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바노 Urba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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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뤼니 수도원을 방문한 교황 우르바노 2세.
① 우르바노 1세(?~230) : 교황(222~230). 성인. 순교자. 축일은 5월 25일. [생 애]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Eusebius Caesariensis, 260/265?~339)의 글에 교황 우르바노 1세가 언급되어 있다. 그의 출생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폰시아노(Pontianus)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에 매우 우호적인 황제가 지배하는 동 안 교황직에 있었기 때문에 전혀 탄압을 받지 않았다. 교황에 대한 자료가 너무 없기 때문에 자세한 활동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에우세비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222년 갈리스도 1 세 교황(217~222)이 세상을 떠난 뒤 교황으로 선출되어 8년 동안 재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리베리오 교황표' (Catalogus Liberianus)에 따르면 223년에 교황에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대립 교황인 히폴리토(Hippolytus, 217~235)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야기된 교회 내적인 혼란이 지속되었다. 히폴리토 는 그의 전임자인 갈리스도 1세를 매우 강하게 비판하였었다. 반면, 교황 우르바노 1세는 교황 갈리스도 1세처 럼 히폴리토와 그의 추종자들을 적대적으로 대하였다. 당시 로마 황제인 세베루스 알렉산데르(222~235)는 절충 주의 노선을 취하고 있었고,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활동 도 허용하였다. 또한 황제의 어머니인 맘매아(Julia Mammaea)는 오리제네스(Origenes, 185~253)와 친분을 맺고 있었다. 그로 인해 교황의 재임 당시에는 황제와 황제 어머니의 관용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롭게 종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법적으로 이들의 지위가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황제는 개인적으로 부동산에 관련된 소송에 그리스도인들이 관여될 경우 이들을 변호하였다. 예를 들어 어떤 대지를 놓고 여관을 지으려는 상인과 교회를 지으려는 그리스도인 사이에 분쟁이 야기되었을 경우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의 편을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 다. 하느님을 섬기는 건물이 들어서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었다. 3세기 전반기의 평화로운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이집트 · 시리아 · 북아프 리카, 그리고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서 그리스도인의 증가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로마의 지하 묘지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로써 그리스도인의 수가 많아 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크게 기여한 것이 교황 우 르바노 1세인 것으로 보인다. 《성녀 체칠리아 행전》(Act of St. Caecilia)에 따르면, 체칠리아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시동생에게 교황이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또한, 교황은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전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 전설이 성립한 것은 9세기 이후이기 때문이다. 또한 은으로 된 성작의 제작에 교황이 관여했다는 주장 역시 신빙성이 없다. [죽음과 묘지] 교황 우르바노 1세가 어떻게 죽었는지 에 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 동안에는 그리스도교가 박해를 받지 않은 점을 비추어 볼 때 순교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로마 순교록》(Matyrologium Romanum)에서는 교황이 로마의 노멘타나가(Via Nomentana)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권 고와 가르침으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의 박해로 하느님의 교회를 위해 많은 고통을 겪었고, 교황은 목이 잘려 순교했다고 전한다. 이에 근거해 교회는 교황 우르바노 1세를 순교자로 공경하고 있다. 《성녀 체칠리아 행전》과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에 따르면, 교황 우르바노 1세는 성 프레텍스타토 (St. Praetextatus) 성당의 지하에 묻힌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많은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데 이 때문에 교황 우르바노 1세도 순교한 것으로 사람들이 믿었다. 그런데 롯시(G.B. de Rossi, 1822~1894)가 성 갈리스도의 카타콤바를 발굴하던 중 뚜껑에 그리스어로 "오우로바노체" (OYPBANOC)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 관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교황 식스토 3세(432~440)가 작성한 성 갈리스도의 카타콤바에 묻힌 순교자들의 명단 중에도 우르 바노가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롯시는 교황 우르바노 1세가 성 갈리스도의 카타콤바에 묻힌 것이고 성 프레텍스타토 성당의 지하 묘지에 묻힌 또 다른 우르바노는 로마의 주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증거로 보아 성 프레텍스타토 성당의 지하 묘지에 묻힌 사람이 교황 우르바노 1세인 것으로 학자들은 생각하고 있다. 우선 성 갈리스도의 카타콤 바의 관에 새겨진 글은 후대에 새겨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또한 교황 식스토 3세가 작성한 명단에 우르바노는 교황이 아니라 다른 주교 중의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또한 근거가 매우 빈약한 주장이다. 성 갈리스도의 카타콤바에 묻혀 있다는 주장의 근거는 주로 치프리아노(?~258)와 에우세비오가 우르바노라는 이름을 언급한 문서에 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우르 바노는 교황 우르바노 1세가 아니라 같은 이름의 다른 사람이다. 