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 그리스도교

原始 - 敎

[라]Christianitas primitiva · [영]primitive Christia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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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교회 설립(30/33)부터 2세기 중엽까지의 교회를 가리키는 용어. "사도 교부 시대"(1세기 말~2세기 중 엽)와 시기적으로 겹치며, "고대 교회" (30~604)보다는 시기적으로 짧다. [개념 및 시대적 한계] 19세기 초부터 일반적으로 사 용되는 "원시 그리스도교" 라는 신학적 개념은 정의하거나 시대적 경계를 규정하기 어렵다. 원시 그리스도교의 출발점을 예수의 말씀과 행적까지 소급시키는 주장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최초의 교회 설립부터로 여긴다. 그러나 그 하한선은 70년, 1세기 말, 2세기 중엽 등 의견이 분분하다. 만약 70년까지의 시대와 뒤이은 시대를 쉽게 동일시할 수 없다고 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70년을 원시 그리스도교의 종점으로 잡는다면, 70년 이후로 추정되는 복음서를 비롯한 거의 모든 신약의 문헌들이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에서 제외된다. 그로 인해 신약성서는 원시 그리스도교 이후의 작품이 되기 때문에, 신약 성서를 성립시킨 교회와 그 후의 교회를 구별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 모든 신약성서의 편찬이 끝나는 시기까지를 원시 그리스도교의 시대적 한계로 삼자는 주장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 경우 뒤이은 '초기 가톨리시즘' 의 성향이 이미 신약성서에서 확인되고, 더욱이 신약 중에서 일부 문헌들(예컨대 사목 서한과 베드로 후서)의 저술 시기를 2세기 초로 여긴다면, 이미 1세기 말부터 나온 사도 교부들의 저술들과도 시대적으로 겹쳐져 시대적 경계선을 긋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원시 그리스도교의 개념 내지는 특징에서 시대적 경계를 정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의견이 등장하였다. 원시 그리스도교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종말의 절박감이다. 이 절박감이 진정되는 시기를 대체로 2세기 중엽으로 보고, 그때까지를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로 부르 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종말의 지연 사상은 2세기 전의 신약성서에 암시되어 있고, 2세기 초로 추정되는 베드로 후서에서는 그 지연 의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원시 그리스도교의 종점을 교회의 때' 의 개입과 교회가 구원 기관이 되는 시점으로 잡으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지만, 이 특징 역시 초기 가톨리시즘과 확실히 구별되는 개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결국 "원시 그리스도교와 초기 가톨리시즘 사이의 경계선이 이렇게 유동적이기 때문에, 원시 교회는 신학 적으로 고찰할 때 하나의 확실한 연대적 시기는 아니고, 비판적인 숙고를 통하여 인식될 수 있는 하나의 역사적 기준으로 제시될 뿐이다" 라는 역사가(W.G. Kümel)의 말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원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우리는 특히 이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예루살렘의 원시 교회] 원시 교회는 부활을 체험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그 밖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오순절에 성령 강림을 체험함으로써 믿는 이들의 공동체로 발족하였다. 그것은 동시에 교회의 창립이었기에, 교회의 역사는 여기서 시작한다. 이 최초의 교회와 함께 처음부터 팔레스티나 지역에, 특히 갈릴래아 주변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존재하였다는 주장은, 부활의 발현이 예루살렘에서와 마찬가지로 갈릴래아에서도 있었을 것이라는 개연성에도 불구하고 확실하지 않다. 그리스도교를 탄생시킨 '부활 신앙' 은 예수를 메시아 이자 주님으로 선포하고, 그분이 최고의 심판자로서 영광 중에 재림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신앙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신자들은 빵을 나누는 예식 때 '마라나타' (1고린 16, 22)를 노래하며 재림을 고대하였다. 이러한 신앙 내용은 유대교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유대교에 머무르면서 종교 의식에 참여하 고 율법도 지키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빨리 식별되지는 않았다.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은 대부분이 아람어를 사용하 는 유대계 그리스도교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디아스포라 출신으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보수적인 유대계 신자들과는 달리 그리스계 신자들은 진보적이었으므로, 그들은 곧 유대교와의 차이를 알아차리고 율법과 성전에 대하여 비판적이 되었다. 특히 그들의 대표격인 스테파노는 성전과 율법을 모독하였다고 고발되어 처형되고, 그 여파로 그 리스계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그들에 의하여 복음이 사마리아와 다마스커스 · 시 리아의 안티오키아 · 지중해의 연안 도시들을 거쳐 멀리 로마에까지 전해졌다. 이 무렵 베드로와 바오로도 전도 에 가담한다. 