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앵 Huin, Martin Luc(1836~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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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성인. 축일은 9월 20일.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마르티노 루가. 한국 성(姓)은 민(闕). 1836년 10월 20일 프랑스 랑그르(Langres) 교구의 기용 벨(Guyonvelle)에서 태어났다. 1861년 6월 29일 사제 서 품을 받았으며, 2년 동안 믈레(Melay)와 부아제(Voisey) 본당에서 보좌 신부로 활동했다. 그런 다음 1863년 8월 20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고, 이듬해 조선 선교 사로 임명되었다. 1864년 7월 15일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 · 도리(Dorie, 金) 신부 · 볼리외(Beaulieu, 徐) 신부와 함께 파리를 떠나 홍콩 · 상해를 거쳐 1864 년 11월에 만주의 차쿠에 도착하였다. 만주에서 입국을 기다리는 동안 한문을 배우면서 겨울을 보낸 그는, 1865년 4월 17일 3명의 동료 신부들과 함께 그곳을 출발하여 백령도(白翎島) 인근에서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보낸 김백심(金伯心, 베드로)의 배로 옮겨타고, 5월 27일 내포 (內浦) 지방에 상륙하여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주교를 만났다. 위앵 신부는 다블뤼 주교로부터 조선어를 배운 후, 세 거리(唐津郡 合德面 大合德里)를 중심으로 충청도 지방에서 전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런 가운데 1866년 병인박해 (丙寅迫害)가 일어나자, 그는 3월 9일에 다블뤼 주교가 있던 거더리(충남 예산면 고덕면 상궁리)로 가서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Aumaître, 吳) 신부를 만났다. 이들과 함 께 하루를 보낸 뒤 세거리로 돌아온 위앵 신부는 신자들 의 권유로 덕산 '높은 뫼' 의 신여실(바오로) 집으로 피 신했다가, 거기에서 다시 20리 떨어진 쇠재로 옮겼다. 그러나 3월 11일에 체포된 다블뤼 주교가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내자, 3월 12일 함께 왔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거더리로 갔고, 소덜에 있던 오메트르 신부 역시 거더리로 와 자수하였다. 이후 세 명의 선교사들은 홍주 관아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3월 19일에 포도청 에서 두 차례의 신문을 받았다. 그런 다음 3월 23일 군 문 효수(軍門梟首)형을 선고받고 1866년 3월 30일 충 남 보령의 갈매못(일명 고마 수영)에서 순교하였다. 위앵 신부의 유해는 갈매못 백사장에 묻혔다가 5월에 이치문(힐라리오) 등에 의해 이장되었고, 8~9월에는 다시 남포 서들골로 옮겨졌다. 그 후 1882년 3월 블랑 (Blanc, 白圭三) 주교의 지시로 발굴되어 11월에 일본 나 가사키(長崎)로 보내졌으며, 1894년 5월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용산 신학교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1900년 9 월에는 종현 성당으로 옮겨졌으며, 1967년 10월 절두산 순교 기념관과 성당이 완공되면서 절두산 지하 성당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 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下/右抽査/磨鑲鉛)《치명일기》. [孫淑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