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 척사론
衛正斥邪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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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고종 실록에 수록된 이만손 등의 만인소.
18세기에 형성되어 19세기에 부각되었던 사상 조류 의 하나. '정학과 정도를 지키고' [衛正] '사학과 이단을 물리친다' [斥邪]는 이론으로, 공자의 존주론(尊周論) 내 지는 춘추대의에 입각한 벽이단론(闢異端論)에 바탕을 두고 있다. 본래 이러한 벽이단 사상은 맹자의 양묵(楊 墨) 비판으로, 한유의 도불(道佛) 배척 사상으로 전개되 다가 남송대 주자에 이르러 '위정 척사론' 으로 체계화되 었다. 이때 주자는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유학의 정 통성과 중화 문화를 지킨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를 기 치로 내세웠다. 조선에서도 여기에 영향을 받아 국초 이래로 벽불론(闢佛論) · 척양론(斥陽論) 등이 전개되어 왔고, 17세기에는 여진족의 청을 배척하는 승명반청(崇 明反清)의 북벌론(北伐論)이 등장하였다. 이어 18~19 세기에 이르러는 천주교를 포함하는 서학(西學)과 서양 세력을 배척하는 척사론이 나오게 되었으며, 이것이 서 양 세력과의 화친 내지는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하는 위 정 척사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에는 성리학의 명분 론인 화이론(華夷論)의 이분법적 논리가 작용하고 있었다. 한국사에서는 일반적으로 19세기에 국한하여 '위정 척사론' 이나 '위정 척사 사상' 혹은 '척사 위정 사상' 이 라는 용어를 사용해 왔으며, 이를 개화 사상이나 동학 사 상과 함께 한말의 3대 사상 조류로 설명해 왔다. 그러나 18세기에 제기된 척사론에도 '위정' 의 요소는 내재되어 있었으며, 18~19세기의 두 척사론 사이에서는 일정한 연결 고리가 있었다. 다만, 19세기에는 서양 세력을 포 함하는 외세의 위협에 대한 위기 의식이 직접 작용하고 있었고, 이후로는 척사론에 더하여 척화(斥和) · 어양론 (禦洋論)이나 자강(自强) · 반개화(反開化) 사상이 다양 하게 강조되었다는 점이 18세기와는 달랐다. 또 18세기 의 척사론이 주로 기호 남인의 산림에서 제기되었다면 19세기의 위정 척사론은 노론의 기호학파 안에서 제기 되어 유림 전체로 파급되어 갔으며, 이것이 위정 척사 운 동으로 전개되고, 더 나아가 의병 운동의 사상적 기저로 작용하였다는 점이 달랐다. [18세기의 척사론] 17세기 초 이래 연행사들에 의해 북경으로부터 전래되기 시작한 서학서와 서양 문물은 조 선의 학문과 사상 조류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에 대한 수용과 비판 논리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상반된 과제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서학은 북학의 대두, 실학의 융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천주교라는 새로운 신앙의 이해와 수용 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반면에 전통 주자학을 고수해 오 던 지식인들은 일찍부터 서학 특히 천주교의 만연이 정 학과 사회 질서의 문란을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하여 앞 장서서 척사론을 주창하였다. 첫 번째 단계인 '척사론 형성기' 에서의 출발점은 이익 (李濯)이었다. 그는 처음에 보유론의 입장에서 서학을 이해하였으나 1757년 이후에는 척사의 입장으로 선회하는데, 여기에 영향을 준 것은 제자 안정복(安鼎福)의 척 사론이었다. 그에 앞서 이익의 제자 신후담(愼後聃)은 1724년에 《서학변》(西學辨)을 저술하여 천주교 교리들 을 논리적으로 비판하였으며, 이것이 훗날 공서계(攻西 系) 인물들에게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후 성호학파(星 湖學派) 인물들 사이에서는 18세기 중반까지 서학의 모든 내용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다음 단계인 '척사의 공론 조성기' 는 성호학파 중에서 도 녹암계(鹿菴系) 즉 권철신(權哲身) · 이벽(李檗) · 정 약용(丁若鏞) 등이 천주교 신앙에 접근하면서 시작되었 다. 