독일에서는 교황 우르바노 1세가 포도 농사의 수호 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교황의 축일인 5월 25일 경에 포도 꽃이 처음 피기 때문이다. ※ 참고문헌 2000 Jahre Christentum, Karl Miiller Verlag, 1989/ J.P. Kirsch,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XV Kevin Knight, 1999/ R. Kottje, Ökumenische Kirchengeschichte, Bd. 1, Matthias-GrünewaldVerlag, 1993/ E. Pulsfort, Biographisch-Bibliographisches Kirchenlexikon, Bd. XII 1997/ E.G. Weltin, 《NCE》 14, p. 4771 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Popes, Oxford Univ. Press, 1996, p. 15. [李種凡] ② 우르바노 2세(1035~1099) : 복자. 교황(1088~ 1099).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1085)가 시작한 개혁을 진전시키고 십자군을 일으켰으며, 교황청을 정치적으로 강화했다. 본명은 외드 드 샤티용쉬르마른(Eudes de Châtillon-sur-Mame) [초기 생애] 그는 1035년경 상파뉴(Champangne) 지역 샤티용쉬르마른(Châtillon-sur-Mame)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랭스(Reims)의 주교좌 성당 학교에서 성 브루노 (St. Bruno, 1032?~1101)로부터 신학을 배웠으며, 이곳에서 1055년경부터 대부제로 일하였다. 1070년경 클뤼니 수도원에 입회하여 성 위고(St. Hugo)의 지도하에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 후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요청으로 수사들이 파견되었는데, 이들 중 한 명에 속하였다. 로마에 서 그는 그레고리오 7세의 교회 개혁 사업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는 1078년 오스티아(Ostia)의 주교 추기경이 되었고,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수석 보좌관이 되었다. 또한 1082~1085년에는 프랑스와 독일에 교황 특사로 파견되었다. 그러던 중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1084~1105/106)에 의해 체포되었다. 하지만 작센 (Sachsen)에 머물던 1083~1085년 동안 교황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동조자들에게 성직을 맡겼다. 또한 크베 들린부르크(Quedlinburg)에서 시노드를 개최하여 하인리히 4세에 의해 선출된 대립 교황인 글레멘스 3세(1080~ 1100)와 추종자들을 모두 단죄하였다. 글레멘스 3세는 1084년 로마에서 다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에 개혁파 추기경들은 그로부터 로마의 통치권을 되찾으려 하였 으나 실패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서거하자 빅토 르 3세(1086~1087)가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약 1 년 만에 사망하였다. 그 후 정치적 혼란으로 교황이 선출 되지 못하고 약 1년 반이란 시간이 흘렀다. 결국 1088 년 3월 12일 로마 남부의 테라치나(Terracina)에 모인 추기경들은 오스티아의 추기경인 외드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교황으로서의 활동] 교황에 즉위한 그는 교황 그레고 리오 7세의 노선을 계속 따를 것을 선언하고, 이 노선에 동조해 온 귀족들과의 유대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보다는 더 온건하며 자신의 단독 결정보다는 공의회를 통한 의견 수렴을 더 선호하였다. 그 리고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사목적이고 활동적인 일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사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선종 하자 세속 군주의 성직 서임을 반대하던 세력이 많이 약 화되어 있었다. 교황 우르바노 2세가 근본적으로 개혁 성향의 클뤼니 수도원 출신이기에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노선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강한 반대 세력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보다 온건하고 타협적인 노선을 취하였다. 대립 교황과 하인리히 4세와의 관계 : 교황이 된 우르바노 2세가 로마에 입성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1089년 가을 70명의 주교들이 멜피(Melfi)에 모여 시노드를 개최하였다. 여기에서는 성직 매매와 성직자 혼인을 반대 하는 선언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이때 교황은 시칠리아 왕국의 분열을 화해로 바꿀 수 있었다. 이 덕분에 교황은 이들의 후원을 약속받을 수 있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1090년 교황은 로마에 입성하였으나 로마의 상황이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사실상 로마는 여전히 대립 교황인 글레멘스 3세의 수중에 있었으며, 하인리히 4세의 군력은 여전히 막강하였다. 독일에서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교황과 앙숙 관계인 하인리히 4세 황제의 세력은 점점 더 확대되었으며, 교황 지지자들은 세력이 약화되었다. 또한, 하인리히 4세 황제가 북부 이탈리아의 실권을 장 악하자 대립 교황이 로마의 베드로 대성전을 차지하고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로마 밖으로 쫓겨나서 문서로 글레 멘스 3세를 단죄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3년 간 교 황은 이탈리아 남부 지역을 방황하며 망명 생활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교황은 회의를 소집하고 교회 규정을 개선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한편 하인리히 4세 황제가 이전에 교황 그레고리오 7 세로부터 굴욕을 당한 적이 있는 북부 이탈리아의 카노 사에서 벌인 전투에서 변경백(邊境(白)인 마틸다의 군대 에 패배하자 황제의 아들인 콘라트(Konrad, 1074~1101)가 마틸다측에 투항하였다. 그는 교황파에 가담해 1093년 에 밀라노의 대주교에 의해 밀라노에서 이탈리아의 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 결과로 교황이 로마에 입성하기에는 여전히 대립 교황의 세력이 컸다. 그래서 교황에게 매우 호의적인 가문의 도움을 받아 프란지파니(Fangipani)의 성에서 머물렀다. 당시 교황은 경제적으로 곤궁하여 매 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프랑스의 수도원 장인 뱅돔의 그레고리오(Gregory of Vendome)가 교황을 찾아왔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후에 교황은 그레고리오 를 성 프리스카 성당의 부제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1094년 글레멘스 3세와 그의 추종 세력들이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상당 액수의 돈을 받고 베드로 대성전을 떠났는데, 이 돈은 그레고리오가 수도원의 재산을 팔아 마련해 준 것이었다. 이리하여 우르바노 2세는 1094년 부활 대축일에 맞추어 라테란 대성전에 들어갈 수 있었 다. 이것은 교황의 지위에 오른지 6년 만의 일이었다. 십자군 운동 : 1095년 이탈리아 피아첸차에서 개최된 시노드는 대립 교황인 글레멘스 3세에게 내린 파문이 정당함을 확인했다. 교황은 그 해 11월 클레르몽(Clermont) 의 노트르담 두 포르(Notre-Dame du Port) 성당 에서 십자군 전쟁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시노드를 개최하였다. 