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나 상타 운동

運動

[영]Una Sancta movement · [독]Una-Sancta-Beweg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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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이후 분열된 그리스도교의 재일치를 위해 독일에서 일어난 교회 일치 운동. [용어와 의미] 우나 상타란 '하나' (una)와 '거룩한' (sancta)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형용사가 결합된 말로써 16세기 이후로 분열된 그리스도인들의 재일치를 위한 노력을 가리키는 일반적 용어이다. "우나 상타 운동" 은 독일에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이후 히틀러(A. Hitler, 1889~1945)의 국가 사회주의 정권 시대(1933~1945) 를 거쳐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1~1965)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 의 성직자, 평신도, 신학자가 교회 분열을 극복하여 "니 체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담겨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 요 '거룩한' 교회를 회복하려는 원의(願意)를 구현하기 위해 함께 기도하고 교리를 토론하는 모임을 조직하거나 교회 일치 문제를 다루는 연구소를 설립하면서 친교를 증진하였던 교회 일치 운동을 지칭하는 고유 용어이다. [종교적 배경] 독일에서 교회 일치를 위한 우나 상타 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던 이유는 종교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독일의 종교 상황은 서로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이 우호 관계를 수립하기에 유리하였다. 무엇보다도,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는 두 가지 종교적 동질성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독일에는 프로테스탄트가 많은 파로 분열되어 있지 않았다. 칼뱅파 교회들이 있었지만, 루터교 전통이 독일 프로테스탄트를 주도하고 있었다. 여기서 루터교의 단일성과 가톨릭 교회의 단일 성이라는 종교적 동질성이 일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종교적 동질성은 두 교파 간의 우호 관계를 쉽게 이룰 수 있게 하였다. 단일 교회인 가톨릭 교회는 단일한 프로테 스탄트 루터교를 이해하기 수월하였고, 다른 많은 프로테스탄트 교회들보다도 확고하고 안정된 루터교와의 접 근 가능성이 더 많았다. 둘째,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는 전통 교리를 중요시하였다. 루터교는 <협화 신조>(Konkordienformel, 1577)와 같은 신앙 고백서들이 담고 있는 교리에 기원을 두고 있었다. 19세기 이후 독일 프로테스 탄트는 전통 교리를 위협하던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나 이를 루터교는 거부하고 전통 교리를 수호하였다. 가톨릭 교회 역시 중요하게 여기는 확고한 전통 교리 를 바탕으로 성사적 체험과 생활한 신앙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루터교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가 단일성을 지니고 전통 교리를 간직하고 있는 종교적 동질성은 두 교회가 우호 관계를 증진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하였다. 20세기 독일에서 교회 일치 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특수한 환경 때문이었다. 첫째는 정치적 환경이었다. 일반적으로 서구 국가들에서 가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파의 신자들은 서로 이웃해 살면서도 서로 무관심하고 접촉을 피하며 더욱이 서로 종교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국가 사회 주의의 영향으로 가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파의 신 자들이 서로의 존재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히틀러 정권은 가톨릭 교회를 교묘하게 박해하고 있었고, 1933년 나치 정권의 지도자들은 프로테스탄트 교회 안에 '제국 의 주교' 를 내세워 새로운 독일 교회를 세우려고 시도하 였다. 이처럼 두 교회의 박해 체험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들을 박해하던 히틀러 독재 정권에 대항하여 함께 투쟁 하면서 서로 가까워지도록 만들었다. 둘째는 학문적 환 경이었다. 서구의 대부분 대학교들은 신학과 일반 학문 들을 구분하고 있었으나, 독일의 중요 대학교들은 대부 분 하나의 신학부 또는 가톨릭 신학부와 프로테스탄트 신학부를 함께 갖추고 있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는 프로테스탄트 신학부가 있었고, 뮌헨 대학교는 가톨릭 신학부가 있었다. 그런데, 튀빙겐 대학교에는 가톨릭 신학부와 프로테스탄트 신학부가 함께 있었다. 