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프, 존 Wycliffe, John( 1330? ~ 1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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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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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프(왼쪽)와 그가 번역한 성서.
신부. 잉글랜드의 신학자. 철학자. 종교 개혁가. 이단자. [생 애] 위클리프는 1330년경 영국 요크셔(Yorkshire) 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한 자료는 매우 부족하여 확실하지 않다. 1345년경 옥스퍼 드 대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여겨지며, 1372년에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것 같다. 1361년 링컨(Lincoln) 교구 소속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교회록을 받게 되었다.ㅠ옥스퍼드에 있는 캔터베리 홀의 주임 신부(1365~1367) 및 필링엄(Fillingham, 1361~1368) , 러저셀(1368~1384) 루 터워스(Lutterworth, 1374~1384)의 주임 신부를 역임하였 다. 그러나 1381년까지 그는 거의 대부분을 옥스퍼드에서 생활하였다. 1374년 4월 7일 에드워드 3세(1327~137)로부터 루 터워스의 주임 신부로 임명된 후, 신학자로서 정치에 관 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왕의 지시로 잉글랜드와 교황 청 사이의 중요한 이견을 좁히기 위해 대표단을 이끌고 브뤼혜(Brugge)를 방문하여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1370~1378)의 사절들과 토론하는 동안, 그는 자신이 애 국자이자 왕의 신하임을 과시하였다. 위클리프는 《세속적 주권》(De Civili Dominio, 1375~ 1376)이라는 저서를 통해 교회 재산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재산 몰수는 국가, 특히 왕이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이 주장은 랭커스터의 공작이자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존(John of Gaunt, 1340~1399)과 에드워드 3세와의 친분을 강화하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런던에서 교 회 재산 몰수를 지지하는 설교를 하여 좋은 반응을 얻은 위클리프의 인기와 영향력은 절정에 달하였다. 1377년 5월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위클리프의 정치 이론의 오류에 대한 19가지 명제를 담은 5개의 칙서를 발표하 였다. 이를 통해 그의 주장을 단죄하고 그를 체포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이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옥스퍼드 대학교도 단죄를 거부했다. 오히려 그는 귀족 들의 옹호를 받았다. 그래서 그의 교황청에 대한 공격과 그에 대한 교황청의 칙서에도 불구하고 무사할 수 있었다. 위클리프는 1380년에 옥스퍼드 대학교의 교수직과 루터워스의 주임 신부를 그만두었다. 이후 그는 오직 저 술 활동에만 전념하며, 교회의 가르침과 전례에 대해 비 판하기 시작했다. 1381년부터 위클리프의 주장은 더욱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위클리프는 자신 의 추종자들인 소위 "가난한 사제들" (the poor priests)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380년에 있었던 미사 중 실체 변화(transubstantiatio)에 관한 논쟁에서, 성체가 단지 유효한 상징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1381년에 발 생한 소작농 반란에서, 그는 이 반란에 공감을 표현하였 다. 이 반란 과정에서 켄터베리의 대주교인 시몬(Simon of Sudbury)이 살해당하고, 코트니(W. Courtenay)가 계승 하여 위클리프의 주장을 반대하였다. 이후 그의 인기는 급속히 떨어졌다. 1382년 5월 런던 블랙프라이어스 (Blackfriars)에서 개최된 교회 회의에서 위클리프의 많은 저서가 단죄받았고, 그의 모든 글들이 금서로 공포되었다. 1382년에 위클리프는 중풍으로 쓰러졌으나 계속해서 많은 글을 집필하였으며, 결국 중풍이 악화되어 1384년 12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주장은 1388년과 1397 년에 단죄를 받았고, 최종적으로 콘스탄츠 공의회(1414~ 1418) 기간 중인 1415년에 단죄가 내려졌으며, 그의 책을 모두 소각하라는 지시가 잇달았다. 또한, 그의 유해를 축성받은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라는 결정이 내려졌 고, 이는 교황 마르티노 5세(1417~1431)의 재임 기간 중 인 1428년에 시행되었다. [사 상] 위클리프 생존 당시에 가장 커다란 논쟁을 불 러일으킨 것은 복음적 청빈에 관한 것이었다. 교황은 온 건론을 지지했지만 마실리오(Masiglio de Padua)와 오컴 (William of Ockham, 1285~1349) 등의 극단론에 속한 학자 들은 교회가 사유 재산 없이 국가의 통제 아래에 놓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주장을 따르는 후계 자들이 많았고 위클리프도 그중의 하나였다. 다만 위클 리프는 이러한 주장을 좀더 극단적인 형태로 몰고 갔다. 