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바오로 Joannes Paulus
글자 크기
9권

1 / 3
교황 요한 바오로 1세.
① 요한 바오로 1세(1912~1978) : 교황(1978). 본래 이름은 알비노 루치아니(Albino Luciani). 33일 간 교 황직에 있음으로써 현대 교황 중 재임 기간이 가장 짧은 교황. 중복된 이름을 가진 최초의 교황. 무라노(Murano)의 유리 공장에 취직할 때까지 프랑 스 · 스위스 · 독일 등지에서 일하던 계절 노동자로 사회 주의적인 경향의 아버지 조반니(Giovanni Luciani)와 열심 한 신자인 어머니 보르톨라 탄콘(Bortola Tancon) 사이에 서 1912년 10월 17일 벨루노(Belluno)의 포르노 디 카 날레(Forno di Canale, 현재의 Canale d'Agordo)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생명의 위험 때문에 태어난 날 즉시 산파였던 마 리아 피오코(Maria Fiocco)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이틀 후 론촌(Achille Ronzon) 신부로부터 보례를 받았다. 1923년 10월부터 펠트레(Feltre) 소신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1928년 10월에는 벨루노의 그레고리오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35년 2월 2일 부제 서품을 받았고, 같은 해 7월 7일 벨루노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 었으며 이틀 후 카날레 다고르도의 보좌 신부로 임명되 었다. 5개월 후 아고르도(Agordo)의 보좌 신부로 이동하면서 이 도시 광산 기술 학교(Istituto tecnico minerario)의 종교 교사를 겸임하였다. 1937년 7월 벨루노의 그레고 리오 신학교 부학장으로 임명되어 10년 동안 재직하였다. 1947년 2월 27일 로마의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안토니오 로스미니에 의한 인간 영혼의 기원>(L'origine dell' anima umana secondo Antonio Rosmini)이라는 논문으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8년 2월 2일 벨루노 교구 의 교리 교육국(Ufficio catechistico diocesano) 책임자로 임명되어 일하면서, 자신의 체험담을 담은 《빵 부스러기 교리 교육》(Catechesi in Briciole)이라는 저서를 출판하였다. 1954년 2월 6일 벨루노 교구의 총대리가 되었고, 2년 후 6월 30일에는 주교좌 성당 참사 위원이 되었다. 교구장으로서의 활동 : 1958년 12월 15일 교황 요한 23세(195~19663)로부터 비토리오 베네토(Vittorio Veneto) 교구의 주교로 임명되어, 12월 27일 로마의 베드로 대 성전에서 교황으로부터 주교 서품을 받았다. 이듬해 1월 11일 비토리오 베네토 교구장으로 착좌한 후 일반 대중 에 초점을 맞추는 사목 활동을 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 의회에서는 크게 드러나지 않는 역할을 하였지만, 이탈 리아 주교 회의의 교리 위원회에서는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69년 12월 15일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는 루 치아니 주교를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로 임명하여, 이듬해 2월 8일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로 착좌하였다. 그리고 1973년 3월 5일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베네치아에 교 황 바오로 6세가 방문했을 때(1972. 9. 16), 루치아니 추 기경의 어깨 위에 교황은 자신의 영대를 매어 주었다. 교 황으로 선출된 후에 베드로 대성전 발코니에서 행한 짧 은 연설 중에 말한 이 에피소드는 교황 바오로 6세의 원 의와 사랑의 표시로 해석되었다. 베네치아에서 루치아니 추기경은 1976년 권위에 관한 일치 문헌을 발표한 영국 교회-로마 가톨릭 교회 국제위원회(Anglican-Roomanan Catholic International Commission) 회의 등을 포함한 5개의 교 회 일치 운동 회의에 참석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우파였던 루치아니 추기경은 공산주의와 그리스도교는 양립할 수 없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1972~1975년에는 이탈리아 주교회의 부의장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신학에 대해 엄격한 입장을 취하였고, 회칙 <인간 생명>(Humanae vitae, 1968. 7. 25)의 열렬한 옹호자로서 1972년 이탈리 아 정부가 이혼을 허용하는 법을 제정하려고 하였을 때 크게 반대하였다. 자신의 교구 성직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봉사자로서 모든 것에 있어, 그리고 모든 것을 위해 스승 의 모범을 늘 본받으라고 요구하였다. 또한 본당 신부들 에게 교회의 값비싼 용기나 그 외 값나는 것들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돕도록 장려하였다. 