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교구
原州教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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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본당 분할 계통도(1888년~2001년)>
원주를 중심으로 강원도의 일부와 충청북도 북부 지역의 일부를 사목 관할 구역으로 하는 교구. 1965년 3월 22일 춘천교구에서 분리 · 설정됨과 동시에 서울 · 춘천 · 인천 · 수원교구와 함께 서울 관구를 형성하고 있다. [역대 교구장] 초대 지학순(池學淳, 다니엘) 주교(1965. 3. 22~1993. 3. 12) 2대 김지석(金智錫, 야고보) 주교 (1993. 3. 12~현재). [관할 구역] 강원도 원주시 · 삼척 시 · 태백시 · 영월군 · 정선군 · 횡성군 전 지역과 동해 시 · 평창군 일부 지역 및 충북 제천시 · 단양군 전 지역. [교 세] 1965년 16,232명, 1970년 27,411명, 1975년 32,858명, 1980년 35,307명, 1985년 39,718명, 1990년 43,096명, 1995년 47,497명, 2001년 59,684명. I . 복음의 전래 [제천 · 원주 지방 전래와 발전] 원주교구 지역에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辛酉 迫害) 때이다. 박해가 일어나자 당시 교회의 젊은 지도자 중의 하나였던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이 박해를 피해 서울에서 여주, 원주를 거쳐 제천 배론으로 김한빈 (金漢彬)과 함께 내려왔다. 황사영은 그 해 2월 중순부터 9월 말까지 배론의 신자 김귀동(金貴同, 청양에서 그 해 2월 초에 이주)의 집 뒤에 있는 옹기굴을 가장한 토굴 속에서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서울에서 온 상인(喪人) 이 씨(李氏)라고 하면서 은신해 있었다. 이때 집주인 김 귀동 가족과 동네에 사는 강 그레고리오의 모친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박해로 말미암아 거의 무너지다시피 한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백서>(帛書)를 썼는데, 이 <백서>는 가로 62cm, 세로 38cm 가량 되는 명주 천 위에 13,384자로 된 것이다. 이 <백서>가 중국 북경교구의 구베아(A. de Gouvea, 湯士選) 주교에게 보내지기에 앞서, 그가 그 해 9월 29 일 체포되고 <백서> 또한 압수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황 사영은 11월 5일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로 서소문 밖 에서 능지처참되었다. 가족들은 모두 노비가 되어 귀양을 갔는데, 모친 이윤혜는 거제도로, 처 정명련은 제주도 대정현으로, 아들 황경한(黃景漢)은 추자도로 각각 귀양을 갔다. 그 외에 그를 숨겨 주었던 김귀동을 비롯하여 전국의 많은 신자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가게 되었다. <백서>는 한국 교회의 초창기 30여 명의 지도급 신자들의 삶과 조선 후기 정치사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1814년에 전국적인 기근이 들었는데, 이때 신자들의 재산을 노린 일부 백성과 지방관이 자의로 1815년에 강 원도와 경상도에서 천주교 박해를 일으켰다. 강원도 울 진에 살던 김강이(金綱伊, 시몬) 형제가 1815년 4월에 체포되어 원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왔다. 여기서 이미 갇혀 있던 6~7명의 신자들을 만났는데, 원주에서 신자들 이 옥에 갇히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끗끗하고 결연한 태도로 모든 형벌을 이겨내다가, 옥에 갇힌 지 8개월 되는 그 해 11월 5일 50세의 나이로 쇠약해진 몸에 이질까지 겹쳐서 옥사하였다. 김강이는 원주에서 순교한 첫 순교자가 되었다. 그의 아들 김양범(빈첸시오) 과 손자 김선행(필립보)은 병인박해(丙寅迫害)로 1867 년 9월 수원에서 순교하였다. 그리고 정해박해(丁亥迫 害)가 일어난 1827년 초 경상도에 살던 유순지(라우렌 시오, 일명 性泰)는 가족들과 함께 박해를 피해 단양의 깊은 산골로 이사하였다. 2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잡혀 단양 관아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혹형과 고문으로 한때 배교하였다. 그는 다른 교우들이 안전한 곳으로 피하자 배교를 취소하였으며, 이에 따라 충주 진영으로 이송되 었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감형되어 함경도 무산 으로 귀양을 갔다. 그는 귀양간 곳에서도 드러내 놓고 신앙 생활을 하였지만 그 해 12월(혹은 이듬해 3월)에 숨을 거두었다. 기해박해(己亥迫害) 당시인 1839년 1월 말경 원주시 부론면 손곡 2리 서지 마을에 살던 신자들 중 최해성(崔 海成, 요한)이 체포되어 원주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21 회의 심문과 18회의 고문을 당한 그는 옥에 갇힌 지 8개 월 후인 그 해 8월 29일 29세의 나이로 참수되었다. 