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수도원
修道院
[영]Westminster Abb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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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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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에 있는 성공회 성당. 본래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이었으나, 현재의 명칭은 영국 성공회의 '웨스트민스터의 성 베드로 참사 위원 사제 성당' (Collegiate Church of St. Peter in Westeminster)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수도원' (Abbey)이란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거대한 고딕 양식의 장중한 건물은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영국 역사가 담겨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역 사] 전설에 따르면 켄트의 왕인 애설버트 1세 (Aethelberht I) 때인 616년에 런던의 한 부유한 시민이, 템스(Thames) 강에 있는 소니(Thorney) 섬에 베네딕도회 수도원과 성당이 건립되었는데, 그 성당의 수호 성인인 성 베드로가 어부로 나타나 기적적으로 축성되었다고 한다. 이 수도원에 대해서는 앵글로색슨 시대 초기의 강력한 왕이었던 오파(Offa, ?~796)의 785년 문서에 언급되어 있는데, 그 진위는 확실하지 않다. 영국의 역사가인 월리엄(William of Malmesbury, 1090~1143)은 베네딕도회 수도승이자 캔터베리의 대주교였던 성 둔스타노(Dunstanus, 909~988)가 이 수도원을 확장하여 개조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의 건물 기초가 놓여지고 영국 왕실과 관련을 맺어 1066년부터 역대 영국 왕의 대관식 장소로 사용된 것은 증거자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 1042~1066) 왕에 의해서이다. 그는 로마로 성지 순례를 가겠다는 약속을 대체하기 위해 당시에는 작은 집이었던 수도원의 재 건축에 착수하였다. 그가 세운 성당은 상당한 크기로 라틴 십자형으로 설계되었으며, 중앙 탑과 2개의 서쪽 탑이 있었다. 그리고 1065년에 성가대석과 십자형 성당 좌우의 익부(翼部, transept)가 완성되었다. 네이브(nave, 身廊)는 1085년에 완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1100년에 원래의 회랑(cloister)이 완성되었다. 증거자 에드워드의 시성식이 거행된 1161년에 그의 유해는성가대석에 있는 묘지로 옮겨졌다. 현재의 건물은 1245년 헨리 3세(1216~1272)가 에드워드가 세운 성당을 네이브만 남겨 둔 채 헐고 그 자리에 고딕 양식으로 건축하여 1269년에 준공한 것이다. 구도와 설계는 당시의 프랑스 성당 건축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이것은 이 성당의 처음 건축가가 랭스의 앙리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 외에 웨스트민스터 수도원 건축에 참여한 유명한 건축가들로는 글로스터의 헨리와 베벌리의 로버트가 있다. 1269년에 증거자 에드워드의 유해가 제단으로 옮겨졌고, 성당의 동쪽 부분이 완성되었다. 노르만 양식의 네이브를 재건하는 작업은 건축가 이블리(Henry Yevele)의 지도 아래 1376년경 시작되어 튜더 왕조 시대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그러나 헨리 3세 의 초기 영국 고딕 양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초영식 (Early English style) · 문식식(Decorated style) · 수직식 (Perpendicular style) · 튜더식(Tudor style) 등 여러 고딕 양 식 기법이 혼합되어 있어 영국 고딕 양식사를 집약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당 전체가 한 번에 지어진 것처럼 잘 조화되고 있다. 16세기에는 헨리 7세(1485~ 1509)에 의해 동쪽 끝에 있던 성모 마리아 경당 자리에 수직식으로 된 헨리 7세 경당(1503경 건축 시작)이 조성되 었으며, 이후 몇 차례에 걸친 개축 · 확장 · 장식의 변화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정면의 서쪽 탑들이 건설되었다. 이 탑들은 렌(C. Wren, 1632~1723)이 설계하였으나, 호크 스무어(N. Hawksmoor, 1661~1736)에 의해 수정되어 1745 년에 완공되었다. 성당의 성가대석은 1848년에 지은 것 으로 추정되며, 성자대석과 신자석 사이의 칸막이(choir screen)는 스콧(G.G. Scott, 1811~1878)에 의해 설계된 후 1867년에 완성되었다. 영국 왕으로서 대관식을 하지 않은 에드워드 5세(1483. 4~6)와 에드워드 8세(1936. 1~12)를 제외한 영국의 통치 자들은 정복 왕 월리엄(William I 1066~1087) 이후 모두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또한, 많은 왕과 여왕의 유해는 중앙 제대 뒤편의 증거자 에드워드의 경당 근처나 헨리 7세 경당에 안장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수도원에 묻힌 마지막 왕은 조지 2세(1727~1760)였 으며, 그 후의 영국 통치자들은 윈저에 묻혔다. 웨스트민 스터 수도원에는 영국의 유명한 신하들의 무덤과 기념비가 있다. 