이러한 대학교 분위기는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의 교수들과 학생들 이 서로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였고, 서로 마음을 열고 학술 회의를 통해서 신학적 교류를 갖기에 유리한 분위기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독일 가톨릭 교회 안에는 프로테스탄트 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새롭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던 신자들이 있었다. 첫째, 일부 가톨릭 성직자들은 프로테스탄트 교 회 일치 운동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였다. 메츠거(M.J. Metzger, 1887~1944) , 호프만(H.Hofiman, 1878~1973), 프리 빌라(M.F.A. Pribilla, 1847~1956) 등의 성직자들은 교회 당국의 허가를 받고 개인 자격으로 '신앙 직제(Faith & Order) 운동' 의 스위스 로잔 세계 대회(1927)와 '세계 교 회 협의회' (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암스테르담 총회 (1948)에 참석하였다. 이로써 독일에서는 그리스도인 모 임에 호감을 갖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둘째, 독일 가톨릭 교회사가들은 역사적 비판 방법론으로 프로테스탄트를 연구하면서 편견에서 벗어났다. 1939년에 로르 츠(J. Lortz, 1887~1975)는 《독일의 종교 개혁》(Die Reformation in Deutschland)을 저술하여 루터(M. Luther, 1483~ 1546)와 그의 종교 개혁에 대해 가톨릭 교회가 전통적으 로 지니고 있었던 부정적 해석을 수정하였다. 아울러 헤 르테(A. Herte, 1887~1970)는 《코클라이우스의 루터 주해 에서 단죄된 가톨릭 루터상》(Das Katholische Lutherbild im Bann der Luther-kommentare des Cochlaeus)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가톨릭 교회의 부정적 루터관은 코클라 이우스(J. Cochlaeus, 1479~1552)가 투쟁 정신에서 저술한 《마르틴 루터의 활동과 저서에 대한 주해》(Commentaria de actis et scriptis Martini Lutheri, 1549)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참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가톨릭의 연구들은 루터파들이 가톨릭 교회를 가까이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활 동] 1917년에 메츠거 신부는 그리스도인들의 친목 단체로 백십자가 세계 연맹' (Weltifriendsbund vom Weissen Kreuz)을 조직하였고, 1929년에 '백십자가 그리스 도왕회' (Chritkonigsgesellschsft vom Weissen Kreuz)로 명칭 을 바꾸었다. 1928년에 그는 마이팅겐에 교회 일치를 위한 기도 모임인 '우나 상타 형제회' (Bruderschaft-UnaSancta)를 설립하였다. 이 회는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모임이며, 어떠한 의무도 지우지 않았다. 회원들은 서로의 종교를 문제 삼지 않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평화와 사랑과 신앙 안의 일치를 위해서, 교파를 초월하여 공통 기도인 '주님의 기도' 와 '그리스도의 일치 기도' (요한 17, 9-26)를 바치면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오해와 편견을 씻어 내고 형제적 사랑의 심화를 위해 노력 하였다. 이 모임을 1929년에 하일러(F. Heiler, 1892~ 1967)를 중심으로 한 베를린 루터교 목사들이 조직한 독일 '고교회 연맹' (Hochkirchliche Vereinigung)이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이 '고교회 운동' 은 가시적 교회와 교회의 권위를 강조하고 감독의 직무를 강화하며, 성사 와 전례를 높게 평가하고 '교파간 평화주의' (Irenicism)의 정신 안에서 교리 문제들을 토론하자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렇게 루터교 안에서 제시되는 가톨릭적 견해는 루터교 신자들이 가톨릭 교회 신자들과 더욱 가까이 접촉하고 유익한 토론을 하도록 이끌었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 신자들은 두 차례(1939, 1940)에 걸쳐 전국 대회를 조직하였다. 1938년에 메츠거 신부는 '우나-상타 협회' (Una-Sancta-Gessellschaft)를 설립하고, 소식지로 <우나 상타>(Una Sancta)를 창간하였다. 그러나 메츠거 신부는 1939년 이 후로 히틀러 정권에 대항하다가 몇 차례 투옥되었다. 