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 대목구
元山代牧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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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교안 발생 후 덕원 부사에게 보낸 그의 항의 서한.
원산시를 중심으로 함경남 · 북도 전역을 관할하던 대 목구(vicariatus apostolicus) 1920년 8월 5일 경성 대목구 (현 서울대교구)에서 분리 · 설정되어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 (Congregation of St. Ottillien O.S.B, 芬道會)가 사목을 담당하였다. 1928년 7월에 만주의 '의란 포교지' (依蘭布敎地)와 '연길 지목구 (延吉知牧區)를 분리하였으며, 1940년 1월 3일에는 원산 대목구가 '함흥 대목구' (咸興代牧區)와 '덕원 면속구' (德源免屬區)로 분리되면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1948년 이후 함경도 지역 교회는 북한 공산 정권에 의해 박해를 받으면서 침묵 의 교회가 되었다. [대목구장] 사우어(B. Sauer, 辛上院) 보니파시오 주교(1920. 8~1940. 1). [교 세] 1920년 5개 본당 약 8,800명, 1929년 6개 본당 2,252명, 1940년 11개 본당 11,064명. [복음 전래와 본당 설립] 복음 전래와 초기의 신앙 공 동체 : 함경도 지역은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이후 천주교 신자들이 유배를 가면서 천주교 신앙이 직접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중에서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 같은 이는 유배되어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한 것으로 언급되지만, 이로 인해 함경도 지역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 같지는 않다. 이곳의 신앙 공동체는 박해가 계속 되면서 함경도 지역으로 피신한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뒤늦게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들 중에는 이웃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 경우가 있었는데, 이 지역의 예비 신자들이 제4대 조선 대목구장 베르뇌(Berneux, 張 敬一)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이 나타나는 것은 1863년 5월경이다. 함경도의 신앙 공동체는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 害)로 와해된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박해로 인해 영흥(永 興)에서 19명이 체포되어 순교하였으며, 1870년대를 전후하여 나타나는 신앙 공동체는 영흥이 아니라 안변 (安邊) 지역에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원도 지역과 가까운 안변의 신앙 공동체는 박해 이후 영동 지역을 거슬러 북쪽으로 이주하던 신자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한국 교회가 선교의 자유를 얻은 후 함경도 지역을 처음으로 순방한 선교사는 드게트(V.M. Deguette, 崔東鎮) 신부였다. 그는 1879년 중국으로 추방되었다가 1883년 한국에 재입국한 뒤 강원도 이천의 '섭골' (강원도 이천군 山內面 龍浦里, 이천 본당의 전신)에 거처를 두고 주로 강원도 동북쪽을 순방하였는데, 이때 그가 함경도 지역에 처음 설립한 공소가 안변의 '근피골 공소' (평안남도 안변군 위익면 竹根里, 현 신고산면), 강원도 평강의 '피대 공소' (현 안변군 신고산면 三防里), 함경남도 간성의 '산두 공소' (현 강원도 고성군 거진면 山北里) 등이었다. 1883~1884 년 당시 세 공소의 신자수는 각각 160명, 55명, 34명이었으며, 그중에서 가장 신자수가 많은 근피골 공소가 함경도 남부 지역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함경도 지역을 방문한 선교사는 푸아넬(Poisnel, 朴道行) 신부와 쿠데르(Couderc, 具瑪瑟) 신부였다. 