이 시노드에는 13 명의 대주교와 225명의 주교 그리고 90여 명의 수도원장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는 우선 확인된 것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성직 매 매 금지, 성직자 독신제, 성직 서임권, 세속 정치권자에 대한 충성 서약 금지, 그리고 간통죄 단죄에 대한 칙령을 재확인하였다. 그리 고 재혼한 프랑스의 필리프 1세(1060~1108) 를 간통죄로 파문하였다. 또한, 이 시노드에서 "신의 휴전" (Treuga Dei)을 처음으로 선언하였다. 이 회의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십자군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기 시작하였고, 교황은 클 레르몽에서 커다란 환영을 받았다. 그 결과 이 시노드에는 수천 명의 귀족과 기사들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는 예루살렘과 아시아 교회들을 사라센 제국의 침략으 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교황은 이 전쟁에 참여하는 모든 자에게 전대사를 허락하였으며, 모든 병사의 오른쪽 어깨 에 하얀 십자가를 달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뜨 거웠고 교황은 탁월한 언변으로 그들의 마음을 더욱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교황이 직접 십자군을 이 끌 것을 바랐다. 그러나 교황은 자신을 대신하여 르퓌 (Le Puy)의 아데마르(Adhémar) 주교를 대리인으로 임명 하였다. 그리고 교황은 프랑스의 각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십자군 전쟁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또한 전 유럽 의 주교들에게 편지를 보내 십자군 전쟁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1096년 3월 교황은 투르(Tous)에서 시노드를 개최하고 프랑스 왕인 필리프 1세의 파문을 재확인 하였다. 하지만 그 해 7월에 복권되었으나 1097년에 재파문되었다. 교회의 개혁 : 십자군 규합에 성공한 우르바노 2세는 그 사이 다시 글레멘스 3세가 차지하고 있었던 로마에 당당히 입성하였다. 이리하여 교황 우르바노 2세가 교황권 싸움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결국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는 교황과 연대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마틸다와 콘라트가 지배하고, 하인리히 4세 황제는 이탈리 아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그러나 교황은 여기에서 멈추 지 않고 노르만족의 도움을 얻어 이탈리아 남부에서도 세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당시 시칠리아 지역은 사라센 제국의 세력 아래 놓여 있었다. 1098년 10월 교황은 동방과 서방 교회 분열의 원인이 었던 "필리오궤" (filioque)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바리(Bar)에서 시노드를 개최하였다. 여기에는 180명의 주교가 참석하였다. 그중에는 캔터베리의 안셀모(Anselmus Cantuariensis, 1033~1109)도 있었다. 1099년 4월 교황은 로마 에서 마지막 시노드를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교황은 다시 한번 십자군 전쟁을 역설하고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 냈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교회의 개혁 입법이 통과되었다. 교황은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2주일 전인 1099년 7월 29일 피에르레오네(Pierleone)에 있는 자신의 후견인의 저택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대립 교황의 동조자들의 방해로 라테란 대성전에 묻히지 못했으며, 베드로 대성전 지하의 교황 하드리아노 1세 옆에 안장되었다.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삶은 파란만장하였고, 그로 인해 그에 관한 여러 가지 전설을 낳았다. 그러나 시복식은 사후 800여 년이 지난 1878년 7월 14일 교황 레오 13세(1878~1903)에 의해 거행되었다. [평 가] 교황 우르바노 2세의 교회를 위한 업적은 매우 많다. 동방 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교황청의 인원과 조직의 확대 정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교황청" (Curia Romana)이라는 용어는 1089년 교황이 작성한 칙서에 처음 등장하였고, 이후 고유 명사가 되었다. 그리고 클뤼니 수도원에서 배운 것 을 활용하여 재정 담당관을 정하여 자금 관리도 합리적으로 개선하였다. 그리고 역사상 처음으로 추기경들도 교회의 지도적 업무에 참여하도록 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교회 개혁 뿐 아니라 사회 개혁에 앞장선 교황으로서 매우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 결과로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교회는 중앙 집권화되었으며, 교황 관할 지 역도 넓어졌다. 비록 성직 서임권 문제에 대해서는 만족 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교회의 역사상 매우 뛰 어난 업적을 남긴 교황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 그레고리오 개혁 ; 성직 서임권 논쟁 ; 십자군) ※ 참고문헌 R.U. Butler,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15, Kevin Knight, 1999/ R. Kottje, Ökumenische Kirchengeschichte, Bd. 2, MatthiasGriinewald-Verlag, 1993/ G. Kreuzer, Biographisch-Bobliographische Kirchenlexikon, Bd. 15, 1999/ M.W. Baldwin, 《NCE》 14, pp. 477~478/ É. Amann, 《DTC》 15, pp. 2269~2285/ 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niv. Press, 1996, pp. 158~160. [李種凡] ③ 우르바노 4세(1200?~1264) : 교황(1261~1264) . 본명은 자크 판탈레옹(Jacques Pantaléon). [초기 생애] 1200년경 프랑스 상파뉴의 트루아(Troyes)에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파리에서 신학과 교회법을 공부하였다. 라옹(Laon)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1245년경 참사위원이 되었으며, 리에주(Liège) 의 대부제가 되었다. 1245년 제1차 리용 공의회에 참석 하였는데, 이때 교황 인노첸시오 4세(1243~1254)의 주목을 받았다. 1247년부터 그는 교황의 특사로 폴란드 · 프 로이센 · 포메른(Pommern) 등을 순회하였다. 이때에 구금당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추진한 것은 폴란드 남서부의 슐레지엔(Schlesien) 지역 교회를 재정비하고, 독일 기사 수도회 출신 기사들과 프로이센 출신의 제후들 사이의 화해를 도모하는 일이었다. 