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레오나르디 Joannes Leonardi(1541 ~ 1609)
글자 크기
9권

요한 레오나르디.
성인. 신부. 천주의 모친 성직 수도회(Ordo Clericorum RegulariumMatis Dei, O.M.D.) 설립자. 축일은 10월 9일. [생애 및 활동] 이탈리아 루카(Lucca) 지방의 디에치 모(Diecimo)에서 1541년(혹은 1543년에 출생하였다는 설도 있음)에 일곱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요한은 약학을 공부한 후 약사로서 여러 해 동안 일했다. 그 후 골롬바노회에 입회 했으며, 고해 사제이 던 도미니코회 파올리 노(Paolino Bernardino) 의 지도를 받아 인문학과 철학 · 신학을 공부하여 1572년 12 월 22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그는 '산 조반니 델라 마지오레' (S. Giovanni dellaMaggiore) 성당에 부임하여 어린이와 성인의 교리 교육을 위한 활동을 하였다. 또한 교리를 가르치 는 평신도와 사제들 로 구성된 '그리스도교 교리 교사회' (Compania della Dottrina Cristiana)를 결성하고, 1574년에는 《그리스도교 교 리》(Dotrina Cristiana)와 교리 교사회의 규칙서를 발간하였다. 1574년 9월 1일 그는 '복되신 동정녀의 개혁 사제회' (Preti riformati dellla Beata Vergine)를 결성하였다. 이 사제 회는 1619년 8월 14일 교황 바오로 5세(1605~1621)에 의해 '천주의 모친 성직 수도회' 라 개칭되어 승인받았 다. 이 수도회의 초기 회원들로는 끝까지 평수사로 활동 한 아리기니(Giorgio. Arrighini), 치오니(Gian Battista Cioni) , 그리고 그의 사촌인 프란치오티(Cesare Franciotti)가 있다. 이 수도회는 처음에 '산타 마리아 델라 로사' (Santa MariadellaRosa) 성당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가 1581년에는 '산타 마리아 코르테올란디니' (St. Maria Corteolandini) 성당 근처로 이전하였다. 이들은 초기에 루카 지방에서 활 동하던 도미니코회 회원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요한 레오나르디는 또한 교회의 개혁에 공헌하였다. 그는 베르밀리(P.M. Vermigli)와 오키노(B. Ochino)의 주 도로 루카 지방에서 발생한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강력한 반격을 가하였다. 그는 사도적인 열정 때문에 이단과 지 방 권력으로부터 반감을 사서 심한 박해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개혁 정신은 교황의 도움으로 구체적으로 전개되었다. 1584년에 그는 로마에 있는 친구 필리포 네리 (Filippo Neri, 1515~1595)를 방문하여 그의 소개로 교황 그레고리오 13세(1572~1585)를 알현하였다. 1592년 9월에는 교황 글레멘스 8세(1592~1605)의 요청으로, 그는 나폴리에 있는 '마돈나 델 아르코' (Madonna del'Arco) 성역을 관할하는 교황청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노엘(Noel) 교구와 '산 아나스타시 아' (Sant'Anastasia) 행정 구역 사이의 분쟁을 해결해야 했다. 성역에 들어오는 헌금을 누가 관리할 것인가 하는 점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이듬해에 교황은 그에게 더욱 어려운 문제인, 나폴리 공화국 안의 베네딕도회 몬테베르 지네(Montevergine) 수도원의 개혁을 맡겼다. 이 문제는 이미 여러 교황청 파견 대표나 주교들이 시도했지만 실패하였던 일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적절한 강구책을 구 사하여 큰 장애들을 슬기롭게 극복하였다. 그 후 그는 몬테베르지네 인근의 수도원들을 방문하는 중 아베르사(Aversa) 교구 모라(B. Morra) 주교의 부탁으 로 그 교구의 관할을 위임받았다. 그리고 1601년 주스 티니아니(B. Giustiniani) 추기경의 요청으로 발롬브로사 (Vallombrosa)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다. 추기경은 요한의 경험을 빌어서 자신의 수도원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이 렇게 요한은 많은 수도원들을 방문하면서 그 수도회의 개혁을 돕는 활동을 하였다. 많은 개혁 활동의 풍부한 경 험을 쌓은 그는 1602~1603년에 포교성성 신학원을 설립하였는데, 이 신학원은 1627년 8월 1일에야 교황 우르바노 8세(1623~1644)의 회칙 〈임모르탈리스 데이 필리 우스>(Immortalis Dei Filius)로 공식 승인을 받았다. 1609 년 로마에 독감이 퍼지자 요한은 독감에 걸린 14명의 동 료 수도자들을 간호하던 중 감염되어, 그 해 10월 9일에 사망하였다. 그는 1861년에 시복되고, 1938년 4월 17 일 교황 비오 11세(1922~1939)에 의해 시성되었다. [영향 및 저술] 요한 레오나르디는 교회 개혁 운동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교회의 개혁을 바라는 교황 바오로 5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선 자신들이 스스로 "모든 덕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 "등잔 받침 위에 밝혀 놓은 빛" 이 되어야 하며, "완전한 삶과 빛나는 도덕적 기풍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요한은 자신의 수도회를 운영하 고 자신이 맡았던 임지를 관리할 때 온건하고 인간적이며 동시에 영성적인 면모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어떤 일을 처리하든 편협하거나 동요됨이 없이 탁월한 식별력을 발휘하였다. 그가 평소에 가장 중요하게 여긴 덕은 순명이었다. 그는 반대나 박해를 영웅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순명을 실천하였다. 동정녀를 닮고자 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봉사했으며, 성모 마리아에 대한 깊은 신심을 실천하였다. 그는 많을 글들을 썼지만 출간된 책은 많지 않다. 그가 저술한 교리서는 19세기 말까지도 루카 교구의 고전적 인 교리서로 남아 있었다. 또한 그의 저술 《그리스도교 적 가정의 형성》(Instituzione d'una famiglia cristiana, Roma, 1591, 1673)과 《여인들의 헛된 치장에 관한 논고》(Trattato del vano ornamento delle donne, Roma, 1593)는 여러 고전과 그리스도교 서적의 모음집이다. 이외에도 그는 《청년들 을 위한 훌륭한 교육에 관한 논고》(Trattato dellla buona educazione de'figliuoli, Napoli, 1594) · 《로마의 포르티코에 있 는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의 기이한 상징에 관한 이야 기》(Narrazione della miracolosa imagine della B. Vergine de S. Maria in Portico di Roma, Roma, 1605) · 《남편들과 더불어 덕스럽게 생활하도록 하는 기혼 여성들을 위한 비망록》(Memoriale alle donne maritate per vivere virtuosamente co'loro mariti, Lucca, 1608) 등의 출간된 저서들과 기타 출간되지 않은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 참고문헌 Vittorio Pascucci, 《DSP》 VII pp. 608~613. 〔宋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