이때 그들의 스승 격인 안정복은 <천학혹문>(天學或 問)을 지어 척사론을 펴기 시작하였으며, 이헌경(李獻 慶)과 채제공(蔡濟恭)도 천주교를 경계하고 나섰다. 그 러다가 1784년 겨울 친서계 인물들이 천주교회를 창설 하자, 안정복은 다음해 <천학혹문>을 수정 보완한 <천학 문답>(天學問答)과 <천학고>(天學考)를 저술하여 널리 제자들에게 돌려보도록 하면서 순암계(順菴系)를 중심 으로 척사의 공론을 조성하는 데 앞장서게 되었다. 이헌 경도 1787년 무렵에 <천학문답>을 저술하여 천주교 교리를 배척함으로써 지식인들이 서학에 빠지는 것을 경계 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척사론은 이론적 비판 단계 요 '명정학 식사설' (明正學 息邪說)과 같은 온건한 척사 론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1787~1788년의 반회 사건(泮會事件)과 1791년의 진산 사건(珍山事件)은 척사의 공론을 확대시키는 계기 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훗날 공서계로 지목되는 이기경 (李基慶)과 홍낙안(洪樂安)은 '먼저 그 도를 공격하고' [先攻其道], 그래도 돌아오지 않으면 그 사람까지 공격 해야 한다' [并其人而攻之]는 강경한 척사론을 제기하였 다. 또 노론계 안에서는 척사의 당론이 정착되어 갔고, 이것이 탕평 정국 내지는 공서계의 활동과 어우러지면서 척사 운동(斥邪運動)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정조와 채제공의 '인기인 화기서' (人其人 火其書) 내지는 부정 학(扶正學) 논리에 입각한 온건한 척사론은 점차 힘을 잃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신후담 · 안정복의 척 사론은 공서계의 척사 운동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고, 안 정복의 척사론은 제자인 황덕일(黃德壹) · 덕길(德吉) 형제와 허전(許傳) 등으로 이어졌으며, 기호 남인의 마 지막 척사론으로서 1791년경 홍정하(洪正河)의 《증의 요지》(證疑要旨)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후 척사의 대상은 주로 천주교 문제에 국한되었으 며, 척사 운동이 친서 · 공서의 대립 속에서 남인의 존립 을 위협하는 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척사 운동은 1795년 6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의 체포에 실패 하면서 야기된 북산 사건(北山事件)으로 심화되었는데, 이때 공서계와 노론의 공격으로 친서계가 타격을 받음으 로써 일시적으로 정조의 탕평 일각이 무너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어 채제공과 정조의 사망, 그리고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는 그 동안 추진되어 온 남인 준론 (峻論) 중심의 탕평 정국을 완전히 퇴조시켰다. 또 박해 과정에서 주문모와 황사영(黃嗣永) 등이 관련된 '양박청 래 일장판결' (洋舶請來 一場判決) 계획이 드러나면서 남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을 변호할 길이 없어지게 되었다.ㅠ아울러 성호학파 일각에서 보여 준 탈주자학(脫朱子學) 의 성향은 물론 서구 문물의 수용 과정에서 드러난 경세 학의 진보적인 인식 성향도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다. 이 시기의 척사론은, 천당 지옥론 · 영혼 불멸설 · 천주 강생설 · 삼구설(三仇說)과 천주의 속성 등 천주교의 주 요 교리와 삼혼설(三魂說) · 사행설(四行說) 등 서양 철 학의 근원을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신 후담 · 안정복 이헌경의 척사론도 여기에 집중되었다.ㅠ그러다가 이헌경이 '서기(西器) 중국 원류설' 을 주장하 고, 홍정하는 서양의 과학 · 기술까지 비판하기에 이르렀 다. 