중재의 재능을 지닌 그는 교황이 된 후에도 귀족들의 화 해와 중재와 매우 적극적으로 나서곤 하였다. 1252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의해 베르됭(Verdun)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 교구는 당시에 커다란 빚 때문에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그가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여 짧은 시간 내에 이 문제를 해결 하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뒤를 이은 교황 알렉산 데르 4세(1254~1261)는 1255년에 그를 예루살렘의 총주교로 임명하였다. 이후 그는 제노바와 베네치아 간의 분 쟁을 중재하는 데에도 능력을 발휘하였다. 또한 성전 기 사 수도회(Ordo Templariorum)와 요한 기사 수도회(Ordo Hospitalariorum S. Joannes Baptistae)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선 종한 후 1261년 8명의 추기경들이 서로 이해 관계가 얽 혀 3달 동안 논쟁을 벌인 끝에, 마침내 7명의 추기경이 모인 가운데 비테르보(Viterbo)에서 만장일치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교황으로서의 활동] 선임 교황인 알렉산데르 4세는 독일 황제와 친족들과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해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선종할 때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후임자인 우르바노 4세도 계속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문제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교황청의 봉토인 시칠리아 왕국을 호엔슈타우펜(Hohenstaufen) 가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 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황 알렉 산데르 4세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상실한 이탈리아 내에서 교황의 권위를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안전한 비테르보와 오르비에토(Orvieto)에 머물렀다. 로마는 교황이 머물기에는 너무나 위험하였기 때문 이다. 그는 교황에 즉위한 후 위험에 처한 동로마 제국을 도울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카 엘 8세(1261~1282)는 교황에게 일치를 위한 회담을 제의하였다. 황제는 교황의 사법적 수위권을 인정하였고, 니체아 공의회의 신앙을 고백하였으며, 성사가 7개라는 것 도 인정하였다. 그리고 공의회를 소집하여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다른 문제도 논의하자는 구상도 밝혔다. 그 래서 일치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교황의 서거로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또한 교황은 당시 시칠리아 왕국을 장악하고 있던 프리드리히 2세 황제의 아들인 만프레디(Manfredi) 왕을 물리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치와의 관계 : 교황 우르바노 4세는 교황이 된 후 1 년도 못 되어 14명의 추기경을 임명하였다. 그중 7명은 프랑스인이었다. 또한, 그중의 한 명은 자신의 조카였다. 그 외 6명도 자신을 교황으로 선출한 추기경들의 친척이 나 후손들이었다. 이 추기경들 중에는 후일의 교황 글레 멘스 4세(1265-1268), 교황 마르티노 4세(1281~1285) 그 리고 호노리오 4세(1285~1287)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교황 우르바노 4세의 과업을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사실 프랑스인들을 중 용한 이유는 이들이 시칠리아를 공격하여 만프레디 왕을 물리쳐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교황은 시칠리아를 되찾게 되면 루이 9세(1226~1270) 왕의 막내 동생인 앙주 의 샤를 백작을 왕으로 앉힐 계획을 이미 수립했었다. 처음에 루이 9세뿐만 아니라 샤를 백작도 이러한 계획에 반대했지만, 교황의 끈질긴 설득과 협상에 마지못해 승낙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샤를 백작은 만프레디 왕과 맞서 싸우게 되고 이 와중에 호엔슈타우펜가의 마지막 계승자이며 만프레디의 조카인 콘라딘(Conradin)을 나폴리에서 처형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것은 교황의 정치적 탁월성을 보여 주는 극명한 예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만 프레디 왕과 그의 연합군에게 쫓긴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샤를 백작과의 계약을 체결하자마자 페루자(Perugia)로 도피하였다. 사실 만프레디 왕은 정치력은 탁월했으나 강한 전사는 아니었다. 오히려 협상과 타협을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몽타페르티(Montaperti) 전투에서 커다란 성과를 올렸으나 교황 우르바노 4세의 책략에 말려들어 샤를 백작과 지루한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교황을 공격하지 않았다.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교황은 교황권의 회복 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호엔슈타우펜가와의 대 립 속에서 그러한 노력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교황이 호엔슈타우펜 가문을 적대시한 것은 교황권을 능 가하려고 한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 Babarossa, 1152~ 1190) 때부터의 오래된 감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칠리 아를 통치하던 만프레디 왕은 사라센 세력을 등에 업고 강력한 독재 정치를 시행하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귀족 중심의 봉건주의와 대립하는 것이었기에 반대할 명분상의 이유로 충분하였다.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세속적인 권력 투쟁에 매우 깊이 관여하였다. 이것은 그의 정치욕 때문이기보다는 타고난 성품과 교육 덕분이었다. 그는 탁월한 교육을 받았고 성격도 매우 적극적이고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 한 의지가 매우 강하고 독선적인 면도 있어서 다른 사람 의 충고를 듣지 않고 일을 추진하곤 하였다. 그리고 무엇 보다도 현실 감각이 매우 뛰어났다. 그래서 교황이 된 후 이탈리아에서 교황권을 회복하기 위한 첫 과업으로 빚으로 얼룩진 교황청의 재정을 정비하였다. 이것은 과거에 베르됭 교구에서 했던 것을 되풀이하는 일이었다. 그리 고 교황권의 회복을 위해 정적을 모든 수단을 동원해 물 리치고 이탈리아에서의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에스테 가 문과의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그래서 1263년 시칠리아 를 제외한 이탈리아 지역에서 교황권을 회복하고 롬바르 디아 지역에서 만프레디 왕의 연합 세력을 약화시켰다. 그러나 교황의 이런 세속 정치에 대한 깊숙한 관여는 신 자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게 불러일으켰다. 교회 내 업적 : 당시는 십자군 운동의 여파로 일반 신자들 사이에 교회를 바라보는 눈이 새롭게 정립되고 있었다. 