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영]Ukra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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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권 러시아 남서부에 있는 나라. 수도는 키예프 (Kyiv)이다. 북쪽으로는 벨로루시, 동쪽으로는 러시아 연방, 남쪽으로는 아조프 해, 흑해, 몰도바, 루마니아, 서쪽으로는 헝가리, 슬로바키아, 폴란드와 접하고 있다. 면적은 603.700k㎡, 인구는 50,660,000(200)이며,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이다. 오랜 역사에 걸쳐 수많은 외 세의 침략에 시달려 온 관계로 100여 민족이 살고 있지만 슬라브 어족에 속하는 우크라이나인 · 러시아인 · 폴 란드인 · 불가리아인 등이 대다수이며 그중에서도 우크라이나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국교는 없으며, 인구의 반 이상이 우크라이나 정교회 신자이다. 9세기 드네프르 강은 발트 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중요 한 교역로가 되었고, 이에 따라 키예프는 동유럽의 정치와 문화를 주도하는 지역이 되었다. 11세기경 강성했던 키예프 공국은 점차 세력을 잃어 13세기에 몽골에게 정복되었으나, 우크라이나 서부에 있던 갈리치아-볼리니아 공국은 14세기까지 존속되었다. 14세기에 이르러 리투아니아는 우크라이나 영토의 대부분을 합병하였고, 갈 리치아-볼리니아 공국은 폴란드 왕국에 넘어갔다. 1569년 폴란드가 루블린 연합을 통해 리투아니아 왕국을 통 합함으로써, 리투아니아에 속했던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에 귀속되었다. 1648년 카자크(kazak)의 군사 지도자였 던 흐멜니츠키(B. Khmelnitsky, 1959?~1657)가 주도한 봉기 를 통해 짧은 기간 동안 준(準)독립 국가가 이루어졌고, 이후 17~18세기 동안 봉기를 주도했던 군사 조직은 키 예프를 포함한 드네프르 강 지역 등지에서 폴란드, 러시아에 대항하는 구심체 역할을 하였다.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의 저항으로 점차 약화되면서 급기야 우크라이나 지 역의 주도권을 러시아에게 빼앗겼고, 3차에 걸친 분할로 독립마저 상실하게 되었다. 18세기 말 폴란드의 분할 이 후 러시아 제국은 갈리치아를 제외한 드네프르 강 서부의 우크라이나 영토를 얻었으며, 갈리치아는 오스트리아 로 넘어갔다. 1783년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합병하고, 흑해 연안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19세기 초 우크라이나는 주요 곡물 수출 지역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 이후 미하일로 후르세프스키 의 주도로 키예프에서 결성된 임시 정부 중앙 라다(Central Rada)는, 이듬해 1월 러시아와의 모든 관계를 끊고 독립 국가임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라다 정부는 독일군의 괴뢰 정부인 스코로팟스키 정부에 의해 붕괴되었으 며, 1918년 가을 독일군이 철수한 이후 우크라이나는 백군과 적군 간의 내란에 휩싸이게 되었고, 적군이 우크 라이나 영토를 점령하자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이 설립되어 1924년 소련의 위성 공화국이 되었 다. 한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무너지자 1918년 11월 우크라이나인들은 갈리치아의 수도 리보프(L'vov) 를 점령하고 독립을 선언하여 우크라이나 본국과의 통일을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후 1921년 갈리치아는 리가 조약으로 폴란드령이 되었으며, 부코비나는 루 마니아에, 헝가리에 속했던 우크라이나의 주들은 신생 체코슬로바키아에 귀속되었다. 1939년에 체결된 독소 불가침 조약에 따라 폴란드령이었던 갈리치아 동부와 볼 리니아 서부가 우크라이나에 편입되었다. 1941년 6월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하고 빠른 속도로 우크라이나를 점 령했을 때 우크라이나는 독일에 대한 게릴라 저항을 전개하였다. 독일이 패하자 모든 영토가 소련에 합병되었 으며,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 소련 중앙 정부의 통 제가 다소 느슨해지기는 했지만 대(對) 우크라이나 기본 정책에는 변함이 없었다. 1980년대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가 시행되면서 우크라이나 내에 민족주의가 싹터 우크라이나는 포괄 적인 범위의 자치권을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1991년 12 월 30일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독립을 얻게 되었다. 교회의 역사 : 키예프 공국의 블라디미르(Vladimir Svyatoslavich, 956? ~1015)는 당시 번성의 절정기에 있었던 동로마 제국의 문명과 종교를 선택하였으며, 988년 블 라디미르와 그의 백성들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크라이나 지역에 그리스도교가 전래되었다. 당시 키예프 공국에 도입된 비잔틴 전례를 따르는 동방 교회는 콘스탄티 노플에 있는 총대주교의 관할 아래 있었고, 키예프에는 대주교가 임명되어 교회 업무를 수행하였다. 몽골의 침략으로 키예프 공국이 붕괴한 이후 14세기 전반 키예프에 위치했던 동방 교회의 대교구좌는 모스크바로 자리를 옮겼으나, 남서쪽 지역에 위치했던 갈리치아볼리냐 공국은 계속해서 키예프 공국의 동방 교회의 문화와 전통을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1458년 우크라이나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우크라이나 지역의 동방 교회를 모스 크바의 영향력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서 키예프 관구를 설립하였다. 14~ 16세기 동안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비교적 관대한 종교 정책을 펼쳤으나, 이어 이 지역을 통치하게 된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가톨릭과 동방 교회의 연합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외부적인 압력과 우 크라이나 내부의 어려움으로 인해, 1596년 '브레스트 (Brest) 교회 연합' 이 선언되었다. 