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트레흐트 교회

敎會

[라]UItraiectensisis ecclesia · [영]church of Utrec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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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센주의자로 유명했던 위트레흐트 교구장인 코데(P. Codde, 1686~1704) 대주교를 교황이 파면함으로써 발생한 이교. [성립과 배경] 위트레흐트는 본래 쾰른 대교구에 속한 교구였는데, 스페인 왕 펠리페 2세(1556~1598)에 의해 새롭게 재편된 네덜란드 교계에 포함되어 1559년 대교 구로 승격되었다. 위트레흐트 대교구 소속 교구로는 하 를렘(Haarlem) · 부아르뒤크(Bois-le-Duc) · 미들레부르크 (Middleburg) · 데벤테르(Deventer) · 레바르덴(Leeuwarden) · 그로닝겐(Groningen) 등이었다. 그런데 위트레흐 트 대교구는 오랫동안 존속하지 못하였다. 초대 대주교 인 솅크(F. Schenk, 1561~1580) 재임기에 칼뱅주의가 특히 귀족층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졌다. 귀족들은 새로운 주 교로 오래되고 부유한 대수도원의 원장들이 임명되는 것 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와중에 네덜란 드 교회에 영향력을 미치던 스페인이 몰락하였고, 북부 지방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위트레흐트 대교구는 무너졌다. 1573년에 칼뱅주의자들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면 서 공식적인 가톨릭 신앙 행위를 금지시켰다. 가톨릭에 대한 박해는 고르쿰(Gorkum)에서 19명의 신자들이 순교한 사건으로 커졌다. 그 후 스페인이 임명한 주교좌의 후 계자는 위트레흐트 주 정부의 반대로 승인을 받지 못했고, 자신의 교구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다. 16세기 말부터 이 주교좌에는 대목구장이 임명되었으며, 그들은 주 정 부의 압력으로 자신의 교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교 구를 돌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여전히 많은 국민이 가 톨릭 교회를 따르는 신자들이었음에도 그들을 돌볼 사제 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였다. 이 시기에 퀼른이나 후에는 브뤼셀에서 파견된 예수회와 프란치스코회의 비밀 선교사들이 활동하였다. 이런 와중에 네덜란드 교회는 프랑스에서 전해진 베를 (P. de Bérulle, 1575~1629)의 신중심주의(神中心主義, theocentrisme)와 얀센주의의 중심지인 포르 루아얄(PortRoyal des Champs) 수녀원의 엄격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 다. 얀센주의는 특히 루뱅(Louvain)의 네덜란드 신학원을 통해서 교구 사제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 신학원의 초 대 원장이 바로 얀센(C.O. Jansen, 1585~1638)이었다.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인물 중 네르카셀(J. van Neercassel, 1662~1686)은 얀센주의자인 아르노(A. Arnauld, 1612~ 1694)와 케넬(P.Quesnel, 1634~1719)의 친구였다. 그의 뒤를 이은 후계자가 코데였는데, 그는 얀센주의를 지지하고 사도좌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1702년 얀센주의에 동조한다는 이유로 교황청에 기소되었다. 이 때문에 교황 글레멘스 11세(1700~1721)는 그의 취임을 보류시켰다가 1704년에는 직위를 박탈하였다. 그러자 코데를 지지하는 많은 네덜란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은 가톨릭 교회를 떠났고, 네덜란드로 이주해 온 얀센주의 자들과 합류하였다. 이들은 1706년 위트레흐트 주교좌 성당에서 불법적 으로 첫 번째 총대리를 선출했으며, 뒤이어 연합 정부의 승인을 받고 1723년 위트레흐트 대교구의 신부인 스텐 호벤(Comelius Stenhoven)을 대주교로 선출하였다. 그러 자 교황 베네딕도 13세(1724~1730)는 스텐호벤을 파문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된 얀센주의를 신봉하는 위트레흐트 교회는 국가의 전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교회로부터 이교로 단죄받았고, 실제로 이 교회에 동참한 가톨릭 사제와 신자들의 수도 많지는 않았다. 이 이교는 참여하는 신자수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칼 뱅주의자들이 대다수를 이룬 네덜란드에서 명맥을 유지 하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 '네덜란드 얀센주의파 교회' (Jansenist Church of Holland) 또는 '네덜란드의 구가톨릭 교회' (Old Catholic Church of the Netherlands)라고 부른다. 1889년 주교들이 조직한 위트레흐트 연합(Union of Utrecht)이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으며, 위트레흐트 주교 가 의장을 맡는다. 또한, 20세기에 세 곳(데벤테르 · 하를 렘 · 위트레흐트)에 주교좌를 갖게 되었다. 전례는 1910년 이후 네덜란드어로 집전하고 있고, 사제의 독신제는 1922년 이후 폐지하였다. [가톨릭 교회의 재생] 이교인 위트레흐트 교회와는 달 리 가톨릭 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795년 프랑 스 군대가 네덜란드를 점령하자 가톨릭 신자들은 비로소 자유를 다소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교회의 업무를 관장할 적절한 조직은 없었으며, 이러한 사정은 1815년 비엔 총회를 거쳐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통합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1827년에 교황과 조약이 체결 되었으나, 이 역시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 1833년 네덜 란드에 대목구장이 임명되었고, 1848년에 제정된 네덜 란드 헌법에서는 가톨릭이 다른 종파들과 평등함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교회 운영권자들에게 순수 종교 문제와 교회 재산의 관리에 관한 자유를 부여하였다. 이렇게 됨 으로써 교황은 네덜란드의 교계 복구에 관한 계획을 세울 수가 있었다. 오랜 협상 끝에 1827년 협약에 규정된 가장 핵심적인 내용들이 실제로 발효되었다. 1853년 4 월 3일에 공표된 교황 칙서 <엑스 과 디에>(Ex qua die)로 네덜란드에 교계 제도가 설립되었다. 이렇게 해서 위트 레흐트는 다시 대교구가 되었으며, 자이젠(J. Zaijsen)이 초대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새로운 교구들을 조직 하고, 본당의 관할 구역을 확정하였으며, 본당과 교회 소 유 영지의 관리, 자선 기관 운영 등 열정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그는 많은 탁월한 교서를 발표하여 교회의 규칙을 개선하고, 수도회와 교회 단체들을 지원하며, 능력 있는 사제를 길러 내는 한편, 국가로부터 독립된 교회 학교들을 세우고, 홍보 사업을 발전시켰다. 위트 레흐트에서는 1858년에 교구 참사회가 조직되었으며, 1864년에 첫 시노드가 개최되었다. (→ 네덜란드 ; 얀센주의) ※ 참고문헌  《ODCC》p. 1673/ A.G. Weiler, 《NCE》 14, pp. 505~507.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