특히 전쟁을 치르는 동안 생명에 대한 위협을 느낀 사람들이 수호 성인을 정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 리고 이는 더욱 확대되어 십자가 숭배, 성인의 유물과 유 해 숭배 등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파악한 교황은 1264년 8월 11일 성체 성혈 대축일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이 축일의 전례를 작성하도록 토마스 아퀴 나스(1225~1274)에게 위임하였다. 그러나 이를 통해 신 자들의 미신적인 생각이 바뀌지는 않았다. 당시 신자들은 교회의 지나친 청치 참여와 세속화에 반발하고 경건주의와 청빈 운동에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미사 참여를 과거보다는 등한시하고, 질병이 옮아 올 것을 두려워하여 영성체를 꺼리는 등 계몽적인 경향을 보이기까지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252년부터 도입되었던 이단 심문은 오히려 신자들로부터 교회를 더 멀어지게 하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당시 신자들은 이단으로부터 정통 교리의 수호를 위한 교회의 노력보다는 세속화로부터 교회를 구하는 일이 더 급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우르바노 4세를 비롯한 여러 교황들은 당시 신자들의 바람을 정확히 알고 대책을 마련하기보다는 세속의 왕권과 버금가는 관료 체제의 수립과 방만한 조직의 운영에 더 심혈을 기울였다. 이는 분명히 비판을 받아야 할 점이다. [평 가] 교황 우르바노 4세는 1264년 10월 2일 페루 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업적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활발한 외교 활동을 통해 유럽 귀족들 간의 권력 다툼과 십자군 전쟁의 후유증으로 권위의 상실과 재정적 궁핍이라는 어려움 속에서 교황권을 어느 정도 다시 일으켜 세운 점이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2세 황제가 제국의 영주들에게 각자의 영토에 대한 고유 권한을 허용한 후, 유럽에는 정치적 · 정신적인 구심점이 사라져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이 종교뿐 아니라 세속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도 교회 의 세속화를 거의 강요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도 고려 하지 않을 수 없다. (→ 성체와 성혈 대축일 ; 이단 심문) ※ 참고문헌 S. Fleischmann, Daten der Weltgeschichte, Bassermann, 1992/ R. Kottje, Ökumenische Kirchengeschichte, Bd. 2, MatthiasGrünewald-Velag, 1993/ G. Kreuzer, Biographisch-Bibliographisches Kirchenlexikon, Bd. XV , Verlag Traugott Bautz, 1992/ L. von Ranke, Die Päpste, Büchergilde Gunterberg, 1962/ R. Webster,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XV , Kevin Knight, 1999/ 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niv. Press, 1996, pp. 194~196/ H. Schmidinger, 《LThK》 10, pp. 544~545/ H. Wieruszowski, 《NCE》 14, pp. 478~479/É. Amann, 《DTC》 15, pp. 2288~2295. 〔李種凡〕 ④ 우르바노 6세(1318?~1389) : 교황(1378~1389) . 본명은 바르톨로메오 프리냐노(Batoloomeo Prignano). 그 의 교황 선출로 서구 대이교(1378~1417)가 촉발되었다. [생 애]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 전해지는 내용이 적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1318년경 나폴리에서 태어나 교회법을 공부하였다. 나폴리 왕국에 속한 아체 렌차(Acerenza)와 아드리아 해 연안에 있는 바리(Bari)의 대주교로 각각 1363년과 1377년에 임명되었다. 12년 동안 교황청에서 근무하였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1370~1378)가 아비농(Avignon)에서 로마로 돌아온 1376 년 이후에는 교황청 업무를 총괄하였다. 교황 선출 : 그는 추기경이 아니었음에도 교황으로 선 출되었다. 물론 그의 사업적 능력, 성실성, 법률 지식 등도 교황으로 선출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이 크게 작용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가 서거하자 교황 선거가 75년 만에 로마에서 이루어졌다. 16명의 추기경 중 4명은 이탈리아인이었고, 5명은 프랑스인이고 7명은 프랑스 중남부에 있는 리모주 (Limoges) 출신이었다. 리모주 출신인 추기경들은 자신들 중에서 한 명을 교황으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이탈리 아와 프랑스 추기경들이 연합하여 이들의 시도를 저지하였다. 사실 이탈리아나 프랑스 추기경들도 나름대로 후보에 대한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추기경단에 속하지 않은 인물을 교황으로 선출하기로 의견을 모았던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 추기경 중에 강력한 후보였던 로베르 (Robert de Geneva)-그는 대립 교황 글레멘스 7세(1378~ 1394)가 되었다-와 이탈리아 추기경 중의 후보인 페드 로(Pedro de Luna)-후에 대립 교황 베네딕도 13세(1394~ 1417)가 되었다-도 후보에서 물러났다. 이탈리아 사람 이지만 로마 출신은 아니어야 한다는 조건에 바리의 대주교인 바르톨로메오가 적합하였다. 또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추기경들은 그가 추기경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들의 의견을 잘 따르리라고 기대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리 모주 출신인 추기경들도 비록 이탈리아와 프랑스 추기경들의 연합 세력에 불만이 있었지만, 결국 만장 일치로 그의 교황 선출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그가 교황이 된 데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로마 출신인 교황을 간절히 바라던 당시 로마인들의 여론이었 다. 교황 선출을 위해 모인 추기경들은 로마 시민들이 로마인이나 적어도 이탈리아인을 교황으로 선출하지 않을 경우 폭동을 일으킬 기세를 보이자 서둘러 바르톨로메오 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던 것이다. 사실 로마 시민들은 프랑스 출신이 교황으로 선출될 경우 다시 아비뇽으로 돌 아갈까 봐 우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1378년 4월 8일에 개최된 교황 선거장에 일단의 무장병들이 침입하여 로마 인을 교황으로 선출하라고 심한 협박을 하였으며, 선거 당일에도 이러한 협박이 되풀이되었다. 추기경들은 군중 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무사히 빠져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바리의 대주교 가 교황청으로 오는 동안, 추기경들은 군중을 달래기 위 해 로마 출신의 연로한 추기경인 테발데스키(Tebaldeschi)를 교황 선출자로 소개하였다. 그리고 임시 교황 문 장을 만들어 미사를 봉헌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추기경 들의 우유부단한 행위가 후에 교황권을 둘러싼 혼란에 또 하나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바리의 대주교는 우르바노 6세란 이름으로 1379년 4월 9일 착좌식을 거행하였고, 대관식은 4월 18일에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 서 추기경들은 교황에게 충성 선서를 하였다. 