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스트, 모리스 르 사주 도테호슈 드 Hulst, Maurice Le Sage d'Haiarochede(184~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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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가톨릭 대학교의 설립자 윌스트.

파리 가톨릭 대학교의 설립자 윌스트.


몬시놀. 파리 가톨릭 대학교 설립자. 설교가. 프랑스 교회의 문화적인 새로운 흐름 속에서 자유롭고 사회적인 가톨릭 사상을 주창한 가톨릭 사상사의 한 증인. [생애와 활동] 1841년 10월 10일 파리의 귀족 가문 에서 태어난 윌스트는, 어릴 때 주로 개인 교사를 통해 교육을 받았다. 1856년 스타니슬라오 중 · 고등학교를 입학한 그는 여러 가지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지 만, 그의 바람은 사제가 되는 것이었다. 1859년 이시 (Issy) 신학교에 입학하여 철학 과정을 공부하였다(1859~ 1861). 그 후 지도 신부의 권유에 따라 생 쉴피스 신학교로 옮겨 신학을 공부하였다(1861~1864). 신학 공부를 다 마쳤지만, 사제 서품을 받기에는 나이가 어렸기에 로마 로 가서 신학과 교회법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 연구 기간 중인 1865년 10월 15일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1866년부터 1871년 사이에는 파리의 빈민 지역에 있는 성 암브로시오 성당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목 활동을 하 였다. 귀족 출신인 그는 이 성당의 보좌 신부로 있으면서 견습생을 위한 기숙사 일에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보 불 전쟁과 프랑스 대혁명 때 그는 사제로서 위험을 무릅 쓰고 시위에 가담하여 평화와 화해의 중재자로 나서기도 하였다. 1872년 파리의 교구장인 기베르(Guibert) 추기경이 그 를 비서로 임명하였다. 그 후 그는 파리 대교구의 총대리 가 되어 교구 사목을 담당하였고, 1875년에는 생 드니 교구의 수석 사제(archipresbyter)가 되었다. 그는 라틴가 가톨릭 서클에서 창립한 사립 고등연구학교(현 파리 가톨 릭 대학의 모태라 할 수 있는데, 오늘날 소르본 대학교 내에 있 는 École Pratique des Hautes Études)에서 종교학을 강의하였다. 그는 자유롭고 대사회적인 사제였으며, 브레스트 지방의 국회 의원을 지냈다. 그리고 6년 간 파리의 주교좌 성당에서 설교를 하였다. 그는 교육 행정에 종사하면서도 고해와 영적 지도자로서의 직무 수행, 저술과 강연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바쳤다. 성 요셉 병원을 비롯하여 다양한 사회 복지 사업에 고문을 역임하다가 1896년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업적 및 사상] 1875년 7월 12일 프랑스에서 고등 교 육의 자유화에 관한 법안 통과 투표를 한 뒤 윌스트는, 후에 파리 가톨릭 대학이 된 파리의 사립 대학에 3개의 단과 대학(법대 · 문리대 · 이공대)을 건립하였다. 1878년에는 교황청이 요청한 신학 대학의 건립을 시도하였다. 혼합 심사 위원 폐지에 대한 1880년 3월 18일자 법이 후에 가톨릭 대학(Institut Catholique)이라는 결과를 낳게 한 데는, 그가 글과 말과 행동으로 적절하게 대비한 덕분이었다. 가톨릭 대학 설립 당시(1875. 11. 5) , 그는 부총장 직을 맡았다. 1881년에 몬시놀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총장에 임명되어 여러 가지 행정적인 문제에 해결하고 다양한 학문 분야를 재편성하는 데 이바지하였으며, 그 자신이 직접 철학을 가르쳤다. 1895년에는 신학 대학 내에 교회법과 철학과를 설립하였다. 