그의 고모인 최 비르지타도 조카를 면회하러 감옥에 갔다가 잡혀 갖은 형벌과 고문을 받은 뒤, 그 해 11월 3일 교 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최양업 신부의 활동과 죽음] 우리 나라에서 두 번째로 사제가 된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의 묘는 배론에 있다. 그는 1836년 12월 김대건, 최방제 등과 함께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가서 신학 교육을 받고, 1849년 4월 15일 사제로 수품되었다. 귀국 후 12년 동안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에 살고 있던 4,000여 명의 신자들과 100여 개의 공소를 맡아 사목하면서, 교리서의 한글 번역과 천주 가사(天主歌辭)의 저술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1861년 6월 15일 경상도 전교를 마치고 서울 로 올라오던 중 과로로 문경에서 선종하였고, 그 해 11 월경 당시 신학교가 있었던 이 배론에 묻히게 되었다. 당 시 장례 미사를 집전한 교구장 베르뇌(S.F. Berneux, 張敬 一) 주교는 그의 죽음을 두고 "그의 굳건한 신심과 영혼 의 구원을 위한 불 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 로는 훌륭한 판단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12년 동안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하고 성공적으로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신학교의 설립과 병인박해] 1836년 세 신학생들을 중국 마카오로 파견한 경험이 있는 한국 교회는 박해의 위험성이 있기는 하지만 국내에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배론에 설립하였다. 신학교의 이름은 1861년 10월 에 성 요셉 신학교로 명명되었다. 신학교는 1855년 2월 이전에 설립되었고, 병인박해로 1866년 3월에 문을 닫 을 수밖에 없었다. 신학교를 설립한 이는 당시 교구장 직무 대행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메스트르(J. Maistre, 李) 신부인데, 그는 배론에 와 살던 장주기(張周基, 요셉)의 초가집을 빌려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신학교의 책임자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푸르티에(Pourthié, 申) 신부와 프 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였다. 이들은 방 2칸밖에 안되는 협소한 장소, 위생 환경의 불량, 열악한 교육 시설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 교육에 전념하였다. 두 서양 신부들은 신학생들을 교육시키면서도 교리서의 번역과 조선어 연구와 '라틴 말-한국어' 사전을 만들기도 하였고, 배론 교우촌을 우 리 나라에서 가장 모범적인 교회 공동체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김 사도 요한, 유 안드레 아, 권 요한을 비롯한 10여 명의 신학생들은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서양의 언어, 철학 및 신학을 공부하였 다. 1876년 개항되기 전 서양 학문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우리 나라 교육사에서도 큰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사제 양성의 열매가 맺을 무렵인 1866년에 병 인박해가 발생하여 두 서양 신부들과 3명의 신학생들은 서울에서, 장주기는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또한 배론 교우촌의 신자들 중 하 베드로, 안 바오로, 이 성천(베드로), 이성욱(베드로), 장한여(베드로)와 그의 부인 이 바르바라 등이 순교하였다. 또한 1866년 초 러 시아를 막기 위해 프랑스와 영국 등과 조약을 맺으려는 방책을 올렸던 남종삼(南鍾三, 요한)은 대원군의 냉대를 받고 부친 남상교(南尚敎, 아우구스티노)가 살고 있는 묘재(현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로 내려왔다. 그는 3주간을 머물다가 배론 신학교에 들른 후 서울로 올라갔다. 그 해 정월 15일 고양군의 한 마을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연 행, 21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하였다. 그의 부친은 공주에서, 장남은 전주에서 순교하였고, 부인과 두 딸과 차남은 창녕으로 유배되었다. 특히 신학교의 집주인이었던 순교자 장주기와 남종삼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선포되어 전세계 가톨릭 교 회의 공경의 대상이 되었다. 병인박해 당시 교구 지역에 살던 순교자들은 다음과 같다. 단양의 김작은쇠 토마 · 김 빈천시오는 충주에서, 이용우(베드로) · 이학이(베드로)는 서울에서, 횡성의 김 베드로 · 박도연 · 심정서 · 윤성이(바오로) · 윤여원 이치안 · 장채용 · 김 아가타 · 심 가타리나 · 심 루치 아 · 윤 가타리나는 서울에서, 김 베드로와 아가타는 횡 성에서 순교하였다. 