1971년에는 서방 세계 의 부유한 교회들은 자신의 수입에서 1%를 제3 세계의 가난한 교회를 돕는 데 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이, 환자,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특별히 독 일 · 프랑스 · 포르투갈 · 부룬디 · 브라질 등에 있는 이탈 리아 이민자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교황 선출과 사망 : 루치아니 추기경은 1978년 8월 6 일 교황 바오로 6세가 사망한 후 개최된 교황 선거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8월 26일). 이탈리아 밖의 지역에 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었던 루치아니 추기경 의 선출은 대다수의 추기경들이 새로운 모습의 교황을 원하고 있음을 잘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새 교황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후보자' (God's candidate)로 서 환영을 받았다. '요한 바오로 1세' 라는 이름을 선택 한 것은 자신의 두 선임자들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과 이 들이 행한 일을 계속 이어 나갈 것이라는 원의를 드러낸 것이었다. 8월 27일 추기경들 앞에서 제2차 바티칸 공 의회의 정신을 계속해서 실현시켜 나가면서 사제들과 신자들의 삶 속에서 교회의 규율이 계속해서 지켜지도록 할 것이라는 자신의 원의를 발표하였다. 좋은 본당 신부로서의 순박한 영혼을 지닌 교황은 단 순함에 대한 강한 열망을 교황직을 시작하는 예식에서도 잘 드러났다(9월 3일). 그는 교황관(tiara)을 쓰는 전통적 인 예식을 사양하고 팔리움(pallium)을 받는 것으로 최고 의 목자로서의 사목직을 시작하였다. 항상 얼굴에 머금는 미소 때문에 '미소의 교황' (papa del sorriso)으로 불렸다. 하지만 33일 간 교황으로서 재위하다 9월 28일 목요일 밤 11시경 자신의 침대에서 개인적인 원고를 읽던 중 심장 마비로 사망하였다. 다음날 새벽 5시 30분에 죽 은 채로 발견되었을 때에도 교황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 었다. 갑작스러운 사망 때문에 바티칸 은행을 정리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가 독살당했다는 등 여러 가지 추측 이 난무하였지만, 어느 것도 증명되지 않았다. 그의 유해는 베드로 대성전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다. 교황의 죽음은 그의 온화한 인격에 감동받은 수백만의 사람들의 마음속에 큰 슬픔을 가져다 주었다. ※ 참고문헌 《AAS》 70, 1978, pp. 677~776, 797~903/ 《ODCC》, pp. 894~895/ Yves-Marie Hilaire, Dizionario Storico del Papato I , diretto da P. Levillain, Traduzione di Francesco Saba Sardi, Milano, 1996, pp. 663~664/ J.N.D. Kelly, The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New York, 1986, pp. 325~3261 A. Lopes, I Papi, La vita dei pontefici attraverso 2000 anni di storia, Roma, 1997, p. 102/ A. Tornielli · A. Zangrando, Papa Luciani. Il parroco del mondo, Roncade, 1998. 邊宗燦] ② 요한 바오로 2세(1920~ ) : 교황(1978~ ). 본래 이름은 카롤 보이티야(Karol Wojtyla). 456년 만에 처음으로 선출된 비이탈리아인 교황. 폴란드 최초의 교황. 130년 만에 처음으로 60세 이전에 교황으로 선출된 인물. 초기 생애 : 카롤은 1920년 5월 18일 폴란드의 크라 쿠프(Kraków)에서 남서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바도 비체(Wadowice)의 공장 지역에 있는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족들은 겸손하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군대에서 대위로 제대한 후 연금으로 생활하였다. 카롤은 7세 때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29년 어머니 가 사망한 후 그는 점점 더 내성적인 성격이 되었다. 11 세 때에 주립 중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뛰어난 학생이 며 훌륭한 운동 선수로서 시를 사랑하고 연극을 하던 보 이티야는, 폴란드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1938년 크라쿠 프의 야겔로니카(Jagelonica) 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이때 그는 아마추어 연출가로 두드러진 학생이었으며, 그의 시는 인정을 받았다. 독일군이 폴란드를 점령하면서(1939. 9), 대학을 강제로 폐쇄하자 그는 지하 대학 폴란드 어학부 2학년에 등록하였다. 또한, 그리스도교 민주 단체(UNIA)와 제휴하고 있던 지하 조직에 가입하 여 유대인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를 통해 숨어서라도 계속 공부할 수 있었으며, 지하 연극 단체인 '말씀의 극단' 을 창단하여 활동하면서 시를 계속 쓸 수 있었다. 1940년 겨울 자크루백(Zakrówek)에 있는 채석 장의 채석공 및 발파수로 일하게 되었고, 1년 후는 솔웨 이(Solway) 화학 공장의 수질 정화부에서 일하였다. 