푸아 넬 신부는 1884년 후반부터 이 지역을 순방하면서 개항 장인 원산에서 새 신자들을 발견하고 '원산 공소' (신자수 20명)를 설립하였고, 쿠데르 신부는 1886년에 '강성골 공소' (신자수 25명, 현 함경남도 안변군 신고산면 江城里)를 설립하였다. 선교사들은 점차 함경도 지역의 복음 전파 를 중시하게 되었고, 이는 얼마 안되어 본당 설립으로 이어졌다. 본당의 설립과 변모 : 제7대 조선 대목구장인 블랑 (Blanc, 白圭三) 주교가 함경도 지역의 신앙 공동체를 위 해 전담 신부를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은 1887년 5월경 으로, 담당 선교사는 르 메르(Le Merre, 李類斯) 신부였다. 이후 르 메르 신부는 안변에서 남쪽으로 약 30리 정도 떨어진 신고산의 '강성골 공소' 에 거처를 정하고, 안변 · 문천의 경계지에 있던 '고춘봉(高春峰) 공소' 를 비 롯하여 피대 공소 · 근피골 공소, 강원도 접경의 '선바 위[仙岩] 공소' 등을 순방하였다. 이것이 바로 "안변 본당"(즉 강성골 혹은 신고산 본당)의 설립으로, 당시의 신자수는 211명이었다. 이어 1887년 7월에는 강원 도의 '이천 본당' 에 있던 드게트 신부가 원산항 인근의 광석동(廣石洞)에 정 착하면서 "원산 본당"이 설립되었다. 드게트 신부는 이후 '원산교안(敎案)' 즉 이른바 드 게트 신부 추방 사건' 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1889년 봄까지 사목하다가 서울로 가던 중 장티푸스에 걸려 사 망하였다. 또 안변 본당 지역은 1888년 가을에 르 메르 신부가 강원도의 풍수원(豊水院) 본당으로 전임되면서 이천 본당의 관할이 되었다. 이후 안변과 원산 본당은 1890년과 1891년에 각각 재설립되었지만, 주임 신부가 자주 변경되는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그 와중에 도 원산 본당의 5대 주임 베르모렐(Vermorel, 張若瑟) 신 부는 1896년 5월 간도(間島)의 사도 김영렬(金英烈, 요 한)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그 결과 두만강 너머의 간도 지역에도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안변 · 원산 본당에서는 강원도의 양양 · 간성 지역의 공소들까지 관할하고 있었다. 안변 본당은 1893년 4월 불라두(Bouladoux, 羅亨默) 신부가 4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선교를 한 결과 1899년 에는 총 신자수 1,410명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는 재임 기간 동안에 '안변 교안' 으로 불리는 잇따른 교 · 민 (敎民) 불화 사건에 휘말리면서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불라두 신부는 1896년 2월에 자신의 거처를 안변에서 그 남쪽에 위치한 내평(內坪)으로 이전하였으 며, 이때부터 안변 본당은 "내평 본당" 으로 불리게 되었다. 1897년 5월 브레(L.A. Bret, 白類斯) 신부가 원산 본당의 6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이미 원산 본당의 4대 주 임으로 재임하다가 1895년에 '원산 교안' 즉 '브레 신부의 발포 사건' 으로 그곳을 떠나야만 하였던 그는, 재 부임 이후 주민들과의 화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한옥 성당을 대신할 새 성당 건립과 교세의 확장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신자들의 이주로 성과를 거둘 수 없었 다. 반면 그는 간도(즉 북간도)의 복음 전파에 큰 관심을 기울였고, 마침내 1907년 간도에 본당이 설립되었다. 이후 원산 본당은 1910년 6월 포아요(G. Poyaud, 表光東) 신부가 10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내평 본당은 1909년 5월 뤼카(F. Lucas, 陸加恩 신부가 7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외형상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한일합 병 이후의 경제적 압박과 신자들의 간도 이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 결과 원산 본당의 신자수는 1911년 407 명이던 것이 1920년에 239명으로 감소하였고, 내평 본당의 1921년 신자수도 1,099명에 불과하였다. 