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가리트
[영]Ugarit
글자 크기
9권

1 / 3
우가리트의 광장 유적.
시리아 지중해변에 위치한(북위 35도 35, 동위 35도 45) 옛 도시 국가 유적지. 아랍어 지명은 텔 라스 샤므라(Tell Ras Shamra)라고 한다. 기원전 1400~1200년경 사이에 번성했던 우가리트 도시 국가는 주로 해상 무역업을 하였으며, 그곳에서 발 굴된 많은 점토판을 통하여 당시의 경제와 문화 · 종교 등을 알 수 있다. 이곳이 알려진 것은 1928년 한 농부가 이 근처의 밭을 갈다가 지하 무덤 방을 발견하고, 그곳에 묻혀 있던 부장품들을 꺼내다 팔면서부터이다. 다음해부터 세페르 (C.F.A. Schaeffer)가 이끄는 프랑스 발굴 팀이 발굴을 시작하여 프랑스 고고학 발굴단에 의해 주기적으로 발굴되 었다. 그로 인해 우가리트 왕국이 번성하였을 당시 주변 의 도시 국가들과 교류하였음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 료들이 발굴되었다. [문화와 역사] 폐허가 된 우가리트 왕국의 발굴 터에서 폭풍의 신 바알(Baal)과 곡신의 신 다곤(Dagon)의 신 전들과 왕궁, 거주지, 작업장 등의 토대를 찾아볼 수 있으며, 청동으로 만든 도끼 · 칼 · 화살촉 · 제기 신상 등과 금 · 은 · 상아 등으로 만든 정교한 장식품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발굴된 공예품이나 장식에 고대 이집트와 히타이트 문화의 양식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점 토판의 기록을 통해서도 이집트와 히타이트 왕국 사이에 긴밀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30여 개의 돌로 만든 닻이 발견되었는데, 그중 에 500kg 정도 되는 것이 4개나 있는 것으로 보아 우가리트 왕국의 항해자들은 큰 배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500kg의 닻은 무게가 약 200톤 정도이며, 이는 길이 20m 정도의 배에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17개의 닻이 신전 안에서 발굴된 것으로 보아 해상 활동이 종교와 깊은 관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우가리트 지역에 처음으로 정착한 시기는 기원전 65세기경이며, 기원전 40~35세기의 청동 석기 시 대의 거주 형태도 볼 수 있다. 초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35~21세기)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영향권에 있 었으며, 중기 청동기 시대에 와서 우가리트는 항구 도시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작은 도성 국가의 면모를 갖게 되었으며, 우가리트 왕국으로 번성하게 된 시기 는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5~12세기)이다. 이 시기에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장악한 이집트와 히타이트 왕국의 이득과 보호로 해상 무역을 원활히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큰 건물과 신전들도 이 시기(기원전 14~13세기)에 건 축된 것이며 행정 · 경제 문서, 종교 의례 문헌이나 이웃 국가들과 왕래한 편지 등도 이 시기에 기록되었다. 15~12세기에 우가리트 왕국은 북으로는 히타이트 왕국,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 서쪽으로는 키프로스 섬과 크레타 섬, 남으로는 이집트와 활발히 통상 · 외교 관계를 맺어 번영했다. 두드러진 유적들로는 도시 고지대에 천둥 번개의 신이요 비를 내리는 신인 바알의 신전 터가 있고, 또한 고지대에는 방이 90개가 넘는 큰 궁전 터가 있는데 이는 기원전 15~13세기에 여러 차례 증축 된 것이다. 왕궁 서고에서, 기원전 14~12세기에 우가리트어로 쓴 점토판이 1,500개 이상, 아카드어로 쓴 점 토판은 훨씬 더 많이 발굴되었다. 신화와 전설과 의례를 적은 종교 문헌 · 서간 문헌 · 행정 문헌이 주종을 이룬 다. 