제천의 남영국 · 심서경 · 이 안드레 아 · 이 프란치스코 · 정 프락시스 · 남 마리아 · 남 엘리 사벳 · 유 마리아 · 이 데레사 · 이 엘리사벳 · 지 모니카 등은 서울에서, 송성보 · 송 아우구스티나 · 심노첨 · 탁 씨 등은 충주에서, 장한여(베드로)는 서울에서, 이성권 (베드로)은 청주에서 순교하였다. 평창의 유 베드로는 경기도 죽산에서, 원주 서지의 조치언 · 최 필로메나는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II . 본당의 설립과 확대 한불조약(1886) 이후 선교 활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서 울에서 종현 · 약현 성당이 설립되었고, 지방에서도 본당 설립이 활발해졌다. 1888년 6월 20일 강원도에서 최초 로 횡성에 있는 풍수원(豊水院)에 본당이 설립되었다. 이곳에 신자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1866년 병인박 해를 피해 신자들이 곳곳에서 이곳으로 모여들어 교우촌을 만들면서부터이다. 초대 주임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르 메르(L.Le Merre, 李類斯) 신부가 부임하였는데, 관할 구역은 강원도 전역과 경기도 일부를 포함한 12개 군, 29개 공소로 신자수는 2,000명이었다. 르 메르 신 부는 1889년에 그가 순회한 30개 공소에서 성인 87명에게 세례를 주고, 이듬해에는 73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는 본당의 터전을 닦은 후 풍수원에서 분할된 원주 본 당 신부로 부임하였다. 후임으로 1896년 4월 26일 예수 성심학교 출신 첫 사제인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부임하여 1943년 10월 23일 81세로 선종할 때까지 사목 활동을 하였다. 정규하 신부의 부임 당시 관할 지역은 횡성, 화천, 양구, 인제, 홍천 등지로 정기 순방에만 3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성당은 처음에 20여 칸의 초가 한국식 건물이었는데, 1909년 정규하 신부가 그 동안 준비해 놓은 돈과 교우들의 헌금 8천 원으로 중국인 인부를 고용하여 성당을 건립하기 시작하였다. 1910 년 높이 5m, 건평 120평의 벽돌 성당을 준공하였다. 이 성당은 강원도에서는 처음으로 지어진 서양식 벽돌 건물이자, 국내에서는 일곱 번째의 고딕 ·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다. 이어 1912년에는 성당 뒤편에 벽돌 사제관을 신축하였다. 원주(현 원동)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1896년 8월 17일 르 메르 신부가 원주 군청 가까이에 거처할 집을 구입하고 부임 했다. 당시 공소는 20개이고, 신자수는 1,137 명이었다. 1898년 7월 리굴로(Rigoulot, 睦) 신부가 부임하였는데, 당시 원주읍에는 교우 집이 넷밖에 없었다. 그 래서 그는 시골로 본당을 옮기려고 추진하던 중 1900년 3월 장티푸스에 걸려 선종하였다. 1900년 5월 부임한 드브레(E. Devred, 俞世竣 신부는 원주, 양평, 제천, 영 월, 단양, 여주 등지를 관할하였다. 1902년 사제관 부근 의 가옥 12채를 매입하여 성당 신축을 위한 터전을 마련하였고, 1913년 건평 70평의 고딕식 성당을 신축하여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 하였다. 1905년 일제의 보호 정치가 시작되자 교육을 통하여 국권을 수호할 목적으로 교육열은 그 어느 때보 다도 높아졌다. 1910년 조제(Jaugey, 楊秀春) 신부가 야 학을 설립, 운영하였다. 이어 1931년에는 4년제 사립 학교를 설립, 운영하였으나 1937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쇄되었다. 1934년에 소화(小花)유치원을 설립하였으며, 이곳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부임하여 유 치원과 소화학원 학생들을 돌보고 가르쳤다. 1898년 제천 봉양의 오미(梧山) 마을에서 용소막(龍 召幕)으로 이사 온 최도철(崔道澈, 바르나바)과 신자들은 신부 방이 포함된 초가 10칸의 아담한 경당을 세우고 공소를 설립하였다. 최도철은 1893년 르 메르 신부로부터 전교 회장으로 임명되어 각처를 다니며 전교하였다. 1899년 오미에 살던 백 씨와 선병로(宣秉魯, 베드로) 일 가가 용소막으로 이사하여 교우촌을 이루었다. 최도철은 본당 승격을 청원하였고, 원주의 드브레 신부와 풍수원의 정규하 신부가 협의하였으며, 이에 뮈텔 주교는 1904년 본당으로 승격시켰다. 초대 본당 신부는 포아요 (V. Poyaud, 表光東) 신부로 사방 300리에 사는 교우들 을 사목하였다. 관할 지역은 원주군 일부, 평창, 제천, 영월, 단양군 등 5개 군에 15개의 공소를 담당하였고, 당시 신자수는 864명이었다. 1910년 포아요 신부가 서 울로 전임될 때에는 신자수가 1,238명으로 증가하였다. 후임인 기요(J.Guillot, 吉) 신부는 새 성당 건립을 계획하 고 우선 성당 건축에 필요한 목재를 운반해 왔다. 이러한 가운데 기요 신부가 1914년 4월 용산 신학교로 전임되 고 시잘레(P. Chizallet, 池士元) 신부가 3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시잘레 신부는 성당 신축 계획을 본격적으로 실천에 옮겨 묘재 공소 이석윤(李錫允) 회장의 알선으로 중국인 기술자를 고용하고 신자들과 합심하여 1915년 가을 건평 100여 평의 아담한 벽돌 성당을 신축하였다. 