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정 하시 본당
龍井下市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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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 하시 본당 전경.
연길교구 소속 본당. 만주 간도성 연길현 용정 하시 소 재. 1909년 5월 1일 원산 본당 소속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1932년에 본당의 소재지를 용정 상시에서 용정 하시로 옮기고, 본당 이름도 용정에서 용정 하시로 바꾸었다. 설립 당시 서울교구 소속이었으나 1920년 8월 5일 원산교구 소속이 되었다가 1928년 7월 19일 연길교구 소속으로 변경되었으며, 1946년 침묵의 본당이 되었다. 주보는 설립 당시에는 예수 성심이었으나 용정 하시로 본당을 옮기면서 그리스도 왕으로 바꾸었다. 공소는 1932년 당시 8개소. [교 세] 1921년 2,705명, 1932년 1,743명. [역대 신부] 초대 퀴를리에(L. Curlier, 南一良) 레오(1909~1921.5), 2대 히머(K. Hiemer, 任) 갈 리스도(1921. 5~1925), 3대 하프너(Hafner, 韓) 암브로시오(1925~1931), 4대 랍(K. Rapp, 朴) 콘라도(1931~1932. 7), 5대 아펠만(B. Appelmann, 裵) 발두인(1932~1936), 6 대 에그너(R. Egner, 王) 레지날드(1936. 9~12), 7대 슈레 플(C. Schräfl, 周聖道) 코르비니안(1936. 12~1946). [공소 시대] 용정은 북간도(北間島) 조선인 사회의 가장 큰 중심지였다. 북간도로 흘러 들어온 조선 사람들은 거의가 용정을 거점으로 하여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용정을 구심점으로 거기서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어 가며 살 았다. 이와 같은 용정의 조선인 사회를 처음 일군 사람들 은 주로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간도 지방에서 첫 번째로 설정된 공소는 부처골[佛洞] 공소였다. 부처골은 용정에서 8리 가량 떨어진 곳으로 1898년 초에 신자들이 이룩한 교우촌이었는데, 1898년 말 원산 본당의 7대 주임인 브레(Bret, 白類斯) 신부의 방문으로 공소가 된 이래 신 자들에 의해 대교동(大敎洞)이라 불리면서 복음 전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후 대교동에 사는 최문화(崔文化, 베네딕도), 최병학(崔秉學, 베르나르도), 김일용(金一 龍) 등 신자 4~5명이 1900년 용정에 405일경(443헥타 르) 땅을 중국인에게서 매입하여 신자들의 경작지로 삼고 신자 20여 호를 이사하게 하여 교우촌을 형성하였다. 본시 중국 사람의 집 몇 호와 그 중국 사람들의 밭을 경 작하는 조선 사람들의 집 5~6호밖에 없는 아주 작은 중 국인 마을로서 육도구(六道溝)라고 불리었으나, 조선 사 람들이 대거 이주해 들어온 뒤로는 용정촌(龍井村)이라 고 명명되었다. 이곳 조선인 집은 거의 다 신자들 소유였 으므로 한때는 성교촌(聖敎村)이라는 별명까지 있었다. 교육 활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이곳 신자들은 회장 장 고스마가 자신의 집을 교사(校舍)로 희사하자 1906년에 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한 간도 최초의 교육 기 관인 삼애학교(三愛學校)를 설립하였다. 신자 지 타데 오, 한 요셉 등이 무보수로 한글과 교리뿐 아니라 산술과 역사 등도 가르치면서 애국 계몽 활동을 펼쳤다. 후에는 김일룡의 집을 교사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용정 공소는 1908년까지 여러 차례 브레 신부의 사목 방문을 받았다. [본당 설립 및 발전과 폐쇄] 원산 본당의 주임으로 간 도 지역까지 맡아 사목 활동을 펼치던 브레 신부가 1908 년 10월 24일 선종하자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1909년 5월 1일 퀴를리에 신부와 라리보(A. Larribeau, 元亨根) 신부를 용정과 영암촌(英岩村)에 각각 파견하였 다. 