1939년 가을 옥중에서 그는 교황 비오 12세(1939~1958) 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그는, 오늘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알리시는 시대의 징표는 그리스도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고 세상에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말 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동안 갈라진 그리스도인들과 갖 고 있었던 긴밀한 관계를 보고하고 나서, 갈라진 그리스 도인들이 가톨릭 교회에 접근하는 데 지장이 되는 것은 교리 차이가 아니라 영적 자세라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교회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겸손과 사랑과 같은 영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마지막으로 메츠거는 교황에게 그리스도교의 분열을 끝내기 위해서 일치 공의회의 소집을 제의하였다. 그는 공의회가 가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에게 신뢰를 주는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1944년 4 월 17일 메츠거 신부는 반역죄로 처형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우나 상타 운동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우나 상타 운동은 라로스(M.Laros, 1882~1965) 신부의 지도 로 이어졌다. 그는 마이팅겐에 교회 일치 노력을 조정하는 기구를 조직하였고, 《그리스도교의 창조적인 화목》 (Schöpferischer Friede der Konfessionen, 1950)을 출판하여 교회 일치 운동에 대한 원칙을 상세하게 제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의 성직자, 신학자, 평신도들은 여러 곳에서 우나 상타 운동을 조직 하여 합동 기도와 토론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제 우나 상타 운동은 단순히 기도하는 친목 단체에서 연구 · 활동 하는 단체로 발전하였다. 1946년 파더보른(Paderborn) 교구의 대주교인 예거(L. Jaeger, 1892~1975)는 루터교 올 덴부르크(Oldenburg)의 감독 스탈린(W. Stählin, 1883~ 1975)과 함께 "복음 교회-가톨릭 교회 일치 운동 협회" (Evangelisch und Katholischer Oekumenischer Arbeitkreis)를 창 설하여, 두 교회의 신학자들이 공통 교리와 상이한 교리를 토론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니더알타이히(Niederaltaich) 베네딕도 수도원의 원장 호이펠더(E.M. Heufelder, 1898~1982)는 수도원을 교회 일치 연구의 장소로 내주어 매년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의 신학자들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하였다. 1950년에 이 수도원의 수사 신부 사르 토리(T. Sartory, 1925~1982)는 1964년에 예거 대주교가 책임을 맡을 때까지 라로스를 이어 우나 상타 운동을 이끌었다. 이로써 니더알타이히 수도원은 우나 상타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르토리는 <교회 일치 운동과 교 회의 단일성》(Die Oekumenische Bewegung und die Einheit der Kirche, 1955)을 저술하여 라로스의 교회 일치 원칙을 구현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교황청의 입장과 견해] 우나 상타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교황청은 가톨릭 교회가 프로테스탄트 교회 신자들과 함께 모임을 갖는 데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였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생활 실천(Life & work) 운동' 과 '신 앙 직제 운동' 이 국제적 모임을 조직하는 동안, 교황 비오 11세(1922~1939)는 회칙 <모르탈리움 아니모스〉(Mortalium animos, 1928. 1.6)를 반포하였다. 이 회칙에서 교황 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일치 운동을 종교적 무차별주의로 비판하였다(2항). 그리고, 그리스도인 일치를 촉진한다는 명목으로 전개하는 모임이나 운동이 신앙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으나(4항) 가톨릭 교회 신자들은 현혹되지 말고(3항) 신앙 교리성의 허가 없이는 가톨릭 교회 신자가 아닌 사람이나 단체가 전개하는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한 집회에 참석하거나 운동에 참가하지 말도록 금지하였다(7항, 10항). 이어서 교황청은 프로테스탄트 '세계 교회 협의회' 가 창립되기 바로 전에 신앙 교리성 의 권고문 <쿰 콤페르툼>(Cum compertum, 1948. 6. 5)을 통 해서 교황청의 허가 없이 가톨릭 교회 신자들은 교회 일치를 위한 기도 모임이나 토론에 참여할 수 없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1949년 신앙 교리성이 발표한 교회 일치에 관 한 훈령 <에클레시아 가톨리카>(Ecclesia Catholica, 1949. 12. 20)는 교회 일치 운동을 성령의 이끄심 아래에서 추진되는 운동으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지역 교회의 주교들에게 교회 일치 모임과 대화를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알리는 기회로 여겨야 할 것임을 일깨우면서, 가톨릭 신자들이 국제적 일치 모임의 참여를 허가하는 권한을 3년 기한부로 부여하였다. 