사실 우르바노 6세는 "지상에서 하느님의 대리인" (Stellvertreter Gottes auf Erden)이 세속의 정치 권력에 종속되어 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교황권을 강화 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교황으로 선 출된 직후 교회 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교황청 내부 인사 개혁에 먼저 손을 대었다. 하지만 이 조치는 추기경들과 고위 성직자들이 교황에게 등을 돌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래서 교황 즉위 후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점차 교황 선출 절차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서구 대이교 : 교황으로 선출된 3개월 후 프랑스 추기경들은 우르바노 6세의 선출이 강요된 것이기에 무효라 고 선언하고, 1378년 9월 20일 대립 교황으로 글레멘스 7세를 선출하자 문제가 심각해졌다. 글레멘스 7세는 프랑스에 우호적인 교황이 선출되기를 바라던 샤를 5세 (1364~1380)의 도움으로 대립 교황이 되었으며, 그는 자신의 거처를 아비농으로 정하였다. 영국과 아일랜드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글레멘스 7세를 지지하였다. 반면 독일의 대부분, 나폴리를 제외한 이탈리아 그리고 플랑드르 지역의 영주들은 우르바노 6세를 지지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교황 우르바노 6세는 28명의 추기경을 새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그중 4명은 추기경직을 고사하였다. 글레멘스 7세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교황을 로마에서 몰아내려고 시도하였으나 산 마리노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그는 나폴리를 거쳐 아비뇽으로 1379년 6 월 20일에 도피하였다. 그래서 교황은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 의 카를 4세 황제(1355~1378)를 비롯하여 독일, 헝가리, 영국, 포르투갈의 많은 영주들이 교황의 동조 세력이 되 었다. 후에는 슬라브 민족의 영주들도 우르바노 6세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두 교황이 교황청을 별도로 운영함 으로써 이에 필요한 재정을 신자들이 부담하게 되었으며, 이는 갈수록 가중되었다. 교황에 대한 반발 : 우르바노 6세를 괴롭힌 것은 대립 교황만이 아니었다. 나폴리 왕의 세력 또한 매우 힘든 상 대였다. 결국 글레멘스 7세를 지지한 조반나 1세 여왕 (1343~1382)을 파문하고 폐위시킨 후 그녀의 조카인 두 라초의 카를로(Charles de Durazzo, 1381~1386)에게 1381 년 로마에서 왕관을 씌워 주었다. 그러나 교황은 1384 년에 카를로 왕과도 대립하였다. 왜냐하면 카를로가 교 황의 조카인 프란체스코(Francesco Prignano)와의 약속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교황은 이탈리아 남부를 공략하던 중 아베르사(Aversa)에서 포로로 잡혔다. 추기경들의 중 재로 풀려 나 노체라(Nocera)로 갔는데, 여기서 교황은 카를로의 아내로부터 푸대접을 받았다. 우르바노 6세 교황은 정치적 능력이 뛰어나지 못한 교황이었다. 초기에 그에게 동조하던 추기경들조차 그가 정신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그를 추방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무력을 동원하여 이들의 반발을 제압 하였다. 6명의 추기경은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고 5명은 사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이들에 동조한 나폴리의 왕과 왕비를 파문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신자들로 하여금 교황에 대한 염증을 더욱 크게 하였다. 또한 다수의 추기경 들이 대립 교황인 글레멘스 7세에게 동조하도록 만들었다. 한편, 나폴리의 군대와 교황 군대는 1385년 노체라 (Nocera)에서 전투를 하였고, 그로 인해 교황은 제노바로 피신하였다. 그가 로마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교황에 반 항하는 사람들을 단죄하고 성무 집전 금지령을 수 차례 내리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카를로 왕이 1386년 2 월 헝가리에서 암살을 당하자 교황은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하려고 노력하였다. 결국 1387년 8월에 글레멘스 7세에 대한 성전을 선포하였다. 그리고는 페루지아로 진군하였지만, 나폴리에서 대립 교황 군대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많은 돈을 낸 후에야 풀려 날 수 있었고, 1388 년 10월 로마로 다시 돌아왔다. 교황은 1389년 10월 15일 로마에서 선종하였는데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의 유해는 베드로 대성전의 지하에 안장되었다. [평 가] 교황들의 아비농 시기 이후 교회 내에 누적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교황이 필요했으나, 교황 우르바노 6세는 그런 교황은 아니었다. 사실 그는 매우 검소하고 일에 대한 열정이 넘치고 양심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재임 기간이 늘어갈 수록 반대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래서 많은 친척들을 교황청의 관리로 임명하였고, 지속적인 전쟁으로 인한 과도한 지출로 재정 파탄을 야기시켰다. 더구나 그는 화를 잘 내고 독재적이며 독단적이고 고집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추기경들과도 조화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 때문에 추기경들은 그를 정신병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르바노 6세는 교황에 즉위한 직후 밖으로는 세속의 정치 세력으로부터 교회를 철저히 분리시키려고 노력했 다. 그리고 안으로는 매우 단순 소박한 생활을 교회 내에 뿌리내리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사실상 이것은 당시 사치한 삶을 살았던 추기경들을 대상으로 교회 개혁을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가 그의 명을 단축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는 자신이 유일한 합법적인 교 황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은퇴한다는 생각을 못했고, 대립 교황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도 않았 다. 그로 인해 서방 교회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다. 또한 대립 교황과 그의 지지자들에게 파문을 내렸고, 이에 대응하여 대립 교황 역시 교황 우르바노 6세와 지지자들에게 파문을 내렸기에 서방 교회 전체가 파문을 받은 것이 되었다. 두 교황은 자신의 영향력을 확산시키기 위해 주교들을 마구 임명하였고, 교회의 직책들을 남용하였다. 