그는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는, 선택된 자로 은총 지위에 있는 자들만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신부들뿐만 아니라 수도자들도 어떤 형태로든 재산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재산은 곧 죄와 연결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극단론은 교황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사실 그가 교회를 신학적으 로 과감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제도화된 교회보다 는 선택받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교회를 따르게 한 예 정설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주로 비판한 대상은 성변화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이 가르침이 비성 서적이며 우상 숭배라고 비판하였었다. 나아가 교황 · 추 기경 · 성직자는 보수가 높은 세속 직업이라고 혹평하였다. 위클리프는 신학과 신앙과 관련된 문제의 최후 법정은 "성서 자체" 라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설교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루터(M. Luther, 1483~ 1546)가 시작한 프로테스탄트의 성서 중심주의의 연원이 되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위클리프를 루터를 포함한 16세기의 종교 개혁가들의 사상과 연관시키고 있다. 그러나 루터가 내세운 "오직 믿음으로" (sola fide)라는 주 장을 위클리프는 하지 않았고, 반면 성체에 관한 논쟁과 사제 독신제를 거부한 것은 루터와 동일하다. 위클리프 가 청빈을 강조하는 것이 교황의 권위에 직접적 도전이 된 이유는 교회의 교계 제도를 부인하고 고해성사와 상 관없이 은총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과 관련되어 있 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도로서의 교회의 권위를 전면 부 정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위클리 프는 하느님의 권위를 현세에서 대변하는 것은 교황이나 추기경이 아니라 국왕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그 근거로 위클리프는 교회의 수장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고 교황조차도 죄인의 지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상 지상 의 조직으로서의 교회는 지상의 지배자인 왕의 권세 아 래에 놓여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결국 150여 년 후에 헨리 8세(1509~1547)가 1534년 선언한 영국 성공회의 성립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위클리프는 신비주의를 철저히 배격하고 신앙과 이성, 그리고 신학과 철학의 조화를 모색하였다. 그래서 당시 교회가 처한 혼란의 원인을 소유와 권력이 비그리스도교 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교회가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기 위해서 는 죄와 필연적인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는 세속적인 재 산과 권력과 철저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위클리프 이전에는 학자들 간에 논의가 된 것이었으나 위클리프 이후에는 학교의 영역을 넘어서 일반인들에게도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성서의 영어 번역도 이러한 추세에 맞추어 복음을 평민들에게 더 가까 이 하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결과 최초로 영어로 완역된 성서가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가난한 사제' 들이 비록 숫자는 적었으나 성서를 가지고 평민들 속으로 파고들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다. 1381년의 소작농 반란도 이러한 위클리프의 활 동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결과이다. [평 가] 위클리프의 주장에 대한 평가는 현재까지 다 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전기 작가들은 그 를 중세의 악한 무리와 혼자 맞서서 싸운 최초의 종교 개혁가로 본다. 그러나, 그의 교회와 정치에 대한 주장은 현실적인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순수한 이론이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교회의 재산에 대해 국가, 특히 왕의 소유권 내에 두려고 한 점은 후에 교회를 국교 회로 만들려는 정치가들의 야심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의 주장을 따르던 후스(J. Hus, 1372?~1415)를 비롯한 위클리프주의자들의 활동은 후에 보헤미아와 독일을 오 랫동안 불안과 공포 상태에 놓이게 함으로써 또 다른 비극을 만들었다. 위클리프의 주장에서 교회 개혁의 필요 성을 발견할 수도 있었지만, 정치적인 외부의 압력에 시달렸던 교회는 교도권 수호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종교 개혁을 맞이하게 하였다. (→ 후스) ※ 참고문헌 S. Fleischmann, Daten der Weltgeschichte, Bassermann, 1992/ 《ODCC》 pp. 1769~1770/ J. Dahmus, 《NCE》 14, pp. 1050~1052/ R. Kottje, Oekumenische Kirchengeschichte Bd. 2, Matthias-Grünewewaid Verlag, 1993/ F. Urquhart,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VIII Kevin Knight, 1999/ K.-G. Wesseling, Biographisch-Bibliographische Kirchenlexikon, Bd. Ⅲ , Verlag Taugott Bautz, 1992/ L. von Ranke, Die Päpste, Büchergilde Gunterberg, 1962. [李種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