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그리소스토모 Johannes Chrisostomus(344/354?~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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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에우독시아에게 훈계하는 요한 그리소스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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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에우독시아에게 훈계하는 요한 그리소스토모.


성인.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교회 학자. 동방 교회 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으로서 안티오키아 학파 중 가장 뛰어난 교부. 설교자들의 수호 성인. 축일은 1월 27일. 그의 유명한 설교들 때문에 '그리소스토모' (Χρυσόστομος), 즉 '금구' (金口)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생 애] 요한은 안티오키아에서 아버지 세쿤두스(Secundus)와 어머니 안투사(Antusa) 사이에 태어났는데, 출 생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고 344~354년 사이로 추정된다. 아버지 세쿤두스는 어머니 안투사가 20세 되던 해 에 사망했기 때문에, 요한은 젊은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일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세 속적인 출세를 위해 공부하고 향락적인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점차 이런 생활에 회의와 염증을 느끼고 친구로 후에 다르소의 주교가 된 디오도로(Diodorus Tarsens, ?~ 394?)와 함께 성서 연구와 수덕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371년 안티오키아의 멜레시오(Melitius, 360~381) 주 교는 그에게 독서직을 주고 자기 곁에서 일하게 하였다. 그러나 평소부터 수도 생활을 갈망하던 그는 인근 광야에 가서 노(老)은수자의 지도를 받으며 4년 간 생활하였 으며, 더 적극적인 수덕 생활을 열망하여 동굴에 들어가 2년 간 고행과 성서 독서의 생활을 하였다. 지나친 고행 으로 건강을 크게 해치자, 어머니 안투사의 눈물 어린 간청 때문에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그는 381년 멜레시 오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았으며, 386년에는 플라비아 노(Flavianus, 381~404)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12년 간 안티오키아의 설교 사제로 활약하면서 수많은 명강론을 하였다. 한편 397년 9월 27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넥타 리오(Nectarius, 381~397)가 사망하자, 황제는 요한을 콘스 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임명하려 하였다. 그는 이를 거 절하였지만 황제의 뜻이 워낙 완강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락하였다. 그래서 398년 2월 26일 알렉산드 리아의 총대주교인 테오필로(Theophilus, 384~412)로부터 주교품을 받았다. 수도(首都)의 총대주교가 된 그는, 궁 중 생활과 너무나 밀착되어 부패한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화려한 생활을 질타하고, 신자들이 생활을 윤리적으로 쇄신할 것을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 한 여러 가지 구호 사업을 시작함으로써 교회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에페소에서 주교 회의를 개최하여 성직 매매(simonia)를 한 6명의 주교를 면직시켰다. 그러자 총대주교의 개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적대자들이 연대하여 요한을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가장 극렬한 적대자는 그에게 주교품을 준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로 총대주교였다. 