이러한 분열은 수도회 내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의 교황 선출과 직무 수행이 아무런 결함도 없는 정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당시부터 논란거리였고, 오늘날에도 학자들간에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이에 관 해서는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에서나 교황 마르티 노 5세(1417~1431)의 재위 기간 동안에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적법한 절차에 의해 교황이 되었다 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서구 대이교) ※ 참고문헌 A. Frenken, Biographisch-Bibliographishces Kirchenlexikon, Bd. XII Verlag Traugott Bautz, 1997/ W. Mulder,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XV , Kevin Knight, 1999/ R. Kottje, Ökumenische Kirchengeschichte, Bd. 2, Matthias-Grünewald-Verlag, 1993/ 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niv. Press, 1996, pp. 227~228/ G. Mollat, 《NCE》 14, p. 480/ -, 《DTC》 15, pp. 2302~2305. [李種凡] ⑤ 우르바노 8세(1568~1644) : 교황(1623~1644) 본명은 마페오 바르베리니(Maffeo Barberini) . [초기 생애] 1568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매우 유복한 상인 가정에서 안토니오(Antonio Barberini)와 카밀라(Camilla Barbadoro)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3세 때 아버지 가 사망하자 교황청 수석 서기(Protonotary Apostolic)로 일 하던 삼촌 프란체스코(Francesco Barberini)의 보살핌 속에 서 성장했다. 피렌체의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를 한 후 로마로 가서 계속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피사에서 1589 년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592년에 교황 글레멘스 8세(1592~1605)에 의해 파노(Fano) 지방의 지사로 임명 받았으며, 삼촌의 뒤를 이어 교황청의 수석 서기가 되었 다. 1601년에 프랑스 교황 사절로 임명되었으며, 1604 년에는 나자렛 명의 대주교가 되었고, 파리 주재 교황 대 사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프랑스 왕인 앙리 4세 (1589~1610)와 깊은 친분을 쌓았다. 교황 바오로 5세 (1605~1621)는 마페오 대주교를 1606년 9월 11일에 몬토리오(Montono)의 성 베드로 성당 명의의 사제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1608년에 스폴레토(Spoleto) 교구의 교구장이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시노드를 개최하 고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스펠로(Spello)와 비소 (Visso)에도 교구 신학교를 세웠다. 1611년에는 볼로냐 (Bologna)의 교황 사절이 되었으며, 1617년에는 교황청 대심원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5세 (1621~1623)가 1623년 7월 8일에 서거하자 50명의 추 기경들에 의해 8월 6일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가 열병을 앓고 있었기에 착좌식은 9월 29일에 거행되 었다. [교황 재임시의 활동과 업적] 시성과 전례 개혁 : 교황이 된 후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교황 그레고리오 15세가 1622년에 시성한 네리(Filippo Neri, 1515~1595), 이냐 시오(Ignatius de Loyola, 1491~1556) , 사베리오(Franciscus Xaverius, 1506~1552) 등의 시성에 관한 칙령을 반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황 자신도 포르투갈의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of Portugal, 1271~1336)과 안드레아(Andreas Corsinus)를 시성하였다.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시복 되었다. 이러는 가운데 시복 시성식의 권한을 교황청이 독점하도록 규정하고, 1625년 10월 30일 칙령을 반포 하여 교황청에서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을 성인으로 공경 하는 행위를 금지하였다. 이는 1634년에 최종적으로 인준되었다. 또한 검증되지 않은 기적이나 계시에 관한 내 용이 담긴 그림을 무덤 앞에 두는 일도 금하였다. 그리고 1642년에는 주일을 제외한 의무 축일의 숫자를 총 34일 로 축소 · 조정하였다. 또한 교황은 소 성무일도(Breviarium)를 1631년에 개정하였다. 한편 여러 편의 성가를 직접 새로 작곡하였으며, 화려하면서도 형식미를 갖춘 라틴어 시도 지었다. 족벌주의 : 교황으로 재임하면서 그는 특출한 지혜를 가지고 있었고, 외교적 수완도 매우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교황청의 업무도 추기경들의 조언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잘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능력은 독재자라는 비난을 받는 구실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고 추기경 회의는 상징적인 기관으로 남아 실질적인 최종 결정은 내리지 못하게 했다. 교황 우르바노 8세는 친인척을 많이 중용했다. 이 점이 그의 업적 중에서 가장 비난을 받는 부분이다. 그는 교황에 즉위한 지 3일 만에 큰조카인 프란체스코(Francesco Barberini)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1627년 에 바르베리니 도서관-1902년 교황 레오 13세(1878~ 1903)에 의해 바티칸 도서관으로 흡수 · 통합되었다-을 설립해 그를 도서관장으로 임명했다. 작은 조카인 안토 니오(Antonio Barberini)는 1627년에 추기경으로 임명되 었으며, 후에 교황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또한 교황의 동생인 안토니오는 1625년 세니갈리아(Senigal-lia) 교구장이 되었고, 1628년에 추기경이 되었다. 그 밖에도 다른 형제들을 교황청의 고위직에 임명하였다. 교황은 재 임 초기에 가족들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나자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친인척들 이 교황청에서 일을 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고, 이에 대하여 교황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후에 교황은 신학자들에게 이러한 친척들의 교황청 관직을 이 용한 부의 축적이 과연 적법한 것인지 자문을 구해야 할 정도였다. 건축 사업 : 사실 교황 자신도 로마의 성당 건축을 위해 많은 돈을 사용하였다. 1626년 11월 18일에는 베드로 대성전을 완공하여 축성하였다. 그리고 제단을 치장하고 마틸다 백작 부인의 무덤과 자신의 무덤도 교황 바 오로 3세(1534~1549)의 무덤 옆에 마련했다. 그는 성당의 완성을 위해 판테온 신전의 지붕에 있는 동판을 가져 다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바티칸의 방어를 강화하 기 위해 북쪽 경계 지역에 카스텔프랑코(Castelfranco)를 건축하고 치비타베치아(Civitaveccia) 항구를 보수하였으며, 천사들의 성(Castel Angelo)을 보강하였다. 