까지 간 그는, 오로베사(Oropesa)라 는 도시에 사는 마요랄(Mayoral)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마요랄의 집에서 글 공부와 허드렛일을 익혀 가면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학교 공부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 가축을 돌보는 일을 하였다. 그는 양치는 목동으로서 28세까지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국경 분쟁이 발생하자 오로베사 백작의 군대에 편입된 그는, 스페인을 방어하기 위해 1523년 봄 북쪽으로 진군하였다. 이 전투는 2년 동안 지속된 장기전이었지만 오로베사 백작의 군대가 전선에 도착할 무렵, 전세는 스페인의 승리로 거의 굳어져 가는 상황이었다. 이 시기에 요한은 다른 군인들과 마찬가지 로 방종한 생활을 했으며, 적은 급료 때문에 가끔은 도둑질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노획한 전리품을 지키는 일을 맡았는데, 어느 날 전리품이 도난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일로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군대에서 추방당하였다. 군대에서 추방당한 요한은 오로베사에 있는 양부의 집 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양치는 목동의 생활을 하였다. 그 러던 중 그는 다시 군대에 지원하였다. 그가 지원한 군대는 터키 제국의 침공으로부터 비엔(Vienne)을 방어하고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1519~1556)의 군 대에 합세하러 원정을 떠나던 군대였다. 1523년 9월 25 일 비엔 근교에서 격전이 벌어졌으나 하루 만에 끝났다. 터키 군은 패하여 유럽에서 퇴각하였다. 전쟁이 승리로 끝나고 군대가 해체되자 요한의 군대 생활도 끝났다. 그 후 그는 감사 기도를 드리기 위해 스페인의 북서부에 있 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로 성지 순례를 떠났다. 이것이 그의 인생에 새로운 장을 여는 출발점이었다. 이후부터 그는 더 많은 시간을 묵상과 기 도로 보내었다. 그러던 중 그는 포르투갈의 영토로서 전 략적인 요새였던 북아프리카의 수타 지역의 일자리를 얻 기 위해 떠났으며, 수타에서 잠시 생활하였다. 수타에서 돌아온 후, 요한은 그라나다의 엘비라(Elvira) 성문 옆에 조그마한 가게를 얻어 책과 십자가, 성물 등을 파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539년 1월 20일 성 세바스티아노 축일에 요한은 '순교자들의 암자' 라는 성당에서 아빌라의 요한(Joannes de Avila, 1500~1569) 신부의 성 세바스티아노(Sebastianus, ?~288?)의 용기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에 대한 강 론을 들었다. 그 후 그는 세바스티아노 성인전을 여러 차 례 읽으면서, 회심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런 그의 생활 을 본 주변 사람들은 그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여겨 왕립 병원에 데리고 갔다. 시설이 열악한 이 병원에서 그는 모 진 시련을 겪었다. 그는 아주 작은 방에 갇혀서 벌거벗긴 채 매를 수없이 맞아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 런 모진 시련을 받으면서도, 그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 는 다른 환자들이 좀더 편안하고 양호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요한은 퇴원을 하자 제일 먼저 자신의 영적 지도자인 아빌라의 요한 신부를 찾아갔다. 그의 지도 아래 기도와 묵상을 1개월 간 한 후 과달루페의 성모 마리아 성지를 순례하였다. 그곳에서 예로니모회의 수도자들이 운영하 는 병원과 의학 학교에서 병자 간호에 필요한 기본적인 일들을 배우면서 3개월을 보냈다. 그라나다로 돌아온 요 한은 1539년 12월 말에 루체나(Lucena) 가도(街道)에 최초로 '자선의 집' 을 개원하였다. 베네가스(Venegas)라 는 은인의 도움으로 2층 건물을 빌릴 수 있었으며, 그라 나다의 주교는 침대와 담요를 사도록 비용을 주었다. 요 한은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오면,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 과 봉사의 의미로 당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었던 것처 럼 그들의 발을 씻어 주는 관례로 그들을 맞이하였다. 환자들은 따뜻하고 깨끗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충분히 먹고 투약을 받았으며, 또한 사랑 속에서 인격적인 대우를 받 았다. 요한은 바쁜 하루 일과가 끝나면 지친 몸을 이끌고 자신의 침대 앞에 무릎을 끓고 하느님의 보호 속에 자기 가 돌보고 있는 식구들을 맡긴다는 기도를 드리곤 하였다. 1540년에 스페인 국왕의 고문이며 그라나다를 관할 하고 있던 투이(Tuy)의 주교 라미레스(S. Ramirez)는 요 한을 만찬에 초대해서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천주의 요한이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하사하였다. 그 이름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온정과 자비를 연상시키는 것이 되었다. 요한은 호감을 주는 친근한 분위기의 사람이었 으며, 타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모든 계층 사람들 의 관심을 자신의 자선 사업으로 돌리게 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또한 매일 거리에서 '자선의 집' 에 기거하는 사람들을 먹일 음식과 구호 물품을 구걸 하는 일 외에도 자신의 사업을 후원해 줄 후원자들을 찾 아 그라나다 외 여러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곤 하였다. 특 히 요한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며 평생 은인이었던 세 사 공작 부인은 기금을 헌납하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세사 공작 부인은 또한 후에 스페인의 왕이 된 필리페 3 세(1598~1621)와 포르투갈의 여왕과 오스트리아의 황후가 된 그의 누이 요안나와 마리아 그리고 많은 귀족들도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요한은 심장 울혈증과 관절염, 안구 이상 등으로 고통 받고 있었으나 쉬지 않고 일하였다. 하지만 결국 1550 년 3월 8일 자신이 태어난 날, 십자가를 가슴에 안고 무릎을 끓은 자세로 임종하였다. 그의 장례식에는 많은 고위 성직자와 공직자들도 참석했으며, 그가 돌보던 가난한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긴 행렬을 지으며 몰려왔다고 한다. [시성과 공경] 천주의 성 요한은 1630년 9월 21일 교 황 우르바노 8세(1623~1644)에 의해 시복되었고, 1690 년 10월 16일에 교황 알렉산데르 8세(1689~1691)에 의 해 시성되었다. 1886년 5월 27일 교황 레오 13세(1878~ 1903)는 그를 병자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하였으며 1930년 8월 28일 교황 비오 11세(1922~1939)에 의해 모든 간호인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의 유해는 그에게 봉헌된 스페인 그라나다의 천주의 성 요한 대 성전에 안치되어 있다. 천주의 성 요한은 살아 있을 때 직접 수도회를 창설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 의해서 수도회가 설립되었다. 교황 비오 5세(1566~1572)는 그를 일컬어 "교회의 뜨락을 온전히 꾸미는 데 없어서는 안될 한 송이 꽃이라고 하였다.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설립된 천 주의 성 요한 수도회(Ordo Hospitalarius S. Ioannis de Deo)는 1572년 1월 1일 교황 비오 5세의 승인을 받아 교황 직속 수도회로 창설되었다. (→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 ※ 참고문헌  머라 니가롤,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한국) 역, 《인자 하신 성자 요한》,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 1990/ 《회헌》, 천주의 성 요 한 수도회, 1984/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한국) 역,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의 역사와 생활》,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 1983/ 베네딕도 오 그레디,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한국) 역, 《사랑의 투사》, 성바오로 출판사, 1975. [李柄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