브레스트 선언의 내용은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며 이와 함께 동방 교회의 전통적인 그리스 비잔틴 전례를 보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브레스트 선언은 우크라이나 교회를 지지하던 이들에 의해 거부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 지역에는 동방 교회, 폴란드의 가톨릭, 우크라이나 가톨 릭 교회가 공존하게 되었다. 17~18세기를 거치면서 서 방과 동방의 요소들을 종합한 독특한 종교 문화를 공유한 동방 교회와 우크라이나 가톨릭 교회는 서로의 종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폴란드와의 대결 속에서 민족 정체성의 보루 역할을 하게 되었고, 민족 정체성의 보존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민족 교회로 발전할 수 있 는 기반을 조성해 갔다. 18세기 말 우크라이나를 분할 · 지배하고 있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상이한 정책을 전개하였고 이는 종교 정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러 시아의 경우 1686년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모스크바 총 대주교의 관할아래 편입시킨 이후, 우크라이나의 성직자 들을 러시아 교회에 받아들이고 키예프 동방 교회의 문 화적 가치를 흡수해 갔는데, 이는 결국 우크라이나 성직 자들을 러시아화시키고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자치적 경 향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오스트리아의 경우는 1774년 이 지역의 우크라이나 가톨릭 교회를 인정하였 는데,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 가톨릭 교회는 폴란드의 영 향으로부터 벗어나 오스트리아의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폴란드 권력 아래서의 열등한 위치를 극복하게 되었다. 1918년 소비에트는 '교회와 국가, 교회와 학교의 분 리에 관한 법령' 을 제정하고 반(反)종교 정책을 펴 나갔으며,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분리될 경우 전체적으로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력이 약화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1921년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분리를 승인하였다. 같은 해 10월 21일 64명의 사제들을 포함해 500여 명의 대표자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대표들은 우크 라이나 교회의 건설을 확인하고, 기존의 교회법과 계서 제를 무시한 채, 바실 리프키프스키(Basil Lypkivsky)를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대주교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후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급속하게 성장하자, 소비에트 정권 은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우크라이나 독립의 상징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1926년 우크라이나 교구에 높은 세금 을 부과하고 성직자들의 행동을 제한하는 등 직접적인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어 대주교 리프키프스키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수많은 협력자들을 체포하였으며 , 1930년에는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강제해산을 명령하였다. 1941년 발발한 전쟁 이후 소비에트는 러시아화(化) 의 수단으로 러시아 정교회를 이용하기로 결정하였고, 우크라이나 정교회와 우크라이나 가톨릭 교회는 탄압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정교회와 우크라이나 가톨릭 교회의 주교 대부분은 죽임을 당하거나 구금되었고, 교회의 재산은 정부에 압수당하거나 러시아 정교회에 넘겨졌다. 몇몇 가톨릭 사제들은 사회주의 통치하에서 비밀리에 활동하였다. 우크라이나 가톨릭 교회가 소련 대통령 고르 바초프의 통치하에서 그들의 법적 지위를 되찾았을 때, 신부와 평신도 간의 계층과 재산 소유권 문제와 관련하여 긴장감이 팽배하였다. 1991년에는 라틴 전례를 따르는 교구들이 재설립되었다. 1990년대 후반, 정부와 몇몇 기업들이 임금을 지불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인플레이션과 경제가 악화되었고, 우크라이나 정교회 지도자들은 집 없는 사람들과 행려자들을 위해 투쟁하였다.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1년 6월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종교적 · 인종적 그리고 정치적 긴장을 극복하고 각 종파가 통합을 위해 노력하여 줄 것을 요청했다. 한편 많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19세기 말과 제2차 세계대전 뒤에 아메리카와 서유럽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전례를 따르는 동방 가톨릭 교회 신자들이었 으며, 교황청에서는 이들을 위하여 위니펙(Winnipeg)을 대교구로, 에드먼턴(Edmonton) 사스카툰, 토론토를 교구로 두는 캐나다 대교구를 조직하였고, 필라델피아를 대교구로, 스탐퍼드(Stamford) 세인트 니콜라스를 교구 로 삼는 미국 대교구를 조직했다. 이와 함께 오스트레일 리아(멜버른), 브라질(큐리티바), 프랑스(파리), 영국(런던), 독일(뮌헨)에 총대주교 대리들을 임명하였다. 2000년 현재 5,614,000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있으며, 가톨릭 우크라이나 전례를 따르는 상급 대주교좌 1, 아르메니아 전례를 따르는 대교구 1, 라틴 전례를 따르는 대교구 1, 교구 11, 직할 서리구 1, 본당 3,741개에 추기경 1(우크라이나 상급 대교구좌), 대주교 2, 주교 21, 신부 2,461(교구 2,101, 수도회 360), 수사 325, 수녀 903명이있다. ※ 참고문헌  《NCE》 14, pp. 372~3761 (EB) 22, pp. 470~474/ 2002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p. 3371 Ammuario Pontificio 1998, Città del Vaticano, 1998/ 《EU》 Les Chiffres du Monde, pp. 516~517/ 임영상 . 황영삼 공편, 《소련과 동유럽의 종교 와민족주의》,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1996.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