이로써 용정 공소와 영암촌 공소는 각기 본당으로 승 격되었다. 용정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퀴를리에 신부는 용정 일대를 중심으로 화룡(和龍)과 연길(延吉) 등 서쪽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였다. 퀴를리에 신부는 신 자들이 제공한 집과 부지를 토대로 성당과 사제관을 건 축하였다. 부임 첫해에 퀴를리에 신부가 방문한 신자들 은 모두 1,444명에 달하였다. 본당을 중심으로 칠십 리 내에 7~8개소의 공소를 설치하고 1년에 두 번씩 순회 함에 따라 신자수가 크게 늘어났다. 1911년 봄 우연히 용정 시가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500여 호의 가옥이 불 타는 바람에 성당과 사제관이 전소하였으나 신자들이 건축비의 반 이상을 부담하여 1912년에 간도에서는 처음으로 프랑스 건축 양식의 벽돌 양옥 성당과 사제관을 새 로 건축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30일 뮈텔 주교의 주례 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용정 장날인 1919년 3월 13일 용정 성당의 정오 종소리와 함께 3 · 1 만세 운동이 시작 되었을 때 일찍부터 교육 활동을 통해 민족 의식을 고취해 온 본당 신자들은 이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0년 8월 5일에 원산교구가 서울교구로부터 분 리 · 신설되자 원산교구의 사목은 베네딕도회에 위임되 었다. 베네딕도회에 사목이 위임된 지역은 함경남북도 일대뿐 아니라 간도를 포함한 만주의 동남 지역까지도 미쳤다. 수도회에서 1921년 5월 1일 서울교구로부터 분할된 지역을 인수함에 따라 12년 동안 간도 지역에서 활 동해 온 서울교구의 신부들이 철수하고 베네딕도회 선교 사들이 본당 사목을 담당하게 되었다. 용정 본당은 수원 에 있는 목공 학교 교장을 오래 역임하여 조선말과 조선 풍습에 익숙한 히머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히머 신부는 우선 성당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제반 예절을 더욱 장엄하게 행하여 신자들의 기분을 쇄신시켰다. 또한 교육 사업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베네딕도회의 선교 방침에 따라 1921년 8월에 4년제 사립 학교인 해 성학교(海星學校)를 설립하여 현대식 초등 교육을 실시하였다. 해성학교에서는 끝까지 조선어 시간을 두어 민 족 의식과 독립 정신을 고취시켰기 때문에 일본인의 감 시의 눈총을 받았다. 아울러 개인 수양과 전교 사업의 후원을 위해 청년회, 부인회, 소년 · 소녀회 등 각종 단체들 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1년에 3~4차례씩 지방을 돌아 다니며 전교하여 지방 신자들의 신앙심을 고취시켰고, 가난한 교우들을 돌보는 자선 사업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활발한 전교 활동으로 교세가 더욱 신장되어 보다 더 넓은 곳으로 본당을 이전해야 할 필요성 이 생기게 되었다. 이때 교우 김인학(金仁學)이 용정의 신 시가지인 하시(下市)에 광대한 부지를 기증하여 1924년에 먼저 이곳에 벽돌집 학교를 새로 짓고 해성학 교를 이곳으로 옮겼으며, 4년제였던 학교를 6년제로 확대시켰다. 1928년 7월 19일 간도 지역이 연길교구로 분리 · 설정됨에 따라 용정 본당은 연길교구에 속하게 되었다. 3 대 주임으로 부임한 하프너 신부는 본당의 교세가 계속 불어나자 1929년에 두도구(頭道溝)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하여 분리시켰다. 1931년에 부교구장을 겸한 랍 신부 가 4대 주임으로 부임함에 따라 본당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랍 신부는 본당을 하시로 이전하기 위 한 계획을 수립한 뒤 하시에 학교를 중축하고, 성당 · 수녀원 · 사제관 등을 본격적으로 신축하기 시작하였다. 