대화(大和)는 1890년대에 풍수원 본당의 공소로 시작 하여 1912년 원주 본당, 1921년 강릉 본당, 1923년 주 문진 본당으로 관할이 바뀌다가 1931년 5월 윤예원(尹 禮源, 토마스) 신부가 본당으로 설정된 대화 본당에 부임하였다. 그는 상대화리에 민가를 개조하여 초가 성당 을 건축하였으나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에 1933년 하대 화리에 있는 구 공립 보통 학교 교사를 매입하여 성당으 로 개축하고 이전하였다. 1937년 말 신자수는 437명이었다. 횡성(橫城)은 일찍부터 풍수원 본당의 공소로 있다가 1930년 양덕환(梁德煥, 안드레아) 신부가 초대 본당 신부로 부임하였다. 성당은 정규하 신부가 1,500원을 들여 대지를 포함한 건물을 매입하여 동, 서, 남면이 내려 다보이는 높은 대지에 한식 기와집으로 지었다. 본당으로 설정된 지 40일 만에 맞이한 성탄 대축일 미사에 참여한 신자는 400명이었다. 공소는 17개였다. 1933년 기와 지붕의 목조 성당을 건축하였다. 양 신부는 현재의 사제관 터에 있던 초가집을 매입하여 이 건물에 공민 학 교를 설립하여 가르친 결과 많은 학생들이 배출되었다. 그 해 5월 이보환(李普煥,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3개월 간 사목하였다. 그 해 8월부터 강원도 전역을 담당하게 된 골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사목 활동을 담당하였다. 제천(현 남천동) 본당은 1940년 7월 14일 용소막 본당 에서 분리 · 설정되어 박일규(朴一圭, 안드레아) 신부가 부임하였다. 당시 제천읍 부리 382-1번지에 있는 한 가옥을 구입하여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1942년 2월에 부 임한 윤예원 신부는 다시 다른 한옥으로 이전하였다. 1943년 12월에 부임한 봉희만(奉喜萬, 안토니오) 신부는 큰 창고가 달린 일본식 집을 구입하여 성당으로 개조하였고, 1947년 5월 15일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 가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Ⅲ . 교구의 설정과 성장 교황 바오로 6세는 1965년 3월 22일 원주교구를 춘천교구에서 분리 · 설정하였다. 교구장 지학순 주교는 그 해 6월 29일 원주 원동 성당에서 주교로 성성되었다. 지학순 주교의 사목 표어는 '빛이 되라' (Fiat Lux)로서, 세상에 끊임없이 옳고 바른 영향을 주어 세상을 선(善)에 로 승화시키는 역할을 하자는 것이었다. 교구 설정 당시 교구의 관할 구역은 강원도 원주시, 원성군, 영월군, 삼 척군, 정선군, 경북의 울진군이었고, 13개 본당에 사제 수는 한국인 9명, 골롬반 외방선교회 11명이었으며, 신 자수는 13,390명이었다. 지학순 주교는 교구 조직을 편성하고, 사제 피정(1965. 10. 8~12), 지구 사제 회의(1966. 3.15,23) 등을 통해 결속을 다져 나갔다. 1960년대에 신설된 본당과 공소는 마차, 도계, 황지, 사직 본당과 쌍용, 석항, 무장 공소 등이었다. 교구 차원에서 서로 도움으로써 가난을 몰아내고 그리스도인적 삶을 살 수 있는 신협 운동을 1966년 11월부 터 전개하여 원주, 황지, 문막, 단구동, 삼척에서 조직하였고, 1969년 10월 진광 학원 부설 협동 교육 연구소(소 장 : 장화순)를 설립하였으며, 1972년 6월 한국 신협 강원 지구 평의회(간사 : 김용연)를 설립하였다. 또한 1966 년 10월부터 바티칸 공의회의 근본 정신에 적극 참여하 기 위한 첫 활동으로 교구 내에 많은 문맹자들을 위한 문맹 퇴치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고, 1967년 8월 넝마주이 들을 위해 '청소년 자활대 합숙소 를 건립하였다. 지학순 주교는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자치적 본당 운영을 위해 각 본당별로 '자치 위원회' (후에 사목 위원회→사도회로 변경) 등을 구성하였다. 또한 교육 사업을 위해 1967년 8월 육민관중학교를 인수하여 진광중학교(真光中學校) 를 설립하였고, 1973년에는 진광종합고등학교를 개교하였다. 그리고 1968년 7월 지역 사회의 개발과 문화 향 상에 공헌할 목적으로 원주 가톨릭 센터를 준공하였고, 1979년 4월에는 제천 가톨릭 회관을 개관하였다. 이는 교회의 사회 참여와 봉사, 간접적인 선교 활동 및 지역민 들의 경제, 사회, 문화 향상에 기여하는 교회의 선구적인 활동이었다. 1967년 8월에는 가톨릭 학생 기숙사를 개 관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사목 활동에 불편을 주던 불합 리한 관할 구역을 새로 조정한 결과 1969년 5월 춘천교 구에서 횡성군과 평창군 일부가, 청주교구에서 제천군과 단양군이 편입되었고, 그 해 6월 울진군을 안동교구로 이관하였다. [격동과 소용돌이를 짊어진 교구] 1970년 9월 지학순 주교는 매스컴의 사회적 역할이 지대한 점을 들어 복음 전파와 홍보 매체를 통한 사회 참여를 하고자 원주 문화 방송국을 5 · 16 장학회와 공동으로 설립하였다. 그러나 원주 문화 방송국의 부정이 드러나 이듬해인 1971년 10 월 5일 오후 7시 30분 교구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등 1,500명은 원동 성당에서 '부정 부패 일소를 위한 특별 미사 를 봉헌한 후 부정 부패 규탄 궐기 대회를 열고, 부정 부패 규탄문, 결의문을 채택하였으며, 구호를 외치며 가두 시위를 하였다. 