이 두 곳에서의 체험들은 뒤에 쓴 시에 영감을 주었다. 사제 생활 : 1941년 아버지의 사망과 두 번의 치명적 인 사고에서 회복한 후 사제 성소를 받은 것을 깨닫고 1942년 크라쿠프의 지하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45년 1월 러시아 군대가 폴란드를 해방시킨 후 대학이 다시 문을 열자, 그 해 3월 야겔로니카 대학교 신학부에 등록 하였다. 1946년 11월 1일 크라쿠프 교구장인 사피에하 (Adam Sapieha) 추기경으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런데 그 해 5월에 그의 첫 번째 시집인 《숨은 하느님의 노래》(Song of the Hidden God)가 출판되었다. 사실 보이티 야는 전쟁 이전부터 안드레이 예비엔(Andrzej Jawien) 또 는 안드레이 그루다(Andrzej Gruda)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있었다. 추기경은 보이티야 신부를 로마의 안 젤리쿰 대학교로 유학 보내 공부를 계속하게 하였다. 그 는 1948년 5월 귀국하였고, 그 해 12월 16일 십자가의 성 요한(Joannes a Cruce, 1542~1591)의 신앙 개념에 관한 논문으로 야겔로니카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보이티야 신부는 폴란드로 돌아오는 중 파리 가톨릭 대학에서 뤼박(H. de Lubac, 1896~1991)과 같은 신학자들 을 만났고, 노동 사제들의 체험에 감명을 받았다. 또한 벨기에에서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J.O.C.)의 설립자인 카 르딘(J.-L. Cardijn, 1882~1967) 신부를 만났다. 폴란드로 돌 아와 1948~1951년까지 본당 신부로 일한 후, 야겔로 니카 대학교에서 철학과 윤리학을 연구하면서 크라쿠프 신학교에서는 사회 윤리학 및 신학 원론을 가르쳤다. 1954년 교수 자격을 획득하였고, 이때부터 120여 종의 논문 및 저서를 집필하였다. 그는 1956년 루블린 (Lublin) 가톨릭 대학교의 윤리학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윤리 연구소를 설립하여 1978년까지 이끌었다. 주교로서의 활동 : 1958년 7월 4일 교황 비오 12세 (1939~1958)는 보이티야 신부를 옴비(Ombi)의 명의 주교 이자 크라쿠프의 보좌 주교로 임명하였다. 38세의 나이로 주교가 된 보이티야는 폴란드에서 가장 젊은 주교가 되었다. 그는 주교 문장에 '모두 다 당신의 것' (Totus tuus)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주교가 된 후에도 그는 신학 교에서 계속 강의를 하였다. 1960년에는 안드레이 예비 엔이란 필명으로 《보석 가게》라는 희곡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결혼을 소재로 한 3부작으로 후에 연극과 영 화로 제작되었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준비 위원 회 위원으로 공의회의 모든 회기에 참석하면서 〈종교 자 유에 관한 선언>(Dignitatis Humanae)과 <사목 헌장>(Gaudium et Spes), <교회 헌장>(Lumen Gentium) 등의 기초에 적극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1963년 12월 30일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는 보 이티야 주교를 크라쿠프의 대주교로, 1967년 6월 26일 에는 추기경으로 서임하였다. 이후 그는 다양한 국제 회의는 물론 교황청의 여러 성에서 위원 추기경으로 활동 하였다. 또한 북아메리카 · 중동 · 아프리카 · 아시아 · 오 스트레일리아 등 여러 지역을 방문하면서 그의 이름은 서방 세계에 알려졌으며, 교황청의 동방 정책에 깊이 관여하였다. 그는 폴란드의 가톨릭 교회 지도자인 비신스키(Stefan Wyszyński) 추기경과 함께 폴란드 공산주의 정부에 대한 교회 저항 활동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폴란드 인들로부터 '노동자의 추기경' 으로 추앙을 받았다. 1969 년 10월 폴란드 주교 회의 부의장이 되었으며, 1971년 에는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 상임 의원으로 임명되었다. 이 해부터 다음해까지 대교구 공의회를 소집하여 주재하 였으며, 1975년에는 저서 <쇄신의 기초》가 출판되었다. 1976년에 교황 바오로 6세는 그를 초대하였고, 그는 교황의 피정을 지도하였다. 때문에 교황 요한 바오로 1세 (1978)의 사망으로 1978년 10월에 열린 교황 선거에 참여했을 때, 이미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10월 16일의 교황 선거에서 그는 58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으로서의 활동 : 교황직을 수행한 첫 슬라브인이 며 동시에 네덜란드 출신의 하드리아노 6세 (1522~1523) 이후 첫 번째 비이탈리아인인 교 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0월 17일 추기경단 앞에서의 연설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온 전한 실현에 헌신하겠다고 선포하였다. 