이런 와중에 가톨릭 대학 교수인 역사가 뒤센(L.M.O. Duchesne, 1843~1922) 신부의 그리스도교 기원에 대한 강 의(1882)와 프랑스 교회가 사도로부터 계승되지 않았다 는 설을 주장한 기사는 월스트의 학문적인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또한 종교학자 르낭(J.E. Renan, 1823~1892)과 성서학자 루아지(A.F. Loisy, 1857~1940)의 근대주의 논쟁 에 연루되어 월스트는 자신이 채용한 이들을 위해 1893 년 1월 25일자 <르 코레스풍당>(Le Correspondant)에 기 사를 발표하였다. 이를 통해 공평한 입장을 표명하려 했으나, 합리주의자로 여겨져 심한 비판을 받았다. 그의 기 사 내용은 과학과 역사학과 교의를 대립 관계로 보지 않고 각 영역의 독자적인 발전을 인정하면서, 이는 교황의 무류성과는 무관함을 주장하고 교황의 무류성은 단지 교의와 윤리적인 문제에 관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관해서 교황 레오 13세(1878~1903)의 회칙 <프로비덴티시 무스 데우스>(Providenissimus Deus, 1893. 11. 18)는 그를 간접적으로 비난하였다. 또한 그는 <르 몽드>(Le Monde)를 통해 자유주의, 신 그리스도교적 운동, 과학 만능주의의 실패 등 당시의 모 든 논쟁에 참여했으며, 진화론적 일원주의에서 비롯한 철학, 데카르트주의, 존재론주의에 대항해서도 투쟁하였다. 그는 스콜라 철학의 혁신자 중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강의 내용과 강연을 발전시켜 여러 잡지에 기고하였으며, 토마스 아퀴나스 연구회를 설립하였다(1884). . 소위 자유주의라고 하는 합리주의 문화와 과학주의가 지배적이던 당시에 "그리스도교적 고등 지식의 보금자리" 의 발 족은 그로 하여금 당시 첨예하게 대립되었던 과학과 신앙의 논쟁 속에 뛰어들어 신앙과 과학의 결합을 시도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바로 이런 목적에서 그는 1885년부 터 뒬레 드 생 프로제(Duilhe de Saint Projet) 참사회에 의 해 구상된 국제 가톨릭 과학 협의회를 지지하였다. 같은 취지에서 그는 파리와 지방에서 많은 강론을 하던 중, 파 리 교구장인 리샤르(F. Richard) 추기경으로부터 파리 주 교좌 성당에서의 강연을 제안받았다. 그의 강연은 형식이나 내용면에서 풍부했지만, 딱딱하고 냉랭한 어조라는 평을 받았다. 그리스도교 도덕에 대한 9~10차례의 강 연을 예상했으나 결국 여섯 번의 강연 -도덕성의 토대 들(1891) · 하느님께 대한 도덕(1892~1893) · 가족 도덕 · 시민 도덕 · 사회 도덕(1896)에 관한 주제 강연 -으로 끝을 맺었다. 윌스트의 저서들은 프랑스 국립 도서관의 목록에 133개나 되는데, 그중 대표적인 저서들로는 《마리 테레즈의 생애》(Vie de la Mère Marie-Therèse, 1872) · 《브르트니에르의 생애》(Vie de Just de Bretenières, 1891, 한국에서 순교한 이시 신학교 동창 신 부) · 《여러 종류의 설교집》(1891) · 《철학 논문집》(1892) · 《파리 노트르담 성당의 강연집》(1891~1896) 등이 있다. 1996년에 그의 탄생 100주기를 맞이하여 파리 가톨릭 대학교에서는 강연회가 개최된 바 있다. 또한 월스트에 관한 저술들도 다수 있다(Mgr Baudrillart, Vie de Mgr d'Hulst, 2 vol. in-8, 1912~1914 ; G. Bertrin, Mgr d'Hulst, dans Les grandes figures catholiques du temps présent, IV , in-8, 1895 ; Monseigneur d'Hulst, Fondateur de I'Institut catholique de Paris, SOUS la direction de Claude Bressolette, Coll. Sciences théologiques et religieuses, Beauchesne, Paris, 1998) . ※ 참고문헌  dir. de Gérard Reynal, Dictiomaire des théologiens et de la théologie, Bayard Editions, Centurion, pp. 227~2281 Ch. Ledré, 《Cath》 5, pp. 1064~1067/ A.J. Clark, 《NCE》 7, pp. 205~206. [文明淑]