이어 1791년 제사 폐지가 문제된 후에는 천주교가 무부무군(無父無君) · 통화통색(通貨通色)의 사교(邪敎) 로 인식되면서 윤리 기강을 무너뜨리는 금수나 오랑캐의 학문으로 폄하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천주교 세력은 사회 혼란을 가져오는 황건 · 백련의 무리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공서계의 홍낙안이나 이기경, 노론계의 척사 론에서는 특히 이러한 측면이 강조되었다. 18세기의 척사론은 그 주창자에 따라 논리적 심도나 내용이 조금씩 달랐고, 지향하는 목적도 서로 차이가 있 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정 (正) =유학' 과 '사(邪)=서학' 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였 다. 또 '숭정학 벽이단' (崇正學 闢異端)을 바탕으로 하 는 도기론(道器論)이나 화이론도 그 척사론 안에 함축되 어 있었으며, 천주교 세력을 이적 · 금수로 보는 시각도 작용하고 있었다. [19세기의 위정 척사론] 신유박해는 천주교 종교 운동이 비밀 결사나 민중 종교 운동의 형태로 변모하는 계 기가 되었으며, 이후로는 이러한 양상이 전국으로 확산 되어 나갔다. 반면에 1839년의 제1차 중영전쟁(中英戰 爭)과 1842년의 남경조약(南京條約), 1856년 이래의 제2차 중영전쟁과 1860년의 북경조약(北京條約) 등이 연행사의 보고에 의해 조선 사회에 알려지면서 천주교와 서양 세력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게 되었다. 동시에 이러 한 인식은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 1866년의 병 인박해(丙寅迫害)를 낳았으며, 이제 천주교 세력은 조선 연안에서의 잦은 표착 사건이나 이양선 출현 등과 맞물 리면서 '초구(招寇)의 무리' 로 이해되고 있었다. 그리고 1846~1847년(현종 12~13)에 발생한 세실(Cecille)과 라피에르(Lapierre)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의 내침, 1860 년대 조선에서 발생한 일련의 양요(洋擾)는 조선 사회의 위기 의식과 척사론의 형성에 상승 작용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아래에서 제기된 19세기의 위정 척사 론은 외세에 대한 위기 의식이 강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 었다. 아울러 조선 중화주의(中華主義)의 보존 내지는 민족 문화의 보호를 자주적으로 표방하는 오도(吾道)의 '위정론' 이 더욱 강조되었다. '사' (邪)의 대상도 가깝게는 천주교였지만, 궁극적으로는 서양 세력이었다. 반면 에 다른 일각에서는 서양 세력의 위협을 우려하면서도 그 타개책으로 해방(海防)이 강조되거나 동도 서기론(東 道西器論)에 입각한 서양 문물의 도입 내지는 통상론이 제기되고 있었다. 19세기 초의 척사론은 기호 산림의 낙론계인 유성주 (俞星柱), 오희상(吳熙常) 홍직필(洪直弼) 등과 또 다 른 기호학자 이항로(李恒老)에 의해 제기되었다. 특히 이항로는 1836년에 〈논양교지화)(論敎之禍)를 저술 하여 척사론을 펴기 시작하였으며, 1839년에는 오희상 의 문인인 이정관(李正觀)이 《벽사변증》(闢邪辨證)을 저 술하였다. 이후 이항로는 이정관의 저술에서 언급한 안 정복의 <천학고>와 <천학문답>, 그리고 남소관(南肅寬) 의 <원서애유략만물진원변>(遠西艾儒略萬物眞源略)을 구해 보고 1863년에 자신의 척사 이론을 심화시킨 《벽 사록변》(闢邪錄辨)을 저술하였다. 이정관의 척사론은 이 항로의 제자인 김평묵(金平默)이 1847년에 저술하고 1866년에 서문을 붙여 완성한 <벽사변증기의>(闢邪辨 證記疑)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이후 위정 척사론은 1848년에 저술된 후 1880년대까지 계속 보완된 윤종의 (尹宗儀)의 《벽위신편》(闢衛新編) , 이항로의 제자인 유 중교(柳重敎)의 《옥계산록》(玉溪散錄), 1856년에 저술 된 김치진(金致振)의 《척사론》(斥邪論) 1867년에 저술 된 황필수(黃泌秀)의 《척사설》, 1870년에 저술된 이호 면(李鎬冕)의 《원도고》(原道孜) , 이항로의 제자인 홍재 구(洪在龜)의 《위정신서》(衛正新書) 등을 통해 논리적으 로 심화되어 갔다. 당시 이항로는 도기론과 정사론 · 화이론에 입각하여 천주교를 이단 · 사설로, 천주교와 서양 세력을 이적 · 금 수의 무리로 비판하였으며, 중화의 문화가 망하므로 사 학과 금수의 무리가 내침하게 되었다고 통탄하였다. 