그러나 훈령은 주교들에게 일치 운동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서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치 운동을 지혜롭게 지도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는 지역 교회 주교들이 일치 운동에 있어서 그리스도인 들을 분열시키는 교리 논쟁은 피하고 그리스도인들 사이 의 화해와 평화를 증진하려는 목적에서 프로테스탄트에서 내세우는 비교 방법론' 을 이용하도록 촉구한 것이 다. 그리고 가톨릭 교리를 이단과 조화시키려는 '교파 간 평화주의' 는 가톨릭 전통 교리의 순수성을 위태롭게 하고, 가톨릭 교리의 명백하고 참된 의미를 애매하게 만 드는 위험이 있음을 유의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교황 비오 12세(1939~1958)는 회칙 <후마니 제네리스>(Humani generis, 1950. 8. 12)를 반포하여 우나 상타 운동 안에서 표현되고 있는 "지혜롭지 못한 종교 평화주의"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법과 원칙을 바탕으로 하는 교리를 그리스도인들의 재일치에 걸림돌로 여기는(15항) 태도는 심각한 위협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모든 진리가 교회 안에서 발견된다면 이설과 오류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교회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거짓 교파 간 평화주의"의 유혹에 가톨릭 신자들이 빠질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였다(73항). [변모와 발전] 교황의 회칙과 신앙 교리성의 훈령 이후 우나 상타 운동은 자발적 모임에서 교계의 지도 아래 적극적으로 운영되는 체제로 전환되었고, 교회 일치 문 제를 다루는 연구소들이 여러 곳에서 설립되었다. 1957 년 1월 18일에 예거 대주교는 파더보른에 교파-종파 연구소' (Institut für Konfessions und Diasporakunde)를 창립했는데, 1966년에 '요한 아담 될러 연구소' (Johann Adam Möhler Institut für Ökumenik)로 명칭이 바뀌어 가톨릭 관점 에서 교회 일치와 프로테스탄트를 연구하도록 하였다. 1957년에 연구소는 1932년 그로쉐(R. Grosche, 1888~ 1967)가 교회 일치 문제를 다루는 전문 신학 잡지로 창간한 《가톨리카》(Catholica)의 간행을 맡았다. 1962년에는 니더알타이히 베네딕도 수도원에도 '교회 일치 연구소' 가 설립되어 소식지 《우나 상타》를 가톨릭 신자들과 루 터교인들의 신학 대화를 다루는 잡지로 바꾸어 간행하였 다. 이러한 연구소들에서 다듬어진 독일 가톨릭의 일치 신학은 오랜 시간 동안 나눈 루터교 신학과의 끈질긴 대 화의 결실이었다. [평가와 의의] 우나 상타 운동에서 비롯된 독일의 가 톨릭 교회 일치 운동은 프로테스탄트 교회 신자들과 피 상적이거나 일시적 우호 관계를 수립한 것이 아니라 연구와 기도 속에서 공통된 견해를 이끌어낸 방대한 활동 이었다. 독일 연구소에서 정립한 가톨릭 교회 일치 신학 은 네덜란드 가톨릭 교회 일치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1952년에 교회 일치 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던 가톨릭 신학자들의 모임인 '교회 일치 문제 국제 협의회' (Conférence Catholique pour les questions oecumeniques)를 창립한 빌레브란츠(J. Willebrands, 1909~ ) 신부는 독일의 교회 일치 신학을 네덜란드 환경에 맞게 구현하여 교회 일치 운동을 전개하였다. 아울러 예거 대주교는 빌레브란츠 신부처럼 베아 추기경(Augustin Cardinal Bea, 1881~1968)을 도와 1960년 6월 5일 '교황청 그리스도인 일치 촉진 사 무국' 이 설립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러한 사무 국이 교황청 공식 기구로 설립되었다는 사실이 가톨릭 교회가 교회 일치 운동에 있어서 새롭게 헌신하는 계기 가 되었다면, 우나 상타 운동은 현대 가톨릭 교회 일치 운동에 적지 않게 공헌하였다고 평가될 수 있다. 1- 교 회 일치 운동 ; 루터교 ; 의화론, 교의사에서의) ※ 참고문헌  《AAS) Annus XX -Vol. XX, 1928/ 《AAS) Annus et Vol. XXXII , 1950/ N.P. Tanner ed., Decree ofthe Ecumenical Councils, 2 vols, Georgetown, Sheed & Ward Limited, Georgetown Univ. Press, 1990/ N. Lossky et al. eds., Dictionary ofthe Ecumenical Movement, Geneva, WCC Publications, London : Council of Churches for Britain and Ireland, Grand Rapids, Mich.,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1/E. Fahlbusch et al. eds., Evangelisches Kirchenlexikon, Bd. 4,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96/ W. Kasper et al. eds., 《LThK》 10/ L.J. Rogier · R. Aube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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