한편 처음에는 요한 주교와 황실과의 관계가 좋았으나, 황제의 보좌관이었던 에우트로피우스 (Eutropius)가 실각하고 실권이 황후 에우독시아(Eudoxia) 에게 넘어가자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는 황후의 지나친 사치와 탐욕을 요한이 비난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403년 콘스탄티노플 근교인 궤르치아(Quercia)에 서 개최되었던 주교 회의에서 적대자들의 근거없는 모략 으로 고발되어 면직되었으며, 소심증이 있던 아르카디우 스 황제(Arcadius, 395~408)는 이 결정을 받아들여 그를 비티니아(Bithynia)로 유배시켰다. 그러나 신자들이 이 결정에 반발하여 폭동을 이르키자, 이에 놀란 에우독시 아 황후는 그의 유배를 취소하였다. 이 첫 번째 유배는 오래가지 않았으며, 요한은 군중의 환호를 받으면서 귀환하였다. 그러나 2달 후 황후는 대성전 옆에 은으로 된 자신의 상(像)을 만들어 세우고 거대한 축제를 벌였다. 이에 격분한 요한 주교는 세례자 요한의 수난 축일에, 또 한 번 헤로디아가 시켰습니다. 또 한 번 춤추게 하였고, 또 한 번 요한의 목을 쟁반에 담아 오게 하였습니다" 라고 강론하였다. 이 강론에서 황후 에우독시아가 헤로 디아에 비유되었음을 간파한 적대자들은 황제에게 그의 주교 착좌식에서 교회법적인 하자가 있었다고 고발하면서 그의 면직을 요청하였다. 황제는 그에게 주교 직무 정지를 명령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였다. 404년 부활절 밤에 사제들과 함께 예비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을 때 갑자기 무장 군인들이 들어와 난동을 부리고 세례 욕조를 피로 물들였다. 그리고 황제는 404년 6월 9일(성 령 강림 후 5일)에 요한 총대주교를 쿠쿠수스(Cucusus, 지 금의 알바니아)로 유배 보내고, 대신 아르사치오(Arsacius, 404~405)를 새로운 총대주교로 임명하였다. 이 소식이 안티오키아 교회에 전해지자 그를 만나 보려는 신자들의 순례 행렬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황제는 흑해의 동편에 있는 피티우스(Pityus)라는 험한 숲속으로 유배지를 옮기 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새로운 유배지로 가던 중 407 년 9월 14일 코마나(Comana)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유해는 438년 1월 27일 군중이 도열한 가운데 콘 스탄티노플에 영광스러이 운구되었으며, 에우독시아의 아들인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408~450)는 요한의 시신 앞에 엎드려 자기 부모가 저지른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하면서 통곡하였다. 한편 요한 총대주교는 콘스탄티노플을 떠나기에 앞서 자기에게 내려진 부당하고 억울한 판결을 인노첸시오 1 세 교황(402~417)과 밀라노의 베네리오 주교, 아퀼레이 아의 주교인 크로마지오(Cromatius, 388~408)에게 알렸 다. 그러나 요한의 적대자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로 주교는 인노첸시오 1세 교황에게 요한 총대주교의 면직 을 통보하였다. 교황은 그리소스토모의 면직에 대한 시 비를 가리기 위해 동 · 서 교회의 주교 회의를 개최할 것 을 요구하였으나, 황제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교황 은 요한이 콘스탄티노플의 유일한 주교임을 선포하고, 황제와 테오필로 주교의 결정을 거부하였다. 이로써 동 · 서 교회의 교류가 단절되었으며, 그리소스토모의 이름이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명단에 복원되기까지 이 단절은 계속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1세는 412년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그의 유해는 1626년 5월 1일 이후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 성가대 경당에 안치되어 있다. 1568년 교황 비오 5세(1566~1572)는 그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면서 "동방의 네 명의 위대한 교회 학자" 중 한 사 람이라고 하였다. 또한, 동방 교회는 콘스탄티누스 모노 마코스(Constantinus Monomacos, 1042~1055) 이래 요한을 대바실리오(Basilius Magnus, 329~379),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Gregorius Nazianzenus, 329/330~389/390)와 함께 최고 의 성직자로 공경하고 있다. [작 품] 요한은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한 학자 중 가장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그의 저서 대부분이 미뉴(J.P. Migne, 1800~1875)의 《그리스 교부 전집》(PG) 47~64권에 무려 18권으로 전해 오고 있다. 