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소막 본당

龍召幕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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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소속 본당.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용암 2리 719-2 소재. 1904년 5월 원주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분리 ·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루르드의 성모. 관할 구역은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전 지역과 충북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 관할 공소는 황둔, 학산 2개소. [교 세] 1904년 864명, 1910년 1,238명, 1919년 2,229명, 1924년 1,477명, 1964년 1,050명, 1974년 878명, 1984년 736명, 1994년 623명, 2000년 798명. [역대 신부] 초대 프와요(V. Poyaud, 表光東) 베다스토(1904. 5~1910.6), 2대 기요(J. Guillot, 吉) 요셉(1910. 10~1914.4), 3대 시잘레(P. Chizallet, 池士元) 베드로(1914. 4~1927. 5) 4대 뤼카(F. Lucas, 陸嘉恩) 프란치스코(1927. 5~1928. 5) 5대 이철연(李喆淵) 프란치스코(1928. 5~1936. 5), 6대 백남희(白南熙) 베드로(1936. 5~1940. 4), 7대 갤라거(F. Gallagher, 갈) 프란치스코(1940. 4~1945), , 8대 맥고원(F. McGowan, 원) 파트리치오(1945~1947. 11), 9대 조응환 (曹應煥) 타데오(1947. 11~1949.9), 10대 주재용(朱在用) 바오로(1951~1951), 11대 이종흥(李鍾興) 그리산도 (1952. 10~1954. 1), 임시 양대석 알로이시오(1954. 1~6) , 12대 최동오(崔東五) 아타나시오(1954. 6~1958. 1), 13대 디어리(P. Deery, 李) 파트리치오(1957. 12~1963. 6), 14대 오코너(P. O'Conor, 권) 바드리시오(1963. 6~9), 15대 딜 레이니(R. Delaney, 도) 리처드(1963. 9~1964. 11), 16대 디 어리(1964. 11~1966. 1), 17대 켈리(P. Kelly, 경) 베드로 (1966. 1~10), 18대 디어리(1966. 10~1969. 3), 19대 딜레 이니(1969. 3~5), 20대 심근섭(沈根燮) 베네딕도(1969. 5~1970. 4), 21대 이흥근(李興根) 마르코(1970. 4~7), 22 대 스미스(M. Smyth, 천) 말라키아(1970. 7~1971.8), 23대 클라크(L. Clarke, 정) 레오(1971. 8~1973. 5), 24대 올루린 (M. O' Loughlin, 오) 미카엘(1973. 5~1974. 4) 25대 스캔 런(R. Scanlon, 장) 레이몬드(1974. 4~1976. 4), 26대 머리 (B. Murray, 함) 브렌다노(1976. 4~1980. 12) , 27대 아이젤 (H.P. Eisel, 양) 파트리치오(1980. 12~1983. 5), 28대 김태 원(金泰元) 요한(1983. 5~1990. 2), 29대 곽호인(郭鎬仁) 베드로(1990. 2~1995. 2), 30대 김태진(金泰鎭) 베네딕도 (1995. 2~1997. 2), 31대 남궁민(南宮玫) 루가(1997. 2~ 1999. 2), 32대 신현봉(申鉉奉) 안토니오(1999. 2~2000. 1), 33대 박상용(朴相龍) 아우구스티노(2000. 1~현재). [전사 및 공소 시대] 용소막에 천주교가 전해진 시기는 병인박해 무렵부터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멀리 수원 지방에서 피난온 몇몇 신자 가족들이 강원도 평창 지역에 살다가 박해가 뜸해지자 뿔뿔이 흩어져 그 일부는 용소막에서 멀지 않은 황둔(黃屯)으로 내려와 거기서 얼마를 살았다. 그 후 그들은 1890년경에 황둔에서 멀지 않은 충북 제천군 송학면 오미(五味)에 정착하게 되 었는데, 이곳에는 최씨와 백씨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 곳 신자들의 지도자는 최도철(崔道澈, 바르나바)이었다. 그는 병인박해 때 이곳저곳 숨어 다니며 신앙을 보존하다가 1893년 제천 길마돈 공소(현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 에서 푸아넬(Poisnel, 朴道行) 신부를 만나 17년 만에 성사를 보았고, 풍수원 본당의 르 메르(L.Le Mere, 李類斯, 루도비코) 신부로부터 전교 회장으로 임명되어 각처로 다니며 전교하였다. 그러던 중 1893년부터 한두 집씩 오미에서 용소막으로 이사 오기 시작하였으며, 1898년 에는 최도철도 용소막으로 이사하였다. 최도철은 1898 년 1월 13일 5~6명의 교우들과 신부 방이 포함된 초가 10칸의 아담한 경당을 짓고 원주 본당 관할의 용소막 공 소를 설립한 뒤 초대 공소 회장을 맡았다. 