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記
[히]אִיוֹב · [그]Ἰώβ · [라]LiberIob · [영]The Book of J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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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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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모욕당하는 욥.
구약성서의 시서(詩書)에 속하는 책. 이 책은 일반적 으로 알려진 것처럼, 불의한 고통의 수수께끼를 풀려는 것이나,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혼란에 빠진 한 인간이 거룩하고 전능한 하느님께 대하여 자리 매김하려는 시도에 대한 것이다. [책 이름과 경전 내의 위치] 유대인들은 흔히 책의 첫 머리에 나오는 낱말을 그 제목으로 삼는데, 욥기는 여호 수아서나 룻기처럼 주인공의 이름을 표제로 사용한다. 이는 구약성서 최초의 번역본인 칠십인역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서양에서는 계속 이 전통을 따른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주인공의 이름에다 '전할 전' (傳)이나(중국), '적을 기' (記)를 보태어(한국과 일본) 책 이름으로 사용한다. 히브리어 성서는 율법서와 예언서와 성문서(聖文書) 로 구분하는데, 욥기는 성문서 중에서 시편 다음이나 시 편과 잠언 다음에 배치된다. 칠십인역에서는 이와 달리 구약성서를 율법서와 역사서와 시서(詩書)와 예언서로 구분하는데, 욥기는 시서의 첫 자리 곧 시편과 잠언과 전 도서와 아가 앞에 배치된다. 우리 나라에서는 가톨릭 교회만이 아니라 프로테스탄트에서도 칠십인역에서 비롯 되어 대중 라틴어역 성서(불가타)에도 적용된 관례를 따르고 있다. 반면, 현대 성서학에서는 욥기를 잠언 및 전 도서, 또 제2 경전의 지혜서 및 집회서와 함께 지혜 문학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구성과 문학 유형] 구성 : 욥기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① 산문으로 된 머리말(1-2장) ② 운문으로 된 대화(3, 1-42, 6) 가. 욥의 독백(3장) 나. 욥과 세 친구의 대화(4-27장) 다. 지혜 찬가(28장) 라. 욥의 독백(29-31장) 마. 엘리후의 담론(32-37장) 바. 주님과 욥의 대화(38, 1-42, 6) ③ 산문으로 된 맺음말(42, 7-17) 문학 유형 : 구약성서만이 아니라 세계 문학사에서도 가장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가장 어려운 작품 가운데 하 나로 평가되는 욥기는 문학 형식 또는 유형상으로도 독 특한 성격을 드러낸다. 앞 부분(1-2장)과 끝 부분(42, 717)은 산문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부분(3, 1-42, 6)은 일부분의 특수 경우(32, 1-5)를 제외하고 모두 운문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앞과 뒤의 산문 부분만으로도 욥이라 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훌륭히 이루어진다. 반면에 어떠한 사건 전개도 없이 시적 문장으로만 구성된 운문 부분은 산문 부분을 바탕으로 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 그러면서도 특히 주인공과 관련하여 산문 부분과 운문 부분 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산문이 그리는 욥과 운문에서 나타나는 욥의 인물상이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로써 이 두 부분의 생성과 결합, 그리고 통일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운문으로 된 욥기의 중심 부분은 형식상 대부분이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n, 기원 전 428/427~348/347)에 의해 유명하게 된 대화는, 메소포 타미아와 이집트에서는 아주 오래 전에 생성되어 문학의 한 형식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욥기에서는 이러한 대화 가 두 가지로 전개된다. 욥과 친구들 사이의 대담(3-31 장), 욥과 주님 사이의 대담(38, 1-42, 6)이다. 첫째 대담은 욥의 독백으로 시작되고 끝난다(3장과 29-31장). 욥과 친구들 사이의 본격적인 대화(4-27장)는 위의 도표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일정한 순서와 구조에 따라 진행된다. 욥의 독백에 엘리바즈가 말하면 욥이 응 답하고 거기에 다음 친구가 나서고, 그 친구에 이어 욥이 다시 응수하는 순서이다. 