이것은 그의 개인적 명 성 때문만이 아니라 신학적인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저서들은 당시 교회 · 정치 · 사회 · 문화 에 대한 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되며, 중요성으로 보아 그는 서방 교회의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와 비교될 만하다. 강론 : 그리소스토모(금구)라는 별명에 걸맞게 요한은 엄청난 양의 명강론들을 남겼다. 그는 마음의 의사처럼 인간의 약점과 악습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처방을 내렸다. 때로는 두 시간 가량 걸리는 긴 강론을 하였지만, 너무나 진지하고 감동적이어서 청중의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강론들 은 두 가지 형태로 전해 오는데, 하나는 초고 형식의 것 으로써 속기사들이 그의 강론을 들으면서 직접 기록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후대 사람들이 이 초고들을 다듬어 써 일괄성 있게 재편집한 것이다. 요한은 전례상 축일이 나 특별한 기회에 맞추어 신 · 구약 성서의 어떤 대목을 발췌하여 강론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신자들의 교육을 위해 성서를 처음부터 연이어 강론한 것도 있다. 구약성 서 주석 강론으로는, 76개의 창세기 강론, 58개의 시편 강론, 6개의 이사야 강론들이 있으며, 신약성서 주석 강 론으로는 90개의 마태오 복음 강론, 88개의 요한 복음 강론, 150개의 사도 행전 강론, 32개의 로마서 강론, 44 개의 고린토 전서 강론, 30개의 고린토 후서 강론, 24개 의 에페소서 강론, 15개의 필립비서 강론, 12개의 골로 사이서 강론, 11개의 데살로니카 전서 강론, 5개의 데살 로니카 후서 강론, 18개의 디모테오 전서 강론, 10개의 디모테오 후서 강론, 6개의 디도서 강론, 3개의 필레몬 서 강론, 34개의 히브리서 강론이 있으며, 갈라디아서의 경우는 연속적인 주석을 한 것이다. 그리고 교의 신학적 · 논쟁적 강론으로는 초월적인 하 느님의 불가해성(不可解性)에 관한 12개의 강론, 8개의 세례성사 교리 강론, 8개의 반(反)유대인 강론 등이 있다. 윤리적인 강론으로는 신년(新年) 강론과 퇴폐적인 극장에 관한 강론이 각각 하나씩 있으며, 3개의 마귀에 관한 강론, 9개의 회개에 관한 강론 등이 있다. 전례 강론으로는 성탄 축일과 공현 축일 강론이 각각 하나씩 있으며, 2개의 파스카 목요일 강론, 3개의 파스카 금요일 강론, 2개의 부활 축일 강론, 2개의 예수 승천 축일 강론, 2개의 성령 강림 축일 강론 등이 있다. 특히 384년 12월 25일에 한 성탄 강론에서 요한은 안티오키아에서는 이미 10년 전부터 성탄 축일을 지내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본래 공현 축일만을 지내던 동방 교회에 서 서방 교회의 전통에 따라 성탄 축일을 지내게 된 사실을 알려 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그리고 구약성서와 신약 성서에 나오는 성인들과 초기 교회 순교자들의 성덕을 찬양하는 강론들이 여러 개 있는데, 특히 사도 바오로에 관한 7개의 강론이 유명하다. 그 외 여러 상황에서 행한 강론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저서 : 총 6권으로 된 《사제직》(De sacerdotio)이란 저 서는 요한의 대표작으로서 문장이 우아하고 신학적인 사 상과 내용이 승고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고전으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다. 저자와 친구 바실리오와의 대화 형 식으로 되어 있는데, 사제직의 고귀함과 이에 요구되는 사제들의 덕행들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의 사후 몇 년 이 지나 이시도로 페루시아타(Isidorus Perutiata)는 이 저서를 읽고 다음과 같이 소감을 썼다. "이 책을 읽고 하느님 께 대한 불타는 사랑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사제직이 얼마나 고귀한지, 그렇지만 얼 마나 어려운 직분인지를 말해 주고 있으며, 그 직을 적절히 수행하기 위해서 사제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수도 생활에 관한 저서로는, 수도 생활의 어려움에 빠진 친구 테오도로를 위해 쓴 2편의 《테오도로에게 권고》 (Paraeneses adTheodorum), 수도 생활을 옹호하기 위해 쓴 3편의 《수도 생활 반대자들에 대한 반박》(Adversus oppugnatores vitae monasticae) · 《진정한 참회》(De compunctione) 등이 있다. 수녀들을 위한 저서로는, 《동정성에 대하여》 (De virginitae) , 그리고 한 지붕 아래 남녀가 형제 자매처럼 함께 지내면서 수덕 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타락의 위험을 지니고 있음을 경고하는 《공주(共住) 동정녀들》(Syneisaktoi, virgines subintroductae) · 《수녀들은 남자들과 함께 살지 말 것이다》(Quod regulares feminae viris cohabitare non debeant) 등이 있다. 