랍 신부가 1932년 7월 일본군에게 살해되자 아펠만 신부가 5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랍 신부가 추진한 사업들을 이어 서 완성해 나갔다. 그 해 아펠만 신부는 성당 · 사제관 · 수녀원 등을 완공하고 본당을 하시로 이전한 뒤 본당의 이름을 용정 하시로 바꾸었으며, 주보도 예수 성심에서 그리스도 왕으로 변경했다. 상시에 있는 옛 성당은 새 성 당의 유치원 · 학원 용도의 부속 건물로 활용하였다. 또 한 1933년 3월에는 연길 성 십자가 수녀회(현 부산 성 베 네딕도 수녀회 전신) 지원(진료소 포함)을 마련하였다. 수녀들은 전교, 진료소, 초등 학교, 유치원, 사제관 등에서 일하면서 각종 단체를 지도했다. 아펠만 신부는 특히 소년 운동에 주력하여 1934년 8월 제2회 탈시시오 소년 연합 대회를 본당에서 성대하게 개최하였고, 1936년 봄부터는 《가톨릭 소년》이라는 월간 잡지까지 발행하였다. 그리고 1936년 8월에 간도 천주교 전래 40주년 기념 경 축 행사를 본당에서 거행하였다. 아펠만 신부는 이 대규모 행사를 치르기 위하여 대강당을 신축하였는데, 행사가 끝난 뒤 성당을 그 대강당으로 옮겼다. 1936년 12월 7대 주임으로 부임한 슈레플 신부는 가난한 미혼 여성들의 교육을 위한 3년제 해성학원을 정비 하고 확대시켰으며, 이듬해 가을에는 교무실 1개와 교실 3개를 갖춘 학원 건물까지 준공하여 갖추게 되었다. 또한 건축 예술에 비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슈미트(A. Schmid, 安) 신부의 도움을 받아 크기만 한 창고 같은 성당을 거룩한 분위기가 나게 꾸미는 작업을 그 해 12월에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기금을 조성해 주식에 투자하여 이익을 냄으로써 본당의 재정을 튼튼하게 만들어 1939 년부터 연길교구의 유일한 자립 본당으로 교구의 보조 없이 본당과 학교를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뒤부터 종교 활동까지 간섭하기 시작하였으며, 1944년에 이르러서는 모든 교회 학교를 국유화하였다. 이로써 20여 년 간 운영되어 온 해성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다. 1945년 6월 사제관과 해성학원이 일본군에게 징발당했기 때문에 해성학원은 예수 성심 본당으로 옮겨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 해 8 월 15일 일본이 패망한 뒤 소련 군대에 이어 중국 공산 당이 이곳을 간섭하면서 본당의 시련은 더욱더 가중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남녀 성직자들을 체포하고 교회 재산을 몰수하기 시작하였다. 슈레플 신부는 중국 공산당의 체포의 손길이 다가오자 본당의 문서들과 신자들의 교적 부 및 그 밖의 중요한 서류들을 땅속 깊이 묻어 버렸다. 마침내 1946년 5월 22일 중국 공산당에 의해 슈레플 신 부가 체포되어 끌려가고 교회 재산도 몰수당하였다. 이 로써 2천여 명의 신자들을 수용하는 대성당, 학생 6백여 명의 국가 공인 6년제 해성학교, 학생 2백여 명의 3년제 학원, 2층 양옥의 사제관, 건평 100평의 흙벽돌로 지은 수녀원과 시약소, 각종 회관 등을 두루 갖춘 연길교구의 중심 본당이었던 용정 하시 본당은 침묵의 본당이 되고 말았다. (→ 간도 교회 ; 삼애학교 ; 연길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青年》 1936년 10월호(연길교구 특집호)/ 《가톨릭 연구》 1936년 9월호(間島 특집호) 주성도,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분도출판사, 1993/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 60년사 편찬위원회 편, 《은혜의 60년》,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 1995/ 方相根, <삼애학교>, 《교회와 역사》 281호(1998. 10)/ 윤선자, <일제의 간도 침략과 간도 천주교회의 한국 독립 운동>, 《일제의 종 교 정책과 천주교회》, 경인문화사, 2001. 〔徐鍾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