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향시 본당
運餉市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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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평양교구 소속 본당.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부라면 (府羅面) 동단동(東端洞) 소재. 1936년 7월에 설립되었다가 1945년 비현(枇峴) 본당 공소가 되었다. 관할 구역은 용천군 서남부 일대. 관할 공소는 용암포 · 남시 · 양시 · 삼룡동 · 북중 · 다사도 등 6개소. [교 세] 1937년 550여 명, 1945년 600여 명. [역대 신부] 초대 한논(S. Hannon, 韓論) 스테파노(1936. 9~1941. 12), 2대 심재덕(沈 載德) 마르코(1942. 2~10), 3대 강영걸(康永杰) 바오로 (1943. 6~1944. 4), 4대 한도준(韓道俊) 마태오(1944. 4 1945. 10). 해안 지대인 용천군 부라면 지역은 1929년 신의주(新 義州) 본당 주임 페티프렌(R. Petipren, 邊聖行) 신부가 이 지역의 일본인 농장에서 일하는 한국인 유랑 농민들에게 선교함으로써 첫 복음의 씨가 뿌려졌다. 페티프렌 신부는 운향시로 선교사를 파견하여 첫 결실로 10여 명의 입교자를 냈다. 선교 1년 만에 비현 본당 소속 공소가 되어 당시 본당 주임 한논 신부의 주선으로 1930년 사제관 겸 강당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집을 신축하였다. 이후 운향시 공소는 비약적인 발전으로 3년 만에 300여 명의 영세자를 내었으며 공소 내에 남녀 신심 단체를 조직하고 그 지방에서 경영하던 영신학원을 공소에서 인수한 후 교원 3명이 빈민 아동 120여 명을 전담 · 교육하였다. 1936년 7월 운향시 공소는 신자수 증가로 비현 본당에 서 분리, 본당으로 설정되어 한논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한논 신부는 대지 1,200여 평을 매입하여 장차 교육 기관으로 사용할 학교 건물 60여 평을 건축하고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는 한편, 40여 평의 사제관을 건축하는 등 본당 제반 시설을 갖추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평양교구 내의 한논 신부를 포함한 모든 메리놀회 성직자들이 체포 · 구금되자 다음해 2월 서울교구에서 파견된 심재덕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한 데 이어 3대 주임으로 강영걸 신부가 부임하였다. 당시 운향시 본당 대부분의 신자들은 일 본인이 개간한 불이농장(不二農場)에서 일하는 가난한 농민들로서 일본의 교회에 대한 탄압 정책이 점차 가혹 해짐에 따라 신앙 생활을 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1944년 4월 4대 주임으로 부임한 한도준 신부는 당시 종교 활동이 용납되지 않는 상황에서 오로지 성가대 지도와 교리 지도에 전념하였다. 1945년 운향시 본당은 신심 단체로 성가대만 있을 뿐 그 외 활동은 없었고 지극히 수동적인 신자들의 교회 활동으로 인해 그 해 10월 한도준 신부가 평양 기림리 본당으로 전임된 후 다시 비현 본당 소속 공소가 되었다. (→ 비현 본당 ; 신의주 본당 ; 평양교구)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천주교 평 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천주교평양교구사》, 분도출판사, 1981. [白秉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