또한 산 안 젤로(Sant'Angelo) 몬테 카발로(Monte Cavallo) 등의 성벽을 강화했다. 그러나 이 공사를 통해 고대의 유적을 파괴한 역사적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리고 티베르 강의 오른 쪽 강변에 여러 가지 방어 시설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로마에서 동남부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있는 카스텔 간 돌포(Castel Gandolpo) 성에 여름 별장을 마련하였다. 정치적인 역할과 활동 : 우르바노 8세가 교황으로 재 임하고 있는 동안 유럽은 30년 전쟁(1618~1648)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이 와중에 리슐리에(A.J. du P. Richelieu, 1585~1642) 추기경은 프랑스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주력하였고,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Gustav II Adolf, 1611~1632)는 독일에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확산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사실 교황은 프랑스에 동조를 하고 있었고, 스페인과는 대립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전체를 대표한다는 차원에서 대립하는 세력들 사이에서 중 립을 유지하고 나아가 중재에 나서려고 노력을 했다. 그 러나 교황은 친 프랑스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 에, 프랑스와 대립한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시 이탈리아를 지배하는 것에 대해 매우 경계하였다. 그래서 전임 교황인 그레고리오 15세가 신성 로 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1619~1637)에게 약속한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가 교황에게 무조 건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1624년에는 교황의 군대가 프랑스에 의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발텔리나 (Valtellina) 계곡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교황은 스페인 과 오스트리아에 대한 적대감을 솔직히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교황은 리슐리에 추기경에 대항하여 별다른 군사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프랑스와 스웨 덴이 연합 전선을 형성하는 것은 방해하였다. 한편 페르 디난트 2세 황제가 프랑스와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프 로테스탄트와 프라하 평화 협정(Prager Frieden, 1635. 5. 30) 을 체결하였다. 이를 통해 프로테스탄트가 제국 내에서 종교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러자 교황은 황제를 강력하게 비난하며 프라하 평화 협정이 교회법적으로 무효 라고 선언하였다. 동시에 리슐리에 추기경에게는 평화를 모색하도록 조언하였다. 교회가 더 이상 분열되는 것을 두려워한 교황은 스페인측의 강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구 체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 특사를 파견 하여 가톨릭을 옹호하는 제후들을 규합해서 프로테스탄트 세력에 대항하여 연합 전선을 펴려고 하던 교황의 노 력은 쾰른 평화 회담(Kölner Friedensckongresse, 1636)을 거쳐 베스트팔렌 조약(Westälischer Frieden, 1648. 10. 24)을 이끌어 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결과로 교 황의 반종교 개혁(Gegenreformation)은 정체 상태에 빠졌 다. 이것은 외적으로는 중립을 지키면서 실질적으로는 프랑스의 편을 들었던 교황 정책의 결과였다. 30년 전쟁 이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만큼 교회 내부에도 변화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와중에도 교회의 권익 즉 종교 개혁 이후 흔들리는 교회의 위상을 다시 높 이는 데 도움이 된다면 정치적 분쟁도 마다하지 않은 교 황 우르바노 8세의 용기를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선교 사업의 지원 : 교황 우르바노 8세는 선교 사업에 매우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1625년에는 레바논 지역 의 마론파 교회 신자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다. 1627년에는 선교 사업을 원한 우르바노 대학(Collegium Urbanum)을 세웠다. 또한 여러 언어로 책을 출판하기 위해 인쇄소를 세우고 아시아 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하였 다. 그뿐 아니라 이교 국가에 교구를 설정하고 선교사들에 대해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1633년 에 이미 중단된 중국과 일본에 선교사를 다시 파견할 것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영국 성공회를 다시 가톨릭과 일 치시키는 것은 실패했다. 성공회를 설득하기 위해 교황 은 스미스(R. Smith)를 교황 대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국에서 교황의 권한을 독점적으로 대리하려고 하여 예수회와 그 밖의 선교회와 충돌을 일으켰다. 기타 업적 : 교황은 주교와 추기경이 자신의 교구에 상주해야 한다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을 시행하였다. 또한 자신의 오랜 개인적 친구인 갈릴레이(G. Galilei, 1564~1642)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부인하도록 하였 으며, 얀센(C. Jansen, 1585~1638)의 저서인 《아우구스티 노》를 판매 금지시켰다. 그러나 교황 우르바노 8세는 갈 리아주의와 얀센주의와 맞서는 일에 커다란 성과를 보지 못했다. 그는 로마에서 1644년 7월 29일 선종하였다. [평 가] 교황 우르바노 8세는 예술과 학문의 애호가였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중요한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베르니니(G.L. Bernini, 1598~1680)의 대표적인 후원자였다. 이를 통해 많은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재임 시기는 실정으로 가득 찼고, 독일의 가톨릭 신앙에는 불행을 초래하였다. (→ 갈릴레이, 갈릴레오 ; 베스트 팔렌 조약 ; 얀센주의 ; 족벌주의) ※ 참고문헌 M. Ott,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XV , Kebin Knight, 1999/ E. Pulsfort, Biographisch-Bibliographisches Kirchenlexikon, Bd. XII , Verlag Traugott Bautz, 1997/ L. von Ranke, Die Papste, Biichergilde Gunterberg, 1962/ V. Ponko, 《NCE》 14, pp. 482~483/ R. Ciasca, 《EC》 12, pp. 912~916/ J.N.D. Kelly, Oxford Dictionary of Popes, Oxford Univ. Press, 1996, pp. 280~281. 〔李種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