반면 간도 지역의 교회는 크게 성장하였다. 1897년 이래 '북관(北關)의 12사도' 를 비롯하여 초기 신자들의 노력으로 괄목한 만한 신자수의 증가를 가져온 간도 지역에는 1902년 용정(龍井) 공소가 설립되고 1904년 조양하(朝陽河, 즉 八道溝) 공소가 설립될 때까지 10여 개 의 공소가 연이어 설립되었다. 당시 간도의 신자수는 1,071명에 달하였다. 이에 제8대 조선 대목구장 뮈텔 (G. Mutel, 閔德孝) 주교는 만주교구장 라루이예(Lalouyer) 주교로부터 북간도 지역의 재치권(裁治權)을 이양받고 1907년 7월 3일자로 브레 신부를 간도에 파견하였다. 브레 신부는 11월 간도에 도착하여 용정에 거처를 정하였으며, 이로써 "용정 본당"이 간도 최초의 본당이 되었다. 그는 1908년 10월에 사망하였는데, 뮈텔 주교는 이듬해 5월 공주 본당에 있던 퀴를리에(Curlier, 南一良) 신 부와 원산 본당의 7대 주임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신 부를 동시에 간도 지역으로 파견하였다. 당시 퀴를리에 신부는 용정에 거처를 정했고, 라리보 신부는 대립자(大 拉子)의 영암촌(英岩村)에 거처를 정하였다. 이어 1910 년 9월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가 조양하 지역에 파견되었다. 1914년 간도 지역의 신자수는 5,418명이었다. [원산 대목구의 설정과 분할] 교구 설정과 초기 현황 : 1909년 2월 한국에 진출하여 서울 백동(柏洞, 현 혜화 동)에 자리를 잡고 활동하던 베네딕도회는 수도회의 정착과 교육 · 기술 활동, 신학교 설립 등에 노력한 결과 1913년 5월 15일 아빠스좌 수도원(abbatia)으로 승격되 었다. 그러나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경제 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기존의 활동이 위축되기 시작 하였고, 그 타개책으로 점차 본당 사목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경성 대목구(현 서울대교구)의 사목을 담당 하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은 베네딕도회 신부들이 본당 을 맡는 것에 반대하였다. 이에 베네딕도회의 사우어 아 빠스는 이 문제를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 복음화성) 장 관과 논의하는 한편, 경성 대목구장 뮈텔 주교와도 여러 차례 협의하였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1919~1920 년의 협의 과정에서 뮈텔 주교는 사우어 아빠스에게 평안도의 사목을 권유하였고, 사우어 아빠스는 함경도 지 역의 사목을 요청하여 뮈텔 주교의 동의를 얻었다. 교황청에서는 이러한 협의 과정을 검토한 후 1920년 8월 5일, 함경남북도 지역을 경성 대목구에서 분리하여 "원산 대목구" 로 설정함과 동시에 그 사목을 베네딕도회에 위임하였다. 그리고 8월 25일자로 사우어 아빠스를 그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하였다. 사우어 아빠스는 1921년 5월 1일, 경성 대목구의 보좌 주교로 임명된 드 브레(Devred, 喩) 주교와 함께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주 교품을 받았고, 같은 날 함경도와 북간도 지역의 사목을 인수하였다. 당시 함경도 지역에는 원산 · 내평 등 2개 본당에 1,300여 명, 북간도 · 의란 지역에는 용정 · 영암 촌 · 조양하 등 3개 본당에 약 7,500명의 신자가 있었다. 이에 앞서 교황청에서는 1921년 3월 19일자로 북간 도 지역 및 그 북쪽에 있는 의란(依蘭) 지역의 사목까지 베네딕도회에 위임하였다. 사우어 주교는 에카르트(A. Eckardt, 玉樂安) 신부를 원산 본당의 11대 주임으로, 슈넬(S. Schnell, 成來純) 신부를 내평 본당의 8대 주임으로 임명하였으며, 히머(K. Hiemer, 任竭忠) 신부를 용정 본당의 2대 주임으로, 퀴겔 겐(C. Kiigelgen, 具傑根) 신부를 조양하 본당의 3대 주임 으로, 다베르나스(K. d'Avernas, 羅國宰) 신부를 영암촌(삼 원봉) 본당의 3대 주임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이때 주교좌 본당으로 설정된 곳은 원산 본당이었다. 