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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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노파의 지도자였던 콜리니 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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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노파의 지도자였던 콜리니 제독.

종교 개혁 시기의 프랑스에 등장한 칼뱅파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지칭하는 용어.
[발생과 전파] 프랑스는 종교 개혁의 발상지인 독일에 인접해 있기에 종교 개혁을 도입하려는 노력도 일찍 시작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1515~1547)와 앙리 2세(1547~1559)는 독일의 프로테스탄트를 지원하면서도, 자신의 영토 내에서 이들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잔인하게 박해하였다. 그로 인해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순교자가 1523년 화형에 처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파 교회들이 형성되었으며, 계속 전파되었다. 하지만, 가톨릭의 미사를 비난하는 프로테스탄트의 대자보가 파리 주변에 배포되었던 1534년 10월 17일의 '벽보 사건' 으로 이들에 대한 공공연한 억압 정책이 실행되었다. 1540년 이후 재판은 늘어만 갔으며, 앙리 2세는 1551년에 이들에 대한 이단 재판을 심리하기 위해 파리의 고등 법원 내에 '화형 법정' (Chambre ardente)을 설립하였다. 사형은 1551년에 루터파를 믿는 이들 때문에 만들어진 형벌이었다. 이 시기에 일반적으로 1명씩 처형되던 관행이 대량 학살로 비화되었으며, 앙리 2세 시대의 감옥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로 가득찼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는 칼뱅파를 따랐다. 칼뱅(J. Calvin, 1509~1564)은 프랑스의 누아용 출신으로 1534년의 '벽보 사건' 이후 바젤로 피신해 있었다. 이곳에서 그가 스스로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를 위한 변명서라고 여긴 《그리스도교 강요》(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를 집필하였고, 이 책이 1541년 프랑스어로 간행되어 칼뱅 신학의 기초가 되었다. 칼뱅은 1541년 이후 프랑스와 서부 유럽 전역을 프로테스탄트화하기 위해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그로 인해 1550년대 후반에 프랑스 칼뱅파의 전국적인 조직이 드러났다. 프랑스 귀족의 반 이상, 3분의 1 정도의 부르주아가 신자가 되었으며, 프랑스 전역에 산재해 있었다. 100만 명 내지 200만 명의 신자와 2,150개의 교회를 확보한 이들은, 1559년 최초의 전국 회의를 파리에서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칼뱅에 의해 기초된 <갈리아 신앙 고백>(Confessio Gallicana)이 근본 사상으로 채택되었다. 이때부터 프랑스의 칼뱅파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위그노파' 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이름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그들의 지도자인 위제(B.Huges)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위그노 전쟁] 전쟁의 발발 : 몇몇 귀족 가문의 개종은 프랑스 내 귀족들 사이의 대립으로 확대되었고, 마침내 정당으로 변화되었다. 위그노파의 지도자는 콜리니 (Gaspard de Coligny) 제독과 부르봉 · 방돔가 출신의 루이와 콩데(Anton de Condé) 왕족들이었다. 이들의 반대편에는 가톨릭 신자인 기즈(Guise) 가문이 있었다. 샤를 9세 (1560~1574)의 어머니로 섭정이었던 카타리나(Catherine de Medicis, 1519~1589)는 1561년 1월 이후 정책상 박해를 중지하고, 기즈 공작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위그노파 귀족을 중용하였다. 또한, 1562년 1월 칙령을 통해 전 왕국 내의 위그노들에게 종교의 자유와 도시 밖에서의 종교 활동을 보장해 주었다. 위그노파 지도자들은 칙령의 준수를 권유하였지만, 칼뱅주의에 사로잡힌 이들은 성당과 수도원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였고,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폭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신앙에 대한 상호 간의 용인이 쉽게 무너졌다. 1562년 바시(Vasy)에서 예배를 드리는 위그노들을 가톨릭 신자들이 습격하였고, 우연히 마주친 프랑수아 드 기즈(Frangois de Guise)는 군대를 보내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사건이 이후 30년 동안 계 속되고 8회에 걸친 위그노 전쟁(1562~1563, 1567~1568, 1569~1570, 1573~1574, 1576, 1577, 1579~1580, 1585~1598)의 신호가 되었다. 기즈 공작이 이끄는 가톨릭과 위그노파 귀족 사이의 투쟁에 교황과 스페인은 가톨릭 측을 지원하였고, 위그노파는 영국과 독일로부터 원조를 받았다. 민중들 사이에 신앙을 강요하는 폭력과 학살의 순환이 프랑스 전역에 걸쳐서 일어났다. 3회까지의 전쟁 끝에 1570년 8월의 강화 조약으로 혼란은 잠시 정지되었다. 이 조약은 위그노파에게 대단히 유리한 것이었다. 그 규정들을 확고히 하기 위해 샤를 9세는 자신의 누이인 마르가리타와 부르봉 가문이며 위그노인 나바르의 앙리 (Henri de Navarre, 1553~1610)와 결혼시켰다(1572. 8. 18). 그러나 이 결혼으로 전쟁이 재발되는 동기가 되었다.
