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 본당

元山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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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원산 본당의 내부 모습(19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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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원산 본당의 내부 모습(1937년).


원산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함경남도 원산시 소재 1887년 7월에 창설되어 1949년에 폐쇄된 원산교구 주교좌 본당으로 주보는 예수 성심. [교 세] 1896년 278 명, 1900년 451명, 1904년 351명, 1915년 250명, 1920년 239명, 1924년 582명, 1927년 1,001명, 1933년 1,496명, 1939년 2,207명, 1942년 2,700명. [역대 신부] 초대 드게트(V.M. Deguette, 崔東鎮) 빅토르 (1887. 7~1889. 4), 2대 마라발(J. Maraval, 徐若瑟) 요셉 (1890. 5~1891), 3대 샤르즈뵈프(S. Chargeboeuf, 宋德望) 스테파노(1891~1894. 4), 4대 브레(A. Bret, 白類斯) 알로 이시오(1894. 5~1896. 1), 5대 베르모렐(J. Vermorel, 張若 瑟) 요셉(1896. 1~1897.4), 6대 브레(1897.5~1907.9), 7대 라리보(A. Larribeau, 元亨根) 아드리아노(1907. 9~1909. 1), 8대 투르니에(F. Tournier, 杜啓昌) 프란치스코(1909. 5~1910. 1), 9대 데예(A. Deshayes, 曹有道) 알베르토(1910. 1~2), 10대 포아요(V. Poyaud, 表光東) 베다스토(1910. 6~1921. 1), 11대 에카르트(A. Eckhardt, 玉樂安) 안드레아 (1921. 5~1923. 11), 12대 슈미트(C. Schmid, 金時練) 그리 소스토모(1923. 11~1927. 5), 13대 로트(L. Roth, 洪泰華) 루치오 (1927. 5~1930. 7) , 14대 담(F. Damm, 卓世榮) 파비안(1930. 8~1949. 5) . [본당 설립] 원산은 1876년에 체결된 한일 간의 불평 등 조약 즉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에 의해 1880년 5월 개항된 곳으로 인구가 집중되어 있던 신흥 도시였다. 1884년 원산 공소가 설립될 당시에는 신자수가 20 명에 불과하였고 예비 신자도 1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1886년 한불조약(韓佛條約) 체결의 결과로 1887년 7월 에 드게트 신부가 원산에 정착하여 원산 본당을 설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불조약에 대한 인식의 미비, 완고한 주민들의 반발, 지방관의 자의적인 횡포로 드게트 신부가 관가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 다. 이 사건으로 인한 일시적인 신부의 공석 상태로 안변 본당과의 통합 본당 형태로 존속하였다가, 이후 안변 본 당과 원산 본당이 다시 분할되었다. 2대 주임 마라발 신부는 교회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는데, 북쪽 지역까지 전교할 계획을 세웠으나 재정상의 문제로 계획을 실현하지 는 못하였다. 4대 주임 브레 신부 재임기에 목조 건물로 된 사제관이 완공되었고, 1890년 67명에 불과했던 신자 수가 1899년에는 486명으로 10년 만에 7배나 늘었다. 이러한 급격한 교세 팽창의 이면에는 늘 교안(敎案)이라는 신자와 외교인 간의 분쟁이 뒤따랐는데, 특히 브레 신부의 '발포 사건' 은 교회와 선교사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사건이었고, 이로 인해 브레 신부는 서울로 전임되었다. 5대 주임 베르모렐 신부는 간도 지방의 첫 교우인 김영 렬(金英烈, 요한)로 하여금 이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여 함경북도 회령에 새 공동체를 설립할 수 있었다. 1897년 5월 브레 신부가 다시 원산 본당으로 돌아와 실추된 선교사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전교에 역점을 두고 사목 활동을 활발하게 벌여 나갔으며 교안 사건에는 가능한 개입하지 않으려는 신중한 입장을 취하였다. 브레 신부가 이임한 이후 1907년부터 1910년까지 라리보, 투르니에, 데예 이 3명의 주임 신부가 재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안정된 활동을 펴지도 못한 채 본당을 떠나거나 사망하였다. 원산 본당이 안정을 찾게 된 것은 10대 주임 포아요 신부가 부임한 이후부터였다. 포아요 신부의 재임 중에 특기할 만한 일은 프로테스탄트와 경쟁적인 선교 활동을 벌이며 성영회 등 육아, 교육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점 등을 들 수 있다. [변모와 폐쇄] 1920년 8월 5일 원산교구가 설정되고, 베네딕도회가 1921년 5월에 서울교구로부터 함경도 지역의 본당 사목을 인수하면서 11대 주임으로 에카르트 신부가 부임하였는데, 이때부터 원산 본당은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에카르트 신부는 1921년 5월 서울에서 오병주(吳秉珠)를 초빙하여 본당 구내에 빈민 아동 교육을 위한 일종의 무료 강습소를 개설하였는데, 이듬해 3월 4년제 남녀 보통학교인 해성학교(海星學校)로 발전하였다. 베네딕도회가 원산교구를 맡게 된 4년여 만인 1924 년 12월에 임시 성당을 축성하고 준공식을 가졌다. 1930년부터 주교좌 성당 건축 계획에 따라 1937년에 성당 신축이 시작되어, 이듬해 9월 25일에 2,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현대식 성당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1925년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원산교구에 진출하면서 수녀들이 본당 내에 야학, 시약소, 노인과 아동을 위한 교리 강습소, 해성유치원 등을 개설하여 운영하였다. 8 · 15 광복 이후 북한 공산 정권의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됨에 따라 1949년 5월 9일 교구장 사우어 주교,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원장 로트 신부 등이 체포된 데 이어 5월 11일 본당 주임 담 신부, 보좌 노이기르크(P. Neugirg, 兪) 신부도 체포되었다. 또한 성당을 포함한 모든 교회 재산이 몰수당함으로써 본당이 폐쇄되어 원산교구의 모든 본당과 함께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폐쇄되기까지 관내에 7개의 공소가 있었다. → 원산 대목구 ; 침 묵의 교회)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함경도 천주 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 -, 《함경도 선교 사서한집》 I ,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5/ -, 《원산교 구 연대기》,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1991. 〔金志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