윤 종의는 '명오도' 를 위한 척사론을 주장하면서 "주사(誅 邪)에는 혁심(革心)이 가장 중요하다" 라고 강조하였고, '장국세' (壯國勢)를 위한 해방론(海防論)을 내세우면서 “어구(禦寇)에는 구정(鉤情)이 가장 긴요하다" 라고 강조 하였다. 이들의 척사론은 대체로 반서학(反西學)과 양이 (攘夷)를 지향하고는 있었지만(척사), 그 궁극적인 목적 은 명오도(明吾道)를 바탕으로 한 정학 보위에 있었다 (위정). 그리고 이러한 이론이 이후에 전개된 위정 척사 운동의 바탕이 되었다. 〔위정 척사 운동의 전개 과정] 제1기 : 1866년에 일 어난 일련의 사건은 위정 척사론이 척사 운동으로 표면화되는 도화선이 되었다. 즉 이 해 초부터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었고, 7월(음)에는 평양에서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 발생하였으며, 8월(음)에는 척사 윤음이 반포되고 마 침내 프랑스 함대의 내침으로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 어나게 되었다. 이때 호남의 유학자 부호군 기정진(奇正 鎭)은 8월 16일에 척사소를 올려 자강과 어양(禦洋)에 목적을 둔 내수 외양론(內修外讓論)과 양물 금단론(洋物 禁斷論)을 역설하였다. 여기에는 천주교와 서양 세력에 대한 배척 의식은 물론 개국 · 개화를 반대하는 보수적인 민족 자존 사상이 들어 있었다. 이어 9~10월에는 동부 승지 이항로가 75세의 노구를 이끌고 고종에게 사직소 를 올리면서 '국내의 간세(奸細)를 처벌함으로써 서양과 내응하는 무리를 끊어 버려야 한다' 는 어양의 주전 척화 론(主戰斥和論)을 역설하였다. 동시에 그는 존체통(尊體 統) · 개언로(開言路) · 선무비(繕武備) · 용덕인(用德人) 등을 바탕으로 자강론으로서의 내수 외양론과 양물 배척론을 주장하였다. 이에 맞추어 의정부에는 양물 금단과 사술 금압을 발 표하였다. 그리고 대원군은 기정진과 이항로의 의견에 동조하여 양이보국(攘夷保國)을 천명하고, "서양 오랑캐 가 침범해 오는데도 싸우지 않는다면 이것은 곧 화친을 맺자는 것인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12자의 척화 문구를 작성하였다. 이때부터 이항로의 문인인 김평묵도 스승을 따라 주전 과 어양의 입장에서 척양대의(斥洋大義)를 표명하였다. 그 후 대원군은 1871년 미 함대가 남양에 내침하여 조 선군을 공격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발생하자 1866년 에 작성해 두었던 척화 문구를 비에 새겨 전국 군현에 설립하도록 하였다. 제2기 : 1873년 이항로의 문인인 최익현(崔益鉉)이 대원군의 실정을 탄핵하다가 유배되고, 11월 5일 오랫 동안 쇄국을 고수해 오던 대원군이 실각하면서 척사 운 동의 제2기가 시작되었다. 대원군 정권의 몰락은 조선의 문호 개방이 한 발 다가온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 이 전부터 시작된 일본의 집요한 책략에 의해 1876년 2월 22일에는 마침내 강화도에서 불평등 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은 개항 질서 속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면서 위 정 척사를 주장하는 인물들은 일본의 정치적 · 경제적 · 윤리적 침탈을 서양의 그것과 동일시하고, 민씨 정권과 개화 정책을 강력하게 배척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최익 현은 불평등 조약 체결 이전인 1월 23일에 직접 도끼를 들고 궁궐 앞으로 가서 척화(斥和)의 '오불가론' (五不可 論)을 상소하였고[持斧伏闕斥和議疏], 이를 통해 왜양 일체론(倭洋一體論)의 입장에서 척왜를 주장하다가 유 배되었다. 이때 그와 동문인 김평묵 · 유중교는 경기 · 강 원 유생 50명을 동원하여 척화의 복합(伏閤) 상소를 올리면서 위정 척사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제3기 : 병자년(1876)의 척화 상소 이후 소강 상태에 들어갔던 위정 척사 운동은 신사년(1881)에 재개되었다.ㅠ이 신사 척사 운동(辛巳斥邪運動)의 배경에는 그 전해인 1880년 8월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김홍집(金弘集)이 올린 <사의조선책략>(私책斬鮮.策略) , 7월에 군비 강구를 위해 시도한 청과의 교섭, 12월에 있은 제물포 개항과 통리기무아문의 설치 등이 있었다. 