이 땅에 만연한 부정 부패와 불의가 사라지고 정의로운 사회가 이룩되기를 기원하는 철야 기도를 하면서 7일 오후까지 비폭력적인 연좌 성토 대회를 가졌다. 교구에서는 5 · 16 장학회에 시정을 요구하였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에 어두운 현실을 절감하며 9월 20일 교구 성직자와 평신도 대표들이 회의를 열고, 교구의 투자액이 문제가 아니라 권력만 믿고 부정 부패 를 일삼는 제도화된 불의에 근본적으로 도전하여 부정 부패의 풍토가 개선되도록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날은 한국 가톨릭 교회가 그 모습을 새롭게 하여 인간 의 보편적 구원을 위해 노력할 의무를 부여하며 가르치 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신학을 실천하는 교회로 새 출 발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일깨워 주는 행동은 꾸준히 전개되었으며, 주교단에서도 11월 14일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 는 공동 교서를 발표하였다. 이로써 원주교구는 정의 평화 운동의 중심에 서 있게 되었다. 지학순 주교는 1974년 7월 6일 오후 4시 50분 김포 공항에 귀국하자마자, 긴급 조치 1호와 4호 위반 혐의로 중앙 정보부에 강제 연행되었다. 그 다음날부터 교구에 서는 교구장의 불법 연행에 따른 전국적인 홍보 활동 전 개와 전문을 발송하기로 하였고, 8일 긴급 교구 사제 회의를 열었다. 그날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은 중앙 정보부에서 지학순 주교를 면회하였고, 10일 주교 회의가 소집되었다. 10일 오후 6시 명동 성당에서 윤공 희(尹恭熙, 빅토리노) 대주교의 주례로 정의 평화와 지 학순 주교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였다. 지학순 주교는 7 월 23일 명동 성모병원 성모 동굴 앞에서 300여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에게 "유신 헌법은 진리에 반대되고, 민주 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여 조작된 것이므로 무효" 이며, "공판을 위해 비상 보통 군법 회의에 출두할 수 없다"는 내용의 양심 선언을 하였다. 이때부터 정의 평화와 지학순 주교를 위한 기도회가 교구를 비롯하여 전 국적으로 계속 열렸다. 지학순 주교는 8월 12일 3차 공 판에서 징역 15년 자격 정지 15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 속되었다. 9월 23일 원동 성당에서 300여 명의 신부가 참석한 성직자 세미나에서 지학순 주교의 실질적인 행동에 자극을 받아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 의 결성을 논의하였다. 이는 이 사건에 대한 분노의 표시이긴 했지만, 교회의 사회 정의 활동에 대한 갈증이 그만큼 강했던 것 이다. 26일 정의 구현 사제단은 1차 시국 선언문을 발표 하였다. 10월 9일 가톨릭 대학에서 개최된 전국 성년 대 회 미사 후 지학순 주교의 석방을 촉구하며 가두 시위를 벌였다. 10월 14일에 열린 주교 회의에서는 지학순 주 교의 사회 참여에 대한 양심적인 지지를 표명하는 주교단의 메시지가 발표되었다. 연이은 기도회가 전국적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지학순 주교가 1975년 2월 17일 구속 집행 정지로 수감된 지 226일 만에 출감하였다. 그 다음 날 오후 6시에 명동 성당에서 정의 구현 사제단 주최로 지학순 주교 출감 환영 및 인권 회복 기도회가 열렸다. 2 월 19일 지학순 주교는 교구로 돌아왔고, 전국에서 온 60여 명의 사제와 5천여 명의 신자가 모인 가운데 미사를 집전하였다. 특히 이 사건이후 골롬반 외방선교회 신 부들은 법적 체류 기간을 2개월에 한 번씩 갱신받아야 하는 고충을 겪었다. 결국 총대리 클라크(L. Clarke, 정) 신부는 재입국 허가를 받지 못해 입국하지 못했다. 1976년 3월 1일 오후 6시 명동 성당에서 3 · 1절 기 념 미사가 봉헌되었다. 미사 후 7명의 신부들과 프로테 스탄트 성직자 및 재야 인사들이 서명 날인한 '민주 구 국 선언' 이 낭독되었다. 이 사건으로 교구에서는 신현봉 (申鉉奉, 안토니오) 신부가 강제 연행되었고, 11일 '정 부 전복 선동 사건' 과 관련한 긴급 조치 9호 위반 혐의 로 구속되었다. 12월 29일 서울 고법에서 신현봉 신부 는 징역 3년 자격 정지 3년을 선고받았고, 이듬해 3월 22일 대법원에서 이 형량이 확정되었다. 1976년 3월 15일 명동 성당에서 구속 사제들을 위한 특별 미사가 봉헌되었고, 계속 전국적으로 구속된 사제들과 고통당하는 이들, 국가를 위한 특별 미사와 기도회가 계속 봉헌되었다. 충남 홍성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신현봉 신부는 1977년 7월 17일 형 집행 정지 결정에 의해 석방되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 문화원에서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의 주동자로 밝혀진 문부식과 김은숙은 3월 28일 원주에 찾아와 최기식(崔基植, 베네딕도)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최기식 신부는 이들을 설득하여 3월 31일 자수하게 하였다. 4월 2일 배후 조종자로 수배 된 김현장이 자수 형식을 밟아 검거되었다. 