그리 고 다음날 가진 외교 사절들과의 만남에서는 자신의 역할이 보편적 사랑(universal love)의 증인이 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전임 교 황인 요한 바오로 1세처럼 교황관을 쓰지 않 고 베드로 광장에서 소박하게 취임식을 거행 하였다(10월 21일). 10월 22일에 한 말은 자 신에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인지 잘 보여 주는 것이었다.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말은 이탈리아인이 아닌 교황에 대해 걱정하 지 말라는 것, 교회가 안고 있는 현재의 어려 움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것, 전쟁과 핵 위험 그리고 테러리즘(temoism)으로 흔들리고 있는 세상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것 등으로 해석되었다. 1979년 1월 푸에블라(Puebla)에서 라틴 아메리카 주교 회의를 개막하기 위해 멕시코를 방문하면서 장차 외국 방문시 행하게 될 모습, 즉 땅에 입맞춤하고 많은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것을 정하였다. 1979년 후반에는 폴란드 · 아일랜드 · 미국 · 터키 등을 방문하였다. 1981년 5월 13일 베드로 광장에서 일반 알현 때 저격당하기도 하였으나, 보편 교회의 목자로서 5개 대륙에 있 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만나기 위한 해외 순방을 막지는 못하였다. 1982년에는 영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교황이 되었고, 포르투갈의 파티마를 방문하여 저격에서 자 신을 구해 준 성모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기도 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유럽 · 아프리카 · 남아메리카· 북아메리 카 · 아시아의 110여 개 이상의 국가를 순방하였다. 재위 초기 멕시코를 방문했을 때, 교황은 해방 신학에 대해 신중히 접근하는 태도를 보이며 정치는 평신도들의 몫이라고 고집하였다. 폭력의 사용을 단죄하면서 인권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교황의 인식은 사회, 경제 구조의 재 조정을 요구한 첫 번째 회칙 <인간의 구원자>(Redemptor hominis, 1979.3.4)에서 잘 나타났다. 이러한 인식은 <자비 로우신 하느님>(Dives in Misericordia, 1980. 11. 30) · <노동 하는 인간>(Laborem Exercens, 1981. 9. 14) 등의 회칙과 가 톨릭 신자가 아닌 이들에게 보낸 첫 번째 회칙인 <사회 적 관심>(Sollicitudo Rei Socialis, 1987. 12. 30) 등에서 반복 되어 나타났다. 교황은 폴란드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몰 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1989년 12월 1일에는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인 고르바초프(M.S. Gorbachov, 1931~ )가 교황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교황은 동유럽이 서유럽의 물질주의(materiailsm)를 따라가는 것을 경고하면서 회칙 <백 주년>(Centesimus Annus, 1991)에 서는 공산주의뿐 아니라 자본주의까지도 비판하였다. 회 칙 외에도 교황은 많은 교황 교서를 발표하였다. 이 중 가장 논란 거리가 된 것은 1994년 5월 22일에 발표한 <남성에게만 유보된 사제 서품에 관하여>(Ordinatio sacerdotalis)로, 이 교서에서 여성 사제직의 불가성을 재천명 하였다. 1984년 6월 세계 교회 협의회(W.C.C.)를 방문한 교황은 교회 일치 운동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특별히 교황 은 동방 교회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증진시켰다. 1986년 의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교황은 로마에 있는 프로테스 탄트 교회에서 설교를 하였다. 이는 교황의 교회 일치를 위한 큰 관심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었다. 또한, 교황 의 여행 일정에는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 또는 전례가 포함되어 있다. 1979년에는 이스탄불에서 총대주교와 함 께 서로의 전례를 집전하면서 완전한 일치를 위한 대화에 대한 요청을 하였다. 교황은 전임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의 문제에 대 한 교회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포클랜드 전쟁과 걸프전 이 발발했을 때 평화를 역설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유고슬라비아와 루안다의 절망적인 상황에 큰 관심을 기 울였다. 교황은 수많은 호소와 설교를 통해 세계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며,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1986년 10월 27일 아시시에서 평화를 위한 세계 기도 모임을 개최하였다. 