점차 이방인 개종자들이 증가함에 따라 그 들에게도 율법을 적용시켜야 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되었 다. 이에 예루살렘 사도 회의(49경)는 그들을 율법에서 해방시키기로 결정하였고, 그것은 세계 교회로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이후 이방인 선교에 중대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사도회의 이후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가 베드로에 이어, 율법에 충실한 유대계 그리스도교인을 대변하며 예 루살렘 교회의 유일한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도 율법의 파괴자라고 하여 살해된다(62/63). 이로 써 예루살렘 교회와 신자들은 중심을 잃게 되었고, 이어 제1차 유대 독립 전쟁(66~70)이 일어나자 전쟁 초기에 많은 신자들이 요르단 강 동쪽 펠라(Pella)로 이주하였 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회당에서 제명됨으로써 유대 교와의 전체적인 이별이 시작되었고, 그것은 70년의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한편 처음부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를 맡았고 유대교에 대해서 온건적인 태도를 보여온 베드로는,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가 헤로데 아그리파 1세(37~44)에 의하여 살해될 당시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마도 로마로 가서 그곳에 교회를 세웠을 것이다. 그는 사도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다시 예루살렘에 나타났으나 곧 예루살렘을 떠났다. 로마 교회는 57년경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편지를 썼을 때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 설립은 로마에서 쫓겨난 아퀼라와 브리스킬라 부부가 51년경에 고린토에 나타나 것으로 미루어, 40년대 말경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 교회의 형성 과정을 복원하는 것은 자료의 부족으로 어 렵다. 베드로는 네로 황제(54~68)의 박해 때 바오로와 함께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로마 체재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방인의 원시 교회]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인 그리스도교 원시 교회는 안티오키아 중심의 유대인과 이방인 혼성 교회로 옮겨졌고, 이어 바오로의 이방인 교회로 옮겨졌다. 이렇게 볼 때, 원시 그리스도교를 '사도 시대' 에서 '사도 후 시대' 로 이행한 것으로 보는 것은 부적절하 다. 왜냐하면 원시 그리스도교는 이미 사도 시대에 유대인 교회에서 이방인 교회로 근본적으로 전환하였기 때문이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스테파노의 순교 여파로 예루살렘에서 추방된 일부 헬라계 사람들의 선교에 힘입어 설립되었다. 여기에 바르나바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견되었고, 그는 다르소로 가서 바오로를 데리고 왔다. 바오로는 유대교의 열성파로 한때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으나 예수의 발현 체험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그리스도교의 열렬한 선교사가 되었다. 나아가 그는 이방인 사도로 불림을 받았다는 사명감에서 이방인 선교에 전념하였다. 바르나바의 초대로 안티오키아에 온 바오로는 여기서 그 와 함께 1년 동안 이방인에게 선교하였다. 이때부터 이 곳의 신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 이라 불리게 되었 다(사도 11, 22-26). 이것은 안티오키아 교회 역시 처음 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이 무렵에 와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유대교의 한 종파가 아니라 별개의 종교 단체로 간주해야 할 만큼 성장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바오로는 안티오키아에서의 선교에 만족하지 않고, 그 리스 · 로마 문화 중심지 가운데 하나인 이 도시를 거점으로 삼고 이후 이방인 전도 여행을 한다. 45년경부터 시작한 3회에 걸친 전도 여행을 통하여 그는 시리아와 소아시아, 그리스에까지 복음을 전하며 곳곳에 교회를 세웠다. 그는 뒤늦게 선교에 가담하였을지라도 세계적인 이방인 선교 시대를 열었다. 특히 성공적인 그의 선교 결 과로 교회 안에 이방인이 유대인을 능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방인에게도 율법이 유효하냐는 문제를 유 발하여 서로의 대립을 초래하였다. 이 문제는 교의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이방인에 대한 선교 방법과도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안티오키아 교회 내에서 일어 난 것이 아니고 밖으로부터, 즉 예루살렘 교회의 보수파 유대인들이 바오로의 선교 방법에 이의를 제기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문제를 놓고 한편으로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다른 한편으로는 율법의 준수를 주장하는 야고보와 베드로가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사도 회의는 이방인은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고, 이로써 문제 는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사도회의 이후 베드로가 안티 오키아 교회를 방문하였을 때, 이른바 '안티오키아 사 건' (갈라 2. 11-14)으로 문제가 재연되었다. 