그는 1980 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검문을 피해 최기식 신부가 있는 원주 교육원에서 1년 10개월 동안 숨어 있었다. 최기식 신부는 광주의 악몽과 그간의 고생으 로 초췌한 모습이 되어 찾아온 사람을 보호한 것은 떳떳 하고 당연한 일로 성직자의 위치에서 가장 양심적인 일이라고 하였다. 4월 8일 최기식 신부 등이 구속되었는 데, 김현장을 22개월 간 은닉시켰고, 도피 자금을 주었 으며, 4일 간 문부식과 김은숙을 숨겨 주었다는 것이 그들의 구속 사유였다. 당국과 언론은 최기식 신부의 범인 은닉 문제에 대해 확대 선전하고 원주 교육원을 마치 용 공 단체의 소굴인 양 몰아 갔다. 11일 교구 사제단은 국 민과 당국에 사건의 진상을 알리고 기본 입장을 밝히기 위해 '우리의 입장' 을 발표하였다. 28일 명동 성당에서 최기식 신부와 부산 미 문화원 사건 관련 구속자들을 위한 특별 미사가 열렸다. 1983년 3월 대법원에서 최기식 신부는 징역 3년에 자격 정지 2년형이 확정되어 대구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그 해 8월 12일 형 집행 정지로 석 방되었다. 그날 오후 원동 성당에서 열린 환영 미사에서 최기식 신부는 "성직자로서 양심적으로 판단하고 처신해 왔기 때문에 마음은 항상 편안하였으며, 후회는 없다" 고 하였다. [남한강 유역 대홍수와 재해 대책위원회] 1972년 8월 남한강 유역에 집중 호우가 내려 수재민 145,000명, 농 경지 피해 19,645 정보, 주택 피해 22,967동, 공공 시 설 피해 44억 원이란 엄청난 재해를 입었다. 이에 지학순 주교는 근본적인 수해 복구를 위해 9월 국제 까리따 스와 서독 주교단에 이 같은 피해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호소하였다. 1973년 1월 서독 정부가 240만 마르크, 유 럽 까리따스가 51만 마르크를 원조하였다. 이에 교구에서는 '원주교구 재해 대책 사업위원회' 를 구성하여 교회 사업만이 아니라 지역 사회 개발 사업 차원으로 각계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였다. 재해 대책 사업은 1단계로 긴급 구호 식량 보조 사업, 2단계는 전답 복구 등 생산 기반 조성 사업, 3단계는 부락 개발 사업, 4단계는 지역 산업 개발 사업으로 전환시켜 나갔다. 이 사업은 지연과 혈연, 종교나 이념, 이해 관계를 초월하여 사랑과 봉사의 자세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관심과 지원을 해주었다. 이 사업은 우선적으로 재해를 입은 주민들을 위한 지원 사업이었으나 점차 농촌 개발 을 지원하는 쪽으로 발전해 갔으며, 보다 근본적이고 구 조적인 모순들을 타개하려고 힘썼다. 낙후된 부락을 선 정하여 공동 이익이 될 사업들을 추진하도록 지원하였 고, 협동 정신을 일깨우는 계몽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 으며, 신용 협동 조합과 소비자 협동 조합을 육성하기 위 해 노력하였다. 이렇게 출발한 재해 대책위원회는 1979 년 사회 개발위원회로, 1983년 11월 사회 사업국으로, 1990년 2월 사회 선교국으로 명칭을 바꾸어 가면서 복지 사업 분야에 주력하였다(1993. 12 사회 개발 사업 종료).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할 교회 소명의 응답] 1967년부 터 본격적으로 실시된 평신도 교육은 평신도의 자주성과 기능을 존중하는 방향에서 3단계로 진행되었다. 1단계 는 1967년부터 1969년 사이에 이루어진 '본당 지도자 교육' 으로, 1969년에 '본당 · 교구 사목위원회' (교구 사 목 회장 : 장화순)를 구성하여 평신도 조직을 정립하였다. 2단계는 1970년부터 1972년 중반까지로 본당과 교구 사목위원회가 주체가 되어 전 신자들의 교육' 을 실시하였고, 1970년 7월 30일부터 8월 2일까지 꾸르실료 운동을 도입하였다. 3단계는 1972년 8월부터 신자들을 계 층별로 분류하여 '계층별 교육' 을 실시했으며, 교육을 조직으로 연장하여 청년회, 부녀회, 군종 후원회 등을 조 직하였다. 이러한 평신도 조직은 사명과 열의에 차서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 는 교구 사목 지침에 따라 가난한 형제들과 함께하며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으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교회의 소명에 응답하였던 것이다. 교구장의 사목 지침에 따라 1977년 10월 가톨릭 센터 내에 생활 문제 상담소를 설치 운영하였고, 의료 활동을 통하여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복음화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도움으로 1970 년 10월 성 바오로 병원을 개원(1985. 10 폐원)하였다. 1970년대에 봉산동, 일산동, 고한 · 사북, 매포 본당이 신설되었고, 배론 성지 개발이 1972년부터 시작되어 그 해 8월부터 10개년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1976년 6월 에는 학교 법인 성심학원(1984. 