특히 중국 사절로 동 경에 와서 있던 황준헌(黃遵憲)이 작성한 《조선책략》에 근거하여 김홍집이 제기한 친중국(親中國) · 결일본(結 日本) · 연미국(聯美國)의 방아책(防俄策)은 조야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때 조정에서는 유원식(劉元 植) · 허원식(許元栻) 등이 척사소를 올려 개화 정책을 반대하고 나서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영남 유림들은 1880년 11월 1일 도 산 서원에 모여 위정 척사의 통문을 발송하였으며, 다음 해 2월 24일에는 산양(현 문경시 山陽面)에서 도회를 열고 유생 이만손(李晩孫)을 소두로 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렸다. 이 영남 만인소는 이전과 같이 정치 · 사회적인 상소가 아니라 양이 · 척사의 반외세 · 반개화 투쟁을 담은 상소 운동이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김평묵은 격려의 글을 보내 "성현의 가르침을 지키고, 왜양(倭洋)의 금수 와 같은 풍습을 배격한 만고에 없는 상소"라고 칭찬하였 다. 또 김평묵은 1881년 윤 7월에 강원도 유생 홍재학 (洪在鶴) 등의 척왜소(斥倭疏)를 대필하여 척화 · 척사 를 주장하면서 국왕을 비난하였다. 그 결과 홍재학은 참형되고, 김평묵은 유배형을 받았다. 이를 전후하여 3월 에는 충청도의 황재현(黃載顯) · 홍시중(洪時中)이, 5월 에는 영남의 김순진(金淳鎭), 경기도의 유기영(劉冀永) , 충청도의 한홍렬(韓洪烈) 등이, 윤 7월에는 홍재학을 비 롯하여 경기도의 신섭(申櫻), 충청도의 조계하(趙啓夏) 전라도의 고정주(高定柱) 등이 척사 상소를 올려 정부의 개화 정책을 반대하고 척왜를 주장하였다. [위정 척사 운동의 변모와 의미] 이처럼 전통의 사회 질서와 문화를 수호하려는 유림들의 움직임은 정세의 변 화에 따라 어양의 주전 척화 운동으로, 왜양 일체의 척왜 운동으로, 반외세 및 반개화 상소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사상 기저로서의 위정 척사론이 크게 변한 것은 아니 었다. 또 신사 척사 운동까지는 적어도 조선 정부의 일각 에서 여기에 호응해 주었다. 한편 1881년 8월 안기영 (安驥泳) · 권정호(權鼎鎬) 등이 척사 운동을 빌미로 국 왕을 폐하고 흥선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李載先)을 추대 하려다 실패하면서 조정에서는 척사론자들을 철저하게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882년에 들어와 구미 열 강과의 조약 체결을 모색하고, 임오군란 이후 개화 정책을 표방하고, 같은 해 8월 5일 전국의 척화비를 철거하 도록 하면서 척사 운동은 재야 유림들의 몫으로만 남게 되었다. 이후 유림들은 1894년의 갑오경장, 1895년의 을미사 변(乙未事變)과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단발령을 계기로 국권 회복 운동으로서의 의병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해 나가게 되었다. 춘천의 의병 이소응(李昭應), 기정진의 제자로 장성에서 기의한 기우만(奇宇萬), 선산의 허위 (許蕉)를 비롯하여 유중교의 문하로 당대 유림의 거두이 던 유인석(柳麟錫)도 제자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아울러 저평의 유림 이춘영(李春永)과 안승우(安承禹) , 홍주의 전승지 김복한(金福漢) 등이 이에 호응하였고, 의병 운동은 강원 · 경기 지역에서 점차 호남 · 호서 · 영 남 지역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이들 의병장들은 대부분 위정 척사를 고수해 온 인물로 일본 제국주의와 친일 관료의 타도를 표방하였는데, 바로 이러한 의병 운동이 1905년의 을사 의병과 이후의 무장 투쟁으로 연결된 것 이다. 을미년 이후의 의병 운동을 위정 척사 운동의 제4 기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편 재야 유림들 안에서도 시폐를 극복하고 자강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서기(西器) 수용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이들도 나오게 되었다. 1881년에 시폐론을 상소한 곽기 락(郭基絡)을 비롯하여 1882년에 채서(採西)의 상소를 올린 박기종(朴淇鍾), 이용후생을 주장한 홍산 유생 조 성교(趙聲敎), 문호 개방과 산업 진흥을 역설한 조탄조 (趙嘆朝) 등이 여기에 속한다. 