바르톨로메오 축일 사건 : 위그노파의 지도자인 콜리니는 샤를 9세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는 영국과 동맹하여 스페인과 싸울 것을 왕에게 종용했다. 그런데, 콜리니의 세력이 커지고 있는 것을 두려워한 섭정이자 모후인 카타리나는 가톨릭인 기즈 공작 가문과 연대하였고, 궁정 정치에서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것을 두려워하여 콜리니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음모는 실패하
고(1572. 8. 22) 콜리니가 부상만 입게 되자, 카타리나는 보복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결혼식 축하를 위해 파리에 모인 위그노들을 기즈 공작 가문이 살해하려는 계획을 묵인하였다. 오히려 위그노파들이 모반을 꾸미고 있다는 거짓 정보와 감언이설로 자신의 아들인 왕에게 위그노파를 섬멸하라고 설득시켰다. 결국 사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전야인 1572년 8월 23일부터 며칠 동안 학살이 계속되었다. 이때, 결혼식을 축하기 위해 파리에 온 3,000명의 위그노들이 학살당하였고, 8,000명이 인근 도시에서 살해되었다. 콜리니를 비롯한 위그노파의 주요 인물이 거의 모두 살해된 이 사건은 세계 역사상 가장 무서운 범죄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신앙에 대한 문제이기보다는 당시의 정치적인 동기로 인한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 그레고리오 13세 (1572~1585)는 베드로 대성전에서 감사가(Te Deum)를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교황에게 프랑스 왕이 모반의 위기를 넘겼다는 사실만 보고하였기 때문이다. 교황은 이 참살의 계획을 사전에 전혀 알지 못했고, 동의한 적도 없었다.
나바르의 앙리는 샤를 9세의 누이와 결혼하고 파리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탓에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때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파리를 무사히 빠져나오자마자 신앙을 포기해 버렸다. 이 행위로 그는 가톨릭 교회가 부여하는 왕의 계승자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전쟁의 진행 : 바르톨로메오 축일 사건은 위그노파의 근절이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들의 세력이 약해지기는 하였지만 전멸되진 않았다. 오히려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샤를 9세의 후계자인 앙리 3세(1574~1589)는 위그노에게 거의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였다. 그러는 동안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 기즈 공작 가문이 부추기는 가톨릭 신자들이 1576년에 위협받 는 교회의 보호를 위해 가톨릭 신성 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들은 매우 공격적인 반프로테스탄트 정책과 급진적인 논리를 내세워 이후 앙리 3세를 더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 연맹은 수도회의 활약을 통해 가톨릭 교회에 대한 열의를 되찾은 국민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앙리 3세가 자식이 없고, 그의 동생인 알랑송(Alengon) 공작이 1584년에 사망하자 장래의 왕으로 가톨릭이 될 것인가 아니면 위그노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일어났다. 왜냐하면, 다음의 계승자는 다시 위그노파가 된 나바르의 앙리였기 때문이다. 기즈 가문 역시 왕위 계승을 위한 경쟁자로 등장하였다.
1584년 가톨릭의 신성 동맹은 기즈 가문의 앙리(Henri de Guise)의 지휘 아래 군사적 동맹으로 조직되었고, 가톨릭을 보호하고 나바르의 앙리를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하기 위해 스페인과 교황의 협조를 얻었다. 또 1585년 7월 국왕 앙리 3세에게 지금까지 위그노파와 관련된 모든 승인을 취소하고, 그들의 예배를 금지시키라고 강요하였다. 1585년부터 가장 극심한 위그노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신성 동맹은 변덕이 심한 앙리 3세와 대립하였다. 기즈 가문의 지지로부터 파리를 떼어 규합하려는 앙리 3세의 시도에 대해 친기즈파는 '바리케이드의 날' 을 이끌었다. 절박한 상황에 빠진 앙리 3세는 기즈 가문의 형제들을 블루아에서 암살했고(1588. 12), 파리를 주도하는 '16인 위원회' 는 "폭군 살해" 를 외치며 왕에게 대항하였다. 앙리 3세는 파리를 포위하기 위해 나바르의 앙리와 결탁하였다. 하지만, 연맹 지지자인 클레망 (JacquesClement)이 1589년 8월 1일 왕을 암살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나바르의 앙리가 왕이 되어 앙리 4세 (1589~1610)가 되었고, 부르봉 왕조가 시작되었다. 초강경 가톨릭 파들은 수많은 다른 후보자들을 내세우면서, 그의 재위를 반대하였다. 하지만, 세력을 규합할 만한 단독 후보자가 나서지 않았다. 그 사이 앙리 4세는 폴리티크(Politique)라는 가톨릭 온건파에 점점 의존하게 되었다. 또한, 그가 1593년 7월 가톨릭으로 개종하자 지지를 받게 되었고, 다음해 파리에 입성했다. 반대파는 술렁거렸지만 앙리는 반란자들과 타협하거나 그들을 매수하여 지지를 확보하였다. 1598년 4월 13일에 공포된 낭트 칙령 (Edictum Nammetense)으로 양심의 자유와 권리의 평등이 널리 공표되었다. 이 칙령에서 가톨릭 교회가 프랑스의 지배적 종교로 인정받았으며, 그동안 잃은 교회의 재산 반납이 명시되었다. 반면, 위그노파에게는 한정된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고, 100여 개의 안전한 장소가 양도되었다. 이 칙령에 대해 당시의 교황인 글레멘스 8세 (1592~1605)는 "상상을 초월하는 최악의 칙령"이라고 비판하였다.