신화에 따르면 연로하고 지혜로운 최고신 엘(E)은 조 용히 물러서 있는 반면, 그의 아들인 바알은 매우 젊고 활동적이다. 우가리트어로 쓰여진 신화에 따르면 바알은 바다의 신 암(Yamm)을 무찌른다. 또한 바알은 죽음의 신인 모트(Mot)에게 져서 땅속으로 내려가지만, 바알의 누이인 아나트(Anath) 여신의 도움으로 주권을 회복한 다. 우가리트인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바알에게 바치는 기도문이 우가리트어로 쓴 점토판에 전해 온다. "힘센 적이 문 앞에서 쳐들어오면, 강한 놈이 너의 벽을 공격하면, 눈을 들어 바알을 쳐다보라. '오, 바알이여, 저 힘센 적을 문밖으로 내쫓으소서. 저 강한 놈을 벽에서 물러가 게 해주소서. 우리는 당신께 황소를 바칩니다. 오, 바알 이여. 우리는 서원한 것을 당신께 바칩니다. 오, 바알이 여. 우리는 수소를 당신께 바칩니다. 오, 바알이여. 우리 는 제사를 바칩니다. 오, 바알이여. 우리는 술을 부어 바 칩니다. 오, 바알이여. 우리는 당신 신전에 올라갑니다. 오, 바알이여. 우리는 바알의 집에 올라갑니다.' 그러면 바알이 너희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 그는 힘센 적을 문 에서 몰아내고, 강한 놈을 벽에서 물러가게 할 것이다." 이러한 바알 신앙 때문에 기원전 13세기부터 가나안 땅에 진입한 이스라엘 백성은 이후 수백 년 동안 그 신앙과 투쟁해야 했다. 기록에 나오는 우가리트 왕국의 여덟 명의 왕들은 기원전 1380년경부터 약 200 년 동안 주변의 강대 국가들과 선린 관계를 유지하며 번영하였다. 그런데 기원전 1200년경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해양 민족들"이 크레타 섬과 그 주변의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이집트와 히타 이트, 지중해 동쪽 연안 지역으로 침입하면서 근동 사회에 큰 변혁이 일어났다. 해양 민족들의 계속적인 침입에 방어할 수 없는 우가리트 군대는 이집트와 히타이트 왕국의 원조를 구하였으나, 자국의 방어에 급급하여 우가 리트를 도와줄 수가 없게 되었다. 그 마지막 때에 왕래한 편지에서 우가리트 왕국이 멸망하는 위급한 장면을 생생히 볼 수 있다. "이제 적의 배들이 옵니다. 내 도시 에 불을 지르고 있습니다. 땅에 해를 끼칩니다.···이제 적의 7척의 배가 와서 우리를 해칩니다." "마지막 편지, 마지막 편지. 당신의 편지가 도착했을 때, 우리 군대는 굴복했으며 도시는 점령되었습니다. 앞마당에 있는 우리 곡식은 불타 버렸고 포도원은 허물어졌습니다. 우리 도시는 점령되었습니다. 아십시오, 아십시오." 결국, 기원 전 1185년경 도시 전체는 불에 타 버렸고 도망가지 못 한 주민들은 살해되었다. 이후 이곳은 재건되지 않았으 며 1928년 한 농부가 밭을 갈다가 지하 무덤 방으로 통 하는 돌 뚜껑을 열기 전까지 도시 전체는 흙더미에 싸여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언어와 문자] 우가리트어는 인류 역사상 첫 번째 알 파벳 언어이다. 기원전 16세기까지 페니키아인들과 우 가리트인들은 주로 아카드어 설형 문자와 이집트어 상형 문자를 사용했다. 이 두 가지 언어의 문자는 매 사물을 고유한 글자로 표시했기 때문에 중국의 한자처럼 매우 복잡하여 지식인이 아니면 문자를 읽을 수 없었다. 그런 데 15세기 무렵 표음 문자 30여 자로 알파벳을 창조함 으로써 언어의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우가리트 문자를 만들어 낸 사람은, 문자 형태는 아카드어에서 모방하고, 그 문자를 이집트 상형 문자의 알파벳식 자음으로 사용하였다. 우가리트어는 200여 년 동안 우가리트 왕국에서 사용되었다. 우가리트 알파벳 문자는 모두 30개이다. 기본 자음은 27개이며, 2개는 후음(喉音)에 모음을 첨가한 문자이고, 외래어를 표기하기 위해 특별히 ''스' (s) 음가의 문자 를 만들었다. 우가리트 알파벳 문자의 해독은 고대 이집트 상형 문자나 고대 메소포타미아 상형 문자보다 훨씬 쉬웠다. 점토판에 기록된 우가리트 알파벳 문자표는 인 류 역사상 처음으로 발견된 일정 수의 알파벳 문자표 (Abecedary)이다. 우가리트어보다 300여 년 뒤에 만들어진 페니키아 문자는 22개의 자음을 가지고 있으며, 히브 리어도 이처럼 22개의 기본 자음으로 표기하였고 그 순서가 우가리트 문자표와 거의 상응한다. 