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 본당
龍門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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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수원교구 소속 본당.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다문 1리 산 10 소재. 1908년 3월 원주교구의 원동 본당에서 분리 ·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묵주 기도의 모후. 관할 구역은 용문면, 단월면, 청운면 전 지역과 지제면 일부 지역이며, 관할 공소는 청운 1개소. [교 세] 1910년 1,173명, 1915년 1,528명, 1920년 1,739명, 1924년 1,508 명, 1967년 1,455명, 1971년 1,505명, 1974년 1,618 명, 1980년 1,736명, 1985년 1,992명, 1990년 1,888 명, 1995년 1,953명, 2000년 1,979명. [역대 신부] 초대 조제(J. Jaugey, 楊秀春) 요셉(1908. 3~1909. 1), 2대 이 상화(李尙華) 바르톨로메오(1909. 6~1911.6), 3대 손성재 (孫聖載) 야고보(1911. 6~1927. 11), 4대 김영근(金永根) 베드로(1927. 11~1936. 9), 5대 김경민(金慶旻) 루도비코 (1936. 9~1937. 8), 6대 임종구(林鍾求) 바오로(1937. 8~1940. 7), 7대 오연희(吳然喜) 마티아(1940. 7~1943), [1943~1958.4 : 양평 본당 관할 공소], 8대 김영근(1958. 4~1964. 6), [1964. 6~1967. 1 : 양평 본당 관할 공소], 9대 이윤성(李潤成) 아우구스티노(1967. 1~1970. 7), 10대 정 지웅(鄭址雄) 요셉(1970. 7~1975. 4), 11대 봉준석(奉俊 錫) 마우리시오(1975. 4~1976. 3), 12대 김정원(金正原) 프란치스코(1976. 3~1981. 6), 13대 배영섭(裴英燮) 베드로(1981. 6~1984. 9), 14대 이영배(李榮培) 안토니오 (1984. 9~1987. 2), 15대 정영식(鄭英植) 바오로(1987. 2~1988. 2), 16대 박현배(朴鉉培) 야고보(1988. 2~1993. 2), 17대 홍명호(洪明浩) 베드로(1993. 2~1995. 2), 18대 이정희(李正熙) 마태오(1995.2~1997.2), 19대 우종민(禹 鍾珉) 도미니코(1997. 2~2000. 1) 20대 김상순(金尙淳) 프란치스코 사베리오(2000. 1~2001. 1), 21대 조규식(曹圭 軾) 요셉(2001. 1~현재). 용문면을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에 천주교 신자가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866년 병인박해 이후이다. 당시 박해를 피해 산간 오지로 숨어 든 신자들은 이곳에서 옹기를 구우며 생활했는데, 양동면 계정리(楊東面 桂亭里) 의 이 요셉 일가와 용문면 마룡리(龍門面 馬龍里)의 이 마티아가 그런 사람들었다. 그 후 양평군 일대는 1887년 풍수원(豊水院) 본당이 설립되면서 풍수원 본당의 관할 지역이 되었고, 1896년 원주(原州) 본당이 설립 된 후에는 원주 본당에서 이 지역을 관할하였다. 그런 가운데 양평군 일대의 신자수가 증가하자, 뮈텔 (G. Mutel, 閔德孝) 주교는 1908년 3월 5일 양근 및 그 인근 지역의 사목을 조제 신부에게 맡겼다. 조제 신부는 용문면 덕촌리 퇴촌(退村)으로 부임하여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고, 얼마 뒤에는 양평읍내로 진출할 목적에서 갈 산면 도곡리 능말(현 양평읍)에 성당 부지를 매입하였다. 이어 1909년 6월에 부임한 이상화 신부는 퇴촌 대신 덕 촌리 덕동 부락에 한옥을 매입한 뒤 7개 공소를 관할하 였고, 3대 주임으로 부임한 손성재 신부는 덕동 성당을 매각하고 용문면 마룡리(마내) 353번지의 대지(2,000여 평)를 매입한 뒤, 중국식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였다. '마룡리(마내) 본당' 이란 명칭은 이때부터 생긴 것인데, 당시 손성재 신부는 양평군뿐만 아니라 경기도 포천 · 양 구 · 춘천 지방의 공소까지 관할하고 있었다. 1927년 11월 손성재 신부가 선종한 후, 김영근 신부 가 4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김영근 신부는 활발한 전교 활동을 전개하여, 300명에 불과했던 교세를 9년 동안 1,000여 명으로 증가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 나 발전을 거듭하던 마룡리 본당은 7대 주임으로 부임한 오연희 신부가 1943년에 양평읍내로 진출함으로써 폐지 되고 양평 본당의 공소가 되었다. 한편 마룡리 성당은 한국 전쟁 당시 폭격을 맞아 반파 되었다. 이에 신자들은 사제관을 개조하여 성당으로 사용했는데, 양평 본당의 김정진(金正鎮, 바오로) 신부는 1954년에 성당 벽체를 헐어다가 양평 성당을 짓기도 하 였다. 그런 다음 김정진 신부는 마룡리 성당 터를 매각하고 용문면 다문리 산 10번지의 임야(15,330평)를 매입한 뒤, 1955년 5월 이곳에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10월 7일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성당이 완공된 후, 1958년 4월 김영근 신부가 재부임 하면서 용문 본당이 부활되었다. 김영근 신부는 1961년 본당 구내에 강당을 신축한 데 이어 청운면 여물리(餘物 里) 공소의 강당도 신축하였다. 그러나 1964년 6월 용문 본당은 김영근 신부가 은퇴하고 후임 신부를 배정받지 못해, 또다시 양평 본당의 공소가 되었다. 그러다가 1967년 1월, 이윤성 신부가 부임하면서 용문 본당은 다 시 부활하였다. 이후 본당에서는 그 해 11월에 성가 수 녀회를 초청하여 본당 사목의 내실화를 기하였고, 1971 년 12월에는 안중 본당과 합동으로 평신도 대회를 개최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또 1977년에는 양동면 계정 리에 공소 강당을 증축하였고, 나환우들의 자활촌인 상 록촌(양동면 석곡리)의 구축에도 힘썼다. 그리고 1984년 을 전후해서는 노후화된 성당을 신축하기 위해 성모회, 사도회, 레지오 마리애 등을 주축으로 성미 뜨기, 산나물 및 각종 농산물 판매, 폐 · 휴지와 빈병 등을 수집하여 기금을 마련하였고, 1987년 4월 29일에는 드디어 임시 성당과 사제관의 신축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이어 본당에 서는 1988년에 대성당 공사에 착수하여 1990년에 완공 하였으며, 주변 공사를 마무리한 1992년 10월 11일 새 성당 봉헌 미사를 거행하였다. 이후 본당에서는 1997년 2월에 신자수의 증가에 따라 양동 본당을 분리하였고, 2001년에는 용두 공소의 강당을 준공하여 사목상의 효율화를 기하였다. 2002년 현재 용문 본당은 '청소년 교육과 구역 · 반 공동체의 활성화' 를 사목 지침으로 전 신자가 본당의 내실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참고문헌 《수원교구 30년사》, 천주교 수원교구, 1993. [方相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