남쪽 익부의 한 부분에는 '시인들의 모퉁이' (Poets' corner)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북쪽 익부에는 영국 정치가들의 기념비가 많이 있다. [교회와의 관계] 증거자 에드워드와 관계를 맺은 웨스 트민스터의 베네딕도회는 이후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수도원이 되었다. 또한, 왕실 성인들에 대한 공경 예절을 거행함으로써 더욱 커졌으며, 왕실 설립이었기 때문에 국가와의 관계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나아가 이 수도원은 교황의 보호 아래 있었다. 이 수도원은 노르만 시대부터 제임스 1세(1603~1625) 시기까지 성역(聖 域)으로서의 권리를 지녔으며, 라우렌시오 아빠스 (1158~1173) 이후 수도원 원장들은 주교관을 쓸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1222년에는 런던의 주교와 캔터베리 대주교의 재치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특권을 받았다. 그러나 헨리 8세(1509~1547)가 교황의 세계 교회에 대 한 수위권을 부정하고, 교황청과 영국 교회를 단절시킨 이후 이 수도원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우선, 1540년에 수도회는 해체되었다. 그리고 수도원 성당은 12명의 교회록을 받는 사제' (Prebendary)가 '대성당 주임 사제' (Dean)와 함께 거주하는 '참사 위원 사제 성당' (collegiate church)으로 설립되었다. 1532~1540년까지 아빠스였 던 보스턴(W.Boston)이 초대 대성당 주임 사제로 임명되 었다(1540~1549) 이후 수도원과 성당은 왕실 재산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런던 주교좌로부터의 독립은 계속 유지되었다. 이 시기에 1298년의 화재로 재건축된 수도 원 숙소의 대부분이 헨리 8세가 1540년에 세운 학교로 이용되었다. 같은 해에 웨스트민스터 주교좌는 티를비 (T. Thirlby)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미들섹스(Middlesex) 주의 대부분을 1550년까지 관할하였다. 영국 교회를 가톨릭으로 되돌리려고 하였던 메리 여왕 (1553~1558) 시대인 1556년에 페커넘(J. de Feckenham, 1515~1584/1585)이 지도하던 베네딕도회 공동체는 본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본래의 건물과 성당을 찾아 수도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1558~1603)에 의해 다시 '참사 위원 사제 성당'이 되었다. 이 성당은 1662~1802년까지 로체스터 주교좌로 사용되었다. 1840년에 '교회록을 받는 사제' 라는 명칭 이 '자문 사제' (Canon)로 바뀌었고, 그 수도 12명에서 6 명으로 조정되었다. 현재는 보통 4명의 '자문 사제' 가 있다. [내부 구조] 이 성당 동서의 종축 길이는 160m로 서측이 출입구 정면이며, 중앙 제대는 동쪽에 위치하고 있 다. 네이브의 폭이 23m이며, 볼트 천장 높이가 35m에 달한다. 남측에 있는 수도원 회랑은 동서 길이 30.5m, 남북 길이 31.5m이며, 챕터 하우스(Chapter House) 너머 의 소수도원 회랑은 사방 14m 정방형이다. 쌍탑이 있는 서측 정면 출입구를 들어서면 한 칸(bay)의 배랑(narthex) 이 있는데 오른쪽에 성 조지(George) 경당이, 왼쪽에는 처칠 기념비가 있다. 네이브의 첫째 칸 중앙에 '무명 용 사들' 의 묘가 있는데, 여기에는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에서 전사한 이름없는 병사들의 유해를 1920년에 옮겨 온 것이다. 네이브의 화려하고 장엄한 삼랑식 공간 다음으로 성가대석, 교차부(crosing) 제단(sanctuary) 그리고 증거자 성 에드워드 경당(St. Edward the Confessor Chapel)이 연속되며, 증거자 에드워드의 묘를 중심으로 왕과 왕비의 묘가 있어 '왕의 경당' 이라고도 불린다. 이 경당에는 역대 영국 국왕의 대관식용 의자 (Coronation Chair)가 있다. 700년 전부터 사용해온 이 등받이 의자 밑에는 '스톤 오브 스콘 (Stone of Scone)이라는 커다란 돌이 있는데, 에드워드 1세(1272~1307)가 스코틀랜드에서 약탈하여 온 것으로 스코틀랜드 왕의 대관식용 의자였다. 지금도 스코틀랜드 사람들 사이에는 이것을 다시 찾으려는 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이 경당 뒤에 헨리 7세 경당(Henry VII's Chapel)이 붙어 있다. 이 경당은 특히 화려한 팬 볼트(fan vault) 천장으로 유명하다. 중앙에는 헨리 7세와 왕비 엘리자베스의 금빛 찬란한 상이 있는 르네상스풍의 묘가 자리잡고, 북쪽 회 랑에는 엘리자베스 1세의 흰 대리석상이 있는 묘, 남쪽 회랑에는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1542~1567)의 묘가 있 다. 십자형 성당의 남쪽 외부에는 13세기 수도원부터 유래하는 대회랑(cloister)이 자리잡고, 그 동쪽에 챕터 하우스가 있다. 이것은 직경 19m의 8각형 평면의 방으로 방 주위에는 돌 의자가 놓여 있다. 대회랑의 동남쪽에는 노르만 양식의 지하 박물관이 있으며, 여기에 고문서나 역사적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성당을 유명하게 한 것은 내부의 화려한 고딕식 리브 볼트 천장과 유리화(sained glaaas)이다. 한없이 뻗어 올라가는 듯이 보이는 세장한 족주(族柱, clusteredpier)의 리브(rib)는 천장에 이르러 나뭇잎 줄기처럼 얽혀 뒤덮였고, 어슴푸레 스며드는 유리화의 색광은 마치 너울지는 화원(花園)과 같은 황홀경을 연출한다. ※ 참고문헌 Nikolaus Pevsner Priscilla Metcalf, The Cathedrals of England, Viking, 1985, pp. 157~207/ 박학재, 《서양 건축사 정론》, 상조사, 1981, pp. 628~631/ 《ODCC》, pp. 1731~1732. [金正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