모음의 규칙성이 분명한 셈어 문법을 터득한 고대 이 집트인들은 일찍부터 상형 문자를 알파벳으로도 사용하 였는데, 우가리트 사람들은 그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기원전 18~16세기 가나안 지역과 시나이 반도에서 알파벳으로 사용된 상형 문자가 발견되었다. 비록 많은 양의 자료가 발견된 것은 아니지만, 기원전 18~16세기에 이 미 알파벳 문자가 가나안 지역에 통용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우가리트 문자가 선택된 이유는 아마도 당시 국제어가 아카드어였고, 우가리트 지역에서는 점토가 파 피루스보다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우가리트어와 히브리어 : 우가리트에서 발굴된 점토판 에는 행정 · 계약 · 주문(呪文) · 신화 등의 내용도 담아 있지만, 단어집이라고 볼 수 있는 2개 국어, 3개 국어, 심지어 수메르어-이카드어-후르리어-우가리트어 등 4개 국어로 된 사전류의 점토판이 8개 있다. 이러한 사전 점토판에 모두 114개 우가리트 단어가 음절로 표기되어서 발음을 재구성할 수 있기 때문에 원(原) 셈어의 어휘 비교 분석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우가리트어는 북서 셈어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알려진 셈어 가운데 히브리어와 상당히 가까운 언어군에 속한 다. 우가리트어는 히브리어 연구뿐 아니라 셈어의 원형을 찾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히브리어 단어와 우 가리트어 단어를 아래와 같이 비교하여 보면 그 유사함 을 쉽게 식별할 수 있다. 아래의 우가리트어와 히브리어 는 자음만을 영문자로 표기한 것이고 '발음' 은 히브리어 의 발음이며 서기 7세기경에 유대교 학자들이 첨가한 모 음 부호에 따라 읽은 것이다. 페니키아 · 우가리트 알파벳의 맨 첫 번째 유적은 시나 이 반도 남서부 지역(Serabit el-Khadim) 바위에 새겨진 명각이다. 이것은 그곳에서 이집트인 감독 아래 터키옥을 캐던 가나안 사람들이 새겨 놓은 것이다. 그리고 알파벳 의 두 번째 유적이 우가리트에서 1,500개 이상이나 출토된 우가리트어 점토판이다. 우가리트어 알파벳의 문자는 두 가지이다. 이집트어 상형 문자를 본따 만든 알파벳 이 있는가 하면 아카드어 설형 문자를 본따 만든 알파벳도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전자가 득세하여 거기서 세계의 여러 알파벳이 파생했다. 옛 히브리어로 쓴 가장 오랜 유물은 게제르 달력이다.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사이의 국도변에 자리잡은 게제르 폐허(Tel Gezer)에서 1908년에 발견된 달력이다. 기원전 10세기의 솔로몬 시대에 누군가 석회석에 새긴 달력으로 늦가을(Tishri 달)부터 시작한다. 현재 이스탄불 고고 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교회와의 관계] 우가리트에서 지중해변을 따라 10km 남쪽으로 가면 시리아 최고의 휴양 도시인 라타키아 (Lattaquia)가 있다. 이곳은 과거 시리아의 라오디체아로서,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Laodicensis, 315?~392?)가 이곳의 주교로 재직하면서 예수의 인성을 약화시킨 이단 사상을 주창했다. 그는, 인간은 몸과 혼과 영으로 이루어지지만, 예수는 몸과 혼과 신성한 말씀(logos)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이 이단 사상은 381년 제1차 콘스 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단죄받았다. (⇦ 라스 샤므라 ; → 언어 ; 우가리트 문서) ※ 참고문헌 《EJ》 15, pp. 1501~1508/ M. Yon · P. Bordreuil, 《ABD》 6, pp. 695~721/ 이시호, 《크리스찬이 본 중근동》, 동산출판사, 1994, pp. 423~4281 알라 밀라드, 정태현 역, 《성서 시대의 보물들》, 성바오 로출판사, 1992, pp. 131~149/ Syrie. Memoire et Civilisation, Paris, Flammarion, 1993, pp. 176~191. 〔鄭良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