이어 베네딕 도회는 1921년 11월 1일 서울 수도원 안에 소신학교를 개교하였다. 한편 모원인 독일의 오틸리엔 연합회에서는 대목구 설정 이후 1925년까지 22명의 신부 · 수사를 한국에 파견하였으며, 수도원이 서울을 떠나는 1927년까 지는 모두 29명의 신부 · 수사가 증원되었다. 베네딕도회에서는 그 동안 새 수도원 건립 계획을 세우고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원산 인근의 덕원(德源) 어운리(於雲里)에 적합한 부지를 발견하고, 1922년부터 1927년까지 이 부지를 매입하는 한편 수도원 건립을 시작하여 1927년 10월에는 1층을 거의 완공 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수도원 이전을 시작하여 그 해 11월 17일 완료함으로써 '덕원 수도원' 이 탄생하였다. 이어 1927년 12월 1일에 덕원 신학교가 완공되었으 며, 1931년 12월 24일에는 수도원 성당의 축복식이 이루어짐으로써 사목의 터전을 닦았다. 덕원 수도원장은 처음에 슈미트(C. Schmid, 金時練) 신부가 맡았다가 1930년 6월 로트(L. Roth, 洪泰華) 신부가 2대 원장에 임명되었다. 이를 전후하여 원산 대목구에서는 선교 활동과 본당 신설, 신학교와 수도원의 정착에 노력하였다. 우선 사우 어 주교는 1922년 11월 말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연길 분원과 '연길 본당' (延吉本堂, 훗날 '연길 하시 본당' 으로 개칭)을 동시에 설립하고 브레허(T. Breher, 白化東) 신부를 분원장 겸 본당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다음으로 1923년 4월 '팔지 본당' (八池本堂, 즉 六道泡本堂)을, 1924년에 '훈춘 본당' (琿春本堂)을, 1926년 6월에는 '대령동 본당' (大領洞本堂, 훗날 '茶條溝本堂' 으로 개칭)과 길림성의 '돈화 본당' (敦化本堂)을 설립하였다. 반면 함경도 지역에서는 1925년 '회령 본당' 이 설립됨과 동시에 히머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으며, 1926년 7 월에는 '청진 본당' (淸津本堂)이, 1927년에는 '함흥 본당' 과 '덕원 본당' 이 설립되었다. 또 의란 지역에는 1924년 7월 송화강(松花江) 지류인 푸진(富錦)에 중국인 본당이 설립된 데 이어 1926년 가을에는 푸진 남쪽 자무쓰(佳木斯)에도 중국인 본당이 신설되었다. 덕원 수도원에서는 수도원 이전 직후부터 의료 · 농 공 · 출판 · 인쇄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특히 1928년 5월에 수도원 경내에 그라하머(J. Grahamer, 咸要 燮) 수사의 의원이 개설되었고, 1927년에는 인쇄소가 설립되었다. 덕원 인쇄소에서는 피셔(L. Fischer, 裵 수사 의 책임 아래 1933년에 한글판 《미사규식》을 처음 간행 하였으며, 이후에도 《천주성교공과》《중관본》를 비롯하여 한글판 《미사 경본》과 성가집들을 꾸준히 간행하였다. 이와 동시에 수도 성소자도 꾸준히 증가하여 1928년 초 에는 한국인 허원자 5명, 수련자 1명, 청원자 1명이 탄생하였다. 덕원 신학교의 경우는 같은 해 9월 신학기를 시작하였을 때 소신학생수가 63명이었으며, 1929년 9 월에는 대신학교 교육이 시작되었다. 당시 대목구의 각 본당에서 운영하던 학교로는 삼원봉 본당에서 1908년에 설립한 덕흥학교(德興學校, 훗날 '대립자해성학교' 로 개칭) 가 있었고, 1918년에 설립된 조양학교(朝陽學校) , 1921년에 설립된 용정해성학교(龍井海星學校) 등이 있었으며, 함경도에서는 1921년에 야학으로 시작하여 다음해 3월 7일 4년제 남녀 보통 학교로 인가된 원산 본당 의 해성학교(海星學校)가 유명하였다. 1925년 11월 사우어 주교의 요청에 따라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Missionary Benedictine Sisters ofTutzing, O.S.B, 芬道修女會)가 원산에 진출하였다. 이 수녀회는 1927년 4월 29일 교황청 포교성성으로부터 '원산 수녀원' 설립 인가를 받았으며, 같은 해 6월 원산 성당 인근 에 위치한 수녀원 축복식을 갖고, 시약소를 통한 의료 활 동을 하면서 본당 사목에 협조하였다. 