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본당
龍山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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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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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성당 모습(1954년).
서울대교구 소속 본당. 서울시 용산구 산천동 2-11 소재. 1920년경 약현(藥峴, 현 중림동) 본당의 공소로 출발하여 1942년 분리,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주보는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관할 구역은 산천동, 도원동, 용문동, 신창동, 원효로 3 · 4가, 청암동, 마포동, 도화1 · 2동 전 지역과 원효로 2가, 효창동 일부 지역. [교 세] 1942년 400여 명, 1954년 1,047명, 1960년 3,564명, 1967년 5,327명, 1976년 3,487명, 1982년 3,088명, 1989년 4,493명, 1995년 4,173명, 2000년 4,975명. [역대 신부] 초대 라리보(A. Larribeau, 元亨根) 아드리아노(1942~1948.8), 2대 정규량(鄭圭良) 레오(1948. 8~1952. 10), 3대 샤보(J. Chabot, 車麗松) 율리오(1952. 10~1953. 6), 4대 박희봉(朴喜奉) 이시도로(1953. 7~1954. 10), 5대 조창희(趙昌熙) 베네딕도(1954. 10~1961. 1), 6대 김윤상 (金允相) 베네딕도(1961. 1~1967. 10), 7대 임화길(林和 吉) 안드레아(1967. 10~1971. 5), 8대 남영희(南永熙) 이시도로(1971. 5~1976. 5), 9대 송순용(宋淳勇) 라자로 ( 1976. 5~1981. 8), 10대 김병일(金秉鎰) 요셉(1981. 8~1984. 8), 11대 김택암(金澤岩) 베드로(1984. 8~1989. 10), 12대 김용태(金用泰) 요셉(1989. 10~1992. 9), 13대 손희송(孫熙松) 베네딕도(1992. 9~1994. 8), 14대 유토마 스(愈토마스) 토마스 아퀴나스(1994. 8~1995. 9), 15대 전용선(田溶先) 요한(1995. 9~1998. 1), 16대 강귀석(姜龜 錫) 아우구스티노(1998. 2~현재). [공소 시대] 1886년 한불조약 체결 이후 조선 대목구는 1887년 용산 함벽정(涵碧亭)과 삼호정(三湖亭) 일대 의 임야를 매입하여 강원도 원주 부흥골(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의 예수성심신학교를 함벽정으로 옮기고 삼호정 뒷산을 성직자 묘지로 정하였다. 이 일대의 신자들과 부근 샌창 마을(현 신창동), 복사골(현 도화동)의 신자들은 1920년경 약현 본당 소속 공소 공동체를 발족시켜 김윤 근(金允根, 요셉) 신부의 방문과 지도로 교세가 증가하 였다. 1924년 이후 신자수가 300명 이상으로 증가하자 1926년에 '약현 본당 청년회 용산 지부' 가 창립되어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고, 그 해 7월 25일에 대지 60평, 건 평 30평 규모의 공소 건물을 완성하였다. 〔설립과 발전] 용산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하게 된 것은 당시의 정세와 깊은 연관이 있다. 1941년 태평양전 쟁 발발 전후 일제는 한국 교회에 대한 탄압을 자행하여 외국인 성직자들을 구금하였으며, 몇몇 교구의 교구장에 일본인 주교를 앉히려고하였다. 이를 사전에 감지한 제9대 서울 대목구장 라리보 주교의 노력으로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신부가 제10대 서울대목구장에 임명되자 라리보 주교는 자신의 거처를 용산 신학교 구내로 옮기고, 동시에 용산의 성모 성심 성당에서 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용산 본당' 이 약현 본당으로부터 분리 · 설립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당시 노기남 주교도 이를 분명히 인정하고 있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제 당국이 용산 성당을 징발하여 대공포 진지로 사용하였으므로, 용산 본당의 신자들은 신학교 내에 있는 예수 성심 성당에서 주일 미사를 봉헌해야 했다. 광복 이후 2대 주임 정규량 신부 재임기에 샬트르 성 바 오로 수녀회 용산 분원 맞은편에 사제관(약 40평, 현 개인 소유)이 완공되었고, 본당의 사목 관할 구역과 신자들의 교적 정리가 시작되어 1948년부터 용산 본당은 중림동 본당으로부터 마포구 일대를 정식으로 인계받았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성당이 훼손되고 본당의 분위기가 침체된 상황에서 부임한 4대 주임 박희봉 신부는 본격적인 사목 활동으로 교세를 증가시켰다. 5대 주임 조창희 신부는 새 성당 건립에 온 힘을 쏟아, 1954년 12월 5일 성당 (95평, 종탑 72척)이 완공되어 노기남 주교의 집전으로 봉 헌식을 가졌고, 이어 1955년에는 사제관이, 1959년에 는 현재의 강당(건평 80평)이 신축되었다. 용산 본당의 교세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6대 주임 김윤상 신부의 재 임기에는 총 신자수가 5,000여 명에 이르게 되어 효창 동과 신공덕1 · 2동 일부 지역에 살던 신자들은 청파동 준본당으로 교적을 옮겼다. 1964년 7월에는 1961년 4 월 정식 인준을 받은 연령회에서 약 5년 간 꾸준히 모아 온 성미와 헌금으로 '용산 본당 묘지' 를 매입하였다. 7 대 주임 임화길 신부 재임기에 두 번째로 구역이 분할되어, 신공덕1 · 2동과 공덕3동, 마포 경찰서 인근의 일부 신자들의 교적이 신설된 공덕동 본당으로 이관되었다. 본당 분할은 8대 주임 남영희 신부 재임기에도 이어져 1971년 9월 신수동 본당이 설립되자 세 번째로 관할 구역을 분할하였다. 1974년에는 사제관을 헐고 그 자리에 현재의 사제관(2층 양옥, 연건평 61평)을 짓기 시작하였다. 9대 주임 송순용 신부는 1977년 주일학교 교리실(36평, 사제관 옆)을 신축하였으며 1980년 1월에는 성직자 묘지 를 정비하였다. 10대 주임 김병일 신부는 1982년 초에 원효로 공소를 개설하고 421평의 부지를 추가로 매입하 여 본당 묘지를 확장하였으며, 11대 주임 김택암 신부는 1987년 12월에 시유지 425.4평을 매입하여 본당 소유로 등기를 마침으로써 본당의 숙원 사업이었던 시유지 매입을 달성하였고, 이후 새 성당 건립 사업을 추진하여 1989년 8월 전 신자가 참여한 가운데 성당 및 교육관 봉헌식을 가졌다. 12대 주임 김용태 신부는 사목 목표를 '가정의 성화' 로 정하고, 사목 방향을 신자 관리의 강화 (냉담자 회두 및 신자 배가 운동)라는 측면에서 설정하였다. 1992년 5월 용산 본당 설립 50주년 기념 행사가 열렸으 며, 《용산 본당 50년사》가 발간되었다. (→ 라리보, 아드 리앙 조제프 ; 서울대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용산 본당 50년사 편찬위원회 편, 《용산 본당 50년사》, 천주교 용산 교회, 1992. 〔金志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