공소가 개설된 다음해인 1899년에 오미에 살던 백(白) 씨네와 행주(幸 州)에 살던 선병로(宣秉魯, 베드로) 일가가 용소막으로 이사해 옴으로써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1900년 10월 24일에는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가 이곳을 방문하여 새 경당을 축복해 주었다. [본당의 설립과 발전] 당시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백낙 훈이 신부가 사제관으로 사용할 집 한 채를 마련하자 최도철 회장은 용소막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켜 줄 것을 원주 본당에 청원하였다. 그러자 원주 본당의 르 메르 신 부는 이웃 풍수원 본당의 정규하(鄭圭夏, 바오로) 신부 와 이 문제에 대하여 협의하여 뮈텔 주교에게 건의하였고, 마침내 1904년 5월 4일 뮈텔 주교가 이 건의를 허락함으로써 용소막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으로는 1903년에 입국한 프와요 신부가 임명되었 다. 프와요 신부가 부임할 당시 신자수는 864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관할 구역은 원주군 · 영월군 · 평창군 · 제 천군 · 단양군 등 5개 군에 걸쳐 있고 사방 3백 리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프와요 신부가 최도철 회장, 선 병로 회장, 최도철 회장의 셋째 아들 최영식(바오로) 등 의 도움을 받아 열심히 전교한 결과 수년 후에는 교세가 1,000명을 넘어섰다. 그리고 1910년 프와요 신부가 서울로 전임될 때에 이르러 용소막 본당은 교세가 1,238 명에 달하는 큰 본당으로 발전하였다. 2대 주임으로는 용산 신학교 교수이던 기요 신부가 부임하였다. 기요 신부가 부임한 지 한 달 만인 1910년 11월 12일에 뮈텔 주교가 본당을 방문하여 신자들에게 견진 · 혼배 · 고해 등 여러 성사를 주었다. 기요 신부는 1913년 새 양옥 성당 건립 계획을 세우고 우선 장마철 을 이용하여 성당 건축에 필요한 목재를 운반해 오는 일 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기요 신부가 1914년 4월 용산 신학교로 전임되고 시잘레 신부가 3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시잘레 신부는 그 해 가을에 묘재(山尺, 현 충 북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 공소의 이석연 회장의 알선으로 중국인 기술자들을 고용하여 공사를 담당하게 하는 등 성당 신축 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장티푸스에 걸려 앓고 있던 최도철 회장의 가족들을 비롯하여 모든 신자들이 적극 나서서 성당 신축 공사의 일을 열심히 도운 결과, 착공한 지 3년 만인 1915년 가을에 100평 규 모의 아담한 벽돌 양옥 성당을 완공하였다. 이 새로 지은 성당 지붕의 경사가 상당히 가파르게 된 것은 당시 건축 기술자였던 중국인이 도면대로 짓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기둥의 길이를 2자씩 잘라내고 지었기 때문이다. 이 당 시의 총신자수는 2,081명에 달하였다. 5대 주임으로 부 임한 이철연 신부는 1929년에 연령회를 창설하였고, 1935년에는 학산 공소의 강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으며, 6대 주임으로 부임한 백남희 신부는 1938년 봄에 학산 공소의 강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1939년 4월 25일 춘천교구가 서울교구에서 분리 · 신설됨에 따라 용소막 본당은 서울교구에서 춘천교구로 이 관되어 골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의 관할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7대 주임으로 부임한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 속의 갤라거 신부는 1940년 7월에 관할 구역 안에 있던 제천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하여 분리시켰으며, 1941년 에는 지역 주민들의 문맹 퇴치와 전교를 위해 4년제 학 교인 명덕국민학원을 설립하여 교육 사업을 전개한 결과 5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43년에는 대동아 전쟁을 벌이던 일본군에 의해 성당의 종을 공출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0대 주임으로 부임한 주재용 신부 때는 6 · 25 전쟁이 발발하여 본당이 크게 피해를 입었다. 성당은 공산군 들의 식량 창고로 전락되었고, 성당 내부의 성모상이 총 탄을 맞아 목과 전신이 파손되었으며, 성당 천장도 총탄의 세례를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아울러 명덕국민학원 교사와 본당 사목 문서도 모두 불에 타 버렸고, 회장 들이 공산군들에게 끌려가 숱한 고초를 당하였으며, 일 반 교우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성당 건물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고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게 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난 뒤 이종흥 신부가 1952년 10월에 