예루살렘 교회 내의 극히 보수적인 소수가 사도회의 결정에 반대하 여, 베드로로 하여금 안티오키아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 과의 공동 식사를 피하고 교제를 끊게 만든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쟁은 그리스도인과 이 방인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더 분명하게 하도록 자극을 주었다. 바오로는 자신이 세운 공동체들과 서로 연락을 취하는 가운데 수시로 일어나는 용건, 예컨대 자신의 사도직과 십자가 신학을 부인하는 자들과 투쟁하기 위해 또는 이단을 경고하고 교회의 일치를 촉구하기 위해, 로마서에 서는 특히 자신의 신학을 정리하기 위해, 해당 교회들에 게 편지를 써 보냈다. 그의 이름으로 된 편지는 모두 13 편이지만, 그의 편지로 분명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7편 정도이다. 이것들은 원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길잡이로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또한 가장 오랜 문헌으로 신약 성서에 수록되어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 서한들 을 통하여 그의 신학을 알 수 있다. 그는 한편으로는 유대 그리스도교적인 전통주의자들과의 대결에서(갈라디아 의 유대주의자들), 또 한편으로는 영적주의자들과의 대결 에서 자신의 신학(특히 십자가 신학 · 의화론 · 카리스마론)을 부각시켜야만 하였다. 바오로 자신은 3차 전도 여행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체포되었다. 이로써 그의 전도 여행은 끝나고, 로마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순교함으로써 그의 생애도 끝났다. [원시 그리스도교의 말기] 이 시기는 70년 이후 2세기 중엽까지를 가리킨다. 이 시대는 1세기 말을 기준으로 할 때 전기(前期)와 후기(後期)로 다시 구분된다. 전기 는 신약성서가 성립된 시대이고, 후기는 '사도 교부 시 대' (또는 사도 후 시대)이고, 동시에 '초기 가톨리시즘' 으 로 특징지워지는 시대이다. '초기 가톨리시즘' (Frükatholizismus)이란,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에서 원시 그리스 도교적인 내용들이 완전히 소멸하는 고대 가톨리시즘 (Altkatholizisimus, 2세기 중반~4세기 최으로 이행하는 중간 시기로써, 말하자면 과도기이다. 그런데 전기에서 이미 '초기 가톨리시즘' 의 성향이 나타나는가 하면, 후 기에서는 후속되는 '고대 가톨리시즘' 의 성향들도 확인된다. 이렇게 말기의 원시 그리스도교 역사는 매우 불투 명하다. 전기와 후기에서 부분적으로 중복되는 내용은 특히 종말의 절박감에 대한 후퇴와 이에 따른 교회의 구원 기관으로서의 발전이다. 70년 이후 1세기 말까지, 어쩌면 2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에 진정한 바오로 서한들을 제외하고, 신약의 거의 모든 문헌들이 쓰여졌다. 사도 교부들의 가장 오랜 저술과 오랜 외경 복음서들도 이 시기의 산물이다. 이러한 문 헌들에서 초기 가톨리시름적인 두 가지 발전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첫째는 임박한 하느님의 나라와 임박한 재림 사상의 점진적인 후퇴 현상이다. 사목 서한이 그렇고, 베드로 후서는 특히 그렇다. 그 결과 재림의 지연을 서서히 의식하게 하였고, 특히 루가의 문헌에서는 현재에 대한 구원사적인 해석에서 종말론적인 중간 시기가 나타난다. 그런데 종말의 임박감이 완전히 포기되거나 소멸된 곳에서는 이미 원시 그리스도교의 경계를 벗어나 있었을 것이다. 둘째는 재림의 지연 및 팔레스티나 지역의 원시 교회들과의 관계 상실은 결과적으로 교회를, 성사 집행 규정과 신조의 신경화, 직제 등을 갖춘 영속적이고 안정적인 구원 기관으로 발전하게 하였다. 본래 넓은 사도 개념이 '12 라는 숫자로 한정되는 것은 루가 문헌에서 맹백히 드러난다. 그리고 유대 승계 사상(사목 서한, 글레멘스의 첫 째 편지)과 자연주의적인 성사론(사목 서한과 이냐시오 편 지)의 등장은, 교회가 정착해 가는 명백한 표시들이다. 이러한 발전 과정과 강한 유대적 성향들이 예루살렘 멸망 후 말기 원시 교회에 어떠한 경로로 들어왔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전례 행위 효력의 헬레니즘적 관념 수용과 구원론의 근본적인 변화 등은 확실히 이미 원시 교회 의 경계를 벗어난 개념들이다. 이렇게 원시 그리스도교와 초기 가톨리시즘 사이의 경계선은 유동적이다. 그러므로 원시 그리스도교를 초기 가톨리시즘의 특징에서 부정적으로 정의하려는 시도는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 이후 유대교가 쇠약해지는 것을 계기로 자율성을 획득하고 새로운 세력이 된 그리스 도교는, 로마 제국과 충돌하게 되고 로마 국가로부터 박해(특히 소아시아에서)를 받게 된다. 이러한 박해에 대하여 요한의 묵시록은, 황제를 악마화하여 제국의 멸망이 가까웠음을 예고하며 신자들을 격려한다. 그리고 베드로 전서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기시키며 고난을 참아 내도록 권하고 있다. 배교자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회개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반면, 헤르마스의 《목자》는 종말 이전인 현재의 때를 회개의 마지막 기회로 간주한다. (→ 교회사) ※ 참고문헌  W.G. Kümel, (RGG) 6, pp. 1187~1193/ W. Breuning, Urgemeinde, 《LThK》 10, pp. 551~557/ K.Rahner · J. Ratzinger, Offenbarunt und Üerliefrung, Freiburg, 1965/ Marcel Simon, Les premiers Chrétiens, Collection Que sais-je?, n. 551/ Norbert Brox, Kirchengesschichte des Altertums, Diiseldorf, 1983/ Jost Eckert, 10, 2001, pp. 463~467/ 三好迪, 原始教團, 纈 力 卜 リ ツ ク 大事典》 Il, pp. 786~789. [崔奭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