이 원산 수녀원의 초대 원장은 히르쉬(Mathilde Hirsch) 수녀였는데, 이 수녀원에서 한국인 수녀들이 첫 서원을 한 것은 1931년 5월 25일이었다. 대목구의 분할과 변모 : 원산 대목구는 1920년 이후 각처에서의 활발한 선교 활동 덕택으로 1927년 말 현재 14개 본당에 신자수 14,000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당시 성직자수는 사우어 주교를 포함하여 28명, 수도자 수는 50명에 달하였으며, 공소수는 176개, 예비 신자수 는 1천 여 명, 학교수는 40개였다. 이 무렵 사우어 주교는 간도와 의란 지역이 매우 넓어 사목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과 그 지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고려하게 되었다. 게다가 원산 대목구의 교세 성장 이 간도 지역의 본당과 신자수 증가에 힘입은 바 컸기 때문에 이 지역을 독립시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그는 이와 관련한 의견서를 교황청에 제출하였고, 교황청에서는 이를 검토한 뒤 1928년 7월 3일자로 원산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흑룡강성 일대를 '의란 포교 지' 로 설정함과 동시에 사우어 주교의 사목 관할 아래 두었다. 이어 교황청에서는 1928년 7월 19일 북간도 지 역을 '연길 지목구' 로 설정한 뒤, 다음해 2월 5일 브레 허 신부를 초대 지목구장으로 임명하였다. 1929년 5월 현재 이 지역의 신자수는 8개 본당에 12,257명이었다. 사우어 주교는 이후 의란 포교지의 사목을 다른 선교 회에 위임해 줄 것을 교황청에 요청하였으며, 포교성성에서는 1933년 9월 1일 이 지역을 티롤의 카푸친회 북부 관구에 위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 이 지역에는 2개의 중국인 본당에 1,272명의 신자가 살고 있었다. 이처럼 두만강 이북 지역이 원산 대목구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나감에 따라 대목구는 함경남북도만을 사목하게 되었는데, 1929년 5월 현재 원산 대목구의 신자수는 6 개 본당에 2,252명이었다. 원산 대목구에서는 분할 이후 더 적극적으로 본당 설립과 선교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1931년 8월 '영흥 본당' (永興本堂)이 설립되었고 1933 년 10월에 '고원 본당' (高原本堂), 1935년에는 '북청 본당' (北靑本堂)과 '흥남 본당' (興南本堂)이, 1936년 말에는 청진 인근에 '나남 본당' (羅南本堂)이 설립되었다. 본래 나남 본당은 북쪽에 있는 나진(羅津) · 웅기(雄 基) 지역에 설립될 예정이었다. 그 무렵 원산 본당에서는 신자수가 증가하자 1938년에 새 성당을 신축하였으며, 청진 본당에서는 1931년에, 흥남 본당에서는 1936 년에 성당을 신축하였다. 한편 내평 본당은 1930년 초에 신고산(新高山)으로 이전되면서 명칭을 '고산 본당' 으로 개칭되었다. 이와 함께 회령 본당에서는 1933년에 '명악학교' (일명 해성학교)를, 북청 · 흥남 본당에서는 해 성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이 밖에도 영흥 본당에서 야간 학교를, 고원 본당에서 보통 학교를 설립 · 운영하였다. 덕원 수도원에서는 그라하머 수사의 의료 활동이 효과를 거두자 1929년 여름에 작은 병원을 건립하였고, 농장 경영과 건축 사업을 바탕으로 한 구빈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또 원산 수녀원에서는 각 본당 분원을 확대해 나가는 한편 1926년에 빈민 학교인 '호수천신학교' 를, 다음해에는 '혜성유치원' 을 시작하였다. 한편 덕원 신학교 에서는 1931년 9월부터 대신학교의 신학반을 시작하였 으며, 1935년 2월 10일에는 함경도청으로부터 정식 인 가를 받고 5월 14일에 다시 개교식을 가졌다. 인가 내용은 5년의 중학 과정과 2년의 고등학교 과정, 2년의 철학 과정, 4년의 신학 과정이었다. 다음해인 1936년 성삼 주일에 신학교에서는 최초로 연길 지목구 소속인 김충무 (金忠務, 글레멘스)와 한윤승(韓允勝, 필립보) 부제가 사우어 주교 집전 아래 사제로 서품되었다. 재분할과 변모 : 1940년까지 원산 대목구에는 5개 본 당이 신설되면서 11개 본당에 11,064명의 신자가 있었 다. 