이 기도 모임에는 세계의 모든 종교들이 초대되었다. 교황은 평화라는 주제로 연설하였고, 이 연설 후 각 대표들은 자신의 고유한 전례에 따라 아시시의 여러 장소에서 모임을 주 관하였다. 이후 아시시에서는 세계 평화를 위한 종교 지도자들의 모임이 지속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또한 아라 파트(Yasir Arafat)를 접견함으로써 교황청이 국가 사회로 부터 온전히 독립되어 있음도 보여 주었다(1982. 9. 15) . 1990년에는 고르바초프를 통해 소비에트 연방과 처음으 로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으며, 1994년에는 교황청과 미 국은 도처에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동반자로서 일해야 한다는 미국 대통령인 클린턴(B.Clinton)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선임 교황들보다 유대인들과 그들의 고통을 이해한 교 황은 1986년 4월 13일에는 대랍비(Chief Rabbi)와 로마 에 있는 회당에서 함께 기도를 하였다. 1993년에 교황 청은 이스라엘을 국가로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교황은 2000년 3월에 이스라엘을 방문하였다. 또한 교 황은 지난 세기 동안 이루어진 교회의 잘못을 공식적으 로 인정함을 통해 세상과 화해의 길을 모색하였다. 그래 서 1992년 11월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G. Galilei, 1564~1642)에 대한 중세의 교회 재판이 오류였음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2000년 대희년에는 베드로 대성전에서 용서의 날 예식을 거행하며 갈릴래오 사건을 비롯한 가톨릭 교회 구성원들이 지나온 역사에서 잘못한 일들에 대해 하느님의 용서를 청했다. 사회 정의에 대한 진보적인 용인과는 반대로, 신앙과 윤리 문제에 있어서 교황은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 다. 그래서 교의적 측면에서 양보 없고 의심 없는 태도 때문에 '확실성의 교황' (papa della certezza)으로 평가받고 있다. 1979년 큉(Hans Küng)을 시작으로 신앙 교리성은 다수의 신학자들에게서 교수 자격을 박탈하였다. 이들 중에 프랑스의 도미니코회원인 포이에(Jacques Pohier) , 미국의 커란(C.E. Curran) , 벨기에의 스킬레벡스(Edward Schillebeeckx), , 독일의 헤링(Bernhard Hering) 페루의 구 티에레스(Gustavo Gutiérrez) , 브라질의 보프(Leonardo Boff) 등이 있다. 신앙 교리성은 이들이 교황의 무류성부 터 피임 등에 관해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의견을 제시하였 기 때문이라고 발표하였다. 또한 교황은 전통주의자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을 받아들이지 않은 르페브 르(Lefebvre) 대주교를 파문하였다(1988) 교황은 피임, 낙태, 동성애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 계속 반대 입장을 취하면서, 회칙 <진리의 광채>(Veritais Splendor, 1993. 8. 6) 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전통적인 교회의 입장을 분명 히 밝혔다. 또한 신자들에게 분명하고도 확실한 교의를 설명하기 위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Cattechismo della Chiesa Cattolica)를 공표하였다(1992) . 교황은 교회의 영성 생활에 있어서 전통적인 교회의 규율, 성체성사, 마리아 신심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계속해서 많은 이들을 시복 시성하고 있다. 특별히 교황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은 교황 문장에 나타나는 마리아의 첫 글자인 '엠' (M) 자에서도 잘 나타난다. 또한, 교황령 <착한 목자>(Pastor Bonus, 1988. 6. 28)를 통해서 교 황청 조직을 재정비하였고, 계속해서 교황청 부서와 추기경단을 국제화하고 있다. 1983년에는 새 교회법을 공포하였고, 1984년에는 라테란 조약의 개정을 완료하였다. 또한 바티칸 시국에 근무하는 평신도들이 조합을 만들도록 허락한 최초의 교황이기도 하다. (→ 교회법전 ; <노동하는 인간> ; <백주년> ; <이성과 신앙> ; <인간의 구세주> ; <자비로우신 하느님> ; <제삼 천년기> ; <진리 의 광채> ; 폴란드 ; 해방 신학) ※ 참고문헌 《ODCC》, pp. 895~896/ J.N.D. Kelly, The Oxford Dictionary ofPopes, Oxford, New York, 1986, pp. 326~329/ P. Levillain, Dizionario Storico del Papato I diretto da P. Levillain, Traduzione di Francesco Saba Sardi, Milano, 1996, pp. 664~6731 A. Lopes, I Papi, La vita dei pontefici attraverso 2000 anni di storia, Roma, 1997, pp. 102~103. [邊宗燦]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