이러한 연속적 대화가 세 차례 에 걸쳐 펼쳐지는데, 셋째 차례가 불완전하게 보인다. 셋 째 친구 소바르의 세 번째 대담과 그에 따른 욥의 마지막 응답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결함은 구두(口頭) 전승이 나 필사 전승 과정에서 본문이 훼손을 입은 결과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욥이 한 마지막 담론(26-27장)에서 26장 5-14절은 친구들의 견해를 반영하는 것처럼 들린 다. 그래서 후대의 편집자들이 욥의 과격한 언사를 누그 러뜨리려고 그것을 욥이 말한 것처럼 꾸며 자리를 옮겼 다고 여기기도 한다. 아무튼 이러한 도식적 구조, 욥과 친구들이 운문으로 전개시키는 담론의 길이가 상당하다는 사실 등은, 욥기의 대화가 직접 일어난 일의 기록이 아니라 순수 문학 작품임을 시사한다. 친구들과 벌인 대화를 마무리 짓는 욥의 독백(29-31 장) 바로 앞에 대화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지혜 찬가' (28장)가 나온다. 많은 학자들은 이를 후대의 첨가문으 로 생각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 찬가의 문체가 38장 에서 시작되는 주님의 말씀의 문체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토대로, 이 시가 대화로 구성된 토론 부분과 욥기 전체의 결론 부분을 분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작되어 삽입되었 다고 판단하기도 한다. 그런데 욥의 둘째 독백에 이어, 지금까지 등장한 적이 없고 이후에도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42, 9 참조) 제4의 친구 엘리후가 나서서 긴 담론을 펼친다(32-37장). 후대 의 욥기 전승가 중 어떤 이가 자기의 뜻에 맞지 않는 욥의 주장을 바로잡고 친구들의 대응을 보완하려는 목적으로 이 부분을 첨가시켰다고 여겨진다. 욥의 친구들 가운 데에서 두 사람은 세 번씩, 한 사람은 두 번만 발언하는 데, 이 엘리후는 연이어 네 번이나 자기의 의견을 개진한다는 데에서도 그러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운문 부분에서 마지막으로 전개되는 욥과 주님 사이의 대담(38, 1-42, 6)에서는, 주님이 길게 말씀하시고 욥은 짧게 대답한다. 이로써 이 둘째 대화가 첫째 대화와 성격 이 다르리라고 예측할 수 있다. 욥기의 대화 부분은 구조와 각 담론의 길이가 보여 주 듯이 느리면서도 장엄하게 전개된다. 이러한 욥기에서 예컨대 특정 문제를 다루는 현대적 의미의 학술 토론을 기대할 수는 없다. 참가자들이 문제를 조리 있게 분석하 고 서로 앞 사람의 주장에 이어 자기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결론을 향해 곧게 나아가지 않는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주님과의 대화, 특히 욥의 고백(42, 26)이라는 대단원을 목표로 진행된다. 그러나 동시에 순환적으로, 원을 그리며 나아가는 것이 욥기 운문 부분의 큰 특징이다. 많은 경우에 앞 사람이 내세운 견해와는 별 상관없이, 때로는 그것을 전혀 듣지 않은 사람처럼 자기의 입장을 밝힌다. 서로 동일한 문제점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면서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것이다. [산문의 욥과 운문의 욥] 많은 자녀와 함께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던 신심 깊은 욥에게 어느 날 까닭을 알 수 없는 엄청난 불행이 들이닥친다. 천상 어전에서 욥의 신심을 높이 평가하는 주님과 냉소적인 존재인 사탄 사이에 벌어진 내기가 그 원인이다. 욥은 자식들과 재산을 한꺼번에 잃고서도 하느님이 믿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굳은 신앙과 큰 인내심으로 고난을 감수한다. "알몸으로 어미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 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실지어다" (1, 21). 욥의 이러한 ·영웅적인 인내 와 믿음을 보면서도 사탄은 단념하지 않는다. 마침내 주님과 사탄 사이에 두 번째 내기가 벌어진다. 사탄은 욥의 자식과 재산만 건드렸기 때문에 그가 주님에게 등을 돌리지 않았지, 욥 자신을 친다면 틀림없이 그의 인내는 다 하고 하느님에 대한 그의 신앙도 저주로 변할 것이라고 장담한다. 욥은 다시 한번, 잿더미 위에 앉아 악성 종기로 뒤덮인 몸을 토기 조각으로 긁으면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보다 못한 부인이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리라고 하지만, 욥은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 (2, 10) 하며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이로써 욥 을 믿는 주님과 욥을 믿지 않는 사탄 사이의 내기에서 주님이 이기신다. 