10 철수)과 배론 성지 개 발위원회를 구성하여 함께 개발해 나가기로 하였다. 1977년 5월 서울교구 양기섭(梁基涉, 베드로) 신부가 배론 성지에 부임하여 전국적인 모금 활동과 함께 본격적인 개발 사업을 벌여 나갔다. 1980년대에는 교구 내에도 크고 작은 행사들과 더불어 많은 성장을 이룩하였는데, 특히 그 동안 힘써온 성소 개발 노력이 결실을 보는 시기로서 많은 사제(23명)들이 배출되었다. 그 결과 외국 선교사의 도움 없이 자립이 가능하게 되었고, 1983년 5월 그 동안 교구 내에서 활동 하던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신부들이 교구를 떠나 더 사제가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갔으며, 김진형 신부가 외방 선교를 위해 1981년 11월 파푸아뉴기니 마당(Ma Dang) 교구로 파견되었다. 또한 서부동, 태장동, 사북 본당이 신설되었고, 1983년 8월 지구를 재조정하여 원주, 제천, 영월, 태백, 영동 지구로 구분하였다. 한국 교회 200주년을 맞는 교구의 활동으로 교구 신앙 대회를 1981년 9월 개최하였고, 1983년 9월 교구 사목 회의를 개최하였으며, 200주년 기념 사업으로 200 주년 기념 성당(태장동)을 건립하고 사회 복지 시설인 노인 요양원 '사랑의 집' (1984. 7)을 건립하였다. 하이디 브 라우크만(Heide Brauckmann) 수녀는 1982년 1월 '원주 가톨릭의원' (1990. 3 가톨릭 병원으로 됨)을 열어 지역 내 가난한 이들에게 의료 혜택을 주기 시작하였다. 이어 지역 사회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봉양 사랑의 집' (1986. 12), '모니카의 집' (1987. 4), '안나의 집' (1988. 8)을, 가 난하고 무의탁한 심신 장애인들을 위해 '천사들의 집' (1989. 11)을, 불우 청소년을 위해 '청소년의 집' (1985. 12), '대철 베드로의 집' (1989. 3), '대건의 집' (1989. 10), '살레시오의 집' (1989. 5) 등을 개원하였다. 또한 1982 년 3월에 어린이 주보인 《우리 친구》를 발행하였고, 그 해 11월 대학생 연합회를 창립했으며, 1984년 4월 교구 정의 평화위원회를 발족하였고, 1985년 2월 '젊은이 모임' 을 개최하였다. 그리고 공소 신자들의 신앙심 함양과 공소 사목의 활성화를 위해 1983년 12월 '공소 지도자 교육' , 1984년 2월 공소 '상록 전교사' 교육 등을 실시 했으며, 1984년 3월 공소 사목 협의회를 발족시켰다. 지학순 주교와 하이디 브라우크만 수녀는 1983년 9월 가난한 이들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해 봉사하 는, 그리고 봉사를 통해 전교 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전 교 봉사 수녀회' (1988. 9 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녀회로 개 칭)를 설립하였다. 또한 1987년 8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수련소가 횡성에, 1989년 12월 천주의 모친 관상 봉쇄 수도원이 배론에 정착하였다. 광산촌 지역민들의 인권 문제와 처우 개선 문제를 위 해 1985년 9월 가톨릭 광산 노동 문제 상담소(소장 : 김 영진 신부)를 사북에, 가톨릭 인권 문제 상담소(소장 : 김 창수 신부)를 도계에 설립하였다. 그래서 이 두 상담소는 지역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함께하고 그들의 인권 보호에 앞장서 왔다. 그런데 1987년 전국적인 노동자 파업 때 광산 노동자 분규가 일어나자 이 두 단체가 불순 단체로 지목되어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그 해 8월 15일 명동 성당에서 노동자들을 위해 일하다 박해를 받는 표본이 되고 있는 사북 성당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호소의 강론을 하였다. 그리고 1986년과 1987년 인권 회복 기도회, 1986년 9월 미국 농산물 수입 저지 농민 대회, 1987년 4월 호헌 철폐 및 민주 개헌을 위한 사제단의 단식 등을 통해 민족의 고난에 적극적으로 함께 대처하였다. 1990년은 감사와 찬미의 축제 분위기 속에서 지낸 한 해였다. 교구 설정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순교자 신 심 운동 전개, 25주년 기념 연수 실시, 기도 모음 운동 전개, 평신도 신앙 의식 조사 실시, 성서 교리서 발간, 교구 25주년 다큐멘터리 제작, 한빛 터 개설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였고, 1990년 6월 24일 교구 설정 25주 년과 교구장 지학순 주교 서품 25주년 기념 신앙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어 9월 8일에는 교구장 지학순 주교의 고 희 축하 미사를, 그리고 10월에는 총대리 이학근(李學 根, 베네딕도) 신부의 은경축을 지냈다. 11월 2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원주교구장 계승권을 가진 부주교로 김지석 신부를 임명하였고, 1991년 1월 14일 주교 성성 식을 거행하였다. 