11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이종흥 신부는 성당과 사제관을 원상 복구하고 강당을 신축하는 한편, 1953년 10월경에는 무염 시태 성모 마사비엘 성모상을 완공해 신자들의 신심을 성모님께 향하도록 함으로써 침체된 농촌 교회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12대 주임으로 부임한 최동오 신부는 1955년 9월에 6 · 25 전쟁으로 불타 없어진 학산 공소 강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거행하였고, 12월에는 신용 협동 조합을 설립하여 가난한 신자들이 경제적으로 자립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13대 주임으로 부임한 디어리 신부는 1958년 송계리 공소를 설립하였고, 1960년 12월에는 가리파 공소를 설립하였으며, 1962년에는 송계리 공소의 강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1965년 3월 원주교구가 춘천교구에서 분리 · 신설됨 에 따라 용소막 본당은 춘천교구에서 원주교구로 이관되 었다. 이후 용소막 본당은 관할 지역의 분할과 주민들의 도시 진출 현상으로 말미암아 교세가 크게 감소되어 갔 다. 이러한 가운데 27대 주임으로 부임한 아이젤 신부는 1981년 유아원을 세워 신자들을 비롯한 지역 주민들이 유아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1983년 5월에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의 신부들이 원 주교구에서 철수함에 따라 이후부터는 한국인 사제들이 본당의 주임을 맡게 되었다. 28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태원 신부는 1984년에 성당 내부를 수리하고 성당 지붕을 동판으로 교체하였으며, 1985년에는 초가집을 구입하여 피정의 집인 두루의 집으로 개축하였다. 아울러 1986년 7월에는 수녀원을 건립하여 성모 영보 수녀회 분원을 마 련하였고, 도 · 농 간의 나눔의 공동체 실현을 위해 서울 교구 소속의 길동 본당과 자매 결연을 맺었다. 또한 1987년 10월에 남상교(南尚敎)의 후손과 미아3동 본당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 학산 공소 강당 옆에 있는 남상교 유택의 지붕을 기와로 교체하고 뒷산에 14처를 조성하 여 축복식을 거행하였는데, 남상교는 성인 남종삼(南鍾 三)의 부친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신앙 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꽃당이(현 제천신 백운면 화당리)에서 이곳으로 이사 와 살았던 인물이다. 아울러 1988년 11월에는 용소막 출신 사제로 성모 영보 수녀회를 설립하고 성서 번역에 큰 자취를 남기고 1976년에 선종한 선종완(宣鍾完, 라 우렌시오) 신부의 삶과 공적을 기리는 유물관을 성모 영 보 수녀회의 도움을 받아 설치하였고, 피정 센터인 두루의 집과 지하 기도실을 새로 준공하여 축복식을 가졌으 며, 1989년 5월에 낡고 협소한 학산 공소의 강당을 헐고 새로 지은 뒤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29대 주임으로 부임한 곽호인 신부는 1990년 12월 가리파 공소가 중앙 고속 도로 건설 부지에 편입됨에 따라 이를 폐쇄하였으며, 1991년 4월에 황둔 공소의 강당을 이전 · 신축하여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아울러 1994 년 4월에는 남상교 유택을 수리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에 소방 도로 개설로 인하여 신림 공소 건물을 철거하였 다. 31대 주임으로 부임한 남궁민 신부는 피정 센터인 두루의 집을 보수(1 2층) · 증축하여(3층) 축복식을 거 행할 뿐만 아니라 성당의 전기 시설을 수리하고, 음향 시설을 교체하며, 마루와 창틀을 보수하는 등 본당의 시설물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단행하였다. 33대 주임으로 부임한 박상용 신부는 2000년 4월에 남의 소유로 되어 있던 메주 집 부지(355.4평)를 교구의 도움을 받아 매입하였다. 이 메주 집에서는 10여 년 전 부터 신자들이 메주와 된장을 제조하여 자매 결연을 맺 고 있는 길동 본당 신자들이나 다른 도회지 신자들 및 수 녀원에 판매해 오고 있으며, 그 수익금으로 열악한 본당 의 재정을 돕고 있다. 많은 도회지 신자들이 1915년에 세워진 유서 깊은 성당 건물과 선종완 신부의 기념관도 둘러볼 겸 용소막 본당을 방문하여 이곳 신자들이 직접 만든 토종 메주나 된장을 사가고 있다. → 원주교구 ; 원주 본당) ※ 참고문헌  원주교구 30년사 편찬위원회 편, 《원주교구 30년 사》, 천주교 원주교구, 1996/ <용소막 본당 연혁>(천주교 원주교구 용소막 본당 공)/ 원주교구 원동 본당 100년사 편찬위원회 편, 《원동 백년사》, 천주교 원주교구 원동 교회, 1999/ 한국교회사연구소 역 주, 《뮈텔 주교 일기》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93, pp. 499~500/ 한국 교회사연구소 역주, 《뮈텔 주교 일기》4,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p. 499. 〔徐鍾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