결과적으로 욥은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아들 일곱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딸 셋을 얻고 재산을 전보다 갑절이나 더 받아 행복하게 수를 다하고 죽는다(42, 12-17). 그러나 운문의 욥은 이렇게 신앙심이 깊고 인내심이 많으며 경건하고 순종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자기의 전 존재로 겪어야 하는 고통 중에 그것이 일으키는 온갖 격정을 그대로 토해낸다. 이러한 운문의 욥은 거의 초인적 자존심과 긍지를 가진 사람으로서, 고통을 순순히 참아 내는 대신에 모든 고통의 원인이신 하느님께 반항하면서, 자기의 억울함을 느끼는 그대로 털어놓는다. 다른 한편, 욥이 이렇게 자기의 고통에 대하여 원망 섞인 한탄을 쏟아 내기 시작하자, 욥을 위로하러 찾아왔던 친구들도 처음에는 조심스러워하다가 연장자인 엘리바즈를 필두 로 욥을 타이르기 시작한다. 이들은 전통적인 신앙과 교 리를 바탕으로 자기들의 이론을 펼친다. 이들이 욥의 한 탄에 대답하는 내용은 한마디로 '하느님의 의로운 응보' 이다. 곧 인간의 선과 악을 하느님이 상과 벌로 되갚으신 다는 교리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아직 내세 신앙이 정립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응보는 필연적으로 현세에서 남김 없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믿었다. 이러한 정통 관점에 서 볼 때 욥이 겪는 고통은, 그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하느님의 벌일 수밖에 없다. 친구들은 욥에게 자기의 과오를 인정하고 자애로우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여 그분과 화해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욥은 자기가 지금의 불행을 불러올 어떠한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그는 '악행 =불행' 이라는 등식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확신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죽음 앞에서도, 자기에게 이유 없이 고통을 가하시는 하느님 앞에서도 굽힐 수 없는 이 자긍심이 육체적 · 정신적 · 영적 으로 극한 상황에 내몰린 욥을 지탱해 주는 하나의 기둥 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자기가 무고함을 주장하면서, 친구들이 근거로 내세우는 전통적 인과응보 사상 자체를 거부한다. 그리하여 욥은 친구들 과 점점 더 격정적인 논쟁을 벌이는 한편, 하느님께도 더욱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놓는다. 이러는 가운데 욥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는 친구들의 위로도, 논쟁에서의 승리도 아니다. 그가 원하는 바는 오직 하느님뿐이다. 욥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며, 신학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다. 그는 마치 원수 같으신 하느님과 법정 같은 곳에서 직접 대면하여 서로 잘잘못을 가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러한 법정이나 그것을 주재할 제3의 존재는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그러한 식으로 하느님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하느님을 뵙기만을 염원한다. 사실 욥은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지만 결코 그분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다. 하느님에 대해서 때로 는 독성(瀆聖)에 가까운 언사를 쓰면서 거의 '초인적 긍지' 와 함께 그분께 대들면서도, 그분만이 자기의 유일한 희망이며 구원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러한 신앙이 결국은 운문의 욥과 산문의 욥을 하나로 이어 준다. 마침내 하느님이 말씀하기 시작하신다. 그런데 욥이 내던진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욥에게 질문을 퍼부으신다. 