또 위정 척사론의 입장에 서 있던 윤종의 같은 경우는 박규수(朴珪壽)의 영향을 받아 위정 척사의 입장에서 동도 서기의 입장으로 선회 해 가는 일면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 실들은 위정 척사론과 채서 사상과의 상보적인 이해는 물론, 동도 서기론 내지는 개화 사상과의 연결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위정 척사론과 척사 운동에 대해서는, 첫째 시대 사상의 조류상 보수 반동적인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평가가 있다. 다시 말해 위정 척사의 인물들은 민 족의 주체성 확립과 이를 위한 실천 행동에는 강하였지 만, 봉건 체제의 모순을 극복함으로써 정치 · 경제 · 문화 적인 자립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반봉건적인 과제에 대해서는 반동적인 입장에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위 정 척사론은 문화 자존 의식 내지는 조선 중화주의의 주 체성에 대한 표현이었고, 척사 운동은 이러한 주체성의 실현을 행동으로 옮긴 것인 동시에 외세의 위협에 직면하여 전개해 나간 내수 · 자강 운동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따라서 이는 자주적인 문화 수호를 바탕으로 근대 민 족주의를 지향한 사상이요 운동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최근에는 새로운 방향에서의 위정 척사 론을 이해하기 위해 척사론자들의 학통과 당론, 학문 성 향에 주목하는 경향도 있고, 위정 척사를 주장한 사상가 들은 물론 그들이 주동이 된 각처의 의병 운동을 새로 발 굴해 보려는 노력도 있으며, 동학과 의병 운동 과정에서 나타나는 전통 유림과 농민 의병과의 연대에 주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노력은 새로운 자료 발 굴과 연구에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긍정적이고도 객관적 인 입장에서 위정 척사론을 재평가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 척사 위정론 ; → 동도 서기론) ※ 참고문헌 洪淳昶, 《韓末의 民族思想》, 탐구당, 1975/ 崔昌圭, <斥邪論과 그 성격>, 《한국사》 16, 국사편찬위원회, 1975/ 李離和, 〈斥邪衛正論의 批判的 檢討 : 華西 李恒老의 所論을 중심으로>, 《한 국사연구》 18, 1977/ 李光麟 <開化 · 斥邪思想>, 《한국사론》 5, 국사 편찬위원회, 1981/ 文昭丁, 〈衛正斥邪運動에 관한 知識社會學적 연 구>, 《한국학보》 36 · 37, 일지사, 1984/ 宋炳基, 〈辛已斥邪運動研究〉, 《사학 연구》 37, 1984/ 琴章泰, 《東西交涉과 近代韓國思想》, 성균관 대학교 출판부, 1984/ 權五榮, <金平默의 斥邪論과 聯名上疏>, 《한국 학보》 55, 1989/ 宋炳基, 〈衛正斥邪運動 : 辛巳斥邪運動을 중심 으로>, 《韓國史市民講座》 7, 일조각, 1990/ 尹炳奭, 〈勉庵 崔益鉉의 衛正斥 邪論과 湖南義兵〉, 《韓民族獨立運動史論》, 朴永錫教授華甲紀念 論叢刊行委員會, 1992/ 車基眞, <18세기 畿湖南人의 斥邪論과 그 성 격>, 《滄海外秉國教授权停年紀念紀學批叢》, 1994/ 陳德奎, 〈韓末 支配 層의 對外認識에 대한 비판적 인식>, 《국사관 논총》 60, 1995/ 權五 榮, <斥邪運動 대한 연구 성과와 과제>, <한국사론> 25, 국사편찬 위원회, 1995/ 鄭玉子, 《조선 후기 조선 중화 사상 연구》, 일지사, 1998/ 金祥起, 〈南塘學派의 형성과 衛正斥邪運動〉, 《한국 근현대사 연구》 10, 1999/ 權五榮, 〈定齋學派의 형성과 衛正斥邪運動〉, 《한국 근현대사 연구》 10, 1999/ 朴敏永, 〈華西學派의 형성과 衛正斥邪運 動〉, 《한국 근현대사 연구》 10, 1999/ 洪英基, <蘆沙學派의 형성과 衛 正斥邪運動〉, 《한국 근현대사 연구》 10, 1999/ 車基眞, 《조선 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車基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