그 동안 성직자수는 16명에서 35명으로 증가하였으며, 그중에는 한국인 신부도 5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 국인 성직자로는 1937년 3~4월에 서품된 임화길(林和 吉, 안드레아), 김보용(金寶容, 루도비코), 최병권(崔炳 權, 마티아) 신부와 1940년 3월에 서품된 이재철(李載 喆, 베드로), 구대준(具大俊, 가브리엘) 신부였다. 또 수 도자수는 수사 37명(독일인 24명, 한국인 13명), 수녀 51 명(독일인 15명, 한국인 36명)이었다. 당시 대목구 내의 공소수는 89개소, 본당에서 운영하는 학교수는 비인가된 학교를 포함하여 모두 40개 교였다. 1940년 1월 12일, 교황 비오 12세(1939~1958)는 칙 서를 통해 원산 대목구를 '덕원 자치수도원구 와 '함흥 대목구' 로 분리하였다. 이로써 덕원 자치수도원구는 원산시를 포함하여 안변 · 덕원 · 고원 · 문천군을 사목 지역으로 하여 원산 · 덕원 · 고산 · 고원 본당 등 4개 본당 을 관할하게 되었고, 함흥 대목구에서는 회령 · 청진 · 함흥 · 영흥 · 북청 · 나남 · 흥남 본당 등 7개 본당을 관할하게 되었다. 이때 원산 대목구장이요 덕원 수도원장이던 사우어 주교는 덕원 자치수도원구장 겸 함흥 대목구의 교구장 서리로 임명되었으며, 그 결과 원산 대목구라는 명칭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어 5월 13일에 덕원 수도원 성당에서 덕원 자치수 도원구 설정식과 동시에 사우어 주교의 착좌식이 있었 다. 이로써 사우어 주교는 교회법적으로 자치수도원구의 초대 원장이 되었으며, 함흥 대목구의 초대 교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함경도 지역 교회의 실제 상황은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고, 모든 본당의 사목 책임도 베네딕도회 성직자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한국인 성직자가 본당 주임을 맡기 시작한 것은 1943년부터였다. 교황청에서 원산 대목구의 주된 사목 지역을 이어받는 함흥 대목구를 설정한 목적은 장차 이를 한국인 교구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한국인 성직자의 수가 대목구의 사목을 맡을 수 있을 정도에 이르게 되면, 사우어 주교가 맡아 온 관리권을 한국인 성직자에게 이양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의 탄압과 수난, 북한 공산 정권의 수립과 청산, 6 · 25 동란 등으로 인해 한국인 대목구장이 임명될 수 있는 여건은 마련되지 않았다. 그리고 1948년 이후 함경도 지역 교회는 함흥 대목구와 덕원 자치수도원구 자체가 북한 공산 정권에 의해 박해를 받아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1944년 함흥 대목구의 교세는 9개 본당에 신자수 5,474명, 공소 31개소, 성직자 16명, 수도자 20명이었으며, 덕원 면속구의 교세는 4개 본당에 신자수 5,370명, 공소 35개소, 성직자 23 명, 수도자 73명이었다. 1 간도 교회 ;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 베네딕도회 ; 연길교구 ; 원산 본당 ; 함흥대목구) ※ 참고문헌 Frumentius Renner, Die Berufung der Benediktiner nach Korea und Manchukuo, Der Finfarmige Leuchter II , EOS Verlag Eryabtei St. Ottilien, 1971(<원산교구사>, 《교회와 역사》 53~60호, 1980. 1~8)/ A. Kaspar & P. Berger, HWAN GAB(還甲), Miinster schwarzach, 1973/ 왜 관성 마오로 쁠라치도 수도원, 《옛 등걸에 새순이》, 분도인쇄소, 1985/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 수녀원사》, 왜관분도인쇄소, 1988/ 崔奭祐, <韓國 芬道會의 初期 修道生活과 教育事業>, 《韓國敎 會史의 探究》 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원산교구 연대기》,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1/ 一, 《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1995. 〔車基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