[축소와 재건] 1620년대 루이 13세(1610~1643)는 위그노들이 자신들만의 종교 의식을 허용하는 베아른 지역에 대해 낭트 칙령을 강화시켰다. 이는 미디 지방 전역의 무장 봉기를 유발했지만, 1622년 몽펠리에 평화 조약으로 위그노파의 지역은 몽토방과 라 로셀로 줄어들었다. 위그노들의 봉기는 1627년 절정에 달했고, 영국과 동맹을 맺은 라 로셀은 1628년 루이 13세가 이끈 포위 작전으로 함락되었다. 이 작전으로 라 로셀 주민은 기아 상태에 빠졌으며, 3만 명의 인구가 6,000명으로 줄어들었다. 1629년 6월 28일 알레스 평화 조약을 통해 위그노는 종교의 자유를 회복할 수 있었으나 의회와 주요 도시들은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고, 모든 군사적 힘도 상실했다. 위그노 반란자들을 자비롭게 처리한 왕의 결정은 왕보다 더 강력한 왕당파가 되었고, 정치적 싸움도 하지 않게 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의 정신이 16세기 후반부터 프랑스 교회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낭트 칙령으로 유지되었던 모든 권리들은 1643년 루이 14세(1661~1715)의 이름으로 발표된 선언으로 효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1659년 이후 전국적인 종교 회의 소집 자체를 금지시켰으며, 지역 종교 회의는 기습 공격을 받았다. 그 결과 600~700개의 교회가 파괴되었다. 그리고, 위그노는 전문직과 길드에 입문하는 것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1676년에는 개종하는 위그노들을 위한 개종 기금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이런 기금이 조성되지 못한 곳에서는 강제 개종이 이루어졌다. 마침내 1685년 10월 18일 루이 14세는 퐁텐블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을 통해 낭트 칙령의 철회를 선언했으며, 그들의 종교 의식도 금지되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프랑스에서는 25만 명 이상의 위그노들이 다른 국가로 이민을 가야 했다.
18세기 전반에는 위그노가 완전히 사라진 듯이 보였다. 루이 14세는 1715년 프로테스탄트의 모든 종교 의식이 종식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같은 해 님(Nimes)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재건을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비록 그 수가 많이 줄어들었으나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1745~1754년에는 위그노에 대한 박해가 되살아났다. 그러나, 프랑스 의 여론은 박해를 반대하였다. 그로 인해 1787년 위그노의 시민권이 부분적으로 회복되었으며, 이듬해 프랑스의 위그노파는 60만 명의 신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기간 중 국민 의회는 종교의 자유를 명백히 인정했으며, 프로테스탄트에게 모든 관직과 직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802년에는 오직 지방에 있는 위그노파 교회들만 재설립이 허락되었으며, 이 교회들은 교육과 선교에서 활동적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1852년에 발생한 진보주의자와 보다 많은 수를 차지하는 전통주의자 사이의 불일치는, 결국 1872년에 두 파로 나누어졌으며, 1906년에는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러나, 1907년 프랑스의 칼뱅 교회가 연합체를 형성하였고, 1909년에는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연맹에 합류하였다. 현재 위그노라고 불려지는 칼뱅주의 신자들은 프 랑스 인구의 약 2%를 차지하고 있다. (⇦ 바르톨로메오 축일 사건 ; 위그노 전쟁 ; → 낭트 칙령 ; 리슐리외, 아르망 장 뒤 플레시스 ; 칼뱅 ; 프랑스)
※ 참고문헌  H. Tüchle · C.A. Bouman · J. le Brun, Nowelle Histoire de L'Eglise, tom. 3, Réforme et Contre-reforme, Seuil, 1968/ K. Bihlmeyer H. Tüchle, Kirchengeschichte, Ⅲ, Die Neuzeit und die neueste Zeit, Paderbom, 1961/ W.J. Stankiewicz, 《NCE》 7, pp. 201~204/ C. Jones, The Cambridge Illustrated History of France, Calmann & King Ltd., 1994(방문숙 . 이호영 역,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프랑스사》, 시공사, 2001)/ 《ODCC》, p. 801/ A. Franzen, Kleine Kirchen-geschichte, Herder, 2000(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개정 증보판, 신학 텍스트 총서 2. 1, 분도출판사, 2001).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