그리고 젊은 과부의 올바른 생활을 위한 《젊은 과부에게》(Ad viduamjuniorem)와 재혼을 금지 하는 《유일한 혼인》(De non interando conjugio)이 있다. 타락한 사회 풍조를 개탄하면서 부모들에게 올바른 자녀 교육을 권하는 저서로는 《헛된 영광과 자녀 교육에 대하 여》(De inani gloria it educandis liberis)가 있다. 고통에 대한 저서로는, 마귀의 유혹으로 고통받고 있는 친구를 위해 쓴 3권의 《스타지리오에게》(Ad stagirium a demone vexatum)가 있으며, <역경에 처한 이들에게》(Ad eos qui scandalizati sunt ob adversitates)와 고통의 원인은 본인 당사 자라는 사실을 설파하는 《해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Quod nemo laeditur nisi a se ipso) 등이 있다. 호교론적 저서로는, 이단자 율리아누스 황제와 이교도들을 반박하 기 위해 쓴 《성 바빌라에 대하여》(De S. Babyla contra Julianum et gentiles), 그리고 《유대인과 이교 논박,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하여》(Contra judaeos et gentiles quod Christus sit Deus)가 있다. 서간 : 요한의 서간은 236편이 전해 오고 있다. 이 서 간들은 그의 2차 유배기인 404~407년 사이에 쓰여진 것이다. 대부분의 서간은 유배지에서 총대주교 자신의 유배로 혼란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친구들에게 보낸 짧고 간결한 것들인데, 가장 긴 편지는 과부이며 여부제인 올림피아스(Olympias)에게 보낸 편지 (Miigne, 《PG》 52, 549~623)이다. 또 교회사적 사료로써 가장 중요한 편지는 인노첸시오 1세 교황에게 보낸 2통의 편지인데, 첫째 편지는 404년 부활절 후 자신에게 부당 하게 내려진 면직과 당시의 상황을 알리는 것이고, 둘째 편지는 406년 말 유배지 쿠쿠수스에서 보낸 것이다. [신학 사상] 요한은 사변적인 신학자는 아니었다. 이 것은 그가 당시 논란이 되고 있던 신학 논쟁 특히 성삼론 과 그리스도론 논쟁에 깊이 개입하지 않고, 사목자로서 신자들의 실생활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합당하게 생활하도록 복음의 윤리적 가르침, 그리스도적 사랑, 구원에 대한 희망을 생생한 강론들을 통해 역설하였다. 교회의 정통 교리인 그리스도의 두 가지 성(性) 즉 신성과 인성의 굳건한 바탕 위에 특히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신앙 생활과의 관계를 역설하였기 때문에, 그는 '성체성사의 박사' 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 사이에 첨예한 신학 논쟁이 되고 있었던 마리아의 명칭들, '하느님의 어머 니' (Θεοτόκος) 또는 '그리스도의 어머니' (Χριστούτοκος) 또는 '인간의 어머니' (Άνθρωποςτοκος)란 표현을 사용하 지 않고, 다만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을 강조하였다. (⇦ 그리소스토모, 요한 ; → 콘스탄티노플 ; 테오필로, 알렉산드리아의) ※ 참고문헌  J.P. Migne, 《PG》, PP. 47~641 《SCH》 13 bis, 28 bis, 79, 103, 117,125, 138, 272, 277, 300/ A. Puech, S.J. Chrysostome et les moeurs de son temps, Paris, 1891/ C. Baur, Der hl. Johannes Chrysostomus und seine Zeit, I Antiochien, I Konstantinopel. München, 1929~1930/ L. Meyer, S.J. Chrysostome maitre de perfection chretienme, Paris, 1933/ A.H.M. Jone, St. John Chrysostom's parentage and education, 《HThR》 46, 1953, pp. 171~173/ G. Fittkau, Der Begriff der Mysteriums bei J. Chrysostomus, Bonn, 1953/ Ivo auf der Maur, Mönchctum und Glaubensverkündingung in den Schriften des hl. J. Chysostomus, Freiburg, 1959/ A.J. Festugière, Antioche paienne et chrétienne, Paris, 1959/ Jean Chrysostomue et Augustin, Atti del Colloquio di Chantilly 24 settember 1974, Paris, 1975/ M. Gonzaga, John Chrysostom and his Time, London, 1960/ J. Quasten, Patrologia II , Torino, 1971, pp. 427~485/ A.M. Malingrey, Giovanni Cassiano, (DPAC), pp. 1551~1558. [李瀅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