욥의 도전에 응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욥에게 도전하신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것은 하느님 말씀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말씀하심으로써 욥이 자신을 알고 하느님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제 욥은 하느님이 인간과 다른 존재로서 인간과 다르게 생각하심 을, 주고받는 인간적인 교환 법칙에 따라 계산하고 행동 하지 않으심을, 그리고 인간의 행위에 대한 반작용으로써 응보하지 않으심을, 곧 응보의 법칙에 따라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절대적인 자유 속에서 판단을 내리심을 깨닫는다. 근본적으로는 욥 역시, 친구들과 다른 형태이기 는 하지만 동일한 방식으로 자기의 인간적 사고의 틀 속 에 하느님을 끌어 넣었던 것이다. 욥은 하느님에 대한 희 망으로 고통의 벽을 넘었듯이, 이제 하느님의 현현으로 그분을 향한 자기 한계의 벽을 허물어뜨린다. 결국 욥은 하느님을 뵙게 된다. 하느님을 뵙는 신 체험(神體驗) 그 자체가 최종적이며 결정적인 사실이다. 이 신비 안에서 욥의 그 모든 문제가 신비로이 해결된다. 이와 함께 운문 부분 전체도 산문으로 된 맺음말로 흘러 들어간다. 욥기의 저자는 이러한 산문의 욥과 운문의 욥이 다름을 완화하거나 상쇄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상이성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결국 운문의 욥이 도달하는 종점도 산문이 그리는 욥의 인물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통성의 바탕 이 바로 두 욥의 굳은 신앙이다. 이로써 욥기 전체가 근본적인 통일성도 이룰 수 있게 된다. [저자와 저작 시기 및 의도] 산문 부분의 바탕을 이루는 본래의 욥 이야기는 이미 기원전 2천년대 말기부터 근동 지방의 현인들 사이에 일종의 민간 설화로 두루 퍼져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이 기원전 1천 년 이후에 이스라엘에도 전해졌다고 볼 수 있다(에제 14, 14 참 조). 바빌론 유배 이후, 곧 6세기 말엽 이후, 그리고 3세기 전반 이전에(집회 49, 9 참조) 팔레스티나에 살던 어떤 유대인 저자가, 성조(聖祖)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욥 이야기를-정확한 범위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자기의 의도에 맞게 각색하고 윤색하여 거기에 독창적인 운문 부분을 지어 붙인다. 그러나 이 운문 부분은 단순한 창작물이 아니다. 저자가 대화 부분의 욥을 통해서 토로 하는 말은, 극심한 고통과 고난을 직접 겪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운문 부분은 사실성과 현실성, 그리고 시공의 제한을 넘어서는 시사성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특성을 살리기 위해서 저자는 몇 가지 조치를 취한다. 욥기의 저자는 산문 부분에서 하느님의 명칭으로 이스 라엘의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인 "야훼"를 주로 사용한다. 이는 저자가 근동 지방에 두루 퍼져 있던 설화를 이 스라엘의 신앙에 따라 이를테면 '토착화' 한 표지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이스라엘 시인의 창작인 대화 부분에서는(12, 9를 제외하고) 보통 명사인 '하느님' 또는 '전능하신 분' 이라는 호칭이 계속 사용된다. 산문 부분은 이스 라엘화하고 운문 부분은 보편화하려는 뜻으로 볼 수 있 다. 저자는 국제적이고 일반적인 욥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스라엘의 신앙이라는 특수 토양에서 출발하여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사실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사실 욥기는 욥이라는 특수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만, 보편성이 이 책의 큰 특징을 이룬다. 욥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선택, 시나이 산 계약, 메시아 사상 등 선택 된 민족의 특유한 사항이 한 번도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아울러 유배 이후에 저술되었음에도, 이스라엘 의 역사와 구약성서에서 일대 전환점을 이루는 "예루살 렘 함락-성전 파괴-유배"라는 일련의 사건들이 암시조차 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의 고통이라는 공통 현상을 바 탕으로 자기의 관심사를 이야기하겠다는 저자의 의도로 이해할 수 있다. 욥기는 출발점에서부터 보편성을 뚜렷이 드러낸다. 주 인공 욥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그의 거주지도 이스 라엘 땅이 아니다. '읍' 이라는 이름 자체도 당시 여러 나라에서 쓰이던 이름이라고 생각된다(1, 1). 욥의 세 친구 역시 모두 외국 이름을 가진 이방인이다(2, 11). 후대의 첨가문으로 여겨지는 부분의 주인공인 "그분은 하느님"이란 의미의 '엘리후' (אֱלִיהוּא)만이 이스라엘식 이름을 지녔다(32, 2). 