지학순 주교는 1990년 12월부터 지병인 당뇨병의 합병 증세로 강남 성모병원에 입원한 이후 계속 투병 생활을 해오다가, 1993년 3월 12일 향년 73 세로 선종하여 배론 성지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지학순 주교의 선종으로 교구장을 승계한 김지석 주교는 1993년 6월 15일 교구장 계승 축하 미사를 거행하였다. 천곡동 · 백운 · 대화 · 둔내 · 우산동 본당이 신설되었고, 중석 폐광으로 인하여 신자들이 많이 떠나 본당의 기 능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진 상동 본당은 황지 본당의 공소로 삼았다. 홍보 매체를 통한 복음 전파에 노력하고자 1991년 11월에 성 바오로 서원을, 그리고 1993년 9월 에는 가톨릭신문 원주 지사를 개원하였고, 1992년 2월 에는 사목국 홍보 업무를 활성화하기 위해 성 바오로 딸 수도회를 진출시켰다. [원주교구의 변화와 전망] 앞으로 예상되는 변화는 농 · 어촌 및 탄광촌의 본당이 폐쇄 위기에 몰릴 정도로 도시화 현상이 가속화될 것이고, 냉담자가 증가하고 예 비 신자가 감소할 것이며, 특히 청소년 신자가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교회의 고령화, 여성화, 사제수의 증가 등의 문제에 대비해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일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고, 급격한 국제 사회의 변화와 통일에 대비한 북한 선교의 필요성도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에 김지석 주교는 1993년에 2000년대를 향한 복음 화 과제와 원주교구의 발전을 위하여 3단계로 장기 사목 지침을 수립하고 이를 실천해 왔다. 1단계(1993~1995)에서는 '복음화의 해' 를 주제로 '복음화되는 교회' (1993), '이웃을 복음화하는 교회' (1994), 그리고 '가르치는 교회로서 모든 이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초대함' (1995)을 목표로 세워 실천하였고, 2단계(1996~1998)에서는 '사랑의 문화 건설' 을 주제로 '평신도의 해' (1996), 그리스도인 가정의 해' (1997), 그리고 참 인간의 진흥을 위한 사랑의 문화 건설' (1998)을 목표로 노력하였다. 3단계 (1999~2000)에서는 '모든 이여, 그리스도께 마음의 문을 열자' 를 주제로 삼아 1999년을 '복음화의 별, 성모 마리 아의 해' 로 정하고 성모님의 모범을 따라 복음적 삶을 살아가도록 하였고, 그리스도 강생 2000년 대희년을 맞 아서는 '인간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해' 로 정하고 그 동안 노력한 모든 결실을 그리스도께 봉헌하도록 하였다. 또한 새 천년기의 첫해인 2001년을 맞아 교구 설정 40주년을 맞는 2005년까지의 중 · 장기 선교 계획인 '복음화의 여정' 을 새로이 수립하여 실천해 가고 있다. 2001년은 선교 영성의 해' 로 복음 선교를 위해 먼저 전 교 사명 안에서 참된 영성을 발견하고자 하였고, 2002 년은 '복된 가정의 해' 로 가정 안에서 가족들이 복음에 맛들이며 자녀들 특히 청소년들이 복음 안에서 성장되도 록 복음적 환경을 이루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2003년은 '복음 안에서 이웃과 함께' 로 정하고 복음 정신으로 이웃을 섬기고 좋은 이웃이 되어 줌으로써 이웃과 더불어 사회를 복음적으로 변화시켜 가고자 노력할 것이고, 2004년은 '그리스도께로 향한 세상 만들기' 로 정하고 민족의 복음화와 온 세상을 향한 선교 사명을 실천하려는 의지를 심고자 힘쓸 것이며, 2005년은 '복음 안에 하나 되는 교구 공동체' 로 정하고 성서 안에서 충만을 나타내는 40이란 숫자의 의미를 근거로 충만과 완성을 향한 교구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일치된 교구의 모습을 구현하고 복음 선교를 위한 새로운 도약의 시간이 되게 하려고 한다. 이러한 연도별 주제에 따라 복음화를 실현할 때, 피폐되어 가는 어촌 · 농촌 · 광산촌 지역에서 보다 많은 이들 이 그리스도의 말씀과 빛 안에서 자기 삶의 목적과 방향 을 찾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함께 생활하는 주민들의 인권 보호 와 그 신장, 사회 정의와 그 실현을 위해 지혜와 용기와 진실을 제공할 것이며, 교회를 필요로 하는 곳 한가운데 에 언제나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이 세상을 향해 열려진 교회, 이 세상을 복음화시켜 모든 이가 그리스도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게하는 교구가 될 것이다. (→ 춘천교구 ; 한국) ※ 참고문헌 주재용, 《배론 성지》, 가톨릭출판사, 1975/ 지학순, 《정의가 강물처럼》, 형성사, 1983/ 천주교 남천동 교회, 《솔산 50년 사》, 1990/ 천주교 의림동 교회, 《의림동 본당 25년사》, 1990/ 배은하, 《역사의 땅, 배움의 땅 배 론》, 성바오로출판사, 1992/ 지학순 주교 기념 사업회, 《빛이 되어라》, 1995/ 천주교 원주교구 30년사 편찬위원회, (《원주교구 30년사》, 천주교 원주교구, 1996/ 최기식,《로만칼라와 빈 무덤》, 기쁜소식, 1997/ 여진천, <천주교의 원주 지역 정착과 발전 연구>, 《원주학 연구》 2, 연세대학교 매지학술연구소, 2001. 呂珍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