욥은 또한 대화를 시작하는 독백에서부터 이미 자기의 고통을 일반화한다. 고통에 처한 자신을 '고생하는 이들, 영혼이 쓰라린 이들' 과 동일시하면서, 그들을 대변하여 하느님에게 질문을 던진다(3, 20-21). 물론 대화 중에 욥은 주로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도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다른 이들과의 연대성 안에서 펼쳐 간다. 욥기의 저자는 자기의 직접 적인 체험을 토대로 처음부터 보편성을 염두에 두면서 자기의 생각을 일반적으로 전개시킨다. [목 적] 산문으로 된 욥 이야기의 핵심 문제는 역설적이게도 사탄이 하느님께 던진 질문이다.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 (1, 9) 하느님을 경외한다 함은 하느님의 속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며, 그에 따라 행동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외는 '야훼' 라는 이 름이 시사하듯(출애 3, 14) 인간을 위하는 존재이신 하느 님께 대한 존경과 믿음과 신뢰와 사랑 등을 내포하는 함 축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경외는 올바른 신앙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욥 이야기의 관건은 사탄의 질문에 담긴, 하느님께 대한 무상적(無償的) 경외 곧 무상적 신앙 이다. 욥이 과연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믿느냐는 문제이다. 냉소적인 사탄은 욥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욥은 자기의 신앙에 대한 반대 급부를 하느님에게서 받아 누리고 있으며 또 앞으로도 그러하리라고 계산하기 때문에, "온전하고 올바르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피한다"(1, 8 ; 2, 3)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욥이 지금까지 누려 온 보상을 빼앗기고 고통에 빠짐으로써 더 이상 반대 급부를 받을 수 없으리라고 예상하게 되면, 주저 없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버릴 것 이라고 사탄은 단언한다. 사탄의 이러한 단언은, 신앙이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라고 할 때, 신앙이 있는(또는, 있 다는) 곳에서 늘 제기되는 문제이다. 하느님이라는 인격체와의 관계만이 절대적이고 그 밖의 모든 것, 심지어 자기 몸과 목숨까지도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순수한 믿음이 인간에게 가능한가? 욥기 의 저자는 그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신앙은 바로 그러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계산적이지 않고 실리를 따지지 않는 신앙, 주고받는(give and take, do ut des) 인간적인 교환 법칙에 따르지 않는 순수한 믿음, 이것이 바로 산문으로 된 욥 이야기만이 아니라, 운문으로 된 대화 부분까지 포함한 욥기 전체의 핵심적인 관심사이다. 결국 욥기의 저자는 사람이면 누구나 겪게 마련인 고 통이라든가 무고한 이가 겪는 고통, 또는 그러한 고통을 야기하는 이 세상 악의 문제에 이론적인 해답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이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 길게 말씀하시면서도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으신다. 욥 자신도 하느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만으로, 그때까지 답을 요구하던 문제들이 모두 해결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욥기의 목적은 고통이라는 근본적이고 공통적인 문제를 통해서 그보다 더욱 근본적인 하느님과의 관계, 곧 신앙의 문제와 그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 구약성서) ※ 참고문헌 N.C.Habel, The Book of Job. A Commentary, The Westminster Press, 1985/ G.Gutiérez, Hablar de Dios desde el sufrimento del inocente, Istituto Bartolom de Las Casas, Lima(김수복 · 성찬성 역, 《욥에 관하여-하느님 이야기와 무죄한 이들의 고통》, 분도출판 사, 1990)/ J.L. Crenshaw, 《ABD》 Ⅲ pp. 858~868/ 민영진 . 임승